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임_참고자료.hwp
닫기
붙임5 |
2018 제1회 국립김해박물관 웹툰 공모전 주제 참고 자료 |
주제1. 국립김해박물관의 가야 소장품을 활용한 이야기 관련 자료
1. 단단한 토기가 등장하다...
여러 지역의 가야에서 회청색의 단단한 토기가 유행합니다. 도질토기는 밀폐된 가마 속에서 1,000℃가 넘는 높은 온도로 구워지기 때문에 물의 흡수가 적고 매우 단단합니다. 이 토기는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물레로 만들어지며, 처음 나타나는 형태는 두 개의 꼭지가 달린 항아리입니다.
신라토기와 비교되는 가야토기는 굽다리접시의 굽다리 곡선이 아름다우며, 굽구멍이 일직선으로 뚫려 있습니다. 굽다리접시뿐만 아니라 항아리⋅잔⋅그릇받침⋅사물의 형태를 본떠 만든 토기 등 그릇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김해⋅고령⋅함안⋅고성⋅진주⋅창녕 등에서 각 지역의 특징을 나타내는 토기 문화가 나타납니다. 가야토기는 일본 고훈시대 토기인 스에끼의 발생 및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2. 풍부한 철로 다양한 물건을 만들다..
가야의 철기문화는 이 지역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철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규격화된 덩이쇠는 현재의 화페나 금괴의 역할을 하면서 활발한 교류의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교류의 결과, 가야에는 주변 나라의 귀중한 물건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가야의 여러 유적에서 동아시아 각 지역의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철제품은 활발한 교류뿐만 아니라 각 국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단단한 철갑옷과 투구를 비롯하여 도끼⋅낫⋅창⋅화살촉 등 다양한 종류의 무기류가 나타났고 세분화된 기능을 바탕으로 실용성을 증가시켰습니다.
덩이쇠
쇳덩이를 얇게 두드려서 만든 철판으로, 도끼나 창과 같은 철제품을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입니다. 긴 사각형 모양으로, 가운데 부분을 잘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덩이쇠는 크기⦁모양⦁무게를 비슷하게 만들어 화폐나 금괴처럼 사용하였습니다. 가야 지배자급 무덤에서는 다량의 덩이쇠를 10매 단위로 묶힌 채로 확인되기도 합니다.
3. 고리달린 칼과 미늘쇠를 들고...
청동검에서 바뀐 날카로운 철검은 실용적인 무기지만,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를 달고 그 안에 용이나 봉황을 장식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리자루칼이라 부르며, 금⋅은을 사용하여 다양한 무늬로 꾸몄기 때문에 장식대도裝飾大刀라고도 합니다. 가야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신라에서 신분⋅권위의 상징물입니다.
미늘쇠는 길쭉한 철판의 가장자리에 가시 모양의 미늘이 달린 철제품입니다. 그런데 합천 옥전⋅함안 말이산고분군 등 일부 지역의 큰 무덤에서는 새모양의 미늘이 달린 큰 미늘쇠가 출토됩니다. 이것은 묻힌 이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고, 새모양 토기와 함께 새를 숭배했던 그들의 정신 세계를 보여줍니다.
4. 가야의 지배자, 온 몸으로 말하다.
가야무덤에서 발견되는 금동관, 봉황과 용이 장식된 고리자루칼, 새모양 미늘쇠, 무더기로 쌓인 덩이쇠 , 다양한 종류의 구슬과 금⋅은 장신구는 가야 지배자의 실체와 위상을 대변합니다. 또한 김해·함안·고령 등 옛 가야의 중심지에 있는 큰 무덤과 순장殉葬으로 가야제국이 연맹체단계를 넘어 고대국가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대왕大王’을 새긴 목항아리의 존재와 대가야 국왕 하지荷知가 중국 남제南濟로부터‘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으로 책봉된 사실(479년)은 대가야의 최고 지배자가 왕으로 불리었음을 알려줍니다.
금동관
가야의 금동관은 화려한 신라의 금관과는 달리 단순한 나뭇가지 모양입니다. 신라 금관의 ‘山’ 자 모양의 초기 형태처럼 보이는데, 금못으로 관테와 입식 가지를 고정시키는 제작 기법은 유사합니다. 하지만 신라처럼 금관은 없고 금동관만 존재합니다.
