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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 주제 참고 자료

주제1. 국립김해박물관의 가야 소장품을 활용한 이야기 관련 자료

1. 낙동강 하류역의 선사문화

낙동강 하류역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유적은 후기구석기시대에 해당합니다. 주로 몸돌석기와 좀돌날몸돌슴베찌르개 등 작은 석기류가 출토됩니다. 신석기시대가 되면 식량을 저장할 토기와 간석기가 출현하고 초보적인 농사를 시작합니다. 주로 자원이 풍부한 강가나 바닷가에서 살며, 때로는 먼 바다로 나가 고래를 잡기도 하였습니다. 청동기시대에는 청동기와 간석기민무늬토기를 사용하였습니다. 본격적인 논농사를 지었으며, 낮은 구릉이나 평지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만들고 공동체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거대한 고인돌을 만들었습니다.

슴베찌르개 / 밀양 고례리 / 길이 8.5cm

흑요석 돌화살촉 / 통영 연대도, 욕지도 등 / 길이 2.5cm (좌상)

도구의 제작은 인류가 자원을 활용하고, 풍요로운 삶을 꾸려 나가는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돌을 깨뜨려 날카롭게 만든 석기로 사슴, 노루, 멧돼지 등을 사냥했습니다.

흑요석은 쉽게 쪼개지고 깨진 면이 날카롭기 때문에 화살촉을 만들 때 주로 이용합니다. 우리나라 흑요석의 원산지는 대부분 백두산과 일본 규슈지방입니다. 물자 교류 측면에서 중요한 자료입니다.

배 / 창녕 비봉리 / 길이 310cm

멧돼지문양토기편 / 창녕 비봉리 / 길이 18cm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 출토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약 8,000년 전)입니다. 200살 된 소나무를 U자 모양으로 파내어 만들었습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풍부한 바다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물고기 잡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또한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 사람들과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은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숭배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할 때도 죽은 후의 세상에서 현세와 같은 생활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죽은 이를 화려하게 꾸미는 등 여러 의례를 행했습니다.

간돌칼 / 부산 괴정동 / 25.3cm

붉은간토기 / 진주, 울산 등 / 22cm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며, 무덤 위에 큰 돌을 올려놓거나 큰 돌을 관의 뚜껑으로 사용했습니다.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에서 많이 확인되는 간돌칼은 의례용 도구이자 무기입니다. 이 간돌칼은 자루 끝과 칼 코가 옆으로 길게 뻗어 장식성이 강조된 것인데, 특별히 껴묻거리로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청동기시대 토기는 민무늬토기입니다. 민무늬토기는 천장 구조가 없는 노출된 가마에서 구우며, 다양한 형태와 용도의 토기를 만들었습니다. 단순한 선무늬나 구멍무늬가 있거나, 표면에 붉은색이나 검은색을 칠한 토기도 있습니다. 그 중 붉은간토기는 표면에 산화철을 발라 구워 내어 붉은색 광택이 납니다. 의례용으로 보이지만, 집터에서도 확인됩니다.

2. 가야의 여명

가야와 신라가 성립하기 이전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에 진한辰韓, 서쪽에 변한弁韓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덧띠토기와 철기를 일부 지역에서 먼저 사용하였습니다. 고조선古朝鮮이 멸망(기원전 108년)하고, 철을 다루는 우수한 기술이 영남지방으로 확대되어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먼저 철기를 일반적으로 사용하였고, 투박한 적갈색의 민무늬토기 대신 밀폐된 토기가마에서 고온으로 구운 회백색 와질토기로 바뀌었습니다. 무덤도 고인돌에서 널무덤과 덧널무덤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풍부한 철과 철제품을 바탕으로 주변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가야로 발전합니다.

