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MHAE NATIONAL MUSEUM
전시『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는 가야가 처음 세워진 날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줄이 내려온 곳에 가 보니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에 황금알이 여섯 개 담겨 있었다. 10여 일이 지나 상자를 열어 보니 알 여섯 개가 모두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처음 태어난 아이 이름을 수로라 짓고, 그 아이가 세운 나라의 이름을 대가락 또는 가야라 하였다. 나머지 다섯 아이도 다섯 나라의 왕이 되었다.”
가야의 건국 신화가 깃든 구지봉 정상에는 2,000여 년 동안 말없이 그 자리를 지켜 온 고인돌이 있습니다. 고인돌은 그날을 기억할까요?
여러 지역의 가야에서 회청색의 단단한 토기[陶質土器]가 유행했습니다. 도질토기는 밀폐된 가마 속에서 1,000℃가 넘는 높은 온도로 구워지기 때문에 물의 흡수가 적고 매우 단단합니다. 이 토기는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물레로 만들어지며, 처음 나타나는 형태는 두 귀 달린 항아리[兩耳附短頸壺]입니다.
신라 토기와 비교되는 가야 토기는 굽다리접시의 굽다리 곡선이 아름다우며, 굽구멍이 일직선으로 뚫려 있습니다. 굽다리접시뿐만 아니라 항아리, 잔, 그릇받침, 사물의 형태를 본떠 만든 토기[像形土器] 등 그릇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김해, 고령, 함안, 고성, 진주, 창녕 등에서 각 지역의 특징을 표현하는 토기문화가 나타납니다. 가야 토기는 일본 고훈시대[古墳時代] 토기인 스에키[須惠器]의 발생 및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야의 철기문화는 이 지역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철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규격화된 덩이쇠[鐵鋌]는 현재의 화폐나 금괴의 역할을 하면서 활발한 교류의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교류 결과, 가야에는 주변 나라의 귀중한 물건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가야의 여러 유적에서 동아시아 각 지역의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철제품은 활발한 교류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에서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기에 단단한 철갑옷과 투구를 비롯해 도끼, 낫, 창, 화살촉 등 다양한 종류의 무기류가 나타났고, 세분화된 기능을 바탕으로 실용성을 증가시켰습니다.
청동검에서 바뀐 날카로운 철검은 실용적인 무기인데,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를 달고 그 안에 용이나 봉황을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고리자루 큰칼[環頭大刀]이라 부르며, 금·은을 사용해 다양한 무늬로 꾸몄기 때문에 장식대도(裝飾大刀)라고도 합니다. 가야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신분과 권위의 상징물입니다.
미늘쇠[有刺利器]는 길쭉한 철판의 가장자리에 가시 모양의 미늘이 달린 철제품입니다. 합천 옥전·함안 말이산 고분군 등 일부 지역의 큰 무덤에서는 새 모양의 미늘이 달린 큰 미늘쇠가 출토됩니다. 이것은 묻힌 이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며, 새 모양 토기와 함께 새를 숭배했던 그들의 정신세계를 보여 줍니다.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에서는 5세기 이후 다양한 지역색을 띤 토기가 나타납니다. 김해 윗덕정·죽곡리·화정·안양리 유적에서는 금관가야 토기뿐만 아니라 대가야·소가야·아라가야 토기 및 신라 토기가 혼재되어 나타납니다. 이 시기까지 금관가야가 존재했지만, 그 세력이 예전 같지는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김해 윗덕정 유적은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형성되었고, 화정 유적에서도 신라식 돌방무덤[石室墓]이나 제사를 지낸 구덩이가 발견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투항한 뒤 6세기에서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김해 지역 지배자들의 무덤일 것입니다. 김해 지역에 여러 지역의 가야 토기와 신라 토기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신라로 넘어가는 과정임을 나타냅니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류역의 가야는 고구려의 남정南征(400년)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6세기 대 이후 신라의 본격적인 팽창 정책으로 창녕 지역이 먼저 신라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그 뒤 금관가야의 멸망(532년), 대가야의 멸망(562년)을 끝으로 가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후 신라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 대성동 유적에서도 5세기 초엽에 큰 무덤의 축조를 중단합니다. 또한 점차 신라식 돌방무덤[石室墓]과 신라 토기인 짧은 굽다리접시 [短脚高杯]로 바뀝니다. 가야의 여러 지역에서 유행하던 독특한 토기나 장신구도 신라 지방 문화의 하나가 되어 갑니다.
이 긴목항아리는 목과 몸통 경계가 유려한 곡선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토기에는 목에 가로로 선이 새겨져 있고, 그 사이 사이에 둥근 무늬와 네 줄의 선 무늬, 구멍 무늬 등이 조합되어 있습니다. 긴목 항아리를 받치는 바리모양 그릇받침에도 삼각형의 선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가야 이전의 변한 사람들도 수정, 호박, 마노 등의 보석 광물과 함께 유리나 금속을 이용해 장신구를 만들었습니다. 1~3세기 유적에서도 옥이나 유리로 만든 구슬 장신구가 자주 발견되는데, 3세기 대의 문헌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의 “진한, 변한 사람들은 금·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꿰어 보배로 삼는다.”는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남색 유리제 환옥을 비롯하여 대추모양 옥, 여러면 옥, 곱은옥, 수정 등 다양한 구슬이 가야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목걸이는 시기와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김해 대성동·양동리 유적과 같은 4~5세기 높은 신분의 무덤에서는 목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목걸이가 출토됩니다. 5세기 후반부터는 목걸이 길이는 점점 짧아지며, 옥의 종류도 단순해집니다. 국력과 장례의 변화에 따라 장신구의 모양과 수량이 변합니다.
화려한 장신구는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정치·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역할도 합니다. 4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야지역은 금이나 은보다는 구슬류를 더욱 귀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5세기 중엽 이후부터 금·은으로 만든 귀걸이와 팔찌의 수량이 증가합니다. 가야 사람들의 장신구에 대한 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해당 전시품은 무단 복제 사용이 금지되며 소장품 복제 신청을 통해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신청 절차 및 신청서 다운로드는 홈페이지 소장품/학술/출판 - 소장품복제·열람 - 소장품 복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