동래 복천동 11호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얇은 관테의 가장자리에 물결무늬와 점무늬를 결합시켜 장식하고 있고 입식 가지에 3줄의 곁가지가 뻗어 있으며, 1~2줄의 달개를 달아 장식성을 더하였습니다. 그 외에 고령 지산동 32호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이 있는데, 입식의 모양이 넓은 광배처럼 생긴 판에 옆가지가 좌우로 뻗어 있고 맨 위에 봉오리 같은 장식을 표현하였습니다.
5. 구슬을 보배로 삼다가 금⋅은으로 치장하다.
화려한 장신구는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고,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정치⋅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역할도 합니다. 가야 이전의 변한사람들도 수정·호박·마노 등의 보석 광물과 함께 유리·금속을 이용하여 장신구를 만들었습니다. 1-3세기 유적에서도 옥이나 유리로 만든 구슬 장신구가 자주 발견되고, 3세기 대의 문헌인『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진⋅변한 사람들은 금⋅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꿰어 보배로 삼는다’는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4세기 이후 김해 대성동유적에서 금동관⋅허리띠⋅말갖춤 등이 확인되며, 금⋅은으로 만든 귀걸이나 팔찌는 5세기 중엽 이후에 많아집니다.
양동리
지산동
옥전
6. 하늘을 날아 영혼을 전달하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조弁辰條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은 새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한다는 믿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죽은 이의 영혼을 이끄는 전달자로서 새를 신성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무덤 속에 새를 본떠 만든 토기를 죽은 이와 함께 묻었습니다.
새모양 토기는 등과 꼬리 부분에 액체를 담거나 따를 수 있는 구멍이 있습니다. 목을 자른 새모양 토기나 머리만 넣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새와 관련된 다양한 형태의 의례儀禮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이여! 큰 새 깃털처럼 훨훨 날아다니게나...
7.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다.
의례儀禮는 집 안이나 집 주변, 농경지, 무덤, 산, 강이나 바닷가 등 당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의례를 할 때 흙인형, 모양을 본떠 만든 작은 토기와 철제품, 점을 칠 때 사용하던 복골卜骨 등을 사용합니다. 새를 본떠 만든 다양한 크기의 토기도 의례에 사용하였습니다.
의례 행위는 자연에 대한 숭배, 개인과 마을의 안전, 다산多産과 풍요, 죽은 사람에 대한 경외敬畏 등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8. 가야 사람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駕洛國記에 가야가 성립될 당시‘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 역사책인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조弁辰條의‘토지가 비옥하여 오곡五穀과 벼를 재배하기에 적합하다’라는 기록도 당시 가야에 농사가 활발하였음을 보여줍니다. 문헌 기록과 고고학 발굴로 오곡(쌀·보리·조·콩·기장)과 복숭아 같은 과일과 채소도 먹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밖에 소·돼지를 비롯한 가축, 사냥한 멧돼지·사슴, 야생에서 채집한 밤·도토리, 강이나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조개 등도 가야 사람들의 주된 먹거리였습니다. 이러한 음식은 나무나 흙으로 만든 그릇에 담아 먹었으며, 저습지유적에서 나무 그릇이나 농기구가 실제로 발견됩니다.
9. 특이한 습속을 지닌 예안리 마을 사람들...
김해 예안리유적은 낙동강 하류 자연제방 위에 위치한 대규모 무덤유적입니다. 조개류 등이 많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인골의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었습니다. 201구의 인골 분석 결과, 남자는 평균 164.7㎝, 여자는 150.8㎝이며, 어린아이가 30% 이상 차지합니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조弁辰條에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들기 때문에 지금도 진한사람은 모두 편두다.”라고 합니다. 예안리 인골에 앞머리가 납작한 편두偏頭가 존재하는 것은 삼국지 기록과 일치합니다. 바닷가 마을 예안리 사람들은 앞니를 일부러 뽑거나, 피부에 문신을 새기기도 하였습니다.