청동거울 / 밀양 교동 3호 / 지름 10cm

수정목걸이 / 김해 양동리 / 길이 3cm (가운데 곱은옥)

자신의 힘을 보여 주는 방법 가운데 으뜸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귀중한 물건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중요한 물건은 청동검, 옥, 거울, 옻칠 제품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고대 거울은 단순히 얼굴을 비추는 용도가 아닌, 지배자들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위세품이었습니다. 거울 뒷면에 새겨진 무늬나 문자는 청동거울의 제작 연대, 교류 관계, 사상 등 당시의 많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구슬류를 귀하게 여겼던 삼한과 가야 유적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유리와 수정목걸이라 확인됩니다. 수정은 아주 단단하기 때문에 원석 자체를 달아서 둥근 모양이나 여러 면을 가진 형태로 만들기가 어려웠습니다. 김해 양동리에서 확인된 이 수정목걸이는 현재 확인된 수정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쇠뿔모양 손잡이 항아리 / 창원 다호리 / 높이 31cm (왼쪽)

요령식동검 / 김해 회현동 / 22cm

삼한은 주변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를 재해석해서 개척하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변한에서는 본격적인 철제품과 새로운 토기를 사용했습니다. 회색의 고운 진흙과 회전물레를 사용해서 만들었고, 높은 온도의 밀폐 가마에서 구웠습니다. 쇠뿌 모양의 손잡이가 붙은 항아리는 청동기시대에 유행하던 민무늬토기에서 발전했습니다.

회현동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한국식 동검으로, 검의 날개등날결입부가 없으며, 융기부가 없는 점이 특징입니다. 전체적으로 마연한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데, 거푸집에서 꺼낸 상태 그대로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연되지 않은 동검은 화순 대곡리, 완주 신풍갈동 유적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청동 말오양 허리띠고리 / 김해 구지로, 울산 하삼정 / 길이 6.7cm (왼쪽)

개오지조개 / 사천 늑도 / 길이 2.5cm

중국이나 일본 등 주변 지역과의 교환이나 교류를 보여 주는 고고학적 증거는 다양합니다.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나 사천 늑도김해 양동리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일본 야요이계 토기, 낙랑계 토기, 중국 거울, 중국 화폐 등이 발견됩니다. 말 모양의 허리띠 고리는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띠의 한쪽에 꼭지 모양의 걸쇠를 꽂고, 다른 한쪽의 띠에 연결되는 둥근 고리에 걸어서 착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말 모양 외에 호랑이 모양 허리띠 고리도 있으며, 동물을 표현한 것은 중국이나 북방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주로 열대 지방의 얕은 바다에 사는 조개로, 일본 오키나와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개오지조개는 중국 상나라에서 화폐처럼 사용했다고 합니다. 사천 늑도 유적에서 개오지조개 외에도 일본 야요이계 토기, 낙랑 토기 등 주변 나라의 물건들이 확인되는 것을 보면, 늑도가 국제무역항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확인되는 주변 나라의 물품은 변한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철과 맞바꾸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나 후한서 등 중국 문헌에도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3. 가야의 성립과 발전

가야加耶는 낙동강 서쪽의 변한 지역에 있었던 여러 세력 집단이 성장한 나라입니다. 그 명칭은 가야加耶가야伽耶가라迦羅가량가락駕洛가락伽洛임나任那 등 다양합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기록에 따른 가야 영역은 오늘날의 낙동강 하류와 남해안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과 가야산 일대로, 낙동강 서쪽의 영남지역이 중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야의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영역이며, 가야의 빠른 시기 영역은 고고학연구 성과에 따라 낙동강 동쪽 일부 지역까지입니다. 가야는 5가야⋅6가야가야7국포상浦上8임나任那10국 등의 형태로 문헌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금관가야대가야소가야아라가야비화가야 등으로 불리었습니다. 여러 소국小國로 구성된 가야는 백제·신라와 패권을 다투었지만, 고령의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562년)되면서 역사의 막을 내렸습니다.

