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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고고학

송 의 정 국립김해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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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가야

(42~562, 《 삼국유사

》)는 변한의 옛 땅인 낙동강 중․하류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철을 기반으로 삼아 고대 국제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함

. 초기에는 경남 

김해의 금관가야

, 후기에는 경북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발전한 가야 문화는 

뛰어난 세련미를 갖춤

.

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 부드러운 곡선미의 다양한 토기, 많은 양의 철제 

무기류와 금은 상감 장식 기법 등이 가야 문화의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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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문화의 전성

한반도 동남부의 소규모 세력으로 
출발한 가야가 성장한 데에는 풍부한 
철 생산과 활발한 대외 교역 활동이 
큰 몫을 차지함

. 가야에서는 철을 농·

공구류

, 무기류를 제작하는 데 

사용하였는데

, 철기 제작의 원료인 

덩이쇠는 화폐로 쓰기도 함. 가야는 
철제 농·공구류를 생산에 이용하여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한편

, 새로운 

무기와 말갖춤을 갖추어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짐

.

가야의 무기는 기능에 따라 적을 
살상하는 공격용과 적의 공격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용으로 구분 할 
수 있다

. 공격용 무기에는 칼, 

창, 

화살

, 꺾창, 도끼 등이 존재. 주로 

왕릉 급 무덤에서 용·봉황을 새긴 
고리자루칼(龍鳳文環頭大刀

과 세 

잎 고리자루칼(三葉文環頭大刀)이 
출토되는데

, 이는 지배자의 신분과 

연맹체 간 결속을 다지는 상징물

창은 기마 전술의 도입과 함께 
중요한 실용무기로 여겨졌으나 판 
모양 쇠창(板狀鐵

鉾)처럼 실용성이 

없고 장식성이 강한 창도 존재

화살촉은 촉머리의 모양에 따라 그 
기능이 구분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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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문화의 전성

철제 갑옷과 투구가 가야 지역에 출현하는 시기는 4세기 전반

. 5세기에는 고구려

·백제·신라와의 전쟁에 휩싸이는데

, 이와 함께 갑옷과 투구도 그 수요가 증가하여 

가야의 전 지역에서 출토됨

.

가야의 갑옷은 넓은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판갑옷(板甲)과 작은 철판을 물고기 
비늘처럼 엮어 만든 비늘갑옷(札甲)으로 구분

, 비늘갑옷은 보병이 착용하는 

판갑옷과 달리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어서 기바병이 주로 착용함

. 투구는 

형태에 따라 챙이 달린 모자형과 복발형으로 나뉨

. 투구의 정수리 분분에는 

고구려 무덤벽화에서 볼 수 있는 새의 깃털 같은 다양한 장식이 붙기도 함

이러한 갑옷과 투구는 방어용 무구일 뿐만 아니라 주로 왕릉 급 무덤에서 
출토되어 당시 지배자들의 상징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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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문화의 전성

 Ⅲ

말갖춤은 말을 제어하는 데 필요한 재갈 

· 굴레 · 고삐, 말 탄 사람의 안정을 위한 

발걸이 

· 안장 · 가슴걸이 · 뒤걸이, 그리고 장식용인 꾸미개 · 드리개 · 말방울 · 

깃발꽂이 등으로 구성됨

. 신라의 말갖춤이 호화로운 장식으로 구며졌다면 가야의 

말갖춤은 실용적인 면을 중시함

. 그러나 5세기 이후부터는 가야에서도 신라와 

백제 등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무늬와 금 

· 은 등으로 호화롭게 장식한 말갖춤을 

주로 사용함

.

실생활에 사용하던 철기는 따비 

· 괭이 · 쇠스랑 · 낫 등의 농구(農具)와 손칼 · 

도끼

 · 

끌 · 톱 · 조각칼 등 공구(工具)가 있음. 가야지역에서 단조 기술롤 만들던 

철제 농

 · 공구류는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일조하여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기반을 마련해 줌

.

의기성(儀器性) 철기에는 고사리 무늬 장식 쇠창을 비롯해 미늘쇠(有刺利器)가 
있음

. 모두 권위의 상징물로 사용하였는데, 주로 가야 각지의 대형 무덤에서 출

토. 현재 부산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은 고사리 모양이고, 경남 함안과 합천 

지역은 새 모양 장식이 미늘로 부착되어 있는 등 지역마다 특징이 있는 형태를 
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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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각국과 가야의 토기

가야토기는 원삼국시대의 토기 제작 기술에 고속 회전 물레

, 굴가마 등 새로운 

토기 제작 기법을 가미하여 만듦

. 이런 가야 토기는 굴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운 

회청색 경질토기(灰靑色硬質土器)와 생활 용기인 적갈색 연질 토기(赤褐色軟質

土器)로 구분하는데

, 모두 신라 토기와 비슷하나 기형이 곡선적이며 세련됨. 

이단 굽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

, 물결무늬가 새겨 있는 긴 목항아리, 다양한 

높낮이와 형태의 그릇받침 등이 가야 토기의 특징

.

