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 성 호
삼국시대 마갑의 구조와 계보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김 동 일(목포대학교)
토론문
이 동 관(국립경주박물관)
05
31
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
김 새 봄(영남대학교)
토론문
김 훈 희(울산문화재연구원)
35
49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김 효 정(부산대학교)
53
토론문
허 준 양(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75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김 민 철(국립김해박물관)
79
토론문
박 장 호(경산시청)
103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진·변한 재갈의 특징과 계통
윤 서 경(국립대구박물관)
107
토론문
강 나 리(부산대학교)
123
Contents
13:05~13:10
사회 : 김혁중(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사)
개회사 : 오세연(국립김해박물관장)
종합토론(좌장 :
김재홍(국민대학교) / 발표자 및 토론자 전원)
김동일(목포대학교)
이동관(국립경주박물관)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김새봄(영남대학교)
김훈희(울산문화재연구원)
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
윤서경(국립대구박물관)
강나리(부산대학교)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진·변한 재갈의 특징과 계통
13:10~13:40
13:40~14:10
김효정(부산대학교)
김민철(국립김해박물관)
허준양(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박장호(경산시청)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14:10~14:40
14:40-14:50
14:50~15:20
15:20~15:50
15:50~16:10
16:10~18:00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김 동 일(목포대학교)
토론문
이 동 관(국립경주박물관)
05
31
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
김 새 봄(영남대학교)
토론문
김 훈 희(울산문화재연구원)
35
49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김 효 정(부산대학교)
53
토론문
허 준 양(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75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김 민 철(국립김해박물관)
79
토론문
박 장 호(경산시청)
103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진·변한 재갈의 특징과 계통
윤 서 경(국립대구박물관)
107
토론문
강 나 리(부산대학교)
123
Contents
13:05~13:10
사회 : 김혁중(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사)
개회사 : 오세연(국립김해박물관장)
종합토론(좌장 :
김재홍(국민대학교) / 발표자 및 토론자 전원)
김동일(목포대학교)
이동관(국립경주박물관)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김새봄(영남대학교)
김훈희(울산문화재연구원)
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
윤서경(국립대구박물관)
강나리(부산대학교)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진·변한 재갈의 특징과 계통
13:10~13:40
13:40~14:10
김효정(부산대학교)
김민철(국립김해박물관)
허준양(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박장호(경산시청)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14:10~14:40
14:40-14:50
14:50~15:20
15:20~15:50
15:50~16:10
16:10~18:00
주제발표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김 동 일 (목포대학교)
7
김 동 일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Ⅰ. 머리말
다호리유적에서는 초기철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지 대량의 무덤이 발견되므로 중심묘
지의 가능성을 인지할 수 있다. 묘지 내 다수의 무덤에서 다량의 유물이 부장되고, 부장 유
물 역시 세형동검과 철기 등
當代 최고의 위세품이 다수 확인된다. 무덤 간에는 同시대성
과 연속성이 동시에 확인된다. 이를 통해, 다호리유적은 초기철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
지 중심묘지로 인식된 지역이자, 두 시대의 표지적인 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호리유적의 중요성 자체는 필자가 언급할 필요 없이 이미 다수의 연구자가 인식하고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특정 주제에 집중하여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본고의 핵심 주제
는 ‘다호리유적의 철제 농공구’이다.
먼저, 철제 농공구의 변천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조형과 유통 문제 등을 검토한다. 마지
막으로 동아시아 속의 다호리유적 집단에 대해 초보적이나마 관념적인 측면으로 접근하
고자 한다.
Ⅰ. 머리말
Ⅱ. 다호리 출토 철제 농공구의 변천
1. 농공구에 대한 이해
2. 다호리유적의 시간성
3. 다호리유적 출토 철제 농공구의 변천
Ⅲ.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동아시아 속의
다호리유적
1. 철제 농공구의 조형 문제
2. 철제 농공구의 제작과 유통 문제
3.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Ⅳ. 맺음말
목 차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김 동 일
목포대학교
8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Ⅱ. 다호리 출토 철제 농공구의 변천
한반도 출토 철제 농공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철제 농공구 출현 이전의 농공구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농공구에 대한 이해
본절에서는 두 가지 측면으로 농공구에 대해 접근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재질에 따른 변
화이고, 두 번째는 용도에 따른 구분이다. 먼저 재질에 따른 변화를 정리하고자 한다. 인류
는 철제 농공구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목·석·동제 농공구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목제 농공
구는 산성 토양으로 인해 파악이 어렵다. 재질적인 측면에서 철제 농공구 이전의 사용된
석·동제 농공구를 주목하고자 한다. 그 배경에는 철제 농공구가 출현하면서 청동제 농공
구의 수량이 급감하고, 초기철기시대 청동제 농공구의 수량이 증가하면서 석제 농공구의
수량이 급감하는 현상을 통해, 농공구의 전환 과정을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석제 농공구는 한반도에서 신석기시대에 처음 출현한다. 이후 청동기시대에 청동제 농
공구가 출현하지만 그 수량이 매우 적고, 여전히 석제 농공구가 주류를 이룬다. 초기철기
시대가 되면 석제 농공구의 수량이 급감하면서 청동제 농공구의 수량이 증가하고, 일부지
만 철제 농공구가 출현한다. 이때 출현한 철제 농공구가 주조철기이다. 즉, 농공구는 시대
의 흐름에 따라 재질의 변화가 뚜렷하다.
석제 농공구는 석도와 석부, 석겸 등의 기종이 존재하고, 그중 석부는 용도 혹은 연구자
의 분류에 따른 따비나 굴지구로도 구분된다. 분류에 대한 문제는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의 청동제
斧에서도 지속되는데, 이는 국내학계가 斧와 錛을 모두 斧로 표기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 실제로는 용도에 따라 달리 분류할 필요가 있다. 어찌됐든 석제 농공구
는 청동기시대가 되면 일부 청동제로 제작되지만, 그 사례는 매우 소수이다. 실제로는 초
기철기시대가 되면서 청동제 농공구의 수량이 증가한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주조철기가 유입된다. 초반에는 청동제 농
공구류가 주류를 이루고, 일부 농공구류가 주조철기로 제작된다. 이후 연구자마다 차이가
존재하지만, 기원전 2세기대의 어느 시점에 단조철기가 한반도로 유입된다. 이 과정에서
청동제 농공구는 거의 사라지고, 철제 농공구류가 주류를 이룬다. 단조철기가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농공구류는 철제로 대부분 대체된다.
정리하면, 한반도에서는 주로 석제 농구와 공구가 제작 및 사용되지만, 청동기시대부터
9
김 동 일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는 일부 금속제 농구와 공구가 제작 및 사용된다. 초기철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 사이에는
먼저 주조철기가 유입된 이후, 단조철기도 유입된다. 금속제 농구와 공구의 비중이 압도
적으로 높아진 시점은 원삼국시대 혹은 그 직전부터이다.
다음으로 용도에 따른 구분부터 살펴보면, 현재 국내학계에서는
農具와 工具를 농공구
로 통칭하여 사용되고 있지만, 농공구는 용도에 따라 농구와 공구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 농구와 공구를 농공구로 통칭하게 된 배경에는 철기 등장 이전부터 공구가 농구
로 사용되고, 철기 등장 이후에도 공구가 농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1).
필자는 한반도 및 인접지역에서 농구와 공구가 혼용된다는 점에 동의한다. 다만, 본래의
용도에서는 차이가 있고, 동아시아적인 관점으로 볼 때 용도 차이가 더 명확해지는데, 철
기는 외부에서 유입된 재질의 유물이므로, 동아시아적인 관점으로 다호리유적을 이해하
기 위해 필요에 따라 구분하고자 한다.
주지하다피시, 농구는 농업에 사용되는 도구를 지칭하고, 공구는 물건을 만들거나 고치
는데 사용되는 도구를 지칭한다. 실제로 농구는 의도적인 농업 외에도 야생 작물의 수확
에 사용되기도 한다. 농구와 공구의 용도에 대해서 현재 고고자료만으로는 해석에 한계가
있다. 이를 보완하고자, 선사시대 중국의 기록을 참고하고자 한다. 물론, 이는 보완적인 의
미로 접근하려는 목적이 있다.
『
管子』「經重(乙)」은 春秋時期에 작성되었다는 견해와 戰國時期에서 漢代까지 작
성되었다는 견해 등 여러 견해가 존재하지만, 공통적으로 한반도의 선사시대에 해당된다
는 점은 분명하다. 즉, 『
管子』「經重(乙)」을 통해, 이 시기 한반도의 인접지역에 해당
되는
中原의 농구와 공구의 용도와 관념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철기가 중원지역에서
유입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도 중원의 기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
管子』「經重(乙)」에서는 桓公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衡謂寡人曰 : 一農之事,
必有一耜、一銚、一鎌、一鎒、一椎、一銍,然後成為農. 一車必有一斤、一鋸、一
釭、一鑽、一鑿、一銶、一軻,然後成為車.·…(후략)…‘ 그 뜻은 ‘衡이 과인에게 말하기
를, 농사일에는 반드시 따비(
耜) 1개, 가래(銚) 1개, 낫(鎌) 1개, 호미(鎒) 1개, 몽치(椎) 1
개, 짧은 낫(
銍) 1개가 있어야 농사가 된다. 수레는 반드시 도끼(斤) 1개, 톱(鋸) 1개, 바퀴
부속(
釭) 1개, 송곳(鑽) 1개, 끌(鑿) 1개, 끌(銶) 1개2), 굴대(軻) 1개가 있어야 수레가 된
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중원에서는 농사일에 따비와 가래, 낫, 호미 등을 사용하고,
1) 실제로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역의 석부는 굴지구로 사용된 사례가 다수라는 점도 참고할 수 있
다. 대표적으로 요동지역의 마성자문화가 이에 해당된다.
2) 鑽과 鑿, 銶는 기록만으로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여 구분하기 어렵지만, 모두 현대의 조각도구
처럼 비슷한지만 용도가 다른 도구들이라 판단한다.
10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수레처럼 무언가를 제작할 때 도끼와 송곳, 끌 등을 사용한다. 즉, 중원에서는 농구와 공구
의 구분이 존재한다. 다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한반도 및 인접지역에서 농구와 공구가 혼
용된다는 점에 동의한다.
주목할 점은 청동기시대 중원에서 농구와 공구는 농부와 장인의 도구이고, 무덤 부장품
으로 채택되는 경우가 적다. 물론, 청동기시대 유목문화 집단의 무덤에서는 공구가 무덤
부장품으로 채택되고,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역시 공구를 무덤 부장품으로 채택한다.
다만, 전형적인 농구는 철제 농구가 유입된 이후부터 무덤에 부장된다. 즉, 한반도 사람에
게 있어서 농구와 공구를 바라보는 관점에 차이가 존재함을 인지할 수 있다.
또한, 국내학계에서는 도끼류에 대해,
斧와 錛 등을 斧로 통칭하여 사용하는 사례가 많
고, 이러한 관점은 청동제와 철제 도끼 모두 해당된다. 석제 도끼는 다기능성의 인정과 연
구 범위에 따라, 굴지구·벌채구·목재 가공구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손준호 2019). 철부 등 철제 농공구가 증가하면서 석제 농공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급
감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반도에서는 석부류와 동부를 대체하여 철부 등 철제 농공구
가 용도와 무관하게 사용되었다고 판단한다.
정리하면, 한반도의 농공구는 석재로 제작될 때부터 다기능성을 지니고 있다. 중원에서
는 철제 농구와 공구에 대해 용도에 따른 구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철제 농구와 공구가 한
반도로 유입될 때, 재지적인 방식이 잔존하였기 때문에 농구와 공구를 완전히 분리하여
인식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기원과 전파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구와 공구를 분리
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 Ⅲ장 3절에서는 이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관념의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2. 다호리유적의 시간성
다호리유적 출토 철제 농공구의 변천을 검토하기에 앞서, 다호리유적의 시간성을 검토
할 필요가 있다. 아직 다호리유적 내 개별 무덤의 편년은 상세하게 제시되지 않고 유물의
선후관계만 제시되었다. 연대 추정이 가능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은 경우에는 특정한 연대
도 제시되지 않은 경우가 다수이다. 필자는 이에 몇 가지 방법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우선, 토기의 상대연대를 통해, 다수 무덤의 선후관계를 파악한다. 토기 변천은 주머니
호를 중심으로 분석하였고, 이외 다른 토기 기종의 변화도 참고하여 상대연대를 설정하였
다. 그 기준은 다호리유적 9차 보고서 고찰에서 제시된 분류안을 기준으로 하였다(국립김
해박물관 2011).
이어서 검파두식 등 시간성이 비교적 명확한 유물을 통해, 상대연대와 편년의 근거자료
11
김 동 일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로 활용한다. 검파두식의 시간성을 살펴보면, 다호리 1·19·63·73·104·120·141·149호 출토
검파두식은 대체로 기원전 2세기 말에서 기원전 1세기 말 사이에 위치한다(김동일 2017).
그중 다호리 19·104호는 다른 무덤 보다 비교적 늦은 시점에 속하고, 기원전 1세기 후반
으로 판단한다. 다호리 69호는 기원후 1세기 이후에 속한다(김동일 2017). 다호리 93호
출토 검파두식은 아랫면만 확인 가능하지만, 대체로 기원전 2세기 말에서 기원전 1세기대
사이에 속하는 형태이다. 또한, 다호리 119호 가상귀부경은 기원후 1세기 전엽에 속한다
(박지영 2014:85).
다음으로 시간성이 파악된 무덤을 중심으로 각 무덤 간의 상관관계를 통해, 나머지 무
덤의 시간성을 파악한다. 이 방식은 필자가 이전 다른 논고에서 사용한 방법이다(김동일
2019). 요약하면, 묘지 내에서 무덤은 군집현상이 있으며, 무덤의 인접 조성으로 인해 특
정한 배열이 확인되고, 이 배열 간의 상관관계를 통해 연대가 불분명한 무덤의 시간성을
추론할 수 있다(김동일 2019:100-105).
또한, 138호는 105호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에 105호가 더 후행한다는 점과 105호는
8·104호와 함께 주변 무덤들과 다른 장축 방향을 보인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주변 무덤
들이 조성되고 시간이 흐른 뒤 새롭게 조성된 무덤군으로 이해할 수 있다.
파악된 시간성을 통해 단계를 설정하고, 해당되는 무덤을 추론하면 (표 1)과 같다.
상기 표는 다호리유적 1~11차 보고서의 자료를 토대로 분석하여 작성한 표이다. 물론,
무덤 중에는
異見이 존재하는 무덤이 다수이다. 예를 들면, 다호리 125호 주머니호는 얇
은 굽이 있기에 이른 시기로 인식되지만, 공반된 검파두식은 대체로 기원후 1세기에서 2
세기 사이에 속하고, 단조철부의 제작기법도 비교적 늦은 방식으로 판단한다.
단조철부 중에는 인부와 공부의 소재를 하나로 제작한 방식이 있고, 이 방식은 원삼국시
대에서 삼국시대에 유행하며, 인부와 공부의 소재를 따로 준비한 방식보다 후행한다(김상
민 2020:52-54). 필자는 125호 단조철부가 인부와 공부의 소재를 하나로 제작한 방식으
로 생각하고, 이 단조철부는 다호리유적 내 다른 단조철부의 제작기법 중에 가장 늦게 등
장하였다고 판단한다. 이를 종합하여, 다호리 125호는 Ⅲ단계로 판단하지만, 토기를 참고
표 1 다호리유적의 무덤별 시간성
단계
무덤 번호
Ⅰ
1-4, 7, 9, 12, 16-19, 28-29, 34, 39, 41-42, 44, 58, 63, 68, 73, 75, 77, 81, 84-85, 87-89, 94-95,
97-99, 103, 106, 123, 126-127, 129, 130, 132-136, 138-139, 141-142, 145, 148-150
Ⅱ
5-6, 8, 10-11, 13, 20, 23-27 ,35, 38, 40, 43, 45-48, 57, 59, 61-62, 72, 74, 76, 79, 80, 82-83, 86,
91, 93, 96, 100, 104-105, 120-122, 128, 137, 140, 144, 146
Ⅲ
22, 30-33, 36-37, 49-56, 60, 64-67, 69-71, 102, 107-119, 124-125, 131, 147, 151
12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할 때 Ⅱ단계에 속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또한, 다호리 104호는 철기 연대가 비교적 늦은 시점으로 상정되지만, 다호리유적 11차
보고서에서 104호 출토 반량전의 연대를 검토한 결과 기원전 1세기 전·중엽경으로 상향
된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4:209-221). 그러나 앞서 지적하였듯이 다호리 104호와
105호가 주변 무덤과 다른 장축 방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105호가 138호를 파괴하고
조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반량전의 전세 기간과 무덤 조성 시점은 이보다 늦다고 판단
하였고, 그 단계는 Ⅱ단계에 속한다. 덧붙여, 다호리 107호와 109호의 철기 역시 교란층에
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공반된 다른 유물과 연대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각 단계별 편년은 Ⅰ단계가 기원전 2세기 말에서 기원전 1세기 전중반까지이고, Ⅱ단계
는 기원전 1세기 중후반에서 말까지이며, Ⅲ단계는 기원후 1세기대이고, 일부는 그 이후
일 가능성도 있다. 그 기준은 다호리유적 11차 보고서와 검파두식의 편년을 참고하여 설
정하였다.
3. 다호리유적 출토 철제 농공구의 변천
이상으로 파악된 자료를 바탕으로 철제 농공구의 변천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변진한
의 철제 농공구 변천은 여러 연구자의 논고와 다호리유적 보고서 등에서 이미 전체적인
흐름을 여러 차례 설명하였다(김도헌 2004, 김도헌 2008, 김두철 2009, 류위남 2009, 국
립김해박물관 2011, 이동관 2011, 국립김해박물관 2013, 김상민 2013, 이동관 2013, 국
립김해박물관·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4, 김일규 2014, 이동관 2017, 김상민 2019, 김
상민 2020 등). 필자는 그 흐름 속에서 다호리유적의 철제 농공구를 검토하고자 한다. 검
토대상으로는 판상철부와 단조철부, 주조철부, 철겸, 철도, 철착, 철사, 철제 따비, 철서 등
이다.
판상철부는 소형에서 대형으로의 변화가 확인되고(김도헌 2004), 인부가 넓어지는 형태
가 시간적으로 더 늦다(김상민 2020:66-67). 다호리유적 내에서는 인부가 넓어진 형태만
이 확인되고, 비교적 큰 판상철부와 비교적 작은 판상철부가 병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이 판상철부들은 Ⅰ단계에서 Ⅱ단계로 전환되면서 대형의 판상철부의 비율이 더 증가
하는 현상은 일치한다. 다만, Ⅲ단계가 되면 판상철부가 거의 부장되지 않고, 소형의 판상
철부만 소량 발견된다.
인상적인 점은 인부와 기부의 평면 형태가 호선인 사례가 다수이지만, 인부와 기부 모두
직선인 사례, 인부만 직선인 사례, 기부만 직선인 사례 등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판상철부
는 단조로 제작되는데, 인부와 기부의 끝을 의도적으로 직선화시킨 형상은 특정한 목적이
13
김 동 일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1-12·18-20.1호 13.18호 14.132호 15.134호 16.136호 17.149호 21.99호 22-27.6호 28.8호 29-
30.10호 31-32·56-61.11호 33.13호 34-41.23호 42.27호 43.40호 44.43호 45.80호 46.91호
47-48.93호 49.96호 50-53.104호 54.120호 55.121호 62.109호 63.125호 64.118호
그림 1. 다호리유적 출토 판상철부 사례 집성
14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수반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형식분류의 속성으로 선정하기에는 다호리유적 이외의 자
료 비교가 필요하다.
또한, 인부는 넓지만 매우 소형의 판상철부가 Ⅰ단계부터 Ⅲ단계까지 계속 제작된다. 소
1·13-14.1호 2.4호 3·15.18호 4.19호 5·17.42호 6.132호 7-8.133호 9.134호 10.135호 11.136
호 12.141호 16.29호 18.63호 19.99호 20.139호 21.149호 22.17호 23·33.10호 24·35·44.23
호 25.48호 26.74호 27.93호 28.96호 29.100호 30.104호 31.140호 32.6호 34.20호 36.25
호 37.35호 38.40호 39.47호 40.91호 41.101호 42.120호 43.11호 45-46.36호 47.64호 48.67
호 49.70호 50.108호 51-52.110호 53.111호 54.112호 55.113호 56.115호 57.116호 58.117
호 59.118호 60.125호 61.30호 62.31호 63.32호 64.51호 65.53호 66.66호 67.69호 68.107호
69.109호 70.124호 71.22호
그림 2. 다호리유적 출토 단조철부 사례 집성
15
김 동 일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형의 판상철부는 단일 개체만 부장되는데, 대형의 판상철부는 여러 개체가 부장된다는 점
을 비교할 때, 대형의 판상철부와 다른 의미에서 제작 및 부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외
에 인부가 직선으로 제작된 판상철부와 굴지구로 사용하기 위해 인부 방향이 반대로 제작
된 사례도 있다. 이 사례들은 Ⅰ단계부터 등장하지만, 수량 자체는 매우 적다.
단조철부는
無肩式과 有肩式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無肩式은 西漢時期에 한반
도로 유입되고, 평양 상리유적에서부터 확인되며,
有肩式은 다호리유적에서부터 확인된
다(김상민 2020:54). 즉, 단조철부는
無肩式이 먼저 유입되고, 이후 다호리유적에서 有肩
式이 새롭게 등장하고, 이 때문에 다호리유적에서는 두 형식 모두 확인된다. 실제로 다호
리유적의 Ⅰ단계에 속하는 다호리 1·18·42호에서는
無肩式과 有肩式 단조철부가 모두 출
토된다.
주조철부는 단면 형태가
長方形과 梯形이 있지만, 다호리유적에서는 단면 형태가 梯形
만 출토된다. 주조철부의 주요 속성을 살펴보면, 단면은
長方形과 梯形, 크기는 대형과 소
1·6-10.1호 2-3.133호 4-5.138호 11.17호 12.99호 13-16.121호 17-18.132호 19-21.134호 22·30.6호
23.38호 24-26·40-43.120호 27-28.140호 29.144호 31-32.10호 33-34.40호 35-37.93호 38-39.104호
44.32호 45·48.125호 46-47.107호
그림 3. 다호리유적 출토 주조철부 사례 집
16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형,
身部 상면의 융기 돌출 有無, 인부의 확장 등이 있다(김상민 2020:50-51). 그중 다호
리의 주조철부는
身部의 상면에 양측 외곽에 융기가 돌출된 형태와 융기가 돌출되지 않은
형태로 구분된다.
身部 상면의 융기가 돌출되지 않은 주조철부의 경우, 다호리 1호를 제외
하면 Ⅲ단계가 되어서야 인부가 넓어진다.
身部 상면의 융기가 돌출된 주조철부의 경우,
Ⅰ단계부터 Ⅲ단계까지 병존한다. 즉, 다호리유적 내에서는
梯形의 주조철부가 身部 상면
에서 융기 돌출 발생
有無의 구분만 가능하고, 시기별 수령의 변화 정도만 해석이 가능하
다. 또한, Ⅲ단계가 되면, 다호리유적 내에서 주조철부의 부장 비중이 매우 줄어들다.
철겸의 형태는
大同小異하다. 대체로 基部 끝이 말려있고, 날 방향으로 基部의 평면 형
태가 돌출되어 있다. 인상적인 점은 일반적으로 다호리유적의 철겸은 날 방향으로
基部의
평면 형태가 돌출되지만, 다호리 43호 철겸은 날 반대 방향에
基部의 평면 형태가 돌출된
1.68호 2.134호 3.136호 4.138호 5.145호 6.141호 7.149호 8.8호 9.13호 10.25호 11.26호 12.35호 13.43
호 14.40호 15.48호 16.72호 17.74호 18.104호 19.140호 20.146호 21.30호 22.31호 23.32호 24.51
호 25.53호 26.54호 27.66호 28.67호 29.69호 30.70호 31.71호 32.107호 33.110호 34.111호 35.113호
36.115호 37.116호 38.117호 39.124호 40.147호
그림 4. 다호리유적 출토 철겸 사례 집성
17
김 동 일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다. 필자는 이를 자루의 결합 방식에 있어서 예외적인 사례라 판단한다.
철도는 철도자와 환두도자, 소환두도자, 환두소도자, 환두소도 등 여러 용어가 사용된다.