긴 목 항아리와 바리모양 그릇받침 / 김해 대성동 / 높이 39cm

덩이쇠 / 함안 도항리 / 48.4cm (하단)

여러 지역의 가야에서 회청색의 단단한 토기가 유행했습니다. 밀폐된 가마 속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지기 때문에 물의 흡수가 적고 매우 단단합니다. 이 토기는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물레로 만들어집니다. 가야 토기는 굽다리 접시의 굽다리 곡선이 아름다우며, 굽구멍이 일직선으로 뚫려 있습니다. 굽다리 접시 뿐만 아니라 다양한 그릇을 만들었으며 각 지역의 특징을 표현하는 토기 문화가 나타납니다. 가야 토기는 일본 고훈시대 토기인 스에키의 발생 및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야의 철기문화는 이 지역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철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해습니다. 특히 규격화된 덩이쇠는 현재의 화폐나 금괴의 역할을 하면서 활발한 교류의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교류 결과, 가야에는 주변 나라의 귀중한 물건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가야의 여러 유적에서 동아시아 각 지역의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철제품은 활발한 교류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봉황장식 큰칼 / 합천 옥전 / 길이 83cm

미늘쇠 / 함안 도항리 / 60cm

청동검에서 바뀐 날카로운 철검은 실용적인 무기인데,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를 달고 그 안에 용이나 봉황을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고리자루 큰칼이라 부르며, 금은을 사용해 다양한 무늬로 꾸몄기 때문에 장식대도라고도 합니다. 가야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신분과 권위의 상징물입니다.

미늘쇠는 길쭉한 철판의 가장자리에 여러 개의 고사리 모양의 미늘이 달린 철제품입니다. 나무 자루를 꽂는 구멍이 있어 말을 탄 적군을 걸어 떨어뜨리는 전쟁용 무기로 보기도 합니다. 고사리 모양 대신 새 모양이 장식된 미늘쇠는 장식성이 강조되어 특정한 지배층이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함안과 합천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특징적인 유물입니다.

금동관 / 부산 복천동 / 높이 25cm / 보물 1922호

은허리띠장식띠드리개 / 창녕 교동 / 길이 75cm

가야의 금동관은 신라의 화려한 금관과는 달리 단순한 나뭇가지 모양입니다. 신라의 금관 장식인 자 모양의 초기 형태처럼 보이는데, 금못으로 관테와 입식 가지를 고정하는 제작 기법은 유사합니다. 하지만 신라처럼 금관은 없고 금동관만 존재합니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류역의 가야는 고구려의 남정(400년)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6세기 대 이후 신라의 본격적인 팽창 정책으로 창녕 지역이 먼저 신라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그 뒤 금관가야의 멸망(532), 대가야의 멸망(562)을 끝으로 가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에따라 가야의 여러 지역에서 유행하는 독특한 토기나 장신구도 신라 지방 문화의 하나가 되어갑니다.

역사 속에 빛나던 가야 사람들

가야라는 이름 아래 빛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처럼 수많은 인재들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지만, 우리가 거론할 수 있는 가야출신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재위 521~532, 구형왕仇衡王이라고도 함의 증손자로,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자,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른 사람입니다. 고구려 낭비성 전투로 큰 공을 세웠으나, 가야계 출신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여동생을 진골인 김춘추에게 시집을 보내 인척관계를 맺었고, 한 번도 패배하지 않는 명장이자 정치가로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우륵于勒은 대가야에서 태어나 520년 초반 30대 즈음에 대가야의 가실왕嘉悉王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가실왕은 당시 대가야의 불안한 상황 속에 권력을 강화하고 세력을 결속하기 위해 우륵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작곡하도록 명하였습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 가야금은 중국 악기인 쟁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하지만, 가야금은 독창적인 가야 악기입니다. 우륵은 신라로 넘어가 진흥왕에게 발탁되어 대가야 음악을 알렸고, 우륵의 음악은 신라의 국가國歌 대악大樂이 되었습니다.

