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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HAE NATIONAL MUSEUM
전시가야 사람들은 주로 움집이나 초가집에서 살았지만 2층으로 만든 다락집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가야 사람들의 집터에서는 부뚜막과 음식을 찌는 시루, 이동식 부뚜막 토기도 발견됩니다. 가야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얻었지만, 고기잡이와 조개 채집도 여전히 중요했습니다. 김해 봉황동(옛 회현리), 부원동뿐만 아니라 내륙 지역인 고령에서도 바다 생선 뼈와 조개껍데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가야 사람들은 낙동강을 통해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야 사람들은 풍요와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거나 점을 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돌로 어린아이의 머리를 눌러 머리 모양을 납작하게 만들거나 이를 뽑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아름다워지려고 성형을 한 것이었을까요, 어른이 되는 혹독한 통과의례였을까요.
가야의 도성과 궁성은 고고학 조사로 그 모습이 점차 밝혀지고 있습니다. 봉황 토성은 금관가야의 도성과 궁성 구조를 알려 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봉황 토성 안팎에는 넓은 건물터와 땅보다 높게 지어진 건물, 토성, 환호(방어용 도랑), 의례 공간, 호안(강기슭이나 둑을 보호하는 장치) 시설 등이 있습니다. 금관가야는 대성동 언덕을 중심으로 무덤이 있는 지역과 봉황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두 지역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대가야의 도성은 고령읍 서쪽 가장자리인 주산에 있으며, 그 아래쪽의 나지막한 언덕에 궁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주산성 아래로 대가야의 왕들이 묻힌 지산동 고분군이 자리합니다. 이곳에서는 고령읍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가야리 유적은 아라가야의 궁성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가야리 유적은 주변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토성과 건물터 등이 조사되었습니다. 유적 주변으로는 의례 공간으로 추정되는 당산 유적과 아라가야의 왕들이 묻힌 말이산고분군이 자리합니다.
한반도 남부는 북부보다 철기 문화가 늦게 들어와서 쇠로 만든 농기구도 뒤늦게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풍부한 철과 뛰어난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도끼·괭이·낫 등 중요한 농기구들을 모두 쇠로 만들었습니다. 나무로 만든 손잡이는 거의 썩어 없어졌지만 드물게 남아 있는 손잡이가 있어 연결 방법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농사 기술이 발전하면서 U자형 삽날이나 쇠스랑, 호미, 살포와 같은 농기구도 등장합니다. 쇠로 만든 농기구가 널리 쓰여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었습니다.
가야 사람들은 강이나 바다로 나가 먹거리를 장만하기도 했습니다. 물고기를 잡고 해초를 따거나 조개를 캐려면 다양한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대성동 고분군과 주변의 조개더미에서 나온 크고 작은 낚싯바늘, 작살 등이 대표적인 고기잡이 도구입니다. 그물이 물속에 가라앉도록 그물에 매다는 어망추는 가야 사람들이 그물을 썼음을 보여 줍니다. 갯바위나 갯벌, 얕은 바다의 바위 등에 사는 조개와 해조류를 캐고 손질할 때 쓰는 쇠로 만든 도구도 있었습니다.
가야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까요? 옷감은 쉽게 썩어 없어지므로 고대의 옷감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기록을 보면 변한 때부터 비단과 베를 짰다고 되어 있으며,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는 비단실로 만든 노끈이 나왔습니다. 가야 유적에서는 여러 종류의 비단과 마직물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 금동관·화살통·허리띠 등 금속 제품에 붙은 채 발견됩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변한 특산물인 변한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노예로 잡아 온 한인 중 500여 명이 죽어서 그 보상으로 진한 사람 1만 5,000명과 변한포 1만 5,000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가 전근대사회에서 화폐처럼 쓰인 것을 고려할 때 베는 당시 주요 재물 중 하나로 교역에서도 중요한 품목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2005년 발굴된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는 100개 층으로 구분되며, 4단계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장 아래층인 100층에서는 기원 전후 무렵의 토기가, 맨 위층에서는 4세기 무렵의 단단한 토기(도질 토기)가 나왔습니다. 이는 이 조개더미가 400여 년 동안 만들어졌음을 말해 줍니다. 조개더미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온 토기, 뼈로 만든 도구나 장신구 970점, 점을 칠 때 쓰는 뼈 도구 101점, 동물 뼈 5,065점, 조개껍데기 40종, 옥구슬과 철로 만든 물건들, 석기, 송풍관 등이 나와 당시 생활 모습이나 교류했던 지역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의례는 집 안이나 집 주변, 농경지, 무덤, 산, 강, 바닷가 등 당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에서 치러졌습니다. 가야 사람들은 흙 인형, 모양을 본떠 만든 작은 토기와 철제품, 점을 칠 때 쓰는 뼈 등을 의례에 사용했습니다.
의례 행위에는 자연 숭배, 개인과 마을의 안전, 다산과 풍요, 죽은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 등을 담았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의 기록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새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한다고 믿었던 듯합니다. 새를 죽은 이의 영혼을 이끄는 전달자이자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신성한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새를 본떠 만든 토기를 죽은 이와 함께 무덤에 넣었습니다.
새 모양 토기는 속이 비어 있고 등과 꼬리 부분에는 구멍이 있어 액체를 넣거나 따를 수 있습니다. 새 모양 토기를 목 부분을 자르고 넣거나 머리 부분만 넣기도 한 것을 보면 새와 관련한 의례가 다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는 1907년 처음 알려진 뒤 여러 차례 발굴되었습니다. 2001년 봉황대 유적과 함께 ‘김해 봉황동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전시된 토양층은 1998년 발굴 당시 조개더미의 단면을 보존하려고 얇게 떠낸 것입니다. 조개더미의 깊이는 6m 이상으로 모두 17개 층이며, 발굴된 유물을 보면 조개더미가 기원 전후부터 삼국시대까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개더미에서는 토기, 동물 뼈, 조개류, 뼈 조각품과 중국 동전인 ‘화천’, 중국 거울 조각, 일본 야요이 토기 등이 발견되어 가야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불에 탄 쌀은 벼농사 연구에 무척 중요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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