사실 철도의 형태 중 환두의
有無 등은 기원 차이라 생각한다. 銅刀의 형태를 살펴보면,
환두가 없는 형태로 치병동도가 있다. 치병동도는 병부가 없고,
基部만 존재하며, 基部의
형태가 이빨처럼
凹凸이 심한 형태를 지칭하지만, 凹凸 없이 一字 형태의 基部도 존재한
다. 환두가 있는 형태는 동도의 영향으로 이미 지적되고 있다(김상민 2020:63). 그러므로
철도는 석검이나 동도처럼 다양한 형태를 상정하고
有柄式이나 有莖式 등으로 명명하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다호리유적 내에서는 특별한 변화상이 관찰되지 않지만,
有柄式과 有莖式 모두 확인되
고, 특히
有柄式의 출토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또한, 다호리 64호에서 食刀로 추정되는
有莖式 철도가 출토되고, 중국에서 유사한 형태의 銅刀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산
발적인 유입 혹은 예외사례로 상정할 수 있다.
철착은 특별한 시간적인 변화상이 확인되지 않는다. 대부분 공부의 단면 형태가 원형 혹
은 타원형이고, 매우 소수의 사례로 단면 형태가 방형도 있다. 예를 들면, 다호리 4호 철착
처럼 공부의 단면 형태가 방형도 있고, 다호리 32·134호 철착처럼 단면 형태가 방형에 가
까운 형태도 있다. 철착에 대한 연구 자체가 많지 않지만, 연구자에 따라 송곳형 철제따비
로 인식하기도 한다(이동관 2011).
몇몇 특징도 확인되는데, 다호리 29호 철착처럼 철착의 신부가 매우 편평한 형태는 단
한 사례이지만, 중국에서 다수 발견되므로 이 역시 청동제
鑿을 모방하여 제작하였다고
판단한다. 또한, 다호리 19·79·141·144호 철착처럼 공부가 다른 철착에 비해 두드러지게
확장된 형태가 있다. 철착은 원래 끌이나 정의 용도로 사용하기 때문에 자루를 끼워서 사
용한다. 자루가 삽입되는 공부의 크기가 확장되면, 더 두껍고 큰 자루를 끼울 수 있게 되
고, 철착은 더 강한 힘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공부가 확장된 다호리 19·79·141·144호 철착 중 79호의 사례를 제외하면, 모두 2
점의 철착이 공반된다. 다호리 19·141·144호에서는 다호리유적 내 다른 철착처럼 공부가
좁은 것과 공부가 확장된 것이 부장되고, 다호리 19·141호에서는 공반된 철착 간의 크기
차이까지 명확하다. 이는 철착의 공부 넓이에 따라 철착의 용도에서 차이가 존재하기 때
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철사도 특별한 시간적인 변화상이 확인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철사는 단면이 초승
달형이고,
基部 끝의 평면 형태는 말각방형 혹은 그에 가까운 형태이다. 다만, 다호리
134·140·141호 철사처럼 양 끝이 뾰족한 형태이고, 자루가 중앙에만 위치하는 소수의 사
례도 있다. 또한, 다호리 22·38호 철사처럼
基部 끝의 평면 형태가 단을 지면서 줄어드는
형태도 있고, 이 경우 일반적인 철사처럼 자루가
基部에 위치한다.
18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철제 따비는 일반적으로 대형에서 소형으로 변화하고, 공부는 신부와 점차 일직선으로
변화한다(이동관 2011:42). 다호리유적의 철체 따비는 인부 단면이 ‘
︿’자이고, 삼국시대
가 되면 인부 단면이 ‘
一’자로 평탄화된다(이동관 2011:42-43). 다호리유적의 철제 따비
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필자는 인부의 단면 형태에 주목하였고, 대부분의 형태는 인부 단
면이 ‘
︿’자이고, 다호리 31·104호 철제 따비는 인부 단면이 렌즈형태이므로, 이를 기준으
로 구분이 가능하다3). 이에 대해 필자는 Ⅱ단계의 늦은 시점부터 철제 따비의 인부 단면
이 조금씩 평탄화되는 과정이 발생하였다고 판단한다.
철서는 다호리 61·77호에서만 확인되고, 모두 합해 5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Ⅰ단계부터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다호리유적의 이른 시점부터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
례가 매우 적기 때문에 특별한 형식 분류는 어렵다.
鐵錐는 단면 방형과 단면 나선형이 있다. 그러나 나선형이 Ⅱ단계에만 확인된다는 특징
외에 특별한 변화상은 확인되지 않는다.
鐵錐 자체는 중국에서 청동제 錐가 다수 확인되
므로, 그 기원을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외 겸형철기와 방주상철부, 철제 망치, 철제 쇠스랑 등이 있다. 이 사례는 대부분 1점
만 확인되는 등 그 소수의 사례만 확인되기 때문에 변화상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그 용
도에 맞추어 다호리유적 일대까지 산발적으로 제작 혹은 유통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다호리유적에서는 철제 농공구의 형식학적 변천이 두드러지지 않고, 소수 형식이 병존
하는 기종이 다수이다. 이 때문에 형식 분류가 유의미하지 않은 경우에는 형식 분류 대신
에 자료 소개 혹은 형태 소개로 대체하였다. 경우에 따라 이른 형식이 늦은 단계까지 잔존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문화의 속성이 단절적이지 않고, 다차원적으로 발현되기 때문
이다.
Ⅲ.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동아시아 속의 다호리유적
본장에서는 다호리유적 출토 철제 농공구의 조형을 검토하고, 철제 농공구의 의미를 통
해 동아시아 속의 다호리유적을 이해하고자 한다.
3) 이동관의 분류에서 다호리 31호 철제 따비는 다호리 19·23호 철제 따비보다 늦은 형식으로 설
정하였다는 점도 참고할 수 있다(이동관 2011).
19
김 동 일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1. 철제 농공구의 조형 문제
주지하다시피, 한반도의 철제 농공구는 주조철기부터 등장하고, 이후 단조철기로 이어
진다. 청동기가 합금이기 때문에 순동시대를 거치지 않고 자체적으로 발생할 수 없듯이,
철기 역시 주조에서 단조로의 기술발전에는 기술 격차가 명백하게 존재한다. 즉, 주조기
술에서 단조기술로 자체적인 발전보다 지속적인 기술 유입을 상정해야 한다.
변진한의 철기문화는 재지의 세형동검문화의 형식을 계승한 것과
細竹里-蓮花堡類型
에서 한반도 서남부지역으로 계승한 것, 낙랑을 통해 수용된 것으로 크게 세 가지 계통이
존재한다(김두철 2009:55). 또한, 단조철기는
漢代에 발전한 단조기술 계통으로 추정되
기도 한다(김상민 2020:282). 한반도 동남부지역으로 한정한다면, 철기의 유입은
燕系 철
기와
漢式 철기의 유입으로 한정할 수 있다.
한반도 서남부지역은 기원전 3세기대
燕系 철기가 유입되고(김상민 2013), 기원전 2세
기대 위만조선단계의 철기류가 등장하며(정인성 2013), 낙랑 설치 이전에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도 철기가 유입된다(김상민 2013, 김도영 2015). 한반도 동남부지역에는 기원전 2
세기대
燕系 주조철기가 유입되고 재지적 단조철기가 등장하며, 기원전 1세기대에는 漢式
철기가 유입되고 재지적 철기문화가 형성된다(김상민 2013). 즉, 영남지역의 초기철기는
호서지역처럼
燕系 철기 계통이고, 시간이 지나면 漢式 철기가 유입된다(김일규 2014).
상기의 연구사를 종합하면, 철기의 유통 경로와 주체가 비교적 명확하다. 또한,
漢式
철기 역시
漢으로부터의 유입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한 문제점은 燕系 철
기의 조형과 유통 방식이다. 우선 철기의 조형에 대해 살펴보면, 필자는 기존에 알려
진 철기의 조형에 대해 대체로 동의하지만, 몇몇 동의할 수 없거나 새롭게 검토해야
할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였다. 그 대상은
鐵鋤를 비롯한 燕系 철기, 판상철부 등이다.
판상철부의 조형은
薄刃刀(이남규 1997, 村上恭通 1998)와 편인석부(김도헌 2004)로
나누어진다. 특히, 김도헌이 주장한 내용에는
薄刃刀와 초기 판상철부의 평면형태가 다르
다는 점이 강조된다(김도헌 2004)4). 더욱이
薄刃刀는 인부 주변만 ’V’자로 모이지 않고,
전체적인 형태 자체가 ’V’자로 모이는 형태이기 때문에 판상철부와의 차이가 명확하다.
이에 필자가 주목한 자료는
板狀銅斧와 板狀銅錛이다5).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4) 편인석부를 판상철부가 대체하였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기종의 대체가 반드
시 조형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는 세형동검과 철검처럼 계승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한반도 마제석부와 주조철부처럼 계승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경우도 다수이기 때문이다.
5) 중국학계에서는 板狀銅斧와 板狀銅錛에 대해 手斧와 鏟刀, 鐵鏟, 鐵鋤 등 다양한 용어로 지칭
하고 있으며, 통일된 개념이나 독립적인 기종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이에 본고에
서 두 기종 중 片刃을 板狀銅錛으로 명명하고, 合刃을 板狀銅斧로 명명한다.
20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자료이지만,
板狀銅
斧와 板狀銅錛은 중
국에서
商代부터 戰
國時期까지 산발적
이지만 지속적으로
제작된다.
商代에 속
하는
漢源 商周 靑
銅器로 板狀銅錛 3
점이 보고되었고(그
림 5:1),
新干 大洋
州 商墓에서 板狀銅
錛 여러 매가 부장되었다(그림 5:3). 西周時期에 속하는 監潼 南羅村 西周墓에서 3점 板
狀銅錛이 출토되었는데, 규격이 9.7~13cm로 보고되었기 때문에 각 유물의 정확한 규격
은 불분명하다(그림 5:2).
戰國時期에 속하는 鳳翔 西村 戰國秦墓에서 板狀銅斧가 출토
되었고(그림 5:4),
芮城 東周墓에서 소위 ‘薄刃刀’라는 형태의 板狀 銅器가 출토되었다
(그림 5:5). 또한,
戰國前期에 속하는 洛陽市 中州路 西工段 戰國墓M2719에서 斧와 錛
의 구분이 어렵지만,
板狀 銅器가 출토되었다(그림 5:6). 이외에도 戰國後期의 李三孤堆
楚王墓에서 3점이 출토되었고, 雲南 劍川海門口 수집품 등 다수의 板狀銅斧와 板狀銅錛
이 보고되었으며, 한반도의 판상철부처럼 여러 매를 부장한 사례가 다수이다.
편인석부는 용어 그대로
片刃이고, 편인은 주로 자귀로 사용되므로 合刃과 용도 및 자루
결합에서 차이가 명확하다. 다호리 1호에서 자귀용으로 제작된 판상철부가 있지만, 이 사
례는
刃部가 아니라 基部가 확대된 형태이므로 다른 판상철부와 날의 위치가 반대에 위치
하고, 판상철부의 용도에 따른 형태 차이가 명확해진다. 즉, 판상철부는
合刃의 다수이고,
片刃은 소수라 생각한다.
편인석부가
合刃이 다수인 판상철부의 조형이라 판단하기 어렵다. 板狀銅斧는 合刃이
고,
板狀銅錛는 片刃이므로, 판상철부의 조형으로 합당하다. 또한, 板狀銅斧와 板狀銅錛
는
薄刃刀와 달리, 판상철부처럼 刃部 주변만 ’V’자로 모이는 형태이다. 그러므로 판상철
부의 조형은 중국경내에서 발견되는
板狀銅斧와 板狀銅錛일 가능성이 높고, 薄刃刀를
예외적인 사례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다호리 29호 출토
鐵鑿도 검토가 필요하다. 이 鐵鑿은 身部 형태를 기준으로 鐵鍦로 구
분하는 편이 타당하지만, 공부가 존재하기 때문에
鐵鑿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기종은
이전부터
中原에서 청동제로 제작되어 사용되어온 기종이다. 중국에서는 이 기종을 沖子
(center punch)로 구분한다.
1.
漢源 商周 靑銅器 2.監潼 南羅村 西周墓 3.新干 大洋州 商墓 4.鳳翔 西
村 戰國秦墓 5.芮城 東周墓 6.洛陽市 中州路 西工段 戰國墓M2719
그림 5.
中原 출토 板狀銅斧와 板狀銅錛
21
김 동 일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이러한 기종은
身
部가 형태는 납작하
고, 공부가 존재하는
특징이 있다. 실제
로 공구는 다양한 종
류가 존재하고,
斧·
錛·鑿·鉇만으로 모
든 공구를 정의할 수
없다. 실제로 중국학
계에서도 다호리 29
호 출토를
沖子로 명
명하고 있다. 동시에
鐵鑿이지만, 身部가
납작한 기종 역시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종들은 고건축 용어를 활용하여 개
념 정의가 가능하다.
鑿과 같은 형태이지만 身部가 납작한 형태를 鑿釘, 다호리 29호 출
토품처럼
鍦와 같은 형태이지만 身部가 납작한 刻釘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정리하자면,
刻釘과 板狀鐵斧, 鐵錐 등은 철기의 한반도 유입과 함께 새로이 제작된 형
태가 아니라,
中原에서 청동기로 제작되어온 형태이고, 철기 제작 기술이 도입되면서 청
동기를 대체하여 철기로 제작된 기종들이다.
다음으로
鐵鋤를 비롯한 燕系 철기의 조형 문제이다. 白云翔은 燕의 철기가 제작 및 사
용된 시점은
戰國時期이고, 三晉의 영향 아래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白云翔 2012).
최근 김주호는 ‘전국연계철기’가
燕 고유의 철기가 아니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김주호
2016). 실제로 철서와 철추는 연의 중심지에서 발견되지 않고, 내몽고자치구 동남부와 중
국 동북지역 등 기원전 3세기대 연의 세력이 새롭게 확장한 영역에서만 발견된다. 그렇다
면
燕系 철기를 어떻게 정의할지 中原 내부의 사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주조로 제작된 철제 농공구가 중원 각지로 확산되기 이전부터 검토하고자 한다.
春秋
時期에 이미 다수의 철기가 중원 각 지역에서 출토되지만, 주조인지 혹은 단조인지를 떠
나서 철제 농공구 자체가
楚의 영역에서만 주로 제작된다. 예를 들면, 대다수의 鐵鏟과
鐵鍤은 湖北省에 집중되지만, 예외적으로 鳳翔秦公M1에서 鐵鏟과 鐵鍤이 출토되었
을 뿐, 기본적으로는 철제 농공구가
楚에서 주변 지역으로 확산된다(周万利 2000·2001).
村上恭通 역시 楚에서 제철 메커니즘이 개발되고, 戰國中期에 秦으로 흡수되었으며, 다
른 경로를 통해 중원지역으로 확산되어 선철 생산 및 주조철기 생산을 고양시켰다고 주장
하였다(
村上恭通 2013:56). 戰國中期는 주조철기 외에도 楚戈 및 문양 시문 기법이 요
1.
中山成公M6 鑿釘 2.中山成公M6 鑿釘 3.中山成公M6 刻釘 4.다호리 29호
刻釘
그림 6
鑿釘과 刻釘의 사례
22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령성까지 확산되는 등 명확한
楚의 문화요소가 戰國時期에 중국 각 지역으로 확산된다는
점 역시 철제 농공구의 확산과 맥락을 같이 한다.
燕의 철제 농공구에 대해 김주호는 戰國後期가 되어서야 철제 농공구가 부장된다고 주
장한다(김주호 2016). 필자는 이 견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楚의 철제 농
공구는 북쪽으로 확산되면서 우선
中山國으로 유입된다. 中山國에서는 戰國中期의 中山
成公 시기 유구에서 이미 다량의 철기가 유입되고, 자체적인 생산까지 이루어진다. 戰國
前中期에 이미 中山國과 楚는 교류를 통해 玉器 등 주요 물자가 왕래하였고, 이는 中山成
公의 무덤 및 그 이후 시기에도 확인된다(蔡靑 2018). 이로보아, 中山桓公이 中山國을 復
國하면서 철기 제작 기술을 확보하였거나, 늦어도 戰國中期 中山成公이 楚와의 교류를
통해 철기 제작 기술을 확보하였다고 판단한다.
中山 착왕의 무덤에서는 中山成公 시기의 철기보다 발전된 철기가 등장한다. 필자는 이
중
鐵鋤를 주목하였다. 이 鐵鋤는 소위 燕系 철기의 한 기종이고, 白云翔은 鐵鋤의 邊稜
은
燕의 특징이라 주장하였다(白
云翔 2012:43). 그러나 邊稜, 즉
鐵鋤의 외변에 둘러싸듯이 융기
된 형태는
燕 이전에 中山國에서
먼저 확인된다.
邊稜의 鐵鋤는
燕의 중심지가 아니라, 중국 동
북지역에서 주로 확인된다. 반면,
中原에서는 中山 착왕 무덤에서
邊稜의 鐵鋤가 확인되는데, 착왕
은
戰國中期의 인물이다. 즉, 시
간의 흐름상
邊稜의 鐵鋤는 戰國
中期 中山 착왕 때 설계되고, 戰
國後期 전반에 中山이 멸망하면
서 주변으로 철기 제작자가 이동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燕으로 邊
稜의 鐵鋤가 확산되었다고 판단한다.
만약,
中山國 멸망 이전에 中山國의 철기가 燕으로 유입되었다면, 中山 착왕 때 齊와 중
산이
燕을 정벌하였고, 이 때 燕의 영역 다수를 中山國이 차지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中山國의 철기가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6). 이는 燕昭王이 燕을 復國할
6) 국내에는 燕의 멸망에 대해, 齊의 단독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 인식된다. 그러나 中山 착왕 무
그림 7
中山 착왕묘 출토 鐵鏟
23
김 동 일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때,
齊와의 교섭을 통해 復國이 이루어지지만, 그 과정에서 中山國과의 교섭 기록은 찾기
어려우므로, 온전하게 영토를 복원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輝縣 固圍村區 魏国 묘지에 대해 戰國中期로 보는 인식이 존재하고, 여기서도 철제 농
공구가 확인된다. 그러나
輝縣 固圍村區 6호 무덤 토기는 中山國 鮮虞墓M8204 출토 토
기와 거의 일치하는데,
鮮虞墓M8204는 戰國後期 전반에 속하며, 이 시기는 中山國의 멸
망 시점에 속한다.
輝縣 固圍村區 魏国 묘지 출토 고리형 帶鉤 역시 戰國後期의 양식이
고(
王仁湘 1985:269), 그 형태는 中山 착왕 무덤 출토 고리형 帶鉤에 후행하는 형식이다.
즉,
輝縣 固圍村區 魏国 묘지의 철제 농공구 역시 中山國 멸망 이후 잔존 세력이 이주하
면서 유입된다.
이를 정리하면,
燕系 철기 중에서는 中山國이 멸망하면서 이주한 철기 제작자들에 의해
제작된 철기도 존재한다7). 즉, 필자가 인식하는
燕系 철기는 燕에서 완성되거나, 혹은 燕
에서만 보유하여 주변으로 확산시킨 철기를 총칭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中山國이 멸망하
면서 철기 제작자가
魏와 燕 등지로 흩어졌고, 中山國의 철기가 燕의 중심지에서 발견되
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민영의 존재를 상정하고자 한다8).
2. 철제 농공구의 제작과 유통 문제
본절에서는
燕系 철기 중 철제 농공구 제작에도 민영이 존재할 수 있는지 검토하고자 한
다.
白云翔은 낭정촌 10호 공방지에 대해 화폐 주조는 관부官府가 담당해야 하므로 관영
으로 그 성격을 규정하였다(
白云翔 2012:50). 그러나 낭정촌 10호 공방지만이 도폐刀幣
용범과 철기 제작이 동시에 확인될 뿐이다. 또한, 기원전 2세기 전~중반의
漢文帝 때, 화
폐와 철을 민간에서 제작하거나, 옥황묘문화에서
刀幣가 먼저 제작되는 등 중원의 官府가
아닌 장소에서도 화폐가 제작되었으므로, 낭정촌 10호 공방지를
官府가 아닐 가능성도 있
다.
중원에서는 늦어도
春秋時期 말부터 민영 상공업이 등장한다. 즉, 제작 관할이 관영이
든, 민영이든 유통상에서는
春秋時期에 이미 민영이 존재한다. 湯洁姸은 수공업의 경영
덤에서 발견된 中山三器에는 燕과 전쟁 및 영토 확보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中
山三器는 명문이 새겨진 銅鐵複合容器 1점과 靑銅容器 2점을 지칭한다.
7) 철기 제작자뿐만 아니라, 中山國의 사람들이 中山國 멸망 이후 燕 등으로 이주하여 장수가 되
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樂毅가 있다. 그는 中山國의 사람이었지만, 中山國 멸망 이후 趙로 이
주하였고, 이후 다시 燕으로 이주하여 燕昭王의 장수가 된다.
8) 白云翔 역시 燕 내 민영 철 생산을 상정한 바 있다(白云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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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형태 역시
戰國時期에 관영 중심이었지만 민영의 수가 급증하면서, 두 방식이 병행 및 점
진적으로 발전하고(
湯洁姸 2017:176), 가내 수공업의 발전으로 인해 염철 등 민영 수공
업의 대부호가 출현하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湯洁姸 2017:182).
문헌기사를 찾아보면, 『
史記』「貨殖列傳」9)에서는 ‘魯人俗儉嗇,而曹邴氏尤甚,以鐵
冶起,富至巨萬’이라는 기사가 있다. 그 뜻은 ‘魯 사람은 풍속이 검소하고 인색하며, 曹의
邴씨는 더욱 심하였고, 철을 제련하여 일어나 막대한 부를 쌓았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기사로 ‘
周人既纖,而師史尤甚,轉轂以百數,賈郡國,無所不至’가 있다. 그 뜻은 ‘周 사
람은 인색하고,
師史는 더욱 심하였으며, 물자를 운반하는 수레가 수백이고, 郡과 國에 장
사를 하였으며,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내용을 종합하면,
戰國
時期에 이미 민영에서 철을 제련하였고, 철제품은 買賣시 큰 부를 쌓을 수 있으며, 민영에
서 각 지역으로 판매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러 문헌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戰國時期 중원에서는 민영에서 철을 제련하였고, 유
통까지도 담당하였다. 철제 농공구는 농부의 농사일에 사용되는 도구이지만, 소재 자체가
매우
高價의 물품이다. 그러므로 戰國時期 중원의 철제 농공구는 민영에서 제작하여 유
통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철제 농공구 제작 기술이 어떻게 민영에 전파될 수 있는지도 검토할 필요가 있
다.
燕의 경우,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中山國이 멸망하면서 燕의 영역으로 이주
한 철기 제작자들이
官府에 소속되지 않고, 민영으로 활동하였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
는
官府의 수공업 관리자 ‘工師’10)의 지도 아래 민간 수공업자 생산을 실시한 결과이다
(
湯洁姸 2017:185). 湯洁姸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官府에서 출토된 제품도 民營에서 생
산이 가능하고, 낭정촌 10호 공방지가
官符라 하더라도 민영으로 기술이 이전될 수 있음
을 의미한다.
燕系 철기에 대해 요령지역의 상황을 살펴보면, 먼저 燕이 요서지역을 장악한 시점에도
철제 농공구는 무덤에 부장되지 않고(
裵炫俊 2017), 戰國後期부터 취락 내에서 燕의 철
기가 확인되지만(김상민 2019:125-130), 요동지역으로
燕의 문화요소가 확산되는 시점
인 기원전 3세기경에는 요동지역의 취락과 무덤 모두에서 철제 농공구가 확인된다(김상
민 2019:138). 즉,
燕의 영역 내에서 철제 농공구는 무덤 부장품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생
계에 필요한 용품으로 인식된다.
민영의 존재를 고려할 때, 중원과 주변 지역의 상관관계 보다 상업을 우선시하였기 때문
9) 「貨殖列傳」은 『史記』의 편명으로, 춘추 말부터 서한까지 상공업 등 재물을 통해 부자가 된 이
야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10) 工師의 존재는 韓과 魏, 趙, 秦 등지의 청동기 명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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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 일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에 철제 농공구가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戰國時期에는 중원 이외 지역과의 買賣가
정치체 간의 상황을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경우가 확인된다. 심지어 민영에서 국가관계를
무시하고,
中原의 상인이 흉노와 관계가 단절되기 전에 거래를 하였다는 기록도 존재한
다.
燕系 철기로 인식되는 邊稜의 鐵鋤는 세죽리-연화보유형에서 확인되는데, 燕系 철기를
서북한까지 유통시킨 주체는 세죽리-연화보유형이고(김일규 2014, 정인성 2016), 세죽
리-연화보유형은
燕이 아니라 고조선이다(정인성 2016, 김상민 2017). 이러한 燕系 철기
역시 민영의 존재로 인해 고조선으로 유통되고, 이후 고조선에서는
燕과는 다른 관념으로
무덤 부장품이 된다. 또한, 이 관념은 고조선에서 한반도 남부로까지 확산되고, 그 근거로
다호리유적에서 확인되는
邊稜의 鐵鋤 등이 있다.