진경대사眞鏡大師; 855~923는 원래 이름은 김심희金審希, 임나왕족이자 흥무대왕興武大王;김유신의 시호의 후손이라고 진경대사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라 불교의 진흥에 기여했으며,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창원 봉림산문鳳林山門을 창건하였습니다.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보물 제362호과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보물 제363호)가 남아있습니다.

4. 가야사람들의 삶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조弁辰條에 의하면 사람들은 누에치기와 옷감 제작, 오곡 재배, 그리고 철 생산과 교역 등으로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김해 봉황대와 고령 지산리유적에서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문헌에 의하면 왕은 궁성 내에 왕궁을 짓고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서민들은 주로 움집이나 초가에서 살았고 이층으로 만든 다락집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부뚜막 시설과 음식을 쪄먹는 시루, 이동식 부뚜막 토기가 여러 유적에서 발견됩니다.

가야사람들은 논밭농사로 식량을 얻었고 고기잡이나 조개류 채집도 여전히 중요한 생산활동이었습니다. 김해 봉황동(옛 회현리)부원동조개더미뿐만 아니라 내륙에 위치한 고령에서도 바다 생선과 조개류가 발견되는 것은 낙동강을 통한 활발한 교류 활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모양 토기 / 창원 석동 / 17.6cm

새모양 토기 / 김해 망덕리 / 14.6cm

가야의 집은 발굴한 집터와 집 모양 토기로 복원할 수 있으며, 주로 구덩이를 파서 만든 움집과 고상가옥이 있습니다. 움집은 보통 사람들의 살림집으로 부뚜막과 온돌 시설을 갖추었슨비다. 고상가옥은 높은 기둥을 세워 만든 이층집으로, 짐승과 습기로부터 곡물을 보호하는 창고이자 지배자의 권위를 보여 주기 위한 건축물이었습니다. 경북 현풍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집 모양 토기는 고양이와 쥐가 표현되어 가야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입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은 새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한다는 믿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새를 죽은 이의 영혼을 이끄는 전달자로서 신성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새를 본떠 만든 토기를 죽은 이와 함께 무덤 속에 묻었습니다. 새모양 토기에는 등과 꼬리 부분에 액체를 담거나 따를 수 있는 구멍이 있습니다.

점치는 뼈 / 김해 회현동 / 19.2cm (가운데)

시루 / 김해 부원동 / 29cm

의례는 집 안이나 집 주변, 농경지, 무덤, 산, 강이나 바닷가 등 당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의례르 할 때 흙인형, 모양을 본떠 만든 작은 토기, 철제품, 점을 칠 때 쓰던 점뼈 등을 사용합니다. 점치는 뼈는 고대 사회에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점을 치는 행위에 사용되는 뼈입니다. 주로 사슴이나 멧돼지의 어깨뼈를 이용합니다. 뼈를 불로 지져 갈라지는 모양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것입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가야가 성립될 당시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의 토지가 비옥해 오곡과 벼를 재배하기에 적합하다라는 기록도 당시 가야에서 농사를 지었음을 나타냅니다. 일반적으로 음식은 날것으로 먹는 경우도 있지만, 찌거나 삶은 조리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시루는 아래에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있고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어 고온의 수증기로 음식물을 찌는 원리로 조리합니다.

절구와 절굿공이 / 부산 고촌 / 34.5cm (절구)

쇠살포 / 김해 대성동 / 19cm (쇠부분)

절구는 곡식을 빻아 가루로 만들거나 겉껍질을 벗기는 데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절구를 이용한다는 것은 단단한 낟알을 빻아 가루를 내어 죽 같은 음식을 만드는 조리법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현재 전시된 절구는 소나무로 만들었습니다.