가야토기는 지역에 따라 그릇 모양과 무늬 등 세부적인 면에서 뚜렷한 차이가 

인정되어 몇 개의 지역군으로 나눌 수 있으며

, 그 경계는 대체로 가야 각국의 

지배 범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음

. 즉 금관가야가 있던 부산과 경남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낙동강 하류역

, 아라가야의 옛 지역인 경남 함안지역, 

대가야의 옛터인 경북 고령과 그 주변 지역

, 소가야로 비정되는 경남 고성 · 사천 

· 진주 지역 등으로 나뉨. 이처럼 가야 각국이 존재하던 지역마다 독특한 토기가 

제작됨

. 그러다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세력이 급속도로 확대되면서 가야 

토기는 독자적인 원형을 잃어버리고 신라 토기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통일 양식 

토기 문화로 변화하여 낮은 굽다리접시

, 꺾인 목항아리 등과 같은 토기 형태로 

바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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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와 의례

가야의 제의행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죽은 이를 위해 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장례의식

. 가야인은 무덤을 만드는 동안 제사를 지내면서 각종 토기를 

부수어 무덤 주위에 뿌리거나 토기 바닥에 구멍을 뚫는 행위를 하며 죽은 자를 

추모함

. 특히 경남 김해 대성동 · 함안 말산리, 경북 고령 지산리 고분군의 대형 

무덤에서 보이는 딸려묻기(殉葬)는 당시 가야의 왕이 사회 구성원에 대한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였음을 보여줌

.

가야 무덤은 시기에 따라 덧널무덤(木槨墓

), 돌덧널무덤(石槨墓), 돌방무덤(石室

墓)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남. 덧널무덤은 나무덧널을 짜고 다시 그안에 주검을 

넣은 널을 안치한 무덤으로 

, 4~5C에 만들어짐. 무덤 주인공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딸린덧널(副槨)이 추가되어 규모가 커지는데

, 딸린덧널에는 각종 토기류, 

으뜸덧널(主槨)에는 의기

 · 무기 · 말갖춤 등 여러가지 철제품이 주로 껴묻혀 

있음

. 5C를 전후하여 등장한 돌덧널무덤은 깬 돌을 쌓아 만든 돌덧널 안에 

주검이 든 널을 안치한 무덤으로

, 가야의 대표적 무덤 양식. 기본적으로 긴 

네모꼴 구조이나 가야 각국에 따라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음

. 고령 지산리에서는 

돌덧널무덤과 봉토자락의 돌레돌 사이에 딸린무덤(陪塚)인 작은 돌널무덤이 

있고

, 경남 합천 옥전에서는 옆벽을 불규칙하게 쌓고 나무로 덮은 특이한 형태도 

발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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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와 의례

 Ⅱ

돌방무덤은 백제 무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짐

. 이러한 양식의 무덤은 경북 고령, 

경남 합천 등 대가야 문화권에 주로 분포하며

, 고령 지역의 특색 있는 유물이 

껴묻히다가 신라의 영향이 미치면서 신라 양식의 유물로 바뀜

.

한편 가야무덤에서는 동물이나 물건을 모방해서 만든 상형 토기가 출토되는데

이것은 죽은 이의 안식과 영혼의 승천 등 사후 세계에 대한 상징적 기원과 염원을 
표현한 것

. 이것은 제사와 관련된 의식이 끝난 뒤 주인공과 함께 무덤에 묻힌 

것으로 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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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대외교류

가야는 바다와 접해 있는 지리적 이점과 풍부한 철 자원을 바탕으로 대륙은 물론 
일본과도 활발한 교류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함

.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사회에서 대륙과의 교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로는 호랑이 모양 띠고리(虎形帶鉤)와 청동 솥(

鍑), 청동 

거울(銅鏡

) 등이 있음. 이들 유물은 내몽골이나 중국 동북 지역에 기원을 둔 유목 

기마민족 계통의 것으로

, 한반도의 서 · 북한 지역을 거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 또한 벽옥제 돌화살촉(璧玉製石鏃), 바람개비 모양 청동기(巴刑同器)와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적갈색 토기(土師器) 등은 일본과의 인적 또는 물적 교류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

. 대륙과 왜계 유물은 가야에서 생산한 철과 교환된 것으로, 

당시 김해의 금관가야가 대외무역의 중개지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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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대외교류

5~6C 후기 가야의 대외교류는 전기만큼 활발하지 못하였으나, 경북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중국 남조

, 왜와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 나감. 또한 가라국왕이 

중국 남제로부터 ‘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

)’의 작호를 받았다는 기록을 

보아 중국과 긴밀한 교류 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음

왜(倭)와는 고령을 

중심으로 교류 하였으며

, 일본의 유력한 수장묘(首長墓)에서 대가야 계통의 

위세품인 투겁창

, 말재갈, 허리띠꾸미개, 귀걸이, 말띠드리개(劍菱形杏葉), 

말얼굴가리개(馬胄)가 발견되고 있음

. 국내에서는 경북 고령 지산리 44호 

무덤에서 출토된 오키나와산 야광 주개로 만든 국자

, 경남 고성 송학리 무덤과 

경남 합천 봉계리 무덤에서 출토된 일본제 경질토기(須惠器

), 경남 산청 

생초고분군에서 출토된 청동 거울 등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