정리하자면,
燕 중심지에서 鐵鋤 등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과 燕의 고위 무덤에서는 철
제 농공구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철제 농공구는 농부와 장인의 도구라는 점, 문헌기록
상
戰國時期에는 민영에서 철을 제련하였다는 기록이 다수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11), 주
조로 제작된 철제 농공구는 민영에서 제작 및 유통되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판단한다. 더
욱이 주조 철제 농공구류를 관영에서 관할하였다면,
非중원의 영역인 한반도로 유입되었
을 가능성이 매우 낮아진다.
3.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다호리유적은 기원전 2세기 말에서 기원전 1세기 전반에 형성되고, 다수의 철기가 출토
된다. 이 때문에 낙랑과 더 가깝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현재는
燕系 철기와 낙랑 설치 이
전의 고고자료의 유입이 비교적 명확하게 인식되고 있다. 즉, 다호리유적의 연대는 낙랑
설치 이후이지만, 그 주체는 낙랑과 별개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여기서 철제 농
공구와 다호리유적의 상관관계에 대해 풀이하고자 한다. 접근 방향은 크게 두 가지 방향
이 있고, 첫 번째는 철제 농공구의 인식 문제이며, 두 번째는 묘지 형성과의 상관관계이다.
철제 농공구는 용어 그대로 농구와 공구를 지칭하고, 철제는
中原에서 제작된 후 한반
도로 유입된다. 정작
中原에서 철제 농공구는 무덤 부장품이 아니라, 농부와 장인이 사용
하는 도구에 불과하였고, 고위 귀족 무덤의 부장품으로 채택되지 못한 경우가 다수이다.
앞서 설명한
中山 착왕 무덤의 경우에도 봉분이나, 무덤의 보수 구역에서 출토되거나, 공
11) 鐵刀는 銅刀일 때부터 다용한 실용성으로 인해 중원에서도 무덤 부장품으로 자리매김하였
고, 이 때문에 鐵刀가 工具이지만, 다른 농공구와는 분리하여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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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방유구에서 발견된다.
燕의 경우에도 공방유구나 생활유구에서 철제 농공구가 발견된다.
즉, 철제 농공구는
中原에서 위세품이나 부장품, 혹은 장송의례의 도구로 인정받지 못하
였다.
고조선에서
中原의 민영 상인과 교류(매매나 교환 등)를 통해 철제 농공구가 유입되면
서, 철제 농공구는 무덤에 부장되기 시작하지만,
中原의 철제 농공구에 대한 관념은 유입
되지 않는다. 즉, 철제 농공구에 대한 관념이 변화하였다. 사실 이러한 관념은 고조선에서
본래 존재하던 관념이다. 철제 농공구가 유입되기 이전에는 석제와 청동제 농공구가 존재
하였고, 당시 석·동제 공구는 무덤 부장품으로 사용되는 기종이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입
장에서 철제 농공구는 기존의 무덤 부장품에 속하는 기종이며, 새로운 방식 혹은 보다 더
단단하고 날카롭게 제작된 상급품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관념은 추후 한반도로 유입되며, 한반도 역시 기존에 석·동제 공구를 부장품으로
사용하는 관념과 결합하여 철제 농공구를 무덤에 부장하게 되었다고 판단한다. 또한, 그
배경에는 고위직이 장인과 겸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실제로 중국 동북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나 인접한 옥황묘문화에서는 최고위 무덤에서도 공구가 부장된다(
金東一
2018). 즉,
中原과 달리,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에서는 고위층 무덤의 피장자가 장인의 기
술을 보유하였고, 본인이 사용한 공구를 무덤에 부장하는 관념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철제
농공구도 무덤에 부장하였다고 추정한다.
다음으로 묘지 형성과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호리유적이 조성되는 시점에는
이미 석·동제 농공구가 대부분 사라지고, 주로 철제 농공구가 출토된다. 석ㆍ동제 농공구
가 대부분 사라진다는 점을 고려할때, 철제 농공구는 단순 무덤 부장품에서 나아가 실용
구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다호리유적은 이러한 철제 농공구가 대량으로 확인되고,
나아가 철제 농공구 부장 무덤이 다수 확인되는 묘지이다. 이는 묘지 내 피장자 다수가 철
제 농공구를 보유하였다는 의미이다.
물론, 다호리유적의 피장자가 농업을 직접 행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구의 경우, 동
아시아의 유목문화와 중국 동북지역 등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지
속적으로 부장된다. 반면, 농구의 경우는 고위 무덤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고, 주로 생활유
구에서 발견된다. 즉, 철제 농구는 철제 공구가 유입되면서 새롭게 무덤 부장품으로 채택
된 경우이다.
이 시기 무덤의 피장자가 소수의 혜택 받는 존재라는 상징성과 다양한 철기가 부장된다
는 점을 고려할 수 있다. 특히, 다양한 철기가 부장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부장품에는 무기
와 공구, 농구가 모두 출토되는데, 한 명이 농업을 비롯하여 여러 직업을 겸직하기 쉽지 않
다. 그러므로 농구 부장은 농구에 대한 관리 혹은 소유적 성격이 강하다고 추론한다.
이상으로 살펴본 다호리유적은 외래계 철제 농공구가 다수 확인되지만,
中原의 관념을
27
김 동 일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따르지 않고, 고조선 혹은 한반도의 자체적인 관념에 따라 무덤을 조성한다. 이는 동아시
아에서
中原과는 대비되는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호리유적의 피장자들은
적어도 철제 농공구에 한하여 철제 농공구를 주도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자체적으로 발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Ⅳ. 맺음말
이상으로 다호리유적의 철제 농공구를 검토하였다. 우선 다호리유적의 시간성을 검토한
후, 철제 농공구를 정리하였고, 그 조형을 검토하였다. 이후 철제 농공구의 유통 방식과 관
념의 주체성을 통해
中原의 철제 농공구와 관념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민영과의
교류를 통해 주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철제 농공구는 고조선 및 한반도 내의
관념 속에서 기존의 부장품을 대체하였을 뿐,
中原의 방식이나 관념을 따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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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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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 농공구 도면은 지면상 생략하였으나, 추후 보완하여 제출할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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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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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금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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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에 대한 토론문_이 동 관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
」에 대한 토론문
이 동 관
국립경주박물관
발표자는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축적해오셨으며 특히 옥
황묘문화 단계의 동북지방과 한반도 남부지방의 교류 양상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져 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이번 발표에서는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철제 농공구를 분석하고, 이를 통하여 철
제 농공구의 조형 문제, 제작과 유통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전국시대 중국 동북지방
燕
의 철제농공구와의 관련성을 검토하면서 낙랑, 고조선과의 상관성 및 중원의 관념의 적용
여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각에서의 접근이라는 생각이 드는 반면 이러한 연구 방법론
이 조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다호리유적의 시ㆍ공간적 위치는 일반적으로 영남지역의 원삼국문화의 성립, 조금 더
나아가서는 변ㆍ진한 문화의 성립과 전개라는 큰 틀 안에서 설정되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
동북지방 또는 고조선, 낙랑과의 관련성 등을 설명해왔다. 철제 농공구라는 영역으로 한
정하자면 이러한 경향을 더욱 짙어진다. 이에 비하여 본 발표에서는 다호리라는 단위 유
적을 통하여 조형이나 제작, 유통 등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발표문에서 말하
는 민영 교류나 중원의 관념 등을 보다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변한사회의 성층화
구조나 주변 유적과의 관계 등을 선명히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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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이러한 관점에서 발표 내용에 대하여 간단하게 추가 질의를 드리는 것으로 토론에 갈음
하고자 한다.
1. 다호리 출토 철제농공구의 변천에 대하여
발표문의 시간성에 대한 질의이다. 각 단계의 기계적 나열보다는 다호리 철제 농공구의
변천에서 유의미한 속성이나 형식(
形式)의 등장 유무 등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
를 들어 다호리 132호에서 출토되는 철착, 철사, 철검 등의 유물들은 다른 유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오히려 경북지역의 대구 월성동, 팔달동에서 많이 보이는 소위 ‘월
성동유형’의 것들인데 그렇게 본다면 Ⅰ단계를 세분하는 것이 오히려 초기철기시대와 원
삼국시대의 특징을 보다 선명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Ⅰ~Ⅲ의 각 단계 시간폭도 일정
해 보이지는 않는데, 혹시 철제 농공구에서 나타나는 단계 설정의 획기가 있는가?
- (단조철부) 평양 상리유적에서 출토된 일괄 유물 중 유견식 단조철부가 없다는 것에 대
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단조철부 2점 중 1점은 어깨가 뚜렷한 형식이다). 만약 서북한지
역에 이러한 철부가 이미 병존한다고 한다면, 현 시점에 다호리유적의 단조철부를 무견식
과 유견식으로 분류하는 것이 과연 유효한지 의문이다. 발표문의 도면상에서도 일견 무견
식과 유견식의 구분이 모호한 것들이 눈에 띤다. 동아시아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오히
려 유견식 단조철부의 계보에 대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 실용성이 강한 철제 농공구의 특성상 개별 유물이 시간적 변화에 민감하지 않는 경우
가 많다. 따라서 개별 유물의 변천양상을 귀납적으로 제시하는 것보다는 전체 철제 농공
구 조합상에서 특이점을 추출하는 것이 더욱 유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쇠스랑의 등장시
기, 철착의 소멸시기 등이다. 이러한 다호리 전체 철제농공구 조합에서 관찰되는 특징적
인 획기는 없는가?
- “경우에 따라 이른 형식이 늦은 단계까지 존속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문화의 속성이
단절적이지 않고, 다차원적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는 결론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추가
적인 설명을 부탁드린다.
2.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동아시아 속의 다호리유적
발표문에서 검토한 철제 농공구의 조형 문제나 제작과 유통 등의 내용에 대하여 깊이 있
게 토론을 진행하기에는 토론자의 공부와 능력이 부족하다. 그리고 판상철부의 조형 문제
등 일부는 공감하는 부분도 있다. 다만, 본 발표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중원지역 또는 동아
시아적 관점에서 다호리유적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부분
33
토론문
「철제 농공구를 통해 본 다호리유적」에 대한 토론문_이 동 관
들이 많이 생략되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먼저 다호리 유적의 철제 농공구들이 발표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중원, 동북지방,
또는 서북한지역과 조형을 직접 비교할 수 있는 것들인가에 대한 검토가 선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미세한 관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영남지역 철기문화의 성립과 관련해서는
경북지역에 대구 월성동, 팔달동이나 경주 하구리, 북토리 등 시간적으로 앞서는 유형들
이 존재하며 이에 대해서 일부 연구자(박진일 2020)는 서남부지역의 세죽리-연화보유형
에 계보를 두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결국 서남부지역에서 나타나는 초기철기문화와 영남지역 철기문화의 성립과의 관계, 변
진한의 성립과정 속에서 다호리 유적의 위치, 나아가 발표자가 이야기하는 최초 중원의
철제 농공구와 관념들이 민영 상인을 통해서 다호리유적에 이입되기까지의 과정 및 유통
네트워크에 대한 추가적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영남지역 철기 문화 성립 후 기존
철기 문화의 선진지였던 서남부지역이 급격히 쇠퇴하는 현상에 대하여 생각하시는 바가
있다면 함께 알려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호리 유적에서 외래계 철제 농공구가 다수 확인된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지 궁금하다.
주제발표
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
김 새 봄 (영남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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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새 봄
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
Ⅰ. 머리말
창원 다호리 유적은 경남 창원시 동읍 다호리 232번지 일대에 해당하며, 다호리 마을 뒤
쪽에 자리잡은 해발 약 50m 정도의 구릉에서 부터 해발 약 10m인 얕은 계단식 논밭에 이
르기까지 여러 시기에 걸쳐 다수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유적의 동북쪽에는 동판저수
지, 북쪽 약 1km 지점에는 주남저수지가 있으며, 그 주변은 넓은 평야지대다. 이 저수지들
과 평야는 북쪽으로 약 10km에 위치한 낙동강에 제방을 쌓기 전까지 대부분 갈대 등이 자
라는 강변습지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수상교통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
다.
이곳에서 원삼국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지배집단의 목관묘가 집단적으로 조영된다. 특
히나 다호리 1호묘는 부장유물의 풍부함과 통나무관의 실체 확인, 철제농기구와 칠기의
사용, 새로운 부장유물방법이 요갱의 확인, 한 문물의 수용 등 중요한 고고학적 사실을 전
해주고 있다. 이러한 부장 양상으로 볼 때 다호리 1호묘는 당대 낙동강 이서지역 최고 위
계의 족장묘이며, 국읍에 상당하는 사회조직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조직은 곧 변한(
弁韓)의 형성으로 여겨진다.
Ⅰ. 머리말
Ⅱ. 다호리 유적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
종류와 변천
Ⅲ.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등장과 진·변한
Ⅳ. 맺음말
목 차
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
김 새 봄
영남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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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변한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다호리 유적에서는 다수의 철기가 출토되어 본격적으로 철
기를 사용하는 단계로 진입하였음을 알려준다. 전통적인 동검과 동모가 포함되지만 각각
2점, 1점씩 상징적으로 부장될 뿐 이전에는 부장된 적이 없었던 철제농기구와 철제무기가
다량으로 부장되었다. 특히 다호리 1호묘 요갱의 죽협에서는 2매 1조로 포개어져 끈으로
묶여있는 제형의 주조철부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동북아 다른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
는 다호리 유적의 특징적인 현상이다. 이는 주조철부를 원료철로써 재사용할 수 있게 만
든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다호리 유적에서는 철기사용 뿐만 아니라 철기제작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판단된
다. 풍부한 철광석과 발전된 제철기술로 다양한 철기를 제작하였으며, 잉여생산된 철을
매개로 주변국가와 교역을 하면서 고대국가로 성장해 나갔을 것이다. 특히 다호리 64호묘
출토 철광석과 단야구인 17호묘 출토 쇠망치는 철의 제작이 이루어졌음을 뒷받침하고 있
다.
이처럼 다호리 유적에서 발견된 풍부한 철기문화 중, 본 발표에서는 특히 고대국가 형성
의 필수 요소인 전쟁에 쓰인 무기와 집단의 상징성을 내포한 이형철기를 통해 다호리유적
에서 철제무기 및 이형철기의 등장배경과 원삼국시대 개시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다호리 유적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 검토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출현과 전개는 영남지역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따라서 영남지역 철기문화의 전개양상을 염두에 두고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철기에 대해 살펴보면, 다호리 유적에서 철기의 출현시기는 점토대토기단계이며, 이후 전
기 와질토기단계까지 유지된다. 그리고 최전성기는 다호리 1호 단계인 원삼국 전기전반인
것으로 확인된다. 그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철검: 평균길이 35㎝내외, 경부길이 6㎝정도의 비교적 짧은 단검(
短劍)만이 출토된다.
이 철단검은 세형동검에 착안하여 제작된 것으로 검신의 형태가 유사하고 검초 및 그 장
식, 병부와 검파두식 등의 청동 검부속구가 세형동검과 매우 같다1). 그러므로 그 기원을
1) 임영희, 2011, 「嶺南地域 原三國期 鐵劍·環頭刀의 地域別 展開過程」, 『嶺南考古學』59, 영남
고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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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새 봄
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
그림 1. 다호리 유적의 칠초철검과 칠초동검 비교
(1. 92호, 2. 69호, 3. 149호, 4·5. 140호, 6. 1호. 단, 6번은 칠초동검)
그림 2. 다호리 유적의 철단검
(1. 37호, 2. 48호, 3. 51호, 4. 53호, 5. 104호, 6. 124호, 7. 1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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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세형동검문화의 주도세력인 위만조선에 두기도 한다2).
철모: ‘직기형철모’가 유행한
다. 이것은 다시 2가지 형식으
로 세분되는데, 하나는 평균길
이가 20㎝내외(
短棒)이고 다른
하나는 평균길이가 40㎝내외
(
長棒)인 것이다. 길이가 다른
것 이외에는 그 형태가 크게 다
르지 않은데, 공부의 형태는 직
기형이며 신부에서 관부까지 거
의 직선적으로 내려오다가 완만
하게 축약되어 공부와 이어지는
형태이다. 그리고 신부와 공부
의 길이 비는 거의 1:1이다.
한편 다호리 53호묘 등에서는
변칙적으로 ‘이단관식철모’가
각각 1점씩 부장되었다. 이단관
2) 이청규, 2007, 「石劍, 銅劍, 그리고 鐵劍」, 『石心鄭永和敎授 停年退任記念 天馬考古學論叢』,
석심정영화교수 정년퇴임논총 간행위원회.
그림 3. 다호리 유적의 장봉철모
(1~4. 1호, 5. 5호, 6. 53호)
그림 4. 다호리 유적의 단봉철모
(1. 5호, 2. 18호, 3. 23호, 4. 25호, 5. 32호, 6. 48호, 7·8 69호, 9. 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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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
식철모란 신부와 공부사이의 관부가 2단을 이루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철모이다. 이것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만 유행하는 유일한 형식이며, 독자적 철기 생산의 증거 중 하나이
다. 대체로 3기인 목관묘 늦은단계부터 4기인 목곽묘 이른단계까지 유행하는 철모로 알려
져 있으나, 전기전반경인 다호리 53호묘와 조양동 11호묘에서 출토되는 것은 주목되는 점
이다.
철과: 한국식동과에 연원이 있는 것3)으로
알려져 있다. 즉 기존의 청동제 무기가 철제로
전용(
轉用)된 것이다. 단조제품이며, 봉부와
기부까지 예리한 날이 형성되어 있다. 신부의
단면은 볼록렌즈형이며, 경부의 단면은 장방
형이다. 허리부분의 좌우 축약도가 약간 차이
를 보인다. 자루 착장을 위한 2개의 구멍이 대
칭적으로 뚫려 있다.
철촉: 무경식 철촉이 대세이
다. 이것은 경부가 없는 것을 가
장 큰 특징으로 하며, 이 단계의
것은 대체로 전장이 짧고 폭이
넓다. 서북한 지역 등 다른 지역
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의 철촉이며, 청동기시대
청동촉의 철기화로 판단된다.
따라서 영남지역의 독자적인 철
기 제작을 알려주는 증거 중 하
나로 손꼽힌다. 이것은 철판을
잘라 만드는 매우 간단한 제작
공정이기 때문에, 원삼국 전기에 출현하여 삼국시대까지 상당기간동안 한반도 남부지역
에서 널리 사용되는 것4)으로 보인다.
3) 권동운, 2017, 「한일 양 지역 출토 철과 연구」, 영남대학교석사학위논문.
4) 손명조, 2012, 「弁·辰韓 鐵器의 初現과 展開」, 『韓國 古代 鐵器文化 硏究』, 진인진.
그림 5 다호리 유적의 철과
(1. 1호, 2. 125호, 3. 74호)
그림 6. 다호리 유적의 철촉(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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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닻형철기: 사용용도가 아직 불명확하나, 배를 한 곳에 멈춰있게 하는 ‘닻’의 모양과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철기이다. 대체로 하단은 톱니모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부 양측에
궐수장식이 베풀어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모두 확인된다.
궐수장식 철기: 닻형철기 외에도 다호리유적에서는 철기에 다양한 궐수장식을 베푼사
례가 확인된다. 19호묘에서는 재갈멈치의 신부 가장자이에 각각 4개씩 궐수장식을 베풀
었으며, 또한 동무덤에서 사용용도를 알 수 없는 유자이기와 같은 형태의 궐수장식이 베
풀어진 철기가 출토되었다. 20호묘와 104호묘에서도 역시 재갈멈치 가장자리에 궐수장식
여러 개를 베풀었다.
그림 7. 다호리 유적의 닻형철기(1. 1호, 2·3. 19호, 4·5. 74호)
그림 8. 다호리 유적의 궐수장식 철기(1. 1호, 2·3·5. 19호, 4. 20호, 6. 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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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새 봄
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
Ⅲ.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등장과 진·변한
다호리 유적의 철제무기와 이형철기를 검토한 결과, 점토대토기단계의 경우 아주 극소
수에 불과하지만 전기와질토기단계에 진입하면서 그 수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것
은 이성주의 원삼국시대 토기 편년안5)으로 볼 때, 다호리 1호묘 단계에 해당하는 대략
1-3~4단계에 해당하며, 그 이후인 1-5~7단계까지의 철기 수량도 아주 극소수이다. 따라
서 다호리 유적은 다호리 1호묘 단계 즉 원삼국시대 전기전반이 최전성기였음을 알 수 있
다. 다만 다호리 유적에서 원삼국 전기전반에 갑작스럽게 돌출적으로 철기가 등장한 것은
아니고, 당시 영남지역의 철기문화 양상 속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원삼국 전기전반에 나타난 다호리 유적의 철제무기와 이형철기는 이전시기 영남지역에
서 출현한 주요기종의 대부분을 계승하고 있다. 철단검, 철모, 철과 등의 무기류는 이미 초
기철기시대 영남지역의 주요 무기로써 등장해 있었던 것이다.
철단검은 대구 팔달동이나 월성동, 경산 임당동 등지의 초기철기시대 목관묘에서 이미
5) 이성주, 1999,
「변·진한지역 분묘 출토 1~4세기 토기의 편년」, 『영남고고학』24, 영남고고학회.
도면 9. 이성주의 원삼국기 토기편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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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등장한 평균길이 35cm내외, 경부길이 6cm정도의 비교적 짧은 단검이, 특기할 만한 형태
적인 변화없이 다호리 유적에서 다량 출토되었다. 철모 또한 초기철기시대 영남지역에서
이미 출현한 평균길이가 20cm내외(
短棒)와 40cm내외(長棒)의 단봉·장봉의 직기형철모
가 유행한다. 그리고 철과는 초기철기시대로 편년되는 경주 조양동 5호묘에서 1점이 기
출토된 이래, 동일한 형태의 것이 원삼국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다호리 l호묘와 74호묘에
서도 출토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원삼국시대 전기인 다호리 유적에서 나타나는 대부분
의 철제무기들은 이미 초기철기시대에 형성된 기종을 계승한 것을 의미한다.
다호리 유적에서는 초기철기시대 철제무기를 계승한 철기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형식의 철기가 등장하고 지속적으로 보급되는 것 또한 확인된다. 특히 무경
식철촉과 이단관식철모, 닻형철기를 비롯한 궐수장식의 철기들이다. 이들은 모두 이전시
기의 초기철기시대에는 없던 철기이며, 동북아시아의 다른지역에서도 아직까지 그 유래
를 찾을 수 없다. 즉 원삼국시대 전기전반에 영남지역에서 돌연 출현한 철기들인 것이다.
대체로 목관묘 늦은시기나 목곽묘 이른시기에 출현하는 것으로써 영남지역의 독자적
철기생산의 증거 중 하나로 인식되어 온 이단관식철모가 이보다 빠른 시기의 다호리 53호
묘에서 출토된 점, 청동기시대 마제석촉의 철기화로 판단되며 역시 영남지역의 독자적인
철기 제작을 알려주는 증거 중 하나인 무경식철촉의 출현, 그리고 닻형철기를 비롯한 궐
수장식이 베풀어진 이형철기의 등장은 원삼국 전기전반을 기점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출
토사례가 없는 철기가 다호리 유적에서 출현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지역사회
내에서 요구되는 철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 즉 철기화 과정이 진행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초기철기시대 철기기종의 계승과 철기화 현상의 진행 등은 다호리 유적에서만 일어나
는 것이 아니라, 범 영남지역에서 동일하게 확인되는 현상이다. 상기의 현상은 창원·밀양
등 낙동강하류역 뿐만 아니라, 상주·대구·경산·영천·경주·성주 등 낙동강중상류역을 중심
으로 성행한다. 이 시기가 되면 낙동강에 인접한 분지지역을 중심으로 국(
國)의 형성을 알
려주는 지표인 각 지역단위별 목관묘(
木棺墓) 군집 현상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목관묘에
서 다종다양한 철기들이 다량으로 출토되는 것이다. 이러한 범 영남지역의 현상과 창원
다호리 유적은 궤를 같이한다.
고대는 유통망을 형성하는데 오늘날처럼 다양한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과거
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연지형의 제약성이었다. 영남의 지형은 소백산맥과 태
백산맥으로 둘러싸여 하나의 거대한 분지를 이루며, 태백산맥을 분수계로 하여 낙동강 및
그 지류들이 흐르는 내륙지역과 동쪽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해안지역으로 내
륙은 산맥이 발달하여 크고 작은 분지가 많다. 따라서 지역 간의 교통은 낙동강 본류와 지
류를 따라 선상(
線上)으로 연결되거나 지구대를 통하여야 하였으며, 그렇지 않으면 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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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새 봄
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
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게가 상당한 철기를 각 지역으로 운반하기 위해서
는 높은 재를 넘는 것 보다 수로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6).