논에 물이 잘 흘러갈 수 있도록 작은 도랑을 트거나 김을 맬 때 사용하던 농기구입니다. 나무 자루를 꽂아 사용하기 위해 투겁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한국 특유의 농기구이며, 수장층 무덤에 부장되어 당시 논농사를 장악하고 통치했던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농기구임을 보여 줍니다. 삼국시대 허리띠 장식에도 보이고, 조선시대에 높은 벼슬에 오르면 임금이 직접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5. 세련된 곡선미의 가야토기

가야토기는 단단한 토기와 무른 토기로 나눕니다. 도질토기는 굴가마에서 1,000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구웠기 때문에 매우 단단한 회청색 토기입니다. 연질토기는 한데가마에서 낮은 온도로 구웠기 때문에 흡수성이 높고 무른 편이며, 붉은 색 토기입니다. 도질토기는 저장·의례·장식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연질토기는 일상생활용으로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가야토기가 생산된 분포 범위는 가야산 이남의 낙동강 서쪽 지역에서 호남 동쪽 지역까지이고, 시기는 3세기 대부터 6세기 대까지 제작되었습니다. 신라 토기보다 두꺼운 편이지만, 세련된 곡선미가 특징입니다. 가야의 각 나라마다 형태와 무늬 등 세부적인 차이가 있으며, 가야 토기의 제작 기술은 일본의 고대 토기인 스에키 발생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항아리 / 함안 말이산 / 55cm

대왕이 새겨진 긴 목 항아리 / 출토지 미상 / 16.8cm

가야 토기는 굴가마에서 구워집니다. 굴가마는 구릉 사면에 굴을 파서 만든 지하식과 경사면을 약간 파고 들어가 지상에 천장을 만든 반지하식이 있습니다. 가야의 대표적인 가마 유적은 창명 여초리, 함안 우거리 유적입니다. 본 항아리는 함안 말이산 4호 돌덧널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마치 백자달항아리를 보는 듯합니다. 항아리 전체 표면에는 도구를 통해 두드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보통의 가야 토기보다 크고 두꺼워 상당히 무거운 편입니다.

종이를 발명하기 전 사람들은 나무나 대나무를 다듬어 종이 대신 사용했습니다.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붓과 글자를 지우는 데 쓰던 손칼이 출토되어 기원전 1세기 대에 이미 문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변한이 중국과 교역하기 위해서는 문자의 필요성이 더욱 컸을 것입니다. 이 항아리는 大王대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가야에 왕이라는 칭호가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긴 목 항아리원통모양 그릇받침 / 부산 복천동 / 72cm

굽다리접시 / 함안 도항리 / 19cm

밑바닥이 둥근 항아리는 가장 단순한 형태지만, 아가리의 길고 짧음과 벌어지는 곡선에 따라 소박한 가야토기의 미적 감각을 잘 표현합니다. 둥근 바닥 항아리를 받쳐 두기 위한 용도로 만든 것이 그릇받침입니다. 길쭉한 원통 모양과 넓은 바리 모양, 화로 모양으로 구분됩니다. 본 그릇받침과 항아리는 복천동 돌덧널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그릇받침에는 위로 올라가는 거북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런 원통 모양 그릇받침은 무덤 내부 뿐만 아니라 봉토나 주구에서도 확인되기 때문에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굽다리 접시는 신석기시대부터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는 토기입니다. 중국에서 라고 하며,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에는 두형토기로 불립니다. 예기를 참고하면 나물이나 고기를 담은 제사 그릇으로 많이 사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맡은 접시가 긴 굽다리 위에 붙은 모습이며, 가야 토기 중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합니다. 굽다리의 무늬나 다양한 형태의 구멍으로 지역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토기는 함안 지역 아라가야에서 유행한 불꽃무늬가 뚫린 형태입니다.

손잡이 잔 / 함안 황사리 / 10.7cm

수레바퀴모양 토기 / 함안 말이산 / 15cm

가야의 잔은 형태가 다양하며, 오늘날의 컵과 비슷해 컵모양 토기라고도 합니다. 보통 원통 모양의 잔에 큰 손잡이가 붙습니다. 잔의 중앙부가 볼록하게 만들어지거나, 깊이가 낮은 접시모양에 손잡이를 달기도 합니다. 이러한 손잡이 잔은 단순한 직선과 곡선의 미를 살려 만들어진 소박한 가야토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토기입니다.

