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MHAE NATIONAL MUSEUM
전시남해안 바닷길 중개 교역을 밑거름으로 발전한 금관가야는 4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400년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후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신라의 팽창에 영향을 받기 시작합니다. 낙동강 동쪽에 자리한 비화가야부터 신라문물이 확산되었고 532년에는 금관가야의 왕 김구해가 신라에 항복했습니다. 신라는 낙동강 서쪽으로 계속 진출하여 마침내 562년 대가야를 정복함으로써 가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가야의 다양한 문화는 신라의 지방 문화로 바뀌었고 옛 가야 지역의 유적과 유물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녕지역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비사벌比斯伐’, ‘비화非火’ 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여러 가야 지역을 관통한 황강과 남강의 물길이 낙동강과 만나는 곳을 넓게 끼고 있어 예로부터 낙동강 문화교류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은 역설적이게도 가야로 진출하고자 했던 신라 세력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은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창녕읍과 계성면 일대의 거대한 무덤에서는 당시 신라의 문물이 확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짧은 굽다리접시와 굽다리 긴목 항아리는 6세기 중엽에 유행했던 대표적인 그릇입니다. 이 무렵 가야 여러 나라의 무덤에도 이러한 토기를 껴묻기 시작합니다. 무덤의 형태도 돌덧널무덤에서 신라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 같은 변화는 김해, 함안, 고성, 합천, 고령 등 옛 가야 지역의 무덤에서 나타나는 고고학적 현상입니다. 가야가 신라의 지방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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