즉 원삼국 전기 영남의 각 지역은 낙동강을 따라 형성된 경로를 통해 상호간의 정보를
밀접하게 공유하였으며, 특히 철기의 유통과 그에 대한 정보가 각지로 확산하는데 용이하
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영남지역 간 긴밀한 정보공유되는 가운데, 창원 다호리 유
적이 포함된 것이다. 그리고 영남지역 상호간 긴밀한 정보공유는 ‘진·변한(
辰·弁韓)’이라
고 하는 공동체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진·변한 공동체라는 정체성이 확립은 ‘궐수장식’이 베풀어진 각종 이형철기들에서도 포
착된다. 궐수장식은 철기의 가장자리 일부를 오린 다음 말아서 제작하는 것으로, 기존에
는 기원후부터 나타난 후 삼국시대까지 성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원삼국시대 철
기 출토사례가 증가함에 따라 기원전의 시기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 사례로는
창원 다호리 20호묘를 비롯하여 울산 창평동 2호묘에는 재갈멈치의 양단에 ‘궐수장식’을
베풀었으며, 역시 같은 시기인 창원 다호리 1호묘와 19호묘 및 울산 장현리 50호묘에서는
2점의 닻형철기 모두 양단에 궐수장식을 베풀었다. 또한 경주 조양동 2호묘에서는 기형을
알 수 없는 궐수장식 3점이 출토되었다. 이들은 모두 경주 조양동 38호를 지표로 하는 와
질토기가 부장된 시기이다.
궐수장식이 부착된 철기는 대체로 실용성이 떨어지며, 때문에 대부분 의례에 사용되는
등의 ‘상징성’을 내포하는 것7)으
로 알려져 있다. 즉 철기에 궐수
장식을 부착하는 행위는 영남지
역 진·변한 고유의 정체성을 나
타내는 상징(
象徵)과도 같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성을 내포
한 철기가 이 시기부터 다호리
유적을 비롯하여 영남지역 각지
에서 출현하는 것은 진·변한 고
유의 정체성이 나타나기 시작하
였으며, 철기제작이 진·변한 사
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여 유통
6) 申東昭, 2008, 「嶺南地方 原三國時代 鐵斧와 鐵矛의 分布定型 硏究」, 慶北大學校文學碩士學
位論文.
7) 우병철·김민철, 2009, 「궐수형철기를 통해 본 진·변한 정치체의 상호작용 : 대등 정치체 상호작
용 모델의 적용」, 『한국상고사학보』65호, 한국상고사학회.
도면 4 Renfrew의 상호작용 모식화와 진변한사회의 대입
(우병철·김민철 2019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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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되었음을 나타내는 방증이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이미 기원전의 시기부터 철기문화(
鐵器文化)에서 진·변한 정체성
이 확립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원삼국시대로 진입하자마자
나타나게 된 ‘진·변한(
辰·弁韓)’이라고 하는 연맹체의 시작인 것이고, 이 시작에 창원 다호
리 유적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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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새 봄
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
Ⅳ. 맺음말
이상으로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창
원 다호리 유적에서는 초기철기시대부터 전기원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철기가 출토되긴
하지만, 대다수는 다호리 1호묘를 기점으로 하는 원삼국시대 전기전반경에 해당한다.
다호리 유적의 철제무기는 초기철기시대 이미 영남의 각 지역에 이입되었던 철단검·철
모·철과를 계승하면서도, 이단관식철모와 무경식철촉처럼 새로운 철제무기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이는 영남지역 이외의 외부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의 철기들이며, 이
러한 현상은 낙동강유역권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의 각 지역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다호리 유적은 낙동강을 매개로 영남의 각 지역과 철기에 대한
정보를 긴밀하게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것은 철기의 제작과 사용,
그리고 유통이 낙동강 유역을 따라 잘 정착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영남지역
상호간 긴밀한 철기 정보공유는 ‘진·변한(
辰·弁韓)’이라고 하는 공동체가 형성되는 요인으
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철기에 궐수장식을 베푼 이형철기들이 등장한다. 역시 초기철기시대
에는 없으며 외부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자적인 것으로써, 원삼국시대에 진입하면서 다호
리 1호묘를 비롯한 영남지역 각지에서 출토된다. 이 철기들은 대체로 실용성이 떨어지며,
때문에 대부분 의례에 사용되는 등의 ‘상징성’을 내포하는 것이며, 즉 진·변한 고유의 정체
성을 나타내는 상징(
象徵)과도 같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이 다호리 유적을 비롯한 전
영남지역에서 원삼국시대에 진입하자마자 나타나며, 이때부터 ‘진·변한(
辰·弁韓)’이라고
하는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창원 다호리 유적은 영남지역에 형성된 ‘진·변한(
辰·弁韓)’이라고 하는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써 낙동강유역에 위치한 영남의 각 지역과의 긴밀한 정보공유를 통해 철기
문화가 번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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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권동운, 2017, 「한일 양 지역 출토 철과 연구」, 영남대학교석사학위논문.
손명조, 2012, 「弁·辰韓 鐵器의 初現과 展開」, 『韓國 古代 鐵器文化 硏究』, 진인진.
申東昭, 2008, 「嶺南地方 原三國時代 鐵斧와 鐵矛의 分布定型 硏究」, 慶北大學校文學
碩士學位論文.
우병철·김민철, 2009, 「궐수형철기를 통해 본 진·변한 정치체의 상호작용 : 대등 정치체
상호작용 모델의 적용」, 『한국상고사학보』65호, 한국상고사학회.
이성주, 1999, 「변·진한지역 분묘 출토 1~4세기 토기의 편년」, 『영남고고학』24, 영남고
고학회.
이청규, 2007, 「石劍, 銅劍, 그리고 鐵劍」, 『石心鄭永和敎授 停年退任記念 天馬考古學
論叢』, 석심정영화교수 정년퇴임논총 간행위원회.
임영희, 2011, 「嶺南地域 原三國期 鐵劍·環頭刀의 地域別 展開過程」, 『嶺南考古學』
59, 영남고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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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에 대한 토론문_김 훈 희
「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
」에 대한 토론문
김 훈 희
울산문화재연구원
창원 다호리유적의 중요성은 입지와 대외교류, 유구, 유물 등 여러 부분에 대해 다루어
져왔다. 이번 발표에서 다루는 다호리유적 목관묘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는 영남지역
목관묘단계의 철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특히 중요한 자료이다.
발표자는 다호리 유적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등장과 진·변한 철기문화의 시작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발표의 내용에 대
체로 동의하는 바이나 발표자의 부가적인 설명 또는 의견이 필요한 부분 그리고 토론자로
서 의문점이 드는 부분 등에 대해 질의하고자 한다.
1. 발표문에서 닻형철기의 사용용도를 불명확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북방지역의 청동괘강구에서 닻형동기로 다시 닻형철기로의 변화는 시기적·형태적인 부
분 등에서 계기적인 흐름이 관찰된다. 영남지역에서 보이는 닻형철기를 대상으로 본다면
변화양상이 확인되고, 용도에 있어서도 고삐걸이로 보는 견해가 제시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 문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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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표문에서 닻형철기, 재갈멈치 등 궐수장식이 부착된 철기는 대체로 실용성이 떨어
지고, 진·변한 고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서술하고 있다.
닻형철기와 I자형 표비에서 궐수형 장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모두 확인되는데 궐수장
식의 유무를 통해 원래의 용도로 사용된 것과 아닌 것으로 구분 가능한지 발표자의 의견
을 듣고 싶다.
3. 발표문에서 원삼국 전기전반시기에는 초기철기시대 철기기종의 계승과 철기화 현상
의 진행 등 범 영남지역에서 동일하게 확인되는 현상이 확인되고, 이 시기가 되면 낙동강
에 인접한 분지지역을 중심으로 국(
國)의 형성을 알려주는 지표인 각 지역단위별 목관묘
(
木棺墓) 군집 현상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목관묘에서 다종다양한 철기들이 다량으로 출
토되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철기기종의 계승화와 청동기의 철기화를 영남지역 철기문화의 특징으로 볼 수 있겠지
만. 오히려 다호리 목관묘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철기의 복수부장과 의기화되는 현상이
이 시기의 영남지역 철기문화를 뚜렷하게 대별하는 특징이 아닌지 발표자의 의견을 듣고
싶다.
4. 발표문에서 철기의 유통과 그에 대한 정보가 영남각지로 확산하는 것, 상징성을 내포
도1 청동 괘강구의 변화(
林沄2007)
도2 닻형철기의 변화(고상혁·김훈희 2014)
51
토론문
「창원 다호리 출토 철제무기와 이형철기의 이입과 전개」에 대한 토론문_김 훈 희
한 철기가 이 시기부터 다호리 유적을 비롯하여 영남지역 각지에서 출현하는 것은 진·변
한 공동체라는 정체성이 확립되는 시작으로 보고 기원전의 시기부터 철기문화에서 진·변
한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진·변한 공동체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부분은 영남지역 전체인 진·변한을 아우르는 지역
을 말하는 것인지? 진한과 변한이 각각 정체성을 나타내어 구분이 된다는 것인지? 개별
소국 단위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는 것인지?에 대한 발표자의 부가적인 설명을 듣고 싶
다.
5. 발표문에서 다호리 1호묘 단계 즉 원삼국시대 전기전반이 최전성기였고, 다호리 1호
묘는 당대 낙동강 이서지역 최고 위계의 족장묘이며, 국읍에 상당하는 사회조직을 형성하
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곧 변한(
弁韓)의 형성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
발표자는 다호리 1호묘를 오늘 발표의 주제인 철제무기와 이형철기 부분에 있어서 어떠
한 면을 변한 형성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참고문헌
고상혁·김훈희, 2014, 「영남지역목관묘출토 닻형철기 연구」, 『영남고고학』68, 영남고
고학회.
林沄, 2007, 「青铜挂缰钩补说」, 『边疆考古研究』6, 科学出版社.
주제발표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김 효 정 (부산대학교)
55
김 효 정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Ⅰ. 머리말
창원 다호리 유적은 변한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1988년부터 2012년까지 11차에 걸쳐
조사되었다. 151기의 유구 중 23기의 유구에서 청동유물이 확인되었다. 청동유물이 확인
되는 유구는 모두 목관묘이며, 장축방향은 대부분 동-서로 영남지역의 목관묘의 일반적
인 특징을 가진다.
다호리 유적은 세형동검문화에 속하는 유적이다. 세형동검문화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확인되는 청동기문화로 세형동검, 다뉴세문경, 이형동기 등을 표지유물로 한다(이청규
1993). 세형동검문화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기원한 문화를 수용하여 형성된 한반도의 독
자적인 문화로 당시 한반도 남부 한인(
韓人)의 사상과 기호(嗜好)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
로 생각된다. 세형동검문화의 청동기는 주로 분묘에서 출토되며, 실용적 이기(
利器)보다
의기(
儀器)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한 무제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
한 뒤 설치된 한사군과 그 영향으로 점차 철기가 위세품으로 채택되면서 세형동검문화는
쇠퇴하였다. 이 쇠퇴기에 해당되는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는 철기가 위세품의 대세가 되어
가는 가운데 청동기가 여전히 확인된다.
Ⅰ. 머리말
Ⅱ. 세형동검문화와 청동기
Ⅲ. 다호리 유적의 청동기
Ⅳ. 세형동검문화의 쇠퇴
Ⅴ. 맺음말
목 차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김 효 정
부산대학교
56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본고에서는 다호리 유적이 세형동검문화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청동기를 통
해 고찰하고자 한다.
Ⅱ. 세형동검문화와 청동기
우선 세형동검문화와 청동기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단계 구분은
동검의 형식 변화에 의거한다. 그중 세형동검문화에 관한 연구는 세형동검이 출토되는 시
기에 한정해 동검과 공반된 유물 조합상을 근거로 단계 구분이 이루어진다. 동검의 공반
유물 가운데 시간성을 가장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은 동경으로, 동경에는 다뉴조문경
에서 다뉴세문경으로 변화하며 이후 다뉴경이 소멸하고 한경이 부장되는 흐름이 있다. 이
에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며, 유물의 조합상을 통해 시기를 구분하고 있다(이건무 2003;
조진선 2004;
宮里修 2010). 본고에서는 동경이 샤먼의 기본 무구(현용준 1986; 서길덕
2019)이기도 하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간적으로 형식 변화가 뚜렷하기 때문에 청동
기가 주로 의기로 사용된 세형동검문화에 있어서 이를 기준으로 시기를 구분하는 것이 적
합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Ⅰ기는 다뉴조문경, Ⅱ기는 다뉴세문경, Ⅲ기는 한경 및 방
제경을 기준으로 하여 시기를 구분하였다. 한경 및 방제경이 확인되는 Ⅲ기는 철기문화에
진입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세형동검문화의 쇠퇴기이기도 하므로 세형동검문화의 범주
에 포함시켰다. 목곽묘 단계에는 이미 청동기 부장이 소멸한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Ⅲ기의
하한은 목관묘 단계까지로 설정했다. 즉, 창원 다호리 유적은 Ⅲ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좀 더 뚜렷한 시기구분을 위해 세형동검문화의 변화상이 두드러지는 한반도 중서부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1)에서 청동의기가 출토된 분묘 유적을 전수 조사한 것에 기초했다(김
효정 2021). 출토 위치가 명확하지 않은 채집품 등은 대상에서 제외하였으며2), 유구의 정
황이 불충분하여도 발견된 위치가 명확하고, 조합 양상이 보고된 사례는 포함하였다. 대
상이 된 청동기는 형태나 기능에 따라 무기류, 거울류, 방울류, 공구류, 이형동기류로 분류
했다.
<표 1>은 각 시기에 해당되는 분묘 유적에서 종류별로 청동기가 얼마나 출토되었는지
1) 본고에서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해당된다. 각 시기의 중심지가 되는 지역이다.
2) 주요 대상에서 제외되나, 맥락상 필요한 경우 언급한다.
57
김 효 정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를 표로 나타낸 것이다3). 각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수에 각 유물이 존재하는 유적수를 나
눈 값을 비율로 나타낸 것이다. 예를 들어, 동검의 경우 총 14개 유적 중 11개 유적에서 동
검이 확인되었으므로 79%로 표시된 것이다. <표 2>는 각 시기에 해당되는 분묘 유적에서
청동기 외의 유물이 종류별로 얼마나 출토되었는지를 표로 나타낸 것으로, 산출 방법은 <
표 1>과 동일하다.
1. Ⅰ기
Ⅰ기에 해당되는 청동기 출토 분묘 유적은 14개소에서 확인된다. 주로 한반도 중서부지
역에 집중되어 발견되는 경향을 보인다. 소군집을 이루는 익산 오룡리 5지점과 순천 평중
리 평지 지석묘를 제외하면 모두 단독묘라는 특징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대전 괴
정동, 예산 동서리, 아산 남성리, 군산 선제리를 들 수 있다.
세형동검은 79%의 유적에서 확인되나, 동과와 동모 같은 다른 무기류는 확인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경은 성문이나 태양문이 경배면에 시문되는 다뉴조문경이 50%로 확
인된다. 그리고 주목할만한 점이 Ⅰ기에 한정되어 각종 이형동기가 발견되는 것이다. 이
형동기는 검파형동기, 원개형동기, 나팔형동기, 방패형동기 등이 있으며, 독특한 형태로
용도를 명확하게 추정하기 어려운 것이 특징이다. 방울류에 해당되는 동탁은 대전 괴정동
에서만 2점이 확인되었으며, 동령은 확인되지 않는다. 공구류는 동사, 동착, 동부 모두 확
인되며, 동사의 비율이 14%로 가장 적다.
2. Ⅱ기
Ⅱ기에 해당되는 청동기 출토 분묘 유적은 47개소에서 확인된다. Ⅰ기의 권역뿐만 아
니라 전라도 전역 및 경상도 일부까지 세형동검문화가 확산되었다. 중서부지역, 서남부지
역, 특히 완주·전주·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만경강 유역이 중심지역이며 Ⅰ기와 달리 군집
묘가 새로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부여 합송리, 함평 초포리, 완주 갈동, 완주
신풍 등이 있다.
세형동검은 Ⅱ기에도 여전히 79%의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동검보다는 부장 비율이
3) 동일한 방법으로 유구를 기준 삼아 분석하였으나 결과가 대동소이하여 제외하였다. 이는 Ⅱ기
와 Ⅲ기의 분석결과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아 유적을 기준으로 한 분석결과만을 제시하였다.
58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낮으나 Ⅰ기와 달리 동과와 동모가 30%와 19%의 유적에서 부장되기 시작한다. 동경은
조문경과 세문경이 공반된 부여 구봉리, 조문경과 세문경이 다른 유구에서 각각 확인된
완주 덕동 유적을 제외하면4), 모두 다뉴세문경으로 변화하여 Ⅰ기보다 주조기술이 발전
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이형동기는 부여 합송리에서 확인된 원개형동기를 제외하고 확인
되지 않으며, 대신 Ⅱ기를 대표하는 의기로서 간두령, 쌍두령, 팔주령 등 한반도 독자적인
동령류가 등장한다. 이들은 대부분 짝수로 부장되는 특징이 있다. 이는 Ⅱ기에 초현하여
Ⅱ기에서 Ⅲ기의 전환기까지 확인되며, 중심지인 서남부지역에서는 이른 형식이, 경북지
역에서 늦은 형식이 확인된다. 공구류는 부장 빈도가 전체적으로 늘었고, 그 중에서는 Ⅰ
기에 14%만 차지하고 있었던 동사의 부장 빈도가 47%까지 늘어난다. 특히 이러한 조합
양상은 군집묘보다 단독묘일 경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편 Ⅱ기에 들어서는 철기가 새로
이 등장하며, 전국계 주조철부와 철착, 철사, 철겸 등 주로 농공구류가 부장된다.
Ⅰ기와 가장 큰 차이점은 기원지를 다른 지역에 두고 있지 않은, 한반도의 독자적인 의
기가 부장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동경은 주조기술의 발전으로 경배면의 문양이 극
세화되어 다뉴세문경이 등장하였으며, 이는 양각된 선문으로 토범에 문양을 새기고 주물
을 부어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반면 Ⅱ기의 대표적인 유물인 간두령의 문양은 동경
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안소망 2017). 이처럼 Ⅱ기에는 청동
기를 제작함에 있어 다양한 방법이 도입된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Ⅱ기의 유적이 집
중되는 만경강 유역에서는 청동기 주조의 발전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많이 확인되고 있
다(강인욱 2016; 한수영 2017). 즉, Ⅱ기에는 청동 주조 기술의 발달로 인해 주형의 재질
이나 문양 시문법이 다양화되었으며, 독자적인 청동기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 Ⅲ기
Ⅲ기에 해당되는 청동기 출토 분묘 유적은 28개소에서 확인되었다. Ⅰ·Ⅱ기와 달리 중
심지역이 동남부지역으로 이동한다. 분묘는 대부분 군집을 이루며, 단독묘 조영은 급격히
감소한다. 창원 다호리 유적이 이에 해당되며, 이외에도 대표적인 유적으로 경산 양지리,
경주 조양동, 경주 사라리 130호 등을 들 수 있다.
Ⅲ기에는 이전 시기와 달리 부장품의 양과 다양성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세
4) 이들 조문경은 조문경 가운데서도 세문한 편으로, 늦은 시기에 해당된다. Ⅰ기에서 Ⅱ기로의
전환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9
김 효 정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형동검문화의 청동기 조합은 축소되어, Ⅱ기를 대표하는 다뉴세문경과 동령류, 공구류는
확인되지 않고 무기류만이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세형동검은 Ⅲ기에도 변함없이 70% 이
상의 분묘 유적에서 출토됨을 알 수 있다. 주로 칠초동검으로 부장되며, 형식도 결입부가
점차 직선화되며 없어지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부장량도 대부분 1점 정도에 그친
다. 동과와 동모는 유문화(
有文化)·장식화(裝飾化)와 동시에 대형화된다. 앞시기와 비교
해 가장 큰 차이점은 다뉴경이 아닌 한경(
漢鏡)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반리문경(蟠螭紋
鏡)이 확인된 익산 평장리를 제외하면 전부 Ⅲ기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동남부지역에서 확
인된다. 진한지역은 하나의 분묘에서 여러 개의 동경이 출토되는 반면 변한지역은 분묘,
주거지, 패총 등 다양한 유구에서 동경이 출토된다. 그리고 하나의 유구에서 1개의 동경이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된 한경의 연대는 중국 본토나 한사군의
것과 비교해볼 때 거의 동시기의 것으로 보인다(이양수 2009). 이외에도 앞 시기에 그 존
재가 미미하였던 대금구, 동포 등 장신구류가 다수 부장된다. 한편 농공구류가 주로 부장
되었던 철기의 경우, 무기류와 마구류가 부장되기 시작하고 부장량이 증가하여 분묘에서
의 비중이 청동기를 능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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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도 1> 세형동검문화의 유적 분포도
<표 1> 세형동검문화의 청동기 출토 빈도 (출토 유적/전체 유적)
<표 2> 세형동검문화의 청동기 외 유물 출토 빈도 (출토 유적/전체 유적)
무기류
거울류
방울류
공구류
이형동기류
동검
동과
동모
동경
동탁
동령
동사
동착
동부
이형동기
Ⅰ기
79%
50%
7%
14%
29%
29%
29%
Ⅱ기
79%
30%
19%
49%
4%
13%
47%
30%
40%
2%
Ⅲ기
75%
25%
25%
61%
4%
토기
석기
철기
옥류
기타
철제공구
철제무기
판상철부
철제마구
(칠기)
Ⅰ기
64%
29%
36%
Ⅱ기
62%
26%
21%
2%
4%
23%
Ⅲ기
79%
14%
71%
46%
29%
21%
32%
18%
61
김 효 정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도 2> 세형동검문화의 각 시기별 청동기 조합
대전 괴정동(1,4,5,8)·아산 남성리(2,6,7)·예산 동서리(3)
전주 여의동(9,10)·함평 초포리(11)·창원 다호리 1호묘(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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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Ⅲ. 다호리 유적의 청동기
다호리 유적에서 청동기는 23기의 무덤에서 51점이 확인되었다<표 3>. 이들은 세형동
검문화의 영향을 받은 청동기와 한(낙랑)의 영향을 받은 청동기로 크게 나뉘어진다.
1. 세형동검문화의 청동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호리 유적은 세형동검문화가 쇠퇴하는 과정 중의 유적이다. 세
형동검문화의 영향이 남아있는 청동기는 동검, 동모가 대표적으로 모두 11점이 출토되었
다. 6호묘와 63호묘에서 출토된 동검을 제외하면 칠초동검에 해당되며 검초금구를 동반
한 사례가 많다. 칠초동검은 서북한 지역에서도 출토되나 영남지역의 것이 양이나 질적
인 면에서 뛰어나 낙랑으로부터의 수입품이라고 단정짓기 어렵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영
남지역에서 낙랑으로 수출했을 가능성에 대해 분석한 바 있어 주목된다(이제현·장용준
2019).
다호리에서 출토된 검파두식은 모두 청동제로 평형(
平形) 7점, 침형(沈形) 5점, 버섯형
(
茸形) 1점이 확인되었으며, 대부분이 원형 돌기를 가지고 있다. 동검의 검파두식은 대부
<도 3> 창원 다호리의 세형동검과 공반된 청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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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효 정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분 평형인 반면 철검의 경우는 대부분 침형인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동모는 모두 2점이 확인되었으며 모두 공부 측면에 환이(
環耳)가 부착되어있다. 공부
측면에 고정공이 있던 Ⅱ기의 동모와는 달리 장식화, 대형화를 거치는 모습을 엿볼 수 있
다. 특히 1호묘에서 출토된 중세형동모가 공부에서 모신(
矛身) 중앙부분까지 주물사로 채
워져 있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장대를 공부에 끼워서 사용하는 모의 특성상 주물사
를 제거하지 않았음은 실용적인 무기로써 사용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동탁은 2점이 확인되었다. 1호묘에서 확인된 것은 각형마탁의 일종으로 양각된 문양이
시문되어 있으며, 61호묘에서 확인된 것은 뉴가 없는 이형동탁으로 보인다. 이는 Ⅰ·Ⅱ기
의 대전 괴정동, 부여 합송리 등의 유적에서 확인되는 동탁에 비하면 크기가 작고, 문양이
추가되거나 뉴가 없는 등의 차이를 보인다. 이외에 새로이 등장한 청동기는 검초부속구,
심부금구, 청동환 등이 있다.