상형토기는 인물이나 동물 또는 특정한 물건의 모습을 본떠 만든 토기입니다. 형상을 본따 만들 때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대상을 생략과장추상하는 방법을 통해 표현했습니다. 수레바퀴모양의 토기는 아라가야 지역에서 많이 만들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저세상으로 편히 갈 수 있게 하는 배려의 의미를 담았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6. 철의 왕국, 가야

은 청동보다 단단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실용성이 큰 재질입니다. 우리나라 서북 지역의 초기철기시대유적에서 중국 연나라(B.C. 323~222년) 화폐인 명도전明刀錢과 철제품이 함께 출토되어, 이 시기에 철기 문화가 한반도에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야의 성장 기반은 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철 생산과 철제품의 보급은 사회를 변화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삼국지三國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이 지역에서 생산한 철은 화폐처럼 사용되었으며, 낙랑과 대방, 왜에 수출될 정도로 해상 교역의 중요한 물품이었다고 합니다. 가야 유적에서 출토되는 덩이쇠는 정량화·규격화되었기 때문에, 화폐나 교역의 매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쇠투겁창 / 함안 도항리 / 63cm (오른쪽)

나무 활 / 창원 신방리 / 69.6cm(아래쪽)

가야는 풍부한 철 생산지와 유리한 교역환경 때문에 주변 나라의 표적이 되어 자주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의 수많은 전쟁 기록과 일치합니다. 쇠투겁창은 쇠로 만든 창으로, 뾰족한 날 부분과 나무자루를 끼우는 투겁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철제 무기류는 살상 능력이나 관통력 증가, 신호를 알리는 용도 등 다양한 기능 분화기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신분을 과시하는 데도 사용했습니다.

창원 신방리 유적에서 출토된 곧게 뻗은 활입니다. 양쪽 끝부분에 고리를 걸 수 있게 단이나 홈을 파고, 그곳에 활줄을 걸게 만든 것을 직궁이라고 합니다. 자 형태에서 활둘을 걸 수 있게 만든 것은 만궁이라고 하는데, 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부이며, 기마용으로 적합합니다. 화살은 신호, 살상, 화공 등 기능에 맞게 다양한 화살촉을 만들었습니다. 화살통은 가죽이나 나무로 만들었으며, 겉면에 무늬를 넣은 후 옻칠을 했습니다.

투구 / 김해 양동리 / 43.5cm

갑옷 / 김해 퇴래리 / 70cm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는 세로로 길게 자른 철판을 가죽끈이나 못으로 연결해서 만듭니다. 투구 윗부분은 깃털로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투구의 종류는 세로로 긴 철판을 엮어 만든 것에 반원 모양의 복발을 얹은 투구, 앞쪽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투구, 모자 앞에 챙을 단 투구, 관모 모양의 복발을 붙인 투구 등이 있습니다.

갑옷은 전투에서 칼이나 화살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철로 만든 옷입니다. 처음에는 가죽이나 나무로 만들었으며,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철갑옷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몸통을 보호하는 갑옷은 철판의 형태에 따라 판갑옷과 비늘갑옷으로 나뉩니다. 철판을 못이나 가죽끈으로 연결해서 완성합니다. 철판에 녹이 슬었지만 원래는 단단한 쇠여서 날아오는 화살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철판 위에 옻칠을 하거나 새의 깃을 붙여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말머리 가리개 / 김해 대성동 / 55cm

쇠집게 / 김해 덕정리 / 38.7cm

말은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길들인 동물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타거나 짐을 나를 때, 치열한 전쟁에서 신속한 이동과 정보 전달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따른 속도로 달리는 말을 제어하거나 안전하게 타기 위해 여러 기능을 가진 막갖춤을 만들었습니다. 그 중 말이 쓰는 투구를 말머리 가리개라고 합니다. 말머리 가리개는 얼굴을 덮은 얼굴 덮개, 머리 위와 귀를 가리는 챙, 볼을 가리는 볼 가리개의 세 부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얼굴 덮개와 볼 가리개는 가죽끈으로 묶고, 나머지는 못을 사용해서 연결했습니다.