머리뼈(김해 예안리)
김해 예안리
가야 사람얼굴 복원 모습
10. 굽다리접시와 잔
굽다리접시는 중국에서‘두豆’라고 하며, 제사그릇으로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얕은 접시가 긴 굽다리 위에 붙은 모습이며, 가야토기 중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합니다. 굽다리접시의 굽구멍의 형태나 무늬 등 세부 형태로 각 가야 지역의 토기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야의 잔은 형태가 다양하며, 오늘날의 컵과 비슷해 ‘컵모양 토기’라고도 합니다. 보통 원통 모양의 잔에 큰 손잡이가 붙습니다. 굽다리잔은 굽다리 위에 아가리가 넓은 잔을 붙이고, 굽다리에서 잔까지 이어지는 큰 손잡이를 달았습니다. 굽다리에 점토판을 붙이거나, 작은 항아리 모양의 잔에 굽다리가 달린 것도 있습니다.
11. 가야토기는 지역마다 다르다!!!
가야토기는 낙동강 서쪽 지역에 분포하고, 가야의 여러 나라를 구분하는 주요 기준으로 삼습니다.
지역과 시기에 따라 4세기에 김해 금관가야양식, 5세기에 함안 아라가야양식, 고성 소가야양식, 고령 대가야양식으로 분류됩니다.
용도에 맞게 여러 가지 토기를 제작하였으며, 굽다리접시, 목긴항아리, 그릇받침, 뚜껑접시 등은 여러 가야를 구분할 수 있는 대표적인 토기입니다.
12. 쇠로 만든 칼로 가야를 지키다...
가야는 풍부한 철 생산지와 유리한 교역 환경때문에, 주변 나라의 표적이 되어 자주 전쟁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 三國史記』의 수많은 전쟁 기록과 일치합니다. 잦은 전쟁 탓에 여러 가지 종류의 무기를 개발하였으며, 대표적으로 칼⋅·창·화살 등이 있습니다.
철제 무기류는 살상 능력이나 관통력 증가, 신호를 알리는 기능 등 다양한 기능 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무기는 전쟁에도 사용하지만, 용⋅봉황을 장식한 큰 칼이나 매우 긴 창 등은 교류나 신분 과시에도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철제 무기류의 종류와 양으로 피장자의 신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13.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쓰고 싸우다.
갑옷은 전투에서 칼이나 화살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철로 만든 옷입니다. 처음에는 가죽이나 나무로 만들었으며, 철을 다루는 기술의 발달로 철갑옷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몸통을 보호하는 갑옷은 철판의 형태에 따라 판갑옷과 비늘갑옷로 나눕니다. 철판을 못이나 가죽끈으로 연결하여 완성합니다.
갑옷은 사람의 몸에 맞게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우수한 기술력이 필요하였습니다. 새나 고사리무늬를 장식하는 기법은 주로 영남 지역에서 확인됩니다. 지금 남아있는 갑옷 무게는 약 4~5kg 정도이지만, 철이 녹슬기 전에는 더 무거웠을 것입니다.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는 세로로 길게 자른 철판을 가죽끈이나 못으로 연결합니다. 투구 윗부분에 깃털로 장식하기도 하였습니다. 투구의 종류는 세로로 긴 철판을 엮어 만든 것에 반원모양의 복발이 얹은 투구, 앞쪽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투구, 모자 앞에 챙을 단 투구, 관모모양의 복발을 붙인 투구 등이 있습니다.
14. 말도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달렸다...
철갑옷은 사람뿐만 아니라 전사가 탄 말도 입었습니다. 말갑옷은 사람처럼 얼굴을 가리는 투구와 몸을 가리는 갑옷으로 구분됩니다.
말갑옷은 철판을 연결하여 만들었으며, 목가리개는 부채꼴모양으로 연결하였습니다. 말갑옷과 중무장한 무사의 모습은 고구려 벽화무덤이나 말 탄 사람모습의 토기에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실물 자료는 함안 마갑총馬甲塚;말갑옷이 확인된 무덤이라 붙여진 이름을 비롯한 함안 일원⋅부산 복천동⋅고령 지산동⋅합천 옥전⋅경주 황남동 등 대부분 영남 지역에서 나타납니다.