2. 외래계 청동기
한(
漢)의 청동기는 1호묘에서 출토된 성운문경(星雲文鏡)과 오수전, 119호묘에서 출토
된 소형의 가상귀부경(
家常貴富鏡)이 해당된다. 1호묘에서 출토된 성운문경은 대표적인
전한경으로, 주 문양대에는 등간격으로 4개의 뉴가 있고 그 사이에 작은 뉴를 곡선상으로
배치한 것이 성좌도형과 비슷하여 명명되었다. 뉴좌의 가장자리에 연호문이 돌아가고 뉴
는 꽃봉오리 형태를 띤다. 주문양대와 주연부는 거치문대를 돌려 구분하고, 주연부에 16
개의 연호문을 돌렸다. BC 1세기 전반 경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다호리 외에도 평양 정백
동 3호, 밀양 교동, 토성동 4호, 임당 E-58호 목관묘에서 발견되었다. 한편 가상귀부경은
이체자명대경의 일종이다. 이는 명문이 주문양을 이루며 내구의 문양과 명문내용, 글자체
등에 따라 다양한 명칭이 사용된다. 내구문양은 연호문과 원권, 명문 내용은 일광, 소명,
청백, 가상귀부 등으로 구분된다. 대체로 성운문경보다 늦고 박국경보다는 이른 시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다호리 외에도 경주 조양동 38호묘에서 출토된 바 있다. 오수전은 1호
묘에서 3점이 확인되었다. 천상횡문오수전(
穿上橫文五銖錢), 사각결문오수전(四角抉文
五銖錢), 무특징전(無特徵錢)으로 서로 종류가 다르다(이영훈·이양수 2007). 다호리의 사
례처럼 목관 안치 전 의례행위가 치러진 요갱에서 출토되거나, 목관 내부의 철검 주변에
서 출토되는 경산 임당 유적의 사례, 과초의 장식으로 사용된 경산 양지리 유적의 사례 등
은 오수전을 비롯한 중국의 화폐가 위신재의 역할을 하고 분묘 축조과정의 의례에 사용된
것임을 보여준다(권욱택 2014).
한편 앞서 언급한 1호묘에서 확인된 동모를 중세형동모의 늦은 형식(c류)으로 보아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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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계유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吉田広 2003; 井上主税 2008). 그러나 최신 연구에 따르
면 24호 출토와 같은 세형b동모를 계승해 1호 출토와 같은 중세형동모가 등장하였으며,
이는 동남부지역에 서남부지역의 제작기법이 유입되고 새로운 제작기법도 덧붙여져 고안
된 것으로 해석된 바 있다. 세형b동모와 중세형동모를 제작할 때 사용한 B1a·b형과 B1c형
의 내범5)의 출토 사례는 일본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이와 관련된 중세형동모의 제작기법
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어 중세형동모는 세형동모에 이어 한반도에서 발전한 청동기
로 보인다(허준양 2020).
5) B1형의 내범은 동모의 공부 안쪽으로 반타원형 홈 1개가 있는 것을 말한다.
<도 4> 창원 다호리의 외래계 청동기
65
김 효 정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Ⅳ. 세형동검문화의 쇠퇴 원인
세형동검은 한반도와 북부큐슈 일부에서만 발견되는 한반도 특유의 동검으로 한국식동
검이라고 불리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의 세형동검문화를 대표적하는 청동기
이다. 그러나 창원 다호리 유적이 형성된 Ⅲ기에는 철기가 대두하여, 세형동검문화가 쇠
퇴하는 시기로 1호묘와 같은 일부 분묘에서만 비교적 다수의 청동기가 출토되는 정도에
그친다. 다호리에서 확인된 청동기의 조합상에 있어 무기류는 이전의 시기와 다름없이 부
장되고 있으므로 청동제 무기가 가지는 의미가 Ⅲ기의 지배층에게도 유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세형동검문화에 있어 이 청동무기류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고찰하
고, 세형동검문화가 쇠퇴한 원인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1. 청동무기의 의미
먼저 고대 사회에서 의기로서 검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특별하여, 검의 의미에 관한 다
양한 연구와 민족지 사례가 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샤먼은 악령에 대항하는 투사들
이며, 아시아 샤머니즘에서 전투적인 요소(검, 창, 활, 흉갑 등)가 자주 확인되는 것은 샤먼
이 악령과 싸우도록 요구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였다(미르치아 엘리아데 1992). 현
대에도 여전히 우리나라에는 무당의 신칼6)이, 알타이 공화국에는 바실리 샤먼이 소지하
는 단검7) 등이 존재하여 의기로써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무기의 형태를 띤 의기를 주체로 치러진 의례는 마제석검을 사용한 단계부터 존
재하며, 마제석검의 부장, 검과 검파 암각화의 제작 등이 이에 해당된다. 검과 검파 암각
화에 대해서는 신상을 그린 것으로 해석하거나 자손번영과 풍요를 기원하며 성스러운 의
미를 부여함으로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연구가 다수 있다(송화섭 1993, 1994; 장명수
1996; 이상길 2000). 암각화와 무기의 매납 의례 등에 영향을 준 북방 유라시아지역 청동
기문화에는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 문화에서 널리 확인되는 검에 대한 숭배가 반영
되어 있다. 스키타이인은 각 지구(
地區)마다 매년 150기의 차마에 섶을 쌓아올리고 방형
6) 현대 한국의 무속에서는 신령의 몸체로 삼아 신당에 모실 때, 잡귀를 쫓아낼 때, 신에게 음식을
바칠 때, 신을 뜻을 알아볼 때, 제사음식을 위해 사냥할 때, 신의 영험력을 과시할 때, 신을 부
르고 보낼 때, 죽은 자를 위해 길이나 저승문을 열 때 등 사용된다. (양종승 2001)
7) 칼의 존재감으로 악령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 (국립민속박물관 2006)
66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제단을 크게 쌓은 다음, 그 정상에 낡은 철도 1점을 아레스신에게 바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8). 흉노는 ‘경로(
徑路)’라는 검을 땅에 꽂고 숭배하며 ‘경로사(徑路祠)’라는 제사를
거행했다9). 검에 대한 숭배는 죽은 전사들과 전투신(
戰鬪神) 및 남신(男神)에 대한 숭배
인 것이다(강인욱 2003).
또 일본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무기형청동기는 무력과 위엄을 숭배하며 악령이나 외부
의 적을 진압하고 방어하기 위한 청동기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며, 농경의례와 관련된다는
설, 항해와 관련된다는 설 등이 있다(
岩永省三 1997).
정리하면 한반도 주변 지역에서의 무기류의 청동의기는 무력을 상징하며, 남성의 메타
포이자 벽사적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한반도에서도 청동제 무기류는
주변 지역과 유사한 의미를 담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세형동검문화에서 철기문화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세형동검문화 Ⅲ기에 해당되는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는 거울류,
방울류, 공구류, 이형동기류의 청동의기가 모두 확인되지 않으며, 무기류만이 남아 세형동
검문화의 명맥을 유지한다. 거울류는 중원의 요소가 담긴 한경으로, 공구류는 철제로 바
뀌며 무기류도 철제로 대부분 교체된다. 그리고 새로 등장한 청동기는 검파두식, 심부금
구, 마형대구·호형대구 등 주로 의기가 아닌 장식구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창원 다
호리 세력을 비롯한 제세력은 기존의 세형동검문화의 청동의기 조합상을 대신해 철기의
다량 부장을 꾀했는가. 이러한 변화는 분묘 의례의 변화와도 직결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
다.
무기류를 제외한 Ⅰ·Ⅱ기의 청동의기는 크게 태양빛과 반사를 통해 신성성을 부여하는
의기, 소리를 통해 의례의 환경을 조성하고 강신 혹은 접신을 유도한 의기, 부장함으로서
기술과 생산을 상징하는 의기 등이 있다고 할 수 있다(김효정 2021). 빛과 소리를 통해 의
기의 역할을 한 다뉴경과 동령의 소멸은 Ⅲ기의 권력가들에게 빛과 소리와 같은 샤먼적
요소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으며, 권력가가 가진 무력과 위엄은 여전히 분묘를 만
8) 스키타이인의 검 숭배에 대한 기록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언급되고 있다.
9) 경로도에 대한 기록은 『漢書』 「匈奴列傳」의 應劭에 근거한다. 경로는 흉노의 寶刀(귀
한 칼)로 숭배의 대상인 동시에 전사들이 의식을 거행할 때에 사용하였다. (강인욱 2016)
‘昌, 猛與單于及大臣俱登匈奴諾水東山, 刑白馬, 單于以徑路刀金留犁撓酒, 以老上單于所破
月氏王頭為飲器者共飲血盟(창과 맹과 선우는 대신들과 함께 약수동산에 올라서 백마를 죽였
다. 선우는 술에 금가루를 타서 경로도로 섞은 후에 선우가 무찌른 월지왕의 두개골로 만든 술
잔에 따라 연장자부터 함께 마시게 하고 피로서 맹세했다.)’
67
김 효 정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듦에 있어 중요시되고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또 수장급 무덤의 주요 부장품이 청동기가 아닌 철기로 변화하며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
지는 특징은 이러한 위세품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압도적인 양적 증가가 발생하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반도 남부의 청동기는 의기(
儀器)의 성격을, 철기는 이기(利
器)의 성격을 띠고 있어, 청동기와 철기는 서로 다른 성격의 위세품이라 할 수 있다(이창
희 2018).
이창희에 의하면 세형동검문화기의 장송의례에서 부장 양상은 ‘착장용의기(청동기)의
질적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철기사회에 들어서면서 청동기 부장은 축
소되고 철기 부장이 보편화된다. 이때의 부장 양상은 ‘실용이기(철기)의 양적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이창희 2020).
이와 같은 금속기 부장의 변화에 대해서 필자는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의 관계를 통해 접
근하고자 한다. 세형동검문화의 청동의기는 샤먼의 독점적인 기물이었으나, 철기는 그렇
지 않다. Ⅰ·Ⅱ기에는 청동의기를 소유하고 부장하는 것만으로 계층의 차별화를 꾀할 수
있었다. 그러나 Ⅲ기에 청동기 부장의 쇠퇴와 철기의 보급이 맞물리면서 큰 변화가 발생
하였다. 실용이기인 철기를 부장하기 시작하면서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의 차별화 전략이
양적 증가로 바뀐 것이다. Ⅲ기 후반에 철제 무기류의 부장이 증가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
지 않으며, 이는 단순히 피장자가 가진 무력만을 상징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
동을 제공하는 하위계층도 철기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기 그 자체가 피장자의 위
세와 신분을 나타내는 기물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생업과 관련된 농공구
류, 전쟁과 관련된 무기류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실용이기를 다량
으로 부장하였으며, 실용이기의 양적 표출로 위세와 무력을 통제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
지고 있음을 과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68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Ⅴ. 맺음말
이상으로 창원 다호리 유적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에 대해 고찰하였다. 창원 다호리
유적은 세형동검문화 Ⅲ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이전 시기와 달리 청동의기의 다양성이
축소되고 철기가 분묘 의례의 대표격 부장품으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독점성이
강했던 청동의기와 다르게 이기에 해당되는 철기를 피지배층도 소유하게 되면서 지배층
이 그들의 위세를 나타내기 위해 부장품의 수량을 늘리는 방법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이
와 같은 새로운 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이기의 변화, 국제적 네트워크 형성, 환경 및 생업구
조의 변화 등은 의례에까지 연동되어 이와 같은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즉, 시간의 흐름
에 따른 의례의 변화는 집단 내적인 수요와 생업, 외적인 사회나 환경의 변화 등이 종합적
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것이다. 이는 세형동검문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
회라도 내외부적 요인에 의해 의례에 변화를 발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69
김 효 정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목관묘
호수
묘광 규모(㎝)
장축
방향
출토 청동기
청동기 외 출토유물
길이 너비 깊이
1호
278 136 205
남동
북서
칠초동검2,
동모1, 검파공부,
한경1, 마탁1,
청동대구, 동환,
오수전3
토기
: 무문토기호편5, 주머니호편1
철기
: 칠초철검1, 목제검파부철검1, 철검편2, 철모4,
철과1, 칠초철제환두도자1, 목병부판상철부3, 판상철
부12, 방주상철부1, 단조철부3, 주조철부6, 따비2, 겸형
철기1, 닻형철기2, 철촉1, 작살1
칠기 및 목기
: 칠기원형두1, 칠기방형두1, 칠기배1, 유
개통형칠기1, 원통형칠기2, 칠기개3, 칠기반1, 칠기바
구니1, 칠봉1, 칠걸이, 칠기붓5, 봉상칠초1, 대형칠기편,
목제합1, 소쿠리테1, 활3, 화살대
기타
: 유리구슬298, 노끈, 동아줄, 밤, 율무, 감, 나뭇잎
2호
290 114
120
동서
검초금구편1
토기
: 주머니호편1,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1, 장경호편
1, 토기저부편2
칠기 및 목기
: 두형칠기, 원형개, 통형칠기, 원통형칠기,
사각형칠기편, 원반형칠기, 요갱바구니, 바니편, 망상칠
편, 우각형칠기, 목병, 찰갑편, 칠기편, 흑칠찰갑편1
기타
: 지석2
3호
230 100
110
동서
검초금구편1,
단추형동기1
토기
: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1
철기
: 철검편1, 철모2, 꺽쇠1
칠기
: 칠기잔, 원통형칠기
기타
: 지석1
6호
260 125 150
동서
세형동검1
토기
: 유개점토대토기1, 점토대토기편1, 무문토기저부
편4, 주머니호1, 주머니호편2, 호편2, 파수편1
철기
: 철검1, 철검편1, 철모4, 철과편1, 판상철부6, 방
주상철부1, 단조철부1, 주조철부2, 철착1
칠기 및 목기
: 원형두, 원통형칠기, 장경호, 칠기바구니
기타
: 마제석부1, 조약돌1, 유리구슬15
15호
245 100
75
동서
검초금구편1
토기
: 점토대토기1, 뚜껑1
철기
: 철검1
칠기 및 목기
: 거치문원통형칠기, 원통형칠기, 칠기잔,
칠기뚜껑, 장각고배, 칠기, 단각고배, 반형칠기, 환형칠
기, 칠기편
기타
: 죽협편, 나뭇잎, 하관용 동아줄
19호
255 105 150
동서
칠초동검1,
쌍두관상동기1,
우각형동기1,
유구동기1
철기
: 철모2, 철모편1, 철착2, 재갈2, 단조철부1, 닻형
철기2, 따비1, 궐수형장식철기2, 이형철기편6
칠기 및 목기
: 칠초2, 원형칠기, 칠기신발, 환형칠기편3
기타
: 바구니
23호
235 112
43
동서
검파반부금구1
토기
: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1, 파수부호편1
철기
: 철검편, 철모7, 철도자편1, 판상철부8, 단조철부
2, 철부편1, 철착1, 철사1, 따비1, 재갈편1, 나선형철기
편1, 닻형철기편1
<표 3> 다호리 유적의 청동기 출토 유구 일람
70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24호
277
86
112
동서
칠초동검1,
동모1
토기
: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2
철기
: 철착1
칠기 및 목기
: 칠초1, 칠잔1, 통형칠기3, 고배, 부채
기타
: 지석2, 바구니
61호
206
84
60
동서
마탁1, 동관1
토기
: 잔1, 소옹1, 주머니호1
철기
: 철서4
기타
: 관옥1, 강돌5
63호
239
88
60
동서
세형동검1,
검파두식
토기
: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1, 주머니호1, 두1
철기
: 철모1, 단조철부1, 이형철기편4
칠기
: 원통형칠기흔, 잔형칠기흔, 원반형칠기흔,
칠국자
기타
: 지석1
69호
254 100
50
동서
검파두식1
토기
: 봉상파수부호1, 우각형파수부호1, 대부주머니
호1, 와질장경호편1
철기
: 철검1, 철모2, 철촉5, 철도자1, 단조철부1, 철착1,
송곳1, 철겸1, 재갈1, 철환3
기타
: 유리구슬32, 다면옥2, 지석1
73호
220
67
59
남동
북서
검파두식1
토기
: 점토대토기편1, 흑색마연파수부장경호1, 주머
니호1, 옹1
철기
: 철검편2, 철사1
92호
225
74
5
북동
남서
청동구슬6
철기
: 칠초철검1, 철모1
칠기
: 원통형칠기1
93호
254
78
52
동서
칠초동검1
토기
: 소호1
철기
: 철모1, 철도자1, 판상철부2, 단조철부1, 주조철부4
기타
: 방추차2
104호
243 121 208
동서
검파두식2,
연결금구, 동전1
토기
: 단경호1, 주머니호1, 조합우각혀파수부호1, 봉상
파수부호1, 대형완11
철기
: 칠초철검2, 철검2, 철모5, 판상철부4, 주조철부
2, 철부1, S자형표비2, 철겸1, 철착1, 철사1, 따비1, 철추
2, 철촉14
기타
: 운모편
118호
117
67
16
동서
심부금구1
철기
: 칠초철검1, 판상철부1, 단조철부1, 철부1, 불명철
기4
119호
214
75
21
동서
한경1, 동환1,
청동교구1
토기
: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3, 장동호1, 소옹1, 대부
완1
철기
: 청동검파부철검1, 철촉10, 표비1
기타 : 유리옥2
120호
257
96
63
동서
칠초동검1
철기
: 철모3, 환두도1, 주조철부7, 단조철부1, 판상철부
1, 철사2, 철착1, 불명철기1
125호
251
76
42
동서
칠초동검1
토기
: 주머니호1
철기 :
철검·청동제반부단금구1, 철모3, 철과1, 공부편
1, 주조철부2, 단조철부1, 판상철부1, 원통형철기1
기타
: 지석1
141호
259 102 100
동서
검파두식1
토기
: 조합우각형파수부호1, 주머니호1, 장경호2, 단
경호1, 합1, 뚜껑1
철기
: 철검1, 철모2, 단조철부1, 철겸1, 철사2, 철착2
기타
: 지석3, 석착1, 유리구슬31
71
김 효 정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149호
231
95
71
동서
검파두식1
토기
: 조합우각형파수부호1
철기
: 칠초철검1, 철모2, 판상철부1, 단조철부1, 소형철
부1, 철겸1, 철착1, 철사1, 철추1
150호
239
64
30
동서
심부금구1
토기
: 주머니호1, 장경호1, 두형토기2
철기
: 철검1, 철모1
151호
179
91
31
동서
청동환2
토기
: 두형토기1
철기
: 철검1, 철모1
72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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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75
토론문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에 대한 토론문_허 준 양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
」에 대한 토론문
허 준 양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창원 다호리 유적은 1호묘의 도굴로 발굴이 시작된 후 최근까지 발굴조사되어 보고서가
간행되었습니다. 동시에 국립김해박물관은 매해 뜻깊은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오늘 그
연장선인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Ⅰ-금속기-’의 학술대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발표자는 한국의 세형동검문화를 개괄하고, 청동기의 출토 빈도를 정리한 뒤 창원 다호
리 유적의 청동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금속기 부장의 변화를 통해 상·하위의 계층 관
계를 설정하고, 금속기가 가지는 의미와 함께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고자 한 점에 큰 의의
가 있습니다.
토론자는 주어진 소임을 다하기 위해 몇 가지의 질문을 준비하였습니다.
1. 세형동검문화와 청동기에 대해 질문을 드립니다. 발표자는 동경을 기준으로 세형동
검문화를 Ⅰ~Ⅲ기로 분류한 뒤 창원 다호리 유적을 Ⅲ기에 위치시켰습니다. 그렇다면 다
호리 유적과 인접하지만 동경이 출토되지 않은 마산 가포동 유적, 동경이 출토된 김해 무
계리 유적은 어디에 위치하며 나아가 경남지역의 산청 백운리, 사천 월성리 유적 등의 위
치도 궁금합니다.
2. 창원 다호리 유적의 청동기에 대해 질문을 드립니다. 발표자가 언급하는 위세품의 대
76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세가 청동기에서 철기로 전환되고, 세형동검문화가 쇠퇴하는 과정에 창원 다호리 유적이
위치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토론자도 상당부분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전환되는 청
동기와 철기의 구체적인 양상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예를 들어 대구-경산-영천-
경주지역에는 청동기에서 철기로 또는 철기에서 청동기로 전환되거나 모방하는 금속기가
곳곳에서 확인되는데, 창원 다호리 유적 또는 경남지역 일대에 이러한 변화가 확인되는
금속기가 존재하는지 궁금합니다. 이는 단순히 청동기에서 철기로 전환되는 양상에 머무
르는 것이 아니라 금속기 제작기법의 공유와도 관련되며, 나아가 다호리 유적의 변천(전
환)하는 사회상을 재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은 본문에 언급한 칠초동(철)검
의 수입과 수출에 대한 연구와도 밀접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가 궁금합니
다.
3.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왜래계 청동기(
漢, 倭)에 대한 발표자의 구체적인 견해
를 묻고 싶습니다. 본문에 언급한 한경, 오수전, 중세형동모 등이 그것이며, 이외에 겁마
(
砝碼-天平) 등도 있습니다. 이중 중세형동모는 일본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
본측 연구에서 지배적인데, 토론자는 다호리 1호묘의 중세형동모를 실견하지 못하였지만
경산 양지리 1호묘, 영천 용전리 목관묘의 동모를 관찰한 결과 대구-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성립된 제작기법이 삽입된 것으로 판단되어 본 동모도 동일한 기술로 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창원 다호리 1호묘의 중세형동모는 대구-경주지역에서 생산-유통 또는
분배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일본에서 전해진 것이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에 대한 발
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4. 세형동검문화에서 철기문화로에 대한 질문입니다. 본문에 인용한 ‘착장용의기(청동
기)’와 ‘실용이기(철기)’에 대한 다호리 유적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 주길 바랍니다. 이
와 함께 금속기 부장의 계층 구분을 진행하였는데, 양적 증가에 따른 상·하위 구분의 기준
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는 신분과 계층, 나아가 사회조직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일면을
제공하기에 주요한 요점으로 생각됩니다.
5. 위와 연계하여 청동기가 가지는 위상을 통치자의 권력 또는 집단의 성격 등과 관련시
킬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통치자(수장묘)는 정치적·종교적·이념적 권위에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점은
辰韓, 漢(樂浪), 倭의 근·원거리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 관계망을 형성한 당시
다호리 집단의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대한 발표자의 고견을 부탁드립니
다.
77
토론문
「창원 다호리의 청동기와 세형동검문화」에 대한 토론문_허 준 양
李健茂, 2008, 「茶戶里遺蹟 發掘의 意義」, 『茶戶里 遺蹟 發掘 成果와 課題』, 창원 다호
리 유적 발굴 20주년 국제학술 심포지엄, 국립중앙박물관.
李在賢, 2003, 『弁·辰韓社會의 考古學的 硏究』, 釜山大學校大學院 博士學位論文.
허준양, 2021, 「한국식 중세형동모의 성립과 전개」, 『영남고고학』90.
주제발표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김 민 철 (국립김해박물관)
81
김 민 철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Ⅰ. 머리말
한국식 동검은 결입부와 등대의 마디가 형성되어 있고,
劍身과 劍柄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하는 조립식 구조가 가장 큰 특징이다. 요령식 동검을 그 조형으로 하여 발달한 독창
적인 형태인 만큼이나 검초 역시 여타 동북아시아에서 확인되는 동검의 검초와는 뚜렷하
게 구별되는 특색을 지닌다.
한국식 동검의 검초는 대부분 유기물질로 제작한 까닭에 일부 금속제 부속구만 발견되
어 그 구체적인 형태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일찍이 서북한 지역에 확인된 비교적 양호한
자료들은 세밀한 분석ㆍ연구를 위한 접근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그러
던 것이 1988년 창원 다호리유적 1호묘
腰坑에서 완전한 형태의 검과 검초 몇 자루가 확
인됨으로써 연구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다호리 1호에서 출토된 양호한 상태의 자료 확인
이후 전체적인 형태 분류와 각 부위의 명칭과 용도, 그리고 제작 과정에 대해 추론한 몇몇
선구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이건무1995;이청규1997;구문경2002;정인성2013ㆍ2020;
박영성2013). 이후, 광주 신창동 저습지에서 완전한 형태의 자료가 일부 확인ㆍ보고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중남부 특유의
後堆積 환경으로 말미암아 금속제 부속
Ⅰ. 머리말
Ⅱ. 한반도 출토 검파형검초의 출현과 전개
1. 서남부지역
2. 동남부지역
Ⅲ.
