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MHAE NATIONAL MUSEUM
전시가야와 신라가 건국하기 전,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에 진한辰韓, 서쪽에 변한弁韓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일부 지역에서는 덧띠토기와 함께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고조선古朝鮮이 멸망(기원전 108년)한 뒤에는 철을 다루는 우수한 기술이 영남 지방으로 확대되어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먼저 이전과 달리 철로 만든 다양한 도구를 일반적으로 사용했으며, 투박한 적갈색의 민무늬토기 대신 고온의 밀폐된 토기 가마에서 구운 회백색 와질토기를 만들었습니다. 무덤도 고인돌에서 널무덤[木棺墓]과 덧널무덤[木槨墓]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풍부한 철과 철제품을 바탕으로 주변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가야로 발전합니다.
옻칠은 나무제품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겉면에 몇 겹의 옻나무 수액을 칠하는 기술입니다. 옻칠은 나무 표면을 매끈하게 윤이 나도록 하는 장식적인 기능뿐 아니라 부패ㆍ습기ㆍ열에 강하고, 접착제로도 쓰였습니다. 옻나무는 한정된 지역에서 자라며, 옻칠은 복잡한 과정(불순물 정제, 칠 안료의 배합, 도장)이 필요하여 전문가 집단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당시 옻칠로 만든 물건은 매우 귀하게 여겨 특정 계층만이 옻칠한 고급 물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옻칠은 나무 표면에 바로 칠하거나, 모시와 삼베 같은 천을 한 겹 바르고 그 위에 칠하기도 합니다. 이 밖에 대나무, 토기, 가죽, 금속 등에도 옻칠하였습니다.
변한의 널무덤木棺墓은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그 속을 파서 만들거나 긴 나무판을 조립하여 만듭니다. 1호 통나무관은 약 240㎝ 길이로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파내어 사용하였습니다. 통나무관을 만들 때 사용한 도구는 표면에 남겨진 흔적으로 보아, 납작도끼ㆍ끌ㆍ송곳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무거운 관을 무덤 속에 내려놓기 위해 끈을 묶거나 고정한 흔적들이 확인됩니다. 즉 관의 양쪽에 홈이나 'L'자형의 구멍을 만들어서 이용했으며, 관을 무덤 속에 내린 후 쐐기를 박아 바닥에 고정하였습니다. 통나무관을 내리기 전에 무덤 바닥에 작은 타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칠을 한 칼집과 동검[銅劍]이나 쇠검[鐵劍], 투겁창, 쇠낫, 중국거울, 허리띠고리, 오수전, 붓과 손칼[書刀] 등을 담은 바구니를 먼저 넣어두었습니다.
자신의 힘을 보여 주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귀중한 물건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중요한 물건은 청동검, 옥, 거울, 옻칠 제품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청동검은 옻칠한 칼집 속에 있던 것으로, 유기물질인 칼집은 무덤 안에서 대부분 썩어 없어지고 금속인 검이나 부속구만 남게 됩니다. 목걸이는 옥이나 수정을 갈거나 유리를 녹여서 만들었습니다. 아름답게 꾸민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은 빛, 태양, 별과 연결할 수 있는 신성한 물건이기도 합니다. 거울 뒷면에 새겨진 다양한 무늬로 사용했던 시기와 어떤 지역의 거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구슬류를 귀하게 여겼던 삼한과 가야의 많은 유적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유리와 수정목걸이가 확인됩니다. 수정은 아주 단단하기 때문에 원석 자체를 갈아서 둥근 모양이나 여러 면을 가진 형태로 만들기가 어려웠습니다. 김해 양동리에서 확인된 이 수정목걸이는 현재 확인된 수정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삼한시대 자신의 힘을 보여주는 물건 중 하나가 청동검이었습니다. 이 시기 영남지역에서 나오는 청동검은 날이 있는 몸통부분은 직선적으로 가늘고, 중간에 결입부가 있는 한국식동검입니다. 하지만 한국식동검은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점차 철검으로 변하게 됩니다. 김해 양동리 55호 목관묘에서는 칼날은 철로 만들고, 칼 자루는 청동으로 만든 칼이 출토되었습니다. 청동검에서 철검으로 변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청동검과 철검은 옻칠한 칼집에 넣어 보관하였습니다. 칼집의 형태는 양 끝이 벌어지고, 중간은 오목한 형태입니다. 이러한 칼집은 영남지역 목관묘에서 주로 출토되며 형태와 크기가 거의 동일합니다.
민무늬토기[無文土器] 아가리 바깥쪽에 한 줄의 점토띠를 덧붙인 토기를 덧띠토기[粘土帶土器]라고 합니다. 덧띠토기는 점토띠의 단면 형태가 원형에서 삼각형으로 바뀝니다. 즉 원형 덧띠토기는 후기 민무늬토기와 함께 나타나며, 검은간토기[黑色磨硏土器]·굽다리접시[豆形土器]·손잡이항아리·완(碗) 등도 이때 나타납니다. 뒤이어 삼각형 덧띠토기가 나타나면서 기원 전후까지 사용했습니다. 덧띠토기를 사용하던 시기는 민무늬토기에서 와질토기로 변화하는 과도기로 중요한 시점입니다. 이 시기에는 단순히 토기의 변화만이 아니라 새로운 철기문화 유입 등 정치·사회적 변동이 함께 나타났습니다.
삼한은 주변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를 재해석해서 개척하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변한에서는 본격적인 철제품과 새로운 토기를 사용했습니다. 새로운 토기는 회색의 고운 진흙과 회전물레를 사용해서 만들었고, 높은 온도의 밀폐 가마에서 구웠습니다. 이렇게 만든 와질토기瓦質土器는 두께가 얇은 편이며, 삼국시대의 토기보다 단단하지 못하고, 흡수성도 강했습니다. 바닥이 둥근 항아리가 만들어졌으며, 그릇 표면에 삿무늬·노끈무늬·격자무늬 등 여러 타날무늬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릇의 종류, 제작 기술과 정면 기법 등으로 시기를 구분합니다.
중국이나 일본 등 주변 지역과의 교환이나 교류를 보여 주는 고고학적 증거는 다양합니다.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貝塚]나 사천 늑도·김해 양동리·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일본 야요이계토기, 낙랑계 토기, 중국 거울[漢鏡], 중국 화폐인 오수전(五銖錢)과 반량전(半兩錢)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확인되는 주변 나라의 물품은 변한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철과 맞바꾸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이나 『후한서後漢書』 등 중국 문헌에도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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