함안 마갑총은 대형 덧널무덤;길이 6.9m, 너비 2.8m으로 최초로 가야 말갑옷이 발견된 무덤입니다.
15. 쇠를 부리는 가야 사람들
김해金海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가야는 곧‘철鐵’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철 생산과 철제품의 보급은 사회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이었으며, 무덤에서 나오는 수많은 철제품이 이를 증명해줍니다.
고성 조개더미, 부산 복천동⋅밀양 사촌이나 임천리유적에서 확인한 철 생산유구와, 집게⋅모룻돌⋅망치 등의 단야구의 존재로 보아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기술과 다양한 철제품을 만드는 주조鑄造·단조鍛造기술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원 다호리유적에서 출토된 망치는 1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Tip 제련로의 구조
고대 제련로는 그릇을 엎어놓은 형태로 추정합니다. 노벽爐壁은 높은 온도와 압력을 견디기 위해 대나무 등으로 골격을 세우고 진흙⋅모래⋅짚을 섞어 벽체를 만든 후 점토를 보강합니다. 제련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송풍으로, 제련로 내의 온도 유지 및 연료 소모와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 송풍 장치는 나무상자 풀무와 가죽주머니이며, 송풍장치와 노 내부를 연결하는 송풍관이 있습니다.
철을 만드는 방법
1단계
원료 준비 : 제철 유적에서 확인되는 철광석은 대부분 자철광磁鐵鑛;자성을 띤 검은색 산화철 광물
채취 - 철광산에서 철광석이나 토철土鐵을 캐내거나, 강이나 바닷가에서 사철沙鐵을 채취
선광選鑛 - 철광석 중에서 철 함유물이 높은 광석 선별
배소焙燒 - 좋은 철광석을 금속이 녹는 점 이하로 가열(환원 및 파쇄 용이, 중량 감소, 운송 편리)
2단계
연료 준비 : 1,200℃ 이상 온도를 올리기 위한 숯 연료 필요
숯은 열에너지원, 숯이 가진 탄소가 철의 녹는점을 낮추고 불순물을 제거함
숯가마: 숯은 소나무와 참나무 사용, 소나무가 고온을 내는데 적합함
가마 내부에 나무을 쌓고
가마 입구(연소부)에서 불을 피우고
가마 측면의 여러 개의 구멍(측구)를 통해 온도와 산소 공급을 조절하고
가마 반대편 구멍(연도부)을 통해 연기가 빠져나감
완성된 숯은 측면의 구멍을 통해 빼냄
흑탄 - 600-900℃, 연도부와 측구를 막아 불완전 연소시킴→며칠 후 꺼내면 흑탄
백탄 - 1,000℃, 측구를 통해 숯을 꺼내서 흙이나 재를 덮어 강제로 소화시키면 백탄
3단계
제련: 철광석에서 1차로 철을 추출하는 과정
제련로 안에 철광석(원료)와 숯(연료)를 넣고 측면의 송풍구를 통해 바람을 불어넣어 온도를 1,200℃이상 올림. → 제련로 밖으로 흘러나오는 철재鐵滓; 슬래그, 철 찌거기를 배재구排滓口를 통해 꺼내고 → 작업 완료 후 배재구를 통해 1차 생산품인 철덩어리鐵塊를 꺼낸다.
제련로는 1,200℃ 이상의 온도를 견뎌야 하기 때문에 진흙+모래+짚을 섞어 다져서 단단하게 만듦
대부분 원통형이며 위로 갈수록 좁아지게 만드는데 열손실을 줄이고 연기가 위로 잘 빠져나가게 하기 위함. 원료의 철 성분과 불순물이 잘 분리될 수 있도록 석회석, 패각류, 짐승뼈 등 칼슘 성분의 첨가제를 넣기도 함.
먼저 녹은 불순물은 제련로 아래 쪽에 고여 온도를 낮게 하기 때문에 빨리 배재구를 통해 꺼내야 함
송풍구에 꽂는 송풍관이 있으며, 손⋅발풀무를 통해 바람을 불어넣어 산소를 공급함.