劍鞘 제작기술의 특징
1. 형태와 제작기술에 관한 연구성과와 쟁점
2. 제작기술 복원 관련 신자료
Ⅳ. 맺음말
목 차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김 민 철
국립김해박물관
82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구만 확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관련 연구의 진척은 여전히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검초는 한국식 동검문화에서 확인되는 목제품 중 영남지방 일부 유적에서 확인된
戈鞘
와 더불어 제작하기 가장 까다로운 기종이다. 목초는 기본적으로 목제품이긴 하지만 칠기
술, 목심에 금속 부속구를 부가하여 즉, 물성이 전혀 다른 두 재료를 결합시켜 의장성 극대
화를 꾀한 것에서 최상급의 제작기술과 비용이 필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연유
로 검초의 형태 분석과 제작 기술의 검토를 통한 계보 추적은 한반도 중남부에서 확인되
는 한국식동검문화 및 철기문화의 향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된다. 자료 여건의 이런저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 금속기 유물 중 검초에 주
목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한반도 남부에서 검파형검초가 출현하여 전개되는 양상과 지역적 특징
을 일별해 보고 형태와 제작기법에 관한 기왕의 연구에서 쟁점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창
원 다호리 유적을 비롯하여 변ㆍ진한의 고지에서 확인되는 검초의 형태와 제작기술 특성
중 일부를 추출하여 그 의미에 대해 추론해 보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한편, 논의 전개의 편의상 영남지방 목관묘 단계 주요 표지적 유구의 절대연대는 다음과
같은 틀에 준거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경주 조양동 5호를 B.C. 2세기 말로 소급이 필
요하다고 본 필자의 전고(김민철2019)에 따라 그 이전 단계의 월성동 목관묘군, 팔달동,
교동리 등지의 일부 유구들은 B.C. 2세기 중엽 이전으로, 다호리 1호는 B.C. 1세기 2/4,
조양동 38호를 B.C.1세기 3/4로 본다.
Ⅱ. 한반도 출토 검파형검초의 출현과 전개
한반도 남부 출토 한국식동검 검초의 각 부분 명칭과 조립식 구조에 대한 시안을 제시한
선구적 연구에서는 검초를 그 형태에 따라
劍身形ㆍ棒狀形ㆍ四角棒形ㆍ劍把形의 4개로
대별하였다(
李健茂1995). 이 중 검신형은 함평 초포리에서 발견사례가 확인되었다고 하
나 잔존상태가 불량하여 그 실체를 뚜렷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봉상형은 다호리 1호묘
에서 출토되어 보고된 바 있으나 그 외의 자료는 아직 잘 알려진 사례가 없다. 사각봉형은
다호리 24호의 사례를 들어 설정하였지만 검초의 횡단면을 (말각)사각형으로 적극 상정
할 만한 목초 실물 혹은 금속부속구가 확인된 사례는 현재로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호
리 24호 조사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묘광 바닥에 칠 흔적만 잔존하는 사례임에도 불구하
83
김 민 철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고 검초 횡단면을 (말각)사각형으로 상정한 근거에 대해서는 재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이
외
長條形이라 새로이 규정할만한 사례들이 사라리 130호 철검의 검초와 佐賀縣 柚比本
村遺蹟 SJ137호에서 확인되어 새로운 형식으로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선구적 시안이 제안된 지 사반세기가 지난 현시점에서 새로이 조사ㆍ보고된
자료를 토대로 하면 검초의 형태는
棒狀形, 長條形, 劍把形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런데
봉상형과 장조형 두 형식의 사례는 극히 소수이며, 검파형 검초가 자료의 대부분을 차지
한다. 검파형 검초는 상단과 하단의 폭이 몸체보다 길어 대체적인 형태가 마치 대나무 마
디와 같은 형태를 띤다. 그리고 검초 중상위에 이른바 결입부가 형성되어 있는 것들도 있
다. 현시점의 이러한 자료상황을 감안하여 본고에서는 검파형 검초를 중심으로 검토를 진
행하고자 한다.
본격 논의에 앞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간단히 관련 용어를 정리해 두고자 한다. 검파
형 검초 각 부위에 대한 용어는 기왕에 정리된 바가 있다(
李健茂1995). 대체로 적절한 造
語라고 생각되지만 일부 개선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고 본다. 마구 혹은 허리띠 등과 관련
된 연구에서 기왕에는 금속제 부속구를 뜻하는 ‘
金具’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여
왔다. 검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고고학적 전문 연구영역에서는 이미 일반화된 표
현이기는 하지만 우리 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일본식 표현일뿐더러 ‘부분’, ‘갖
그림 1 . 검파형검초 부속명칭(안)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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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춤’을 뜻하는 ‘
具’만 사용하더라 충분히 그 뜻이 통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점을 염
두에 두어 여기에서는 ‘연결금구’를 ‘연결구’, ‘장식금구’를 ‘장식구’ 등으로 사용하고자 한
다. <그림1>은 최근 보고된 경산 양지리 출토품을 예시로 각 부위 명칭을 보완한 것이다.
1. 서남부지역
서남부지역은 세형동검과 각종 특수한 청동기들을 동반한 한국식동검문화가 한반도 남
부지역에서 초현ㆍ발전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실물자료로서 검초는 그 출토례가 거의
전무하였다시피 했다. 90년대 광주 신창동 저습지에서 출토된 몇몇 사례들을 확인되고
2000년대 이후 서산, 서천, 함평, 나주 등지에서 검초에 부가된 금속제 부속들이 일부 알
려지기 시작했지만 동남부 지역의 출토량에 비하면 아직 그 수량은 매우 적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서남부지역 관련 자료의 이러한 특수성은 조문경과 세문경 단계에 해당하는 유
적과 유물량에 비해 한경이 출토되는 단계에 이르면 그 수량이 모종의 이유로 돌연 급감
하는데 기인하는 듯하다. 여하튼 그동안 조문경~세문경~철기출현 단계에 이르는 동안 상
당한 수량의 동검이 출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초 실물이나 그 부속구는 그에 비해
수량이 매우 적은 특징이 간취된다.
서남부지역에서 실물자료로서 가장
古式에 해당하는 것은 서산 동문동에서 출토된 청동
제 초하부연결구이다. 잔존상태는 매우 불량하지만 장방형의 평면을 띄고 중앙부에는 돌
대가 표현되어 있다. 돌대 상위에는 전면과 후면을 관통하는 2개의 투공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왕에 확인된 자료들을 염두에 둔다면 검파형 검초의 초하부연결구일 가
능성이 크다. 이 연결구는 목관묘에서 동검, 검파두식, 동과, 주조철부, 철사, 장경호, 석촉
등과 함께 일괄 출토되었다. 일괄유물의 조합상 갈동, 신풍 유적의 철기를 공반하는 군집
목관묘들과 병행하는 시기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며, 절대 연대는 서기전 3세 후엽, 늦어
도 서기전 2세기 초의 자료로 추정된다. 아무튼 현재로서는 한반도 남부지역 세문경 단계
에 확인되는 가장 이른 금속제 검초부속구 자료로 평가된다.
이외 함평 마산리 출토품, 서천 군사리 채집품 모두 검파형 검초의 초하부연결구로 추정
되나 연대를 구체적으로 특정 지울만한 근거는 빈약하다. 서산 예천동 18-1호 분구묘에
서는 철검 검초 부속으로
琫과 초결입부 부속구가 출토되었다. 횡단면 볼록렌즈형의 검파
형 검초일 가능성이 크다. 이 자료는 일견 영남지방 목관묘에서 출토되는 자료들과 유사
해 보이지만 얼마간의 차이점도 간취된다.
琫은 영남지방의 그것과는 달리 세로로 가로지
르는 봉을 만들지 않았다. 세로로 가로지르는 두 개의 봉이 없는 탓에
珌과 별다른 차이점
이 없지만 출토맥락을 살피면
琫이 확실해 보인다. 초결입부에 장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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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민 철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그림 2 .서남부지역 출토 검초부속구
①서산 동문동 1호 목관묘 ②함평 마산리 ③서천 군사리 채집 ④나주 구기촌9호토광묘 ⑤서산 예천동18-1호
분구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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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는 부속구 역시 그 평면형태가 다소 이질적인 형태를 보인다. 한편, 검초에 삽입하였을 철
검은 봉부쪽 결실이 심한 상태이지만 슴베쪽은 양호하다. 슴베의 길이가 긴 점, 공반된 토
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2세기 후반대의 자료로 판단된다. 주로 2세기 전반 이전
短
莖의 동검, 철검과 공반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영남지방과 대별되는 양상이다.
나주 구기촌 9호 토광묘에서는 단조철부, 철모와 함께 칠초 철검 한자루가 출토되었다.
청동제 검파두식과 우각형동기, 삼각형동기가 검초 주위에서 함께 확인되었다. 검초는 철
검에 수착되어 극히 일부만이 잔존하는데 청동제 연결구 일부가 확인될 뿐이다. 잔존상태
가 불량하여 검초의 전반적인 형태를 추정하기 쉽지 않지만, 초상부 혹은 하부연결구가
확인된 점에서 검파형으로 추정해 둔다. 용도를 정확하게 가늠하기 힘든 삼각형 동기는
대구 팔달동 101호에서 유사한 것이 출토된 바 있다. 검초 주위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미
루어 보아 우각형동기나 쌍두관상 동기와 같이 검초를 장식하는 일요소일 가능성이 있으
나 확실하지 않다. 아울러, 동시기 서남부지역에서 잘 확인되지 않는 철모와 단조철부가
함께 동반된 사실과 더불어 현재까지의 서남부지역 고고자료의 패턴과는 상당히 이질적
인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구기촌 유적은 영남지방 목관묘에서 출토되는 무기, 공구류가
출토되어 주목받은 바 있는데, 이러한 양상을 두고 영남지역과 교류의 결과로 인식하기도
한다(김규정2017:28). 아직까지는 단편적인 증거이기에 쉽사리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영
남지방에서 입수되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광주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는 양호한 상태의 검파형 검초가 수 점 조사ㆍ보고되었다.
‘95년, ‘97년 조사분에서 양호한 상태의 검초가 출토되었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신창
동1, 신창동2(국립광주박물관 등록번호) 검초이다. 침수환경에 놓여진 까닭에 잔존상태가
훌륭하다. 검초 상부에 인접하여 흡사 쌍두관상 동기를 연상시키는
木盒이 출토되었다.
이어서 2001년에 보고된 10여점 내외의 검초편들은 당시 이 일대에서 유행한 검초의 형
태와 제작기법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신창동 저습지 유적 검초를 살펴보면 두 가지 큰 특징이 간취된다. 첫째, 검초에 삽입한
검은 물론이거니와 검초 부속구 역시 금속제로 제작한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점이
다. 국립광주박물관 조사에서는
木劍이 다량 출토된 반면, 금속유물은 신창동1번 검초의
초하부연결구가 유일했다. 그러던 것이 비교적 최근인 2014년 조사분 유물포함층에서 확
인된 철검편과 청동제 검코가 각각 1점 확인된 바 있다(대한문화재연구원2018)<그림3-
③>.
‘95년 조사된 신창동1번 검초의 초하부연결구의 착장방법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최초 보고에서는 이 초하부연결구의 재질을
銀製로 판단하였으며, 장방
형의
銀板을 접어 검초에 끼우고 망치 등으로 두들겨 고정한 것으로 추정하였다(國立光
州博物館 1997:80). 그런데 관련된 후속 연구에서는 연결구의 소재는 은이 아니라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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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민 철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그림 3 . 광주 신창동 저습지 출토 검초
①신창동1, ②검초각종 ③ 청동검코 및 철검(대한문화재연구원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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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으로 추정하고 있다(조현종2012:33). 연결구의 표면은 매끄럽지 못하고 타격을 가한 것처
럼 울퉁불퉁한 부분이 확인된다. 연결구
兩端面이 맞닿여 있는 부분이 외부 충격 등에 의
해 깨진면이 아닌 것을 실제 유물의 관찰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그림3-①>. 신창동 자료
의 이러한 특징은 영남지방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검초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검파형으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유사하지만 금속부속구를 부가하는 방식 전혀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
다. 영남지방 출토품의 경우
琫, 각각의 연결구, 珌 등 검초의 금속부속품은 대부분 청동
을 주조하여 제작하였음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어서 살펴본
木鞘 제작
방식의 차이와 더물어 양지역 제작기술의 차이를 현격하게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이다.
둘째, 신창동 검초보다 먼저 그 존재가 알려진 다호리 유적 검초를 비롯한 진ㆍ변한 지역
검초와 비교할 때 목초 자체의 제작방법에서도 큰 차이점을 보인다. 양 지역 목초 제작 공
정의 차이는 이미 한 차례 정리된 바 있다(박영성2013). 검파형 검초는
劍室을 도려낸 전
판과 후판을 결합하여 제작한다. 이후 칠을 하거나 각 부위에 금속부품을 부가하여 완성
하는 것이 대략적인 제작 공정이다. 그런데, 신창동 유적 자료의 경우 초상부에서 초제1하
부까지만 전ㆍ후 분할한 판을 결합하고 초제2하부는 분할하지 않은 통목으로 제작한다.
이러한 제작방식은 영남지역의 검초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기술적 속성으로 신창동 유적
만의 배타적 특징으로 삼을 만하다. 물론, 서남부지역 검초 관련 자료가 많지 않은 까닭에
이러한 제작 기술상의 특징을 서남부지역 전체로 확대하기에는 아직 이른감이 크다.
한편, 보고서의 도면과 도판을 살펴보면 초제1하부까지만 분할된 전판이 세로 방향으로
쪼개진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세로 방향으로 쪼개진 면이 곧은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
은 경우도 있어 의도적으로 분할하여 제작하였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검초의 횡단면이
볼록렌즈형임을 감안하면 구조상 토압에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는 하나 여러 경우에서 다
소 일관된 양상을 보이고 있으므로 향후 정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2. 동남부지역
영남지방의 한국식동검문화 관련 동검 혹은 철검의 검초는 대부분이 목관묘 부장품으로
서 확인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에 의하면 철검, 철모 등 철제무기류, 혹은 각종 한국식
동검문화 요소로서의 청동제 무기들이 목관묘군의 출현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 시
점은 늦어도 서기전 2세기 중엽 이전으로 생각된다. 서기전 1세기 무렵부터는 한식문물의
유입과 철기 후장이 뚜렷해져가는 가운데 세형동검문화의 의기적 청동기류들은 점차 자
취를 감춰간다. 그러한 추세 속에서도 세형동검은 검신의 형태가 변화하며 그를 조형으로
한 철검과 함께 목관묘 단계의 종말까지 주요부장품으로 채택된다. 즉, 영남지방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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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늦어도 서기전 2세기 중엽에서 목곽묘단계로 들어서는 2세기 전반까지 유행한다. 영남지
방의 검초는 청동부속구를 다량 부착하여 의장성을 극대화한 화려한 형태가 다수 출토된
다는 점에서 서남부지역 상황과 큰 대조를 이룬다.
대구 월성동777-2번지 유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목관묘군은 와질토기를 반출하지 않
고 평저의 굽이 비교적 뚜렷한 삼각형점토대토기와 철기들이 공반하여 영남지방에서도
가장 이른 단계의 목관묘군으로 평가된다. 이 유적에서 철검은 주요 부장품 중 하나로 채
택되지만 검초의 존재를 적극 상정할만한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청동제 검파두식이 공
반되는 것에서 철검을 자루에 장착하여 부장했음은 분명해 보이기에 금속제 부속이 장착
되지 않은 검초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영남지방에서 금속부속이 부가된
最古式 검초 사례는 월성동 목관묘군 다음 단계인 울
산 교동리 1호에서 찾을 수 있다. 정식보고의 유구 도면에는 피장자 머리쪽 동단벽측 충
전토 내에 칠초동검이 세워져 있다. 봉, 연결구 등이 금속제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유구
도면의 표현만으로는 자세한 양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후 교동리 1호 출토
覆顔과 청동
제 유물의 재검토가 이루어지면서 초결입부연결구, 필, 봉, 그리고 패용부속까지 확인되었
다고 한다(오광섭ㆍ정현석2015:14~16). 그러나 동검 모식도만 제시되어 있고, 초결입부
그림 4 . 교동리1호 목관묘 출토 검부속(울문연2013), 동검모식도(오광섭ㆍ정현석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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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금속기
연결구, 패용부속 등의 개별 도면ㆍ도판은 소개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실체 파악은 어렵
다. 필은 횡단면 타원형을 띄며 밑면이 막혀있는데 이와 유사한 형태는 최근 양지리 1호묘
철검의 검초에서 확인된 바 있다. 이 교동리 1호는 피장자의
覆顔으로 추정되는 식물유체
의 AMS연대 측정치가 B.C.2세기 중반을 거슬러 올라가는 결과가 도출되어 조양동 5호를
B.C.2세기 말로 소급해야 한다는 필자의 연대관과 부합하는 결과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교동리 1호의 자료가 금속부속이 부가된 현존 최고식의 검초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교
동리 1호보다는 다소 후행하는 시기로 파악되는 학정동 485번지 1호 목관묘에서도 청동
제 검코가 출토되어 이 단계 즈음하여 금속제 부속이 부가된 검초가 출현하는 것으로 추
정된다.
그림 5 .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검초
①1호,②24호,③92호,④ㆍ⑤104호,⑥118호,⑦120호,⑧125호,⑨134호,⑩140호,⑪149호,⑫傳다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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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민 철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한편, 창원 다호리 유적 목관묘에서도 1호묘를 위시하여 적지 않은 수의 검초가 보고
되었다. 125호묘에서는 청동부속이 부가된 검파형 검초가 출토되었는데 저부에 굽이 잔
존하고 무문토기 소성의 주머니호가 공반하는 것에서 조양동 5호와 병행하는 단계로 볼
수 있다. 검초는 잔존상태가 극히 불량하지만, 봉, 필, 결입부 연결구, 초하부 연결구를 청
동으로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각 부위의 청동 부속에는 사격자문 장식으로 부속 전면
을 꾸몄는데, 음각인지 투공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이후 104호, 1호, 등 서기전 1세기대
에 축조된 목관묘에서 검파형 검초가 다수 출토된다. 청동 부속을 부가하지 않은 검초들
도 다량 확인되며 검파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범주 내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것들이 출토
된다.<그림5.>
한편, 다호리 유적을 포함한 영남지역에서 확인되는 동검과 철검의 칠초를 비롯하여 칠
기 자료가 서북한 지역보다 풍부하다는 점, 청동부속구를 사용한 칠초 연결 방식 등 칠기
제작 기술이 서북한지역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칠초의 기원을 서북한지역이 아닐
가능성을 타진한 견해가 최근 제시된 바 있다(이제현ㆍ장용준2020). 즉, 논자들은 변ㆍ진
한지역에서 낙랑계 선진문물을 공급받는 반대 급부로서 철과 함께 칠초를 수출하였을 가
능성을 타진하였다. 나아가 다호리 유적에서 칠초와 여타 칠기 유물들이 집중하는 현상을
주된 근거로 영남지역 목관묘군 유적에서 출토되는 칠초 역시 다호리와 같은 특정 제작지
에서 제작하여 각 수요지로 공급되었을 것이란 가설을 제시하였다.
일견 주목되는 가설이지만 그간 조사ㆍ보고된 자료의 특성을 세세히 따져 볼 필요가 있
다고 생각된다. 먼저, 그간 확인된 검초를 비롯한 칠기의 출토량과 관련된 부분은 기실 저
명한 다호리 1호를 위시하여 다호리 목관묘군에서 확인된 검초와 여타 칠기의 양은 일견
영남지방 내에서도 으뜸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다호리 유적의 특수한 후퇴적
환경덕분에 완형 혹은 그에 가까운 상태로 출토된 칠기 유물들이 비교적 많이 확인된 데
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다호리 유적은 목관묘가 조영된 유적 전반에 걸쳐 침수환경이 조
성된 지점이 상당히 많다. 그래서 칠초를 비롯한 여타 목제유물의 보존상태가 여타 영남
지방 내 주요 목관묘 유적보다 훨씬 양호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다호리 유적의 특수
한 후퇴적 환경요소를 염두에 두면, 과연 다호리 유적을 영남지방 내에서 칠기 유물의 질
적ㆍ양적 구심점으로 상정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영남지방 주요
목관묘 군은 대부분 나지막한 구릉의 사면에 축조된 터라 다호리 목관묘군과 같이 침수환
경이 조성되는 경우 극히 드물다. 그래서 유기물로 제작된 유물의 양호한 보존상태를 극
히 기대하기 어려운 영남지방 고고학 자료의 보편적 성격을 함께 고려해야 하지 않나 한
다. 임당 유적의 각 지구별 목관묘군에서 다량의 동검과 철검 및 검초 부속구들이 확인되
고 사라리 130호에서 많은 수의 칠기들이 집중 출토된 사례 등을 염두에 두면 단순히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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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존하는 목제유물 다과만을 근거로 다호리 유적의 양적 우위를 상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철기 등장, 와질토기 출현, 한식문물의 체계적인 입수라는 현저한 고고학적 현상이 나타
나는 목관묘 단계에 들어서면 청동 의기류, 무기류, 공구류는 점차 쇠퇴해가고 철제품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런 와중에도
短莖의 동검과 철검은 검초와 셋트로 주요 부장품 중
하나로 채택된다. 최근 보고된 양지리 출토품과 같이 의장성을 극대화한 사례도 확인되지
만 시간 흐름에 따른 뚜렷한 형식변화를 관찰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목곽묘 단계에 진입
하면서 점차 쇠퇴해가는 한국식동검문화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동검 역시 더 이상 확인
되지 않는다. 한국식동검을 조형으로 출현한 철검은 검신과 슴베가 점차 길어지며 장검화
된다. 이 기물들과 짝을 이루던 검파형 검초 역시 사라진다. 물론, 검초 자체는 복천동, 대
성동 등지의 사례를 참고하건데 날을 세운 도검류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계속 제작되
었을 터이며, 환두도가 점차 검를 대신하게 된다.
Ⅲ.
劍鞘 제작기술의 특징
1. 형태와 제작기술에 관한 연구성과와 쟁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식동검문화의 주요 요소이자 그 특유의 의장성으로 볼때
목관묘 단계 내내 위세품이었을 검초에 대한 조사ㆍ연구는 동시기 철기, 청동기, 토기 등
에 비해 극히 미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목재가 주재료인 까닭에 잔존 상태가 양호
한 자료가 극히 적다는 자료 여건에 기인한다. 또 금속 무기를 보호하는 다소 부차적인 성
격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모두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와 같이 다
호리 1호에서 양호한 검초의 출토는 관련 연구의 진척에 있어 가장 큰 모멘텀이었다고 생
각된다.
형태적 속성 분류를 기준으로 그간의 연구에서는 검초의 평면과 횡단면의 형태, 부가된
금속부속의 특징 등이 구분의 큰 기준이 되었다. 다호리 유적의 양호한 자료를 토대로 한
국식동검검초를 크게 4개의 형식으로 분류한 구분안이 그
嚆矢이다(李健茂1995). 또한
검초에 부가된 금속 부속의 특징(이청규1997), 혹은 검초
木心을 일자식과 곡선식으로 대
별하는 구분안(
具門慶2002) 등이 제안된 바 있다. 대다수의 검초가 검파형으로 분류되고
투공 혹은 투조장식 금속 부속이 부가된 자료들이 진ㆍ변한 일대 곳곳에서 점차 발견 사
례가 증가된 점을 감안하면, 기왕의 분류(안)들을 재차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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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민 철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한편, 검초의 제작기술속성에 초점을 맞춰 분류의 큰 기준으로 삼은 연구(박영성2013)
가 주목된다. 검초 목심 제작과정에서 크게 대별되는 기술적 속성이 감지되는 것을 근거
로 한다.
검 초 상 부 ~ 하 부 모 두 를 전
판ㆍ후판으로 분리하여 제작한 부
류와 초하부는 통목으로 두고 상
부~중부까지만을 전ㆍ후판으로
분할하여 제작한 것으로 대별하는
구분틀을 제시하였다. 그러한 구
분틀에 의하면 전자는 주로 동남
부, 후자는 서남부지역(신창동 저
습지 출토품)에 집중한다. 한반도
남부지역 검초의 대부분이 검파형
으로 분류되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형태적 속성만을 기준으로 한 분
류틀만으로는 일정 부분 한계가 있다. 즉,그러한 틀로는 검초의 출현배경과 분포에 관한
적확한 해석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점에서 제작기술 속성이 분류의 주요한 준
거 중 하나가 되어야 함은 명확해 보인다.
검파형 검초의 제작기법과 관련하여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금속제 부속구를 과연 어떠
한 방식으로 장착하였는가 하는 부분인데 크게 2가지 가설이 제기된 상태이다.
