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MHAE NATIONAL MUSEUM
전시변한弁韓의 여러 작은 나라에서 출발한 가야는 발달한 철기 생산 능력과 남해안 바닷길 중개 교역을 바탕으로 성장했습니다. 차츰 축적된 국력과 나라 안팎으로 높아진 위상은 마침내 큰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3세기 후반 무렵 지배계층 무덤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모습에서 그러한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큰 무덤을 만들고 많은 재물을 장례에 소비했을 뿐만 아니라 순장 풍습도 나타났습니다. 4세기는 금관가야의 눈부신 성장이 주목됩니다. 5세기 이후에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아라가야, 소가야가 함께 발전했습니다. 옛 가야 지역 곳곳에 남은 커다란 무덤과 다양한 출토 유물은 당시 지배자들의 우월한 경제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3세기 후반, 가야 지역에서는 새롭게 도입된 기술로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밀폐된 굴가마에서 1,000℃ 넘는 온도로 구운 토기는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졌습니다. 어깨에 꼭지 두 개가 달린 짧은목 항아리를 시작으로 다양한 종류의 토기들이 단단해졌습니다. 더불어 제사 음식을 넉넉하게 담았을 토기 수십 개를 지배자의 무덤에 껴묻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입니다. 죽은 이를 위한 성대한 장례는 이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었지만 이즈음의 극적인 변화는 부와 권력이 지배계층에 한층 더 집중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말을 기르고 말갖춤을 만드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말과 말갖춤은 고대사회에서 신분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발걸이와 안장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꾸미개로 완성된 실용적 말갖춤이 4세기 대 금관가야 지배층 무덤에서 발견됩니다. 다양한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재료이자 화폐 역할을 한 덩이쇠와 함께 고리자루 큰칼, 투겁창, 화살촉 같은 무기들도 대량으로 장례에 사용되었습니다.
동아시아 해상 교역망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낙동강 하구와 연안 일대에서는 다양한 지역의 외래 문물이 발견되어 당시 발전한 가야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옛 김해만 일대 가야 유적에서 발견 사례가 두드러지는데 금관가야 지배층의 공동묘지였던 김해 대성동유적이 단연 돋보입니다. 중국 진晉의 청동 솥과 허리띠, 북방 선비족 계통의 말갖춤, 일본계 청동 제품과 비취 경옥, 열대 조개 등 다양한 물품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물건들은 필요에 따라 가야에서 현지화되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아라가야의 성장은 함안 말이산 고분 유적과 유물에서 잘 드러납니다. 불꽃무늬구멍 굽다리접시가 특징이며 말갑옷·고리자루 큰칼·미늘쇠 등 많은 철제품이 확인됩니다. 5세기 동안 큰 전성기를 누렸으며, 6세기 낙동강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의 압박에 대항하여 가야 세력의 결속을 도모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고령을 중심으로 성장한 대가야는 5세기 후반 가야 최대 세력으로 부상해 중국 남제南齊에 직접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대가야는 가야 세력 중 유일하게 토기뿐만 아니라 독자적 양식의 무기와 금공예품을 갖추어 그 위세가 남달랐음을 보여줍니다. 장수, 남원, 순천 등 호남 동부 일부 지역의 큰 무덤에서 발견된 대가야계 문물은 그 전성기 판도를 잘 보여줍니다.
김해 대성동, 5세기, 높이 38.8cm(그릇 받침)
함안 도항리, 5세기, 높이 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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