1차적으로 생산된 철 종류
괴련철塊鍊鐵 - 저온으로 환원되어 탄소 함량이 낮은 철괴, 표면에 스펀지처럼 구멍이 많아 해면철海綿鐵이라고도 함. 불순물이 많기 때문에 다시 가열하거나 두드려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정련 과정을 거쳐 단조철기를 만듦
선철銑鐵 - 고온으로 환원되어 탄소 함량이 높은 철,, 주조철기를 만듦
괴련철에 탄소를 주입하고, 선철에 탄소를 제거함으로써 단조철기를 만들 때 사용되는 강철을 생산함.
4단계
용해: 선철을 용해로에서 1,200℃로 가열하여 녹인 후 도가니에 쇳물을 받아 거푸집에 부어 주조제품을 만듦.
용해로: 땅을 얕게 판 뒤 제련로처럼 점토와 짚을 섞어 벽체를 만든다.
거푸집: 거푸집은 주로 점토로 만들거나 여러 번 사용하기 위해 철로 만들기도 함
2개가 세트로 만들어지며 2개를 포개어 틈새를 흙으로 메꾸고 끈으로 묶어 고정한 후 쇳물을 넣을 구멍을 위로 해서 땅에 묻는다. 쇳물을 거푸집에 부었을 때 거푸집이 압력으로 터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
5단계
단야: 철을 두드려 만드는 단계로 탄소가 적게 함유된 괴련철과 숯을 함께 넣고 가열하여 탄소를 침투시키면 강철이 됨. 이것을 집게로 집어 모루 위에 놓고 망치로 두드리면서 철 조직 내 불순물을 제거하면서 원하는 형태로 철제품을 만듦. 이 때 달구어진 철을 물이나 기름에 넣어 급랭시키는 과정을 반복하는 담금질을 통해 낫이나 칼과 같은 철제품의 경도를 더 단단하게 만듦.
주제2. 국립김해박물관의 건축물을 활용한 이야기
국립김해박물관 본관 이야기
건축가
성 명 장세양
출생 / 사망 1946년 ~ 1996년 9월 5일
소 속 ㈜공간건축사사무소
국립김해박물관은 사적지인 구지봉 자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기에 역사적 장소와 문화적 상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박물관 건물과의 조화를 이루어야합니다. 하지만 기존의 사각형의 틀로 박물관을 만들면 주변과 조화를 이루기가 힘듭니다.
박물관은 과거와 현재가 함께하는 공간입니다. 이 시간성을 나타내기 위해 원형의 울타리를 먼저 생각해냈습니다. 그리고 원형의 울타리 안에 사각형을 넣어 공간을 나누었습니다. 원과 사각형이 만나고 남은 바깥 부분은 외부공간으로서 구지봉과 조화를 이루게 했습니다.
전체 정문을 통해 김해라는 도시와 만나게 하였고, 박물관이 구지봉 공원에 녹아들게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김해라는 현재와 구지봉이라는 과거가 만나는 박물관이 완성되었습니다.
원형의 울타리 안에서 사각형으로 솟아오른 박물관 전시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철판의 색이 변하도록 하여 철기문화와 시간의 흐름이 쌓이는 모습을 상징하도록 했습니다.
국립김해박물관 가야누리 이야기
건축가
성명 공순구
출생 1960년 ~
소속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 원장
관람객들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주5일근무제에 대비한 지역주민의 평생학습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사회교육관으로 건립되었습니다.
교육관 건립은 정부와 지자체가 지역주민을 위해 상호 협력사업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김해시가 설계비와 건립부지를 제공하였으며 정부가 공사비를 부담하는 형태로 추진되었습니다.
사회교육관 건립 작업은 이미 하나로 완성된 본관과의 조화를 이루어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비례를 사용하여 박물관 본관과의 이질감을 줄이도록 했습니다. 본관과 마찬가지로 원과 사각형을 사용하였으며, 하나의 배경 같은 요소로 설계되었습니다.
‘가야누리’라는 이름은 2006년 교육관의 명칭 공모로 결정되었습니다. '가야누리'란 옛 가야의 지역에 위치한 건물로 널리 선조들의 정신과 생활을 알리는 좋은 터전이 되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