검파형 검초는 그 특유의 죽절상 구조로 인해 금속제 부속을 부가하는데 특별한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판상의 금속재료를 구부려 목심에 장착하는 방식을 상정할
수 있겠다. 쉽사리 상정할 수 있는 방법이거니와 앞서 살펴본 신창동 저습지(신창동1)에
서 실물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검초에 부가하는 금속부속을
一鑄하여 제작한 경우인데 금속부속이 장착된 영남
지방 자료 거의 모두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으로 말미암아 제작기법에
대해 추정한 선구적 연구에서는 분할한 목초를 금속부속 내부에 생칠과 같은 접착제로 결
합하였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李健茂1995).<그림 7.참조>
다음으로 소위 ‘목심내범 실납법’인데 내범으로서 가공한 목심을 이용하고 그 외곽에 밀
납원체를 붙여 모양을 성형한 뒤 외범을 제작하여 용동을 부어 주조하는 방법이다(정인
성2013ㆍ2020). 앞서 언급한 ’분할후 결합‘ 기법에서는
劍室을 조성하기 위해 분할한 상
판, 하판의 목심을 결합한 후 청동부속을 장착하기 위해 재차 분할해야한다. 그렇지 않고
목심을 내범으로 사용하면 그러한 제작공정상의 번잡함을 피할 수 있다는 추정이다. 그와
그림 6 . 검초제작공정 모식도(박영성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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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같은 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서 일체식으로 주조된
盤部의 금
속부속, 목제 부속 흔적이 일부 확
인되는 과초자료를 근거로 제시한
다. 전자는 사라리, 평리동, 후자
는 용전리의 것을 대표적으로 사
례로 꼽는다.
이른바 ’목심내범 실납법‘의 가
설은 내범 역할을 하는 목심이 고
온의 용동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
는 상식적 의문이 가장 먼저 제기
될 수 있다. 그 문제에 관하여 논
자는 목심 표면에 토제 절연제를
바르는 등의 고안으로 그러한 문
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추정
한다(정인성2020). 주조가 끝난 뒤에 도포된 토제피막을 제거하면 주조품과 목심 사이의
간극은 칠로 메우는 제작공정을 상정한다. 여하튼 목심내범의 존재를 상정하는 가설과 그
에 따르는 의문 모두 현재로서는
先驗的 성격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분할후 결합‘기법 역시 검초에 부가된 금속부속이 많아질수록 분할 후 결합해야하는 목
초도 증가할 수 밖에 없다. 예컨대, 다호리1호 출토 검초의 경우 상단과 하단의 봉과 필을
제외하고 결입부연결구와 초하부연결구가 모두 5개 부가되어 있어 분할하여 결합해야 하
는 목제는 모두 6개체로 상정된다.<그림 7의①~⑥> 특히, 초결입부의 경우 그 구조상 아
래 위 폭이 굉장히 좁아질 수 밖에 없는데 이렇게 될 경우 생칠의 접착력을 높게 평가하여
도 과연 구조적으로 일정 수준의 내구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의장성을
극대화한 검초의 기본적인 성격을 염두에 두어 실용이기로서의 역할을 최대한 배제한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제품의 내구성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와 같은
필자의 문제 제기 역시 선험적 성격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이상에서 형태분류와 제작기법에 관한 기왕의 연구성과를 일별하였는데 관련자료가 증
가한 이 시점에서 재정리의 필요성을 확인하였다. 특히, 제작기법 복원과 관련된 논의의
경우 잔존상태가 양호한 자료가 극히 드물고 과학적 분석 데이터의 축적이 깊지 않은 상
황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그림 7 . 검초제작기법 복원(안)[
李健茂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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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민 철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2. 제작기술 복원 관련 신자료
검초의 제작기법 복원과 관련된 기왕의 연구현황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어느 가
설도 쉽사리 결론 짓기
難望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이른바 ’목심내범 실납
법‘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실물자료를 포착할 수 있다. 최근 정식보고된 양지리유적과
용전리유적 자료가 바로 그것이다.
영천 용전리 목관묘에서는 각종 다양한 금속유물과 더불어 한반도 남부 최초로 금동노
기 부품이 출토되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목관내부에서는 동포, 반부선부속구, 한경파편
등과 함께 금속제 검초부속편이 출토되었다. 잔존상태가 불량하지만 그 형태로 보아 초결
입부 연결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속 표면에는 삼각형의 투공이 위아래 부위에 길이를
달리하여 표현하였다. 재질은 정식보고에서는 은제로 추정하였지만 동시기 은제로 보고
된 자료가 없어 추가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청동과초, 금동노기 등 화려한 유물에 가려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 부속 편린은 검초제작기법을 유추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
초를 제공한다.
보고서 도판을 참고하면 투공된 부속구 뒷면에 부착된 이물질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
8-①> 자세히 관찰해 보면 부속구에 표현한 정삼각형과 길다란 삼각 투공 뒤에 밀착되어
그 모양과 똑같이 압착되어 요철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투공사이로 노출된
표면에는 칠한 흔적을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다. 정확한 과학적 분석 데이터는 아직 확보
할 수 없지만, 요철이 형성된 표면은 목제가 아닌 여타 물질로 보이고 그 뒷면에는 목리흔
적이 관찰된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금속부속 뒤에 밀착되어 표면 노출된 부위에는 칠까지 확인된 이 물질의 재질이 정확하
게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이와 같은 자료의 현상은 ’목심내범 실납법‘의 제작기
법 복원안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하는 뚜렷한 증좌로 판단된다. 즉, 부속뒷면에 압착된 ’물
질‘은 목심내범 위에 쓰여진 절연제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특히, 압착된 요철면에 칠한 흔
적인 뚜렷하게 발견되는 점과 그 뒷면에는 목리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에서 이 물질이
목심내범과 금속부속 사이에 위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자료의 이러한 현상은 ’목심내
범 실납법‘의 과정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그 합리적 설명이 어려워 보인다.
둘째로 최근 정식 보고된 경산 양지리유적 1호 목관묘 출토 자료에서도 이와 같은 관점
의 제작기법 복원 상정을 뒷받침 하는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피장자의 오른쪽 팔 부근에
서 동검과 철검이 각각 2자루씩 모두 4자루가 확인되었다. 잔존부속구 등으로 보아 모두
검초에 삽입되어 부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344번 동검과 345번 철검 검초의 초하부연
결구에서 중요한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두 부속 모두 청동으로 제작되었고 동시기 여타
자료에서 확인되는 전형적인 초하부연결구의 형태를 띤다. 그런데 그 내면에 검초의 목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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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금속기
그림 8 . 검초제작기법을 보여주는 청동연결구 내면①
①영천 용전리, ②경산 양지리 1호묘(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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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민 철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그림 9 . 검초제작기법을 보여주는 청동연결구 내면(경산 양지리 1호묘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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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금속기
으로 추정되는 목질흔 일부가 확인된다. 정식 보고문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하나의 동일한 개체의 목질흔이 연결부속 내면 중앙을 가로질러 부착되어 있
음을 알 수 있다.<그림 8.-② 및 그림 9.> 내면의 이러한 목질흔은 소위 ’분할후 결합‘기법
복원안에 정면으로 반하는 양태가 아닌가 한다. 금속연결구가 부가되는 부위에서 분할한
목초를 결합하는 방법으로는 위와 같은 흔적이 생성되는 배경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
렵다. 다시 말해 그러한 방법으로 결합할 경우 부속구 내면 어느 위치에서 각각 분리되어
있는 목질 흔이 확인되어야 할 터이지만 자료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새롭게 지적한 상기 두 가지 사례로서 이른바 ’목심내범 실납법‘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
다. 하지만 그러한 기법을 상정하지 않으면 합리적 설명이 어려운 실물자료를 포착해냄으
로써
先驗的 제안에서 머물러 있던 가설에 개연성을 제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향후 과
학적 분석기법을 동원한 추가로 객관적 데이터1)를 확보한다면 그 개연성을 한 층 더 제고
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한편, 금속부속의 장착방법 이외 검파형 검초 제작기법과 관련하여 주목하지 못한 기술
중 하나가 평탈기법이다. 최근 26개의 오수전을 부착한 양지리 출토 과초의 제작방법에
대한 추론2)(
崔鐘圭 2021)에서 평탈기법의 적용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다호리 단계에는
목태칠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라 추정하지만 15호묘 출토 판상칠기 등에서 토분으로 홈
메우고 수 차례 칠한 자료가 확인된 바도 있다(김수철
外 2012). 원삼국시대 칠기제작 기
술의 수준을 다소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나, 동시기 일본열도의 자료를 참고하건대 검초
제작 기술에는 다양한 기법이 적용되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평탈기법은 그러한 기법 중
하나이다.
佐賀縣 柚比本村遺蹟 SJ137호 옹관묘에서는 玉飾漆鞘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칠초의 복
원도와 복원품을 토대로하면 칠초의 횡단면 볼록렌즈상을 띠고 평면형태는 사각형이다.
표면은 주칠과 길이11㎜, 폭2㎜, 두께0.8㎜가량의 벽옥 약 270~290개로 장식하였다. 표
면을 주칠과 벽옥으로 장식한 공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추정하고 있다.
“판상의 벽옥을 부착하고, 그 틈을 뱅갈라칠 3회 한 후, 주칠을 그 위에 칠하고, 마지막으
로 옥표면의 주칠을 볏겨내 마무리하였다.”(
鳥栖市敎育委員會 2002)
1) 예컨대, 청동합금에서 확인되는 납의 역할같은 부분을 들 수 있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
에 납을 첨가하면 용융된 금속의 유동성이 상승됨으로써 주조성이 향상된다고 추정하고 있다
(박학수2020). 즉, 금속으로서는 녹는점이 굉장히 낮은(327.4℃) 납을 첨가하여 낮은 온도까지
용탕이 액상을 유지함으로써 정교한 주형의 구석구석까지 용탕이 미치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납의 역할은 검초부속구의 제작기법을 추정하는데 어떠한 실마리는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향후, 이와 관련한 복원 실험과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2) 양지리 과초 제작에 평탈기법을 적용한 것으로 보면서도 그 제작지는 영남지방이 아니였을 것
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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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민 철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한 이러한 추정은 칠초의 제작에 있어
平脫기법이 적용되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비록 일본 열도의 사례이나 한국식동검의 분포양상을 고려한다면, 당
시 영남지방 칠초의 제작공정에서도 평탈기법이 활용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영남지방에 확인되는 양호한 상태의 자료에서는 각 부위의 금속 부속구들이
검초 표면에 마치 묻혀있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 또한 삼각 문양의 투공과 투조를 표현한
연결부속에서 칠로 메워진 부분은 그러한 평탈기법의 적용을 뒷받침하는 자료라 판단된
다. 향후 실제 유물의 세세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 검증해야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그림 10 .
佐賀縣 柚比本村遺蹟 SJ137 玉飾漆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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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Ⅳ. 맺음말
이상에서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그간 확인된 검초를 지역별로 일별하고 형태분류와 제
작기법과 관련된 기왕의 연구성과에서의 쟁점을 살폈다. 그리고 이른바 ’목심내범 실납
법‘의 관점에서 그러한 복원안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신자료들을 살피고 검초제작 공정상
의 여타 주요한 제작기법 중 하나로서 ’평탈기법‘의 적용 가능성 역시 제안하였다. 향후,
조사ㆍ분석을 통해 객관적 데이터를 확보해 나가고자 한다.
한편, 제작기법의 특성을 파악하여 검파형검초의 계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못했
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반도 남부지역의 검초는 검파형이라는 큰 틀 아래서 각 지역
별로 제작기술상의 차이를 어느 정도 추출할 수 있다. 물론, 서남부지역에서도 금속부속
구 자료가 점차 축적되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동남부지역 자료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검파형검초는 한국식동검문화의 일요소인 점에서 중원식 검초류와 뚜렷히 구별되는 특
징을 지닌다. 현재 알려진 평양일대의 자료들은 한군현 설치 이후의 것이 대부분이다. 그
러나 검파형검초가 한국식동검문화의 톡특한 특징 중 하나임을 감안하면, 서북한지방에
서 군현설치 이전의 관련 자료도 분명히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한반도 남부
지역 자료의 출현은 서북부 어디선가 형성된 검파형검초문화가 모종의 계기로 어느 시점
에 남부 각지로 전파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한편, 제작공정상의 지역색은 ‘검파형태’라는
큰 모델 아래 각 지역에서의
韓化과정, 이른바 재지화 과정을 거친 결과로 추정된다. 요컨
대 검파형 검초문화를 ‘
韓’사회의 공통 물질문화 요소 중 하나로 설정할 수 있으며, 지역
별로 간취되는 세부적 특징은 각 지역단위 사회에서 그러한 기술을 받아들이고 전개해 나
가는 여러 사회적ㆍ경제적 역량과 조건이 모두 상이했던 까닭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한
다. 아직은 어디까지나 선험적인 추측에 불과하며 이와 관련된 보다 정치한 논의는 향후
의 과제로 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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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민 철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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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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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에 대한 토론문_박 장 호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
」에 대한 토론문
박 장 호
경산시청
원삼국시대 칼집에 대한 연구는 목관묘에서 출토된 청동제 연결구와 장식구 등을 통해
칼집의 형태를 추정하였으나 창원 다호리유적 1호묘에서 온전한 형태의 칼집과 검이 출
토됨에 따라 칼집의 형태를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광주 신창동유적 저습지에서 다
수의 목제 칼집이 출토되어 칼집에 대한 연구가 이어져 왔다. 또한 최근 경산 양지리유적
1호묘에서는 칼집과 함께 창집과 꺾창집이 온전한 형태로 출토되어 남부지역에서 칼집이
어떤 형태를 가지는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칼집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진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는 칼집이 온전한 상태로 출토된 경우가 적고 재
질상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근 온전한 칼집 자료가
증가하고 있고 연결구와 장식구 등도 조사사례가 많이 증가하여 이전보다는 다양한 논의
가 이루어 질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발표는 출토유물의 관찰을 중심으로 칼집의 특징과 그 의미에 대해 살핀 연구로서
발표문을 읽고 몇 가지 의문사항에 대해 질문을 드리고 의견을 구하는 것으로 토론자의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
1. 지역별 출현 시점
발표자는 칼집이 출현하는 연대를 서남부지역은 서산 동문동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제
104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초하부연결구를 통해 서기전 3세기 후엽~서기전 2세기 초로 보았고, 동남부지역은 대구
월성동 777-2번지유적의 철검과 울산 교동리 1호의 청동제 칼집 부속구를 통해 서기전 2
세기 중엽경으로 보았다. 그런데 서산 동문동유적은 출토된 검파두식을 통해 공주 수촌리
유적 검파두식과 거의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어 동일한 단계로 볼 수 있다. 한편 공주 수
촌리유적에서는 판상형 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판상형 철기는 대구 월성동
777-2번지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는바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서산 동문동유적과 공주
수촌리유적, 대구 월성동 777-2번지 유적이 동일 단계로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
면 서남부지역과 동남부지역에서 비슷한 시점에 칼집이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고 판단
되는데 이에 대한 발표자의 의견을 듣고 싶다.
2. 서북부 지역과의 비교
발표자는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출토되는 칼집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였지만 서북부
지역에서도 다수의 칼집이 출토되었으며 남부지역에서 출토되는 칼집의 출현을 서북부지
역과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경산 양지리유적에서 출토된 칼집을 살펴보면
서북부지역에서 출토되는 칼집장식과 유사한 문양이 있는 것이 관찰되며, 서산 예천동유
적의 칼집장식의 경우 동남부지역과는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어 서북부지역에서 제작되
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에 서북부지역과의 관련성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가 있으시다
면 설명을 부탁드린다.
3. 형식분류에 대한 의견
발표자는 칼집에 대한 형식분류를 이건무의 분류안을 사용하여 정리하고 있다. 최근 칼
집 및 부속구에 대한 출토 사례가 많이 늘어났으며, 지역적별로 부속구의 형태에서 차이
점이 확인되고 있다. 동남부지역에서 출토되는 연결구와 장식구를 살펴보면 단면이 타원
형이고 대체로 둥글게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서남부지역의 연결구는 대체로 각지게
처리되어 있는 것이 관찰된다. 이러한 점을 통해 보았을 때 지역별로 차이점이 확인되며,
서북부지역의 사례까지 추가한다면 형식이 세분화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형식분
류를 세분화하는 것에 대하여 발표자의 견해가 있다면 밝혀주기 바란다.
4. 제작기법
칼집에 대한 제작기법적 연구는 이건무의 제작기법 복원안이 가장 통설로 자리매김하
고 있었으나 정인성에 의해 새로운 제작기술에 대한 제시가 이루어졌다. 이건무와 박영성
의 연구에서는 칼집을 2개의 나무판을 만들어 부착한 것으로 보았으나 연결구와 장식구
등을 결합하는 것이 어렵다는 한계점이 있다. 광주 신창동유적 출토 칼집을 보아도 두 개
105
토론문
「한반도 남부지방 출토 검파형검초의 특징」에 대한 토론문_박 장 호
의 판을 이용하여 칼집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래쪽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 형태
도 확인되고 있어 청동제품의 결합이라는 부분에서 문제점이 확인된다. 정인성의 새로운
제작기술은 나무에 직접적으로 거푸집을 만들어 청동용액을 부어넣어 장식구 등을 만든
다는 내용인데 이러한 부분은 청동용액의 온도 때문에 나무가 탈 가능성이 높다는 반대의
견이 많은 편이다. 발표자는 정인성의 제작기법에 대한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으로 연결구
내부에 붙어 있는 칠이 절연제로서의 기능을 하여 나무가 타지않고도 청동기제작이 가능
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단순히 칠의 존재만으로 절연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오히려 그림 8과 9에 제시된 내면에 붙은 점토질의 물질이 절연제
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서산 예천동유적의 연결구에서도 두터운 점토질
의 물질이 연결구 내부에 부착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발표자의 생
각을 듣고 싶다.
주제발표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辰ㆍ弁韓 재갈의 특징과 계통
윤 서 경 (국립대구박물관)
109
윤 서 경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辰ㆍ弁韓 재갈의 특징과 계통
Ⅰ. 머리말
재갈은 말의 입에 들어가 말을 강하게 제어하는 마구 가운데 하나다. 재갈은 재갈멈치
의 형태에 따라 보통 표비
鑣轡, 판비板轡, 환판비環板轡, 원환비圓環轡 등으로 구분된다.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원삼국시대 재갈은 모두 표비로 볼 수 있다. 표비는 동물의
뼈, 나무 조각, 녹각 등을 재갈멈치로 삼거나 철제나 청동제의 막대를 재갈멈치로 쓰는 재
갈이다.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원삼국시대 재갈들은 ‘변한
弁韓의 재갈’로 지칭할 수 있겠
으나 동시기 진한
辰韓의 것과 크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양 재갈의 모습은 아주
유사하므로 영남지방 원삼국시대 재갈은 진ㆍ변한
辰ㆍ弁韓 재갈로 통칭할 수 있다. 특히
창원 다호리 유적과 동시기인 원삼국시대 전기 목관묘 단계 재갈들은 지역에 따른 속성의
차이가 거의 없다.
재갈은 늦어도 원삼국시대에 진ㆍ변한 사람들이 말을 다루는 도구, 마구를 이용했음을
알려준다. 이에 더 나아가 재갈은 당시 사회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여러 단서를 제공한
다. 재갈은 현재까지 모두 분묘유적에서 확인되는데 피장자와 그 무덤을 축조한 집단이
무언가 남다른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재갈을 위세품으로 쓰거나 모종의 의례를 위
Ⅰ. 머리말
Ⅱ.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진ㆍ변한 재갈 검토
1. 다호리 재갈의 유형
2. 다호리 재갈의 편년
Ⅲ. 주변 지역 재갈로 본 다호리 재갈의 계통
Ⅳ. 맺음말
목 차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辰ㆍ弁韓 재갈의 특징과 계통
윤 서 경
국립대구박물관
110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한 도구로 사용했으리라고 본다. 궐수문 재갈을 포함한 궐수문 철기는 삼한 사회 지역 정
치체들의 상호작용 결과물이며(
禹炳喆ㆍ金玟澈 2009), 특히 궐수문 재갈은 진ㆍ변한 엘
리트들이 누세대적으로 정치적 권력을 계승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본다(윤서경 2016). 또
한 재갈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망자가 사후세계로 이동하는 데 쓰인 도구가 명기화 된
것(김진오 2020)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Ⅱ.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진ㆍ변한 재갈 검토
창원 다호리 유적 원삼국시대 분묘 가운데 19, 20, 23, 48, 69, 70, 79, 104, 119호묘에
서 재갈이 출토되었다(
國立金海博物館 외 2011ㆍ2013ㆍ2014, 국립중앙박물관 2012).
재갈은 대체로 목관과 묘광 사이에서 출토되는데 위치상 관외 충전토 상부 혹은 내부로
보인다. 말의 머리에 재갈을 매어 두는 굴레처럼 가죽끈을 고정하거나 연결하기 위해 사
용되었을 금속제 환과 교구도 일부 확인된다. 마구로 보기도 하는 닻형철기(고상혁ㆍ김훈
희 2014), U자형 철기도 확인되지만 차마구로 알려진 일산대꼭지, 입형동기 등은 확인되
지 않는다.
1. 다호리 재갈의 유형
진ㆍ변한 재갈
轡은 재갈멈치鑣, 재갈쇠銜, 고삐쇠引手로 구성된다. 재갈은 각 구성 요
소들이 지닌 다양한 속성과 속성상태를 조합해 형식을 분류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
천과 재갈의 속성 간 상응 관계를 고려해 총 4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윤서경 2016). 먼
저 재갈멈치의 장식 여부 따라 대분류를 하고 장식이 없는 것은 재갈멈치의 형태를 기준
으로, 장식이 있는 것은 재갈멈치의 크기를 기준으로 유형화한다. 제1유형은 판상의 S자
형이다. 이 가운데 재갈멈치가 양 끝이 일직선으로 마무리되지 않고 약간 날카롭거나 둥
글게 마무리되는 형태가 전형적인 프로펠러형이다. 제2유형은 판상의 I자형이다. 대체로
중앙부는 좁고 두껍지만 끝으로 갈수록 너비가 넓어지되 두께가 얇아지는 형태다. 제3유
형은 30cm 미만의 소형 장식재갈이다. 제4유형은 30cm 이상의 대형 장식재갈이다.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유형을 파악할 수 있는 재갈은 프로펠러형 재갈(제1유형)이 23,
69, 70(2), 104(2), 119호묘에서 7점, 소형 장식재갈(제3유형)은 19(2), 20호묘에서 3점,
111
윤 서 경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辰ㆍ弁韓 재갈의 특징과 계통
대형 장식재갈(제4유형은) 104호묘에서 1점 출토되었다<표 1>. 23호묘 재갈은 재갈멈치
의 중앙 상부와 2연식 재갈쇠의 안쪽고리가 연결된 부분만 남아있다. 재갈멈치는 일직선
으로 뻗기보다는 S자상으로 휘어있는 모습이며 현재 남아있는 양 단의 상태를 제3유형 재
갈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너비가 넓고 두께가 얇은 것으로 보아 프로펠러형일 가능성이
크다. 70호묘 재갈은 재갈멈치의 굴레 연결공 부위와 최하부가 남아있다. 최하부의 마무
리 형태로 보아 프로펠러형 재갈로 추정된다. 48, 79호묘에서는 꼬아 만든 2연식 재갈쇠
만 출토되었다.
재갈은 모두 재질이 철제로 단조기법으로 제작했다. 재갈쇠와 재갈멈치의 조합 방법은
삽입식으로 재갈쇠의 바깥 고리에 재갈멈치를 넣어 양자를 연결하는 구조다. 재갈멈치 중
앙에 두 개의 연결공을 뚫고 굴레를 통과시켜 말의 머리에서 재갈이 탈락하지 않도록 고
정한다. 연결공 사이에는 재갈쇠의 바깥 고리가 위치한다. 재갈쇠는 모두 두 마디로 구성
된 2연식으로 철봉을 꼬아 만든 기법이 확인된다. 꼬기 기법에 대해 1줄의 철봉을 S자로
두고 마는 3조 꼬기 기법이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諫早 直人 2012). 재갈의 특성 가운데
단조 철제품, 삽입식 재갈, 꼬아 만든 2연식 재갈쇠 등의 요소는 다른 지역의 원삼국시대
목관묘 유적 출토 재갈과 비교했을 때 시ㆍ공간적 위치와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진ㆍ변한 재갈의 보편적 양상은 아니나 경주 사라리 유적, 탑동 유적, 경산 옥곡동 유적
등지에서는 고삐쇠가 있는 재갈이 출토되었다. 하지만, 다호리에서는 고삐쇠가 있는 재갈
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고삐가 존재했다면 재갈쇠 바깥고리에 바로 걸어야 했을 것이
다. 또한 판상의 I자형 재갈(제2유형)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단순 I자형 재갈은 없으나 기
본형을 I자형으로 두고 궐수문 장식이 더해진 것이 104호묘에서 출토되었다. 궐수문 장식
I자형 재갈은 김해 양동리 382호 목곽묘, 거창 정장리 86호 목곽묘에서 출토되었지만 크
기가 30cm 이상의 대형은 다호리의 예가 유일하다.
번
호
목관묘
호수
제작
기법
재질
재 갈 멈 치
재 갈 쇠
고 삐 쇠
형태
연결공
현
길이
(cm)
마디
제작기법
현
길이
(cm)
방향
공의
개수
꼬기
기법
꼬지
않음
유/무
길이
(cm)
1
19호
단조
철제
S자형+궐수문
직교
2공
24.0
2연식
ㅇ
-
12.5
무
-
단조
철제
S자형+궐수문
직교
2공
24.0
2연식
ㅇ
-
12.5
무
-
2
20호
단조
철제
S자형+궐수문
직교
2공
21.6
2연식
ㅇ
-
11.4
무
-
3
23호
단조
철제
S자형
직교
-
5.9
2연식
ㅇ
-
5.2
무
-
4
48호
단조
철제
-
-
-
-
2연식
ㅇ
-
11.6
무
-
5
69호
단조
철제
S자형
직교
2공
22.7
2연식
ㅇ
-
12
무
-
<표 1>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원삼국시대 재갈의 속성과 속성상태
112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2, 다호리 재갈의 편년
재갈은 매우 기능적인 도구이나 반드시 기능성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
니다. 원삼국시대 재갈의 변천 양상 가운데 큰 흐름을 하나 꼽자면 재갈쇠와 재갈멈치의
조합 방법이 삽입식에서 결합식으로 변하는 경향이다. 재갈멈치와 재갈쇠는 연결된 이상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데 삽입식은 일정 부분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지만 결합식은 서로
의 움직임을 따라가게 되어 후자가 더 기능성이 떨어지는 조합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조합
방법의 변화와 함께 재갈멈치는 크기가 장대화되면서 비대칭이 심화된다. 특히 마구는 대
칭성을 상실해 좌우가 같지 않으면 말이 받는 힘이 달라져 인간의 뜻대로 말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재갈쇠는 2연식에서 한마디가 추가된 3연식이 등장한다. 3연식 재갈쇠는 철봉
자체가 얇아지며 꼬임의 간격이나 형태도 일정하지 않아 말을 제어했다고 보기 어려운 형
태로 변모한다.
진ㆍ변한 재갈은 묘제에 따라 크게 목관묘 단계를 제Ⅰ단계, 목곽묘 단계를 제Ⅱ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제Ⅰ-1단계는 프로펠러형 재갈을 대표로 한 재갈의 정보가 영남지방에
등장하고 현지에서 제작이 시작된다. 제Ⅰ-2단계는 제1ㆍ2ㆍ3유형이 공존하며 영남지방
에 재갈이 본격적으로 널리 제작되는 시기다. 제Ⅱ-1단계는 제1유형이 사라지고 제2유형
은 남아있되 장식 재갈인 제3ㆍ4유형이 주류를 차지한다. 제Ⅱ-2단계는 제4유형만 제작
되는 단계이다. 이 가운데 다호리 재갈의 편년적 위치는 제Ⅰ-1~2단계에 해당된다.
제Ⅰ-1단계는 영천 용전리 유적과 울산 창평동 2호의 전한경 연대로 보아 서기전 1세기
중엽을 중심으로 한다. 상한 연대는 성주 예산리 1호묘의 주머니호와 경산 양지리 2호묘
의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로 보아 서기전 1세기 전엽으로 생각된다. 하한 연대는 서기 전
후로 설정할 수 있다. 제Ⅰ-2단계는 창원 다호리 119호묘, 경주 사라리 130호묘, 경주 탑
번
호
목관묘
호수
제작
기법
재질
재 갈 멈 치
재 갈 쇠
고 삐 쇠
형태
연결공
현
길이
(cm)
마디
제작기법
현
길이
(cm)
방향
공의
개수
꼬기
기법
꼬지
않음
유/무
길이
(cm)
6
70호
단조
철제
S자형
직교
2공
25.2
2연식
ㅇ
-
11.9
무
-
7
단조
철제
S자형
-
-
6.6
-
ㅇ
-
-
무
-
8
79호
단조
철제
-
-
-
-
2연식
ㅇ
-
10.8
무
-
9
104호
단조
철제
S자형
직교
2공
18.2
2연식
ㅇ
-
11.0
무
-
10
단조
철제
S자형
직교
2공
18.5
2연식
ㅇ
-
11.8
무
-
11
단조
철제
I자형+궐수문
직교
2공
35.2
2연식
ㅇ
-
11.2
무
-
12
119호
단조
철제
S자형
직교
2공
20.6
2연식
ㅇ
-
16.5
무
-
113
윤 서 경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辰ㆍ弁韓 재갈의 특징과 계통
동 목관묘 출토 거울의 연대로 보아 서기 1세기 전엽과 서기 1세기 중엽에 해당된다. 하한
연대는 전기와질토기가 쇠퇴하면서 목곽묘가 등장하는 2세기 중엽으로 설정할 수 있다.
재갈의 세부 변천은 프로펠러형 재갈이 만곡도가 적은 것이 큰 것으로 발전한다. 이른
시기의 것은 재갈멈치의 양 단이 서로 대칭적으로 만곡하는 반면 시기가 늦어질수록 점차
대칭성을 잃어가는 것으로 변화한다. 굴레 연결공의 간격은 넓은 것이 기능적인 면에서
재갈쇠 바깥고리의 유동성이 상대적으로 많이 확보하므로 말에 미치는 압박의 효과가 덜
하나 점차 개량화 되면서 두 구멍 사이의 간격을 좁아진다(이상율 2006, 허미연 2014).
다호리 재갈의 상대 편년을 위해 공반된 조합식우각형파수부장경호, 주머니호 등 토기
를 참고하고자 한다<도 1>. 장경호는 이른 시기에는 경부의 만곡이 극히 미약하지만 시기
가 늦어질수록 경부의 만곡이 심화하면서 변곡점의 위치가 올라간다. 동체부는 최대폭의
위치가 상승하거나 장동화하는 경향이 있다. 주머니호는 전체적 외형의 변화가 이른 단계
와 늦은 단계에 따라 다르게 진행된다. 이른 단계는 동체부의 최대폭이 상승하는 경향이
고 늦은 단계는 경부의 내만도가 커지는 경향이다(
李盛周 1999ㆍ2014).
다호리 유적에서 서기전 1세기 전엽, 진ㆍ변한 재갈 등장기의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
다. 가장 먼저 재갈이 부장되는 시기는 토기 편년 Ⅰ-3단계로 20, 104호묘가 있다. 20호
묘 주머니호의 저부는 무문토기와 같이 굽이 있지는 않고 약간 말각 평저로 동최대폭이
중하위에 위치한다. 104호묘 장경호는 평저에 가깝고 동최대경이 중하위에 있으며 경부
가 외반한다. 주머니호는 평저에 가깝고 동최대경은 중하위에 있으며 경부가 만곡없이 직
선적으로 올라가 마무리된다.
토기 편년 Ⅰ-4단계는 23, 48, 119호묘가 있다. 23호묘 장경호는 동최대폭이 대략 중앙
에 있으며 경부가 짧고 약하게 외반한다. 타날문이나 횡침선문은 없다. 48호묘 주머니호
는 원저로 동최대경은 중위이며 구경은 곧게 올라간다. 119호묘 장경호 총 세 점이 출토
되었는데 전부 원저로 동최대경이 중앙에 있고 일부 승문타날문, 횡침선이 확인된다.
토기 편년 Ⅰ-5단계는 69호묘가 있다. 69호묘 장경호는 원저로 동체부의 형태가 거의
구형으로 장동화되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동체의 폭이 넓으며 중앙 지점이 가장 넓다.
경부는 직립하지는 않으나 크게 벌어지는 편은 아니다. 기면에는 종방향의 승문타날문과
1조의 횡침선을 다수 돌렸다. 또한 공반된 대부주머니호를 주머니호에 빗대어 살펴보면
원저로 동최대경은 중하위에 있으며 경부가 내만한다.
토기 편년 Ⅰ-6단계는 70호묘가 있다. 장경호는 세 점으로 모두 한 형식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약간의 차이도 확인된다. 첫 번째 장경호는 동체의 형태는 구형에 가까우며 동최
대경은 중앙에 있다. 경부는 나팔상으로 구연부로 크게 외반해 입지름이 동최대경보다 크
다. 승문을 횡방향으로 타날했다. 두 번째는 원저로 동최대경이 동체 중상위에 있다. 전체
적으로 동체부가 장동화되어 아래쪽이 좁다. 구경은 동체에서 단을 두고 직립하듯 올라가
114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며 외반한다. 종방향의 승문을 타날했다. 세 번째는 두 번째 것과 동체의 형태가 유사하며
상부에 동최대경이 위치한다. 구연이 나팔상으로 외반하는 형태이고 동체는 종방향의 승
석문이 시문되었다. 주머니호는 원저로 동최대경이 중하위에 있으며 경부가 크게 내만한
다.
<도 1> 다호리 재갈 공반 토기의 편년
연 대 단계
다호리 재갈 공반 토기
기준 토기(이성주 2014)
Ⅰ
-
1
단계
Ⅰ
-
1
Ⅰ
-
2
Ⅰ
-
3
0
Ⅰ
-
2
단계
Ⅰ
-
4
Ⅰ
-
5
Ⅰ
-
6
100
115
윤 서 경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辰ㆍ弁韓 재갈의 특징과 계통
재갈 편년 Ⅰ-1단계는 20, 104호묘가 있다. 진ㆍ변한 재갈의 편년과 비교해보면 다호리
재갈은 일찍이 궐수문이 장식이 채용되었다. 104호묘는 두 유형의 재갈이 나왔는데 제1
유형은 목관 내부 동단벽, 제4유형은 봉토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후자는 다른 유형과 공반
되어 출토된 사례가 없으며 경주 황성동, 조양동 유적, 포항 옥성리 유적, 울산 하대, 중산
리 유적 등 동남해안에 위치하는 진한
辰韓 유적에서 주로 출토되었다<도 2>. 이 재갈들은
시기적으로 서기 2세기 후엽~ 3세기 전반 해당된다. 그러나 104호묘의 재갈은 공반토기
로 보아 늦어도 서기 1세기로 추정된다. 다만 진한의 대형 장식 재갈이 기본형을 S자형을
두는 것과 달리 104호묘 재갈은 기본형을 I자형로 두며 재갈멈치와 재갈쇠의 조합 방법이
결합식이다. 재갈이 전반적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꼬임이 안정적인 2연식 재갈쇠가 채
용되는 점 등 이른 시기 재갈의 요소가 많이 확인된다. 재갈 편년 Ⅰ-2단계는 19, 23, 48,
69, 70, 79, 119호묘가 있다. 제1, 3유형이 지속적으로 채용된다. 공반된 토기들은 세부적
으로 시기 구분이 가능하나 재갈들은 같은 단계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도 2> 진ㆍ변한 재갈 제4유형(대형장식 재갈)의 분포
1. 창원 다호리 2. 포항 옥성리 3. 경주 황성동 4. 경주 조양동 5. 울산 중산리 6. 울산 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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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Ⅲ. 주변 지역 재갈로 본 다호리 재갈의 계통
진ㆍ변한 재갈은 유입시기에 대해 낙랑군 설치를 기준으로 이전(
李昌熙 2007) 혹은 이
후(
金斗喆 2000, 李尙律 1996ㆍ2006)로 논의되다가 구체적으로 서기전 82년 마노관 정
책의 폐지로 보기도 했다(이상율 2008). 계통에 대해서는 일찍이 한반도 서북부의 이른
시기 목관묘 단계 마구 일괄과 유사성을 염두하면서도 원류는 중국 전국
燕을 지적했다
(
李尙律 1996ㆍ2006ㆍ2008, 李昌熙 2007, 허미연 2014). 이후 국내에 몽골 흉노 재갈 자
료(국립중앙박물관 외 2003ㆍ2008ㆍ2011ㆍ2021)의 소개가 증가함에 따라 흉노의 영향
도 살펴볼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張恩晶 2012, 허미연 2014, 강나리 2018). 계통
을 추적하는 대상이 된 재갈은 재갈멈치의 형태가 S자형, I자형으로 궐수문 재갈은 일찍이
재지에서 고안된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진ㆍ변한 재갈의 계통은 중국 전국 연이나 몽골 흉노와 같이 시ㆍ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곳에 원류를 구하면서도 한반도 북부를 거치지 않고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남부
에 재갈을 비롯한 마구들이 등장할 수 없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특히 단장목곽묘
를 중심으로 출토된 프로펠러형 재갈, 을자형 동기, 권총형 동기 등의 한반도 북부 마구는
중국 한나라의 것과 분명히 구분되어 비한식 혹은 고조선식으로도 불린다. 아마 낙랑군 설치
이전인 위만조선에도 말을 다루기 위해 마구를 사용하는 문화가 존재했을 것이다1). 다만, 서
기전 1세기 전엽부터 영남지방에 재갈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위만조선(윤서경 2016) 혹
은 낙랑(
金斗喆 2001, 이현우 2020) 가운데 어느 영향으로 볼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창원 다호리 재갈에서 계통 추적의 대상이 되는 것은 프로펠러형 재갈이다. 이는 철제
단조품으로 재갈멈치의 끝이 둥글게 혹은 뾰족하게 마무리되고 꼬아 만든 2연식 재갈쇠
와 조합된다. 이러한 양상은 창원 다호리 재갈에 국한된 것은 아니고 진ㆍ변한 재갈 제1유
형의 정형성과 같다. 진ㆍ변한의 주변지역에서 출토된 판상 S자형 재갈의 사례를 살펴보
고 계통 추적을 위한 비교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도 3>.
우선 중국 전국 연나라의 재갈은 하북성 연하도 유적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전국
중기나 후기에 속하는 철제의 판상 S자형 재갈멈치가 있긴 하지만 특정 재갈쇠와 조합되
는 양상은 불분명하다. 다만 프로펠러형 재갈멈치와 꼬아 만든 2연식 재갈쇠가 조합된 철
제 재갈이 채집되었다. 채집품이라 고고학적 정황 정보가 유실된 한계가 있으나 이러한
요소가 연에 존재했고 한반도 북부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있다. 한나라의 재갈에도
1) 손로(2012)는 재갈과 공반되는 을자형 동기, 권총형 동기, 영두 통형 동기를 전한 중기 이후 쌍
원차와 관련된 차마구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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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서 경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辰ㆍ弁韓 재갈의 특징과 계통
판상 S자형 재갈이 존재하나 동제, 도금제가 대부분이다. 재갈멈치의 형태 또한 너비가 일
정하고 양 끝이 직선적으로 마무리되어 진ㆍ변한의 것과 차이가 있다. 일부 재갈에서 꼬
아 만들거나 꼬기 기법을 형상화한 2연식 재갈쇠가 조합되는 것이 주목된다.
몽골 흉노의 재갈은 그 이전 시기인 알타이 지역 파지리크 문화부터 판상 S자형 재갈을
찾을 수 있다. 서기전 5~3세기의 바얀-울기 아이막 올론 구르 골 유적이 대표적이다. 하
지만, 스키토-시베리아 문화의 그리핀 도상과 장식, 꼬지 않은 재갈쇠, 목제 재갈멈치, 금
박장식 등이 진ㆍ변한 재갈과 뚜렷한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이어 등장하는 불란-코
비 문화의 우스티-에디간 단계의 재갈(서기전 2세기~서기 1세기), 러시아 자바이칼 지역
<도 3> 주변지역의 판상 S자형 재갈
1.
燕 2. 漢 3. 匈奴(스키토-시베리아 문화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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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의 데레스투이 유적 출토품(서기전 2세기 초~서기전 1세기)이 있다. 헨티 아이막 도르릭
나르스 유적에서 재갈멈치가 휘어진 재갈들이 일부 출토되었는데 제작 당시 S자형을 고안
해 제작했을 가능성보다 외부 영향을 받아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휘어짐을 배제하고
보면 전형적인 흉노의 판상 I자형 재갈에 속하며 양 끝은 도끼날과 같이 직선적으로 마무
리되었을 것이다. 흉노 재갈은 철제로 측면 2공식의 재갈멈치와 2연식 재갈쇠의 조합 양
상이 진ㆍ변한의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S자형 재갈멈치는 일찍이 채용되었지만 보편적
으로 쓰인 것은 아닌 듯 하고 출토된 지역도 흉노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장은정 2018).
특히나 재갈쇠에 있어서 모두 단접한 2연식 재갈쇠가 일관되게 채용된 점이 주목된다.
한반도 북부의 재갈은 단장목곽묘를 중심으로 판상 S자형 재갈이 출토된다. 재질은 철제
로 제작기법은 단조일 가능성이 크다. 재갈멈치와 재갈쇠가 조합된 예는 평양 상리 목곽
묘, 평양 석암리 목곽묘에서만 확인된다. 석암리 목곽묘 재갈쇠는 철봉을 단접한 2연식이
다. 평양 토성동 4호묘의 재갈쇠는 주조품이나 꼬기 기법을 형상화했다. 재갈멈치가 공반
되지 않았지만 철봉을 꼬아 만든 재갈쇠가 은파군 갈현리 유적, 황주군 금석리 목곽묘, 은
율군 운성리 목곽묘, 평양 정백동 62, 67호묘 등 다수 확인된다. 기본형이 봉상인지 판상
인지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형태가 S자상을 띠는 철제 재갈멈치가 평양 정백동 195, 123
호묘, 락랑동 10호묘 등지에서 출토되며 2연식 재갈쇠와 조합된다고 보고되었다.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나 낙랑계 화분형토기, 세형동검이 동반된 가평 달전리 3호 목관
묘에서도 꼬아 만든 2연식 재갈쇠가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평양 상리 유적에 한하지만
진ㆍ변한 재갈의 재질, 제작기법, 조합 양상 등 전체적으로 동일한 예가 있으며 프로펠러
형 재갈멈치도 동시기에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어느 지역보다도 철봉을 꼬아 만든 2
연식 재갈쇠가 다수 확인되는데 진ㆍ변한 재갈 제1유형이 재갈멈치의 형태에 있어서 약
간의 차이가 있지만 재갈쇠는 모두 철봉을 꼬아 만든 2연식이라는 점에서 양자의 공통성
을 지적할 수 있다.
진ㆍ변한 주변 지역에서 출토되는 재갈들을 살펴보면 모두 일정 부분에 있어서 상사성
을 도출할 수 있다. 특히나 재갈쇠, 재갈멈치를 각각 독자적 개체로 살피면 상사성의 범위
는 더욱 넓어질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진ㆍ변한 재갈은 전체적 양상에 있어 강한 정형성
을 띤다고 본다. 특히 철제 단조품이라는 것과 프로펠러형 재갈멈치는 예외없이 꼬아 만
든 2연식 재갈쇠가 세트관계를 이루는 점이다. 한반도 북부는 연, 흉노 등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마구를 제작했으며 이는 한 혹은 낙랑계로 분류되지 않는 이른바 위만조선식 마
구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단접한 재갈쇠, 주조한 재갈쇠 등 다양한 제작 요소가 있지만
널리 채용된 요소는 꼬아 만든 재갈쇠다. 또한 프로펠러형 재갈멈치와 꼬아 만든 2연식
재갈쇠의 세트 관계가 비로소 재갈의 한 유형으로 자리 잡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진ㆍ변한의 프로펠러형 재갈도 위만조선식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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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서 경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辰ㆍ弁韓 재갈의 특징과 계통
<도 4> 한반도 판상 S자형 재갈멈치, 꼬아 만든 재갈쇠의 분포(서기전 2세기 후엽~서기 2세기 중엽)
1. 영흥군 소라리토성 2. 대동군 상리 3. 평양 토성동 4호묘 4. 평양 석암리 목곽묘 5. 평양 정백동 1호묘 6. 은
율군 운성리 1호묘 7. 은파군 갈현리 8. 가평 달전리 9. 성주 예산리 1호묘 10. 대구 평리동 11. 경산 임당 12. 경
산 양지리 2호묘 13. 경주 화천리 5호묘 14. 창원 다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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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Ⅵ. 맺음말
창원 다호리 유적은 현재까지 진ㆍ변한 재갈이 가장 많이 출토된 원삼국시대 목관묘 유
적이다. 진ㆍ변한 재갈의 전체적인 양상과 편년을 바탕으로 다호리 재갈을 검토하자면 금
호강 유역의 경산 신대리 유적, 대구 가천동, 신서동 유적 등지와 달리 판상 I자형 재갈이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는 점, 고삐쇠가 있는 재갈이 없는 점, 비교적 일찍이 궐수문이 채용
되는 점, 기본형이 I자형인 대형 궐수문 장식 재갈이 유일하게 출토되는 점 등이 특징이라
볼 수 있다.
다호리 재갈의 계통에 대해서는 판상 S자형 재갈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비
단 다호리 재갈에 국한된 논의가 아니라 진ㆍ변한 재갈의 계통과 결부되는 문제다. 계통
의 후보지로는 연, 흉노, 낙랑 등이 제기되지만 재갈의 재질, 제작기법, 조합 관계 등을 보
았을 때 위만조선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았다. 이는 프로펠러형의 재갈이 유형화되어
널리 쓰인 곳이 위만조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제한적으로 제시된 한반도 북부의 자료로
설명의 비약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현재까지 소개된 한반도 북부 재갈은 소량이지만 꽤
큰 정형성을 띤다고 생각한다. 또한 시기적으로 낙랑 설치 이후의 유적에서 출토된 마구
라도 이후 전형적인 낙랑계 재갈의 모습을 고려한다면 철제 마구들은 위만조선계로 파악
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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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서 경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辰ㆍ弁韓 재갈의 특징과 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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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토론문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辰·弁韓 재갈의 특징과 계통」에 대한 토론문_강 나 리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辰ㆍ弁韓
재갈의 특징과 계통
」에 대한 토론문
강 나 리
부산대학교
본 발표문은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판상 S자형 표비(
鑣轡)의 계통에 대해
서 논하고 있습니다. 판상 S자형 표비는 삼한시대 영남지역의 각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습
니다. 기존 연구에서 이러한 형태의 철제 표비가 영남지역에 집중되고 있는 것과 관련하
여 그 계통의 후보지로 삼은 곳이 연(
燕), 흉노, 낙랑 등입니다.
발표자는 프로펠러형 재갈멈치와 꼬아 만든 2연식 재갈쇠의 세트 관계가 재갈의 한 유
형으로 자리 잡은 곳을 한반도 북부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영남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판상 S자형 표비는 위만조선식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습니다.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판
상 S자형 표비 역시 그 계통이 위만조선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고 있습니다.
토론자 역시 넓은 시각에서 볼 때 영남지역의 철제 표비들은 그 영향의 정도와는 관계
없이 한반도 북부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이라는 점에는 공감하고 있습니다. 아래에서는
발표자의 견해나 궁금한 점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1. 변ㆍ진한 재갈의 계통은 시ㆍ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전국 연이나 흉노 등에서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남지역의 철제 표비 등장에 대해서는 계통지에서 곧바로 영남
지역으로 입수된 것이 아닌 한반도 북부를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
다. 발표자께서는 영남지역에 재갈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위만조선으로 파악하고 계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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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유적 재조명
Ⅰ- 금속기
으로 보입니다. 이번 발표의 주제인 다호리 유적 재갈의 계통과도 직결되는 문제라고 생
각됩니다. 따라서 발표자께서 영남지역 재갈 등장의 배경을 위만조선으로 파악하고 계신
이유와 그 입수 시점은 언제로 보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여쭙고자 합니다.
2. 발표자께서는 “한반도 북부는 연, 흉노 등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마구를 제작하였으
며 이는 낙랑계로 분류되지 않는 이른바 위만조선식 마구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발표자께서 창원 다호리 유적의 판상 S자형 표비의 계통으로 보고
계신 위만조선식 마구라는 것은 정확히 어떠한 것인지 또 연, 흉노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한반도 북부의 다양한 마구는 어떠한 것인지 보완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3. “단장목곽묘를 중심으로 출토된 프로펠러형 재갈, 을자형 동기, 권총형 동기 등의 한
반도 북부 마구는 중국 한나라의 것과 분명히 구분되어 비한식 혹은 고조선식으로 불린
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마구들이 영남지역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반도 북부
에서 출현하고 있는 소위 비한식 마구라고 지칭되는 마구 조합 중 차마구의 부속구로 볼
수 있는 을자형 동기, 권총형 동기 등은 영남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고 있습니다. 영남지
역에서 차마구 부속구는 출토되지 않고 오직 프로펠러형 재갈만이 출토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자 합니다.
ⓒ 국립김해박물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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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年 10月 19日 印刷
2021
年 10月 22日 發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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