김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가야는 곧 이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철 생산과 철제품의 보급은 사회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이었으며, 무덤에서 나오는 수많은 철제품이 이를 증명해줍니다. 고성 조개더미, 부산 복천동, 밀양 사촌이나 임천리 유적에서 확인한 철 생산 유구와, 집게모룻돌망치 등의 단야구로 보아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기술과 다양한 철제품을 만드는 주조단조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섰음알 알 수 있습니다.

7. 해상왕국, 가야

가야는 일찍부터 풍부하게 생산한 철을 매개로 낙랑이나 중국, 일본 및 한반도의 여러 지역과 교역하였습니다. 교역을 위한 다양한 육로나 해로가 발달하였으며, 해상무역이 매우 활발하였습니다. 일본왜;과는 쓰시마를 거쳐 일본 규슈 및 긴끼지방을 연결하는 항로가 있었고 낙랑대방마한[백제]과는 남해와 서해, 동예東濊와는 동해를 이용하였습니다.

가야의 바닷길을 통한 교역 중심에는 배가 있었고, 현재 확인된 다양한 형태의 배모양 토기로 그 형태를 알 수 있습니다. 최근 김해 봉황동유적에서 가야의 배편으로 보이는 목제품이 발견되어 주목받았습니다. 배의 일부분으로 보이는 이 목제품은 현재 국립김해박물관 앞쪽에 위치한 해반천海畔川을 따라 김해 깊숙이 배를 이용한 해상루트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배모양 토기 / 김해 진영 여래리 / 22.5cm

청동 방패 꾸미개 / 김해 대성동 / 12cm (왼쪽)

가야와 주변 나라가 교류하는 데 일등 공신은 이었으며, 점차 서로 물건만 주고받는 단게에서 벗어나 정치적인 성격의 교류로 바뀌어 갔습니다. 본 토기는 가야 지역에서 확인된 최초의 배모양 토기로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덧널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배모양 토기보다 100년 정도 빠른 것입니다. 배의 좌우에 각각 2개의 노걸이나 있고, 배의 보에 해당하는 멍에가 배의 앞머리에만 있습니다. 가야의 해상교역을 책임졌던 배 구조에 관한 연구에 중요한 자료입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데려간다는 믿음도 담겨 있습니다.

바람개비 모양 청동기는 가죽으로 만든 방패를 장식하던 도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이러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며, 가ㅣ야와 일본의 활발했던 교류를 알려 주는 유물입니다.

통모양 동기 / 김해 대성동 / 14cm (오른쪽)

청동 솥 / 김해 대성동 / 17.5cm

통모양 동기는 그 속에 청동 봉이 들어가있어 흔들면 소리가 납니다. 한쪽 끝에는 나무 자루를 꽂아 고정할 수 있도록 했는데, 실제로 안쪽의 나무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 전역에서 고루 출토되어 일본계 청동제품으로 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김해 대성동양동리, 부산 복천동에서만 출토되었습니다. 김해 대성동에서는 한꺼번에 8점에 출토되어 금관가야의 자체 제작품일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양의 청동솥은 북방 초원 지대의 유목민이 주로 사용하던 그릇입니다. 중국에서는 서주시대 말에서 육조시대까지 사용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평양의 낙랑 유적, 김해 대성동과 양동리의 가야 유적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청동솥의 몸통은 길쭉한 편이며, 손잡이가 얇은 편입니다. 이 청동솥 속에는 밤 3점이 들어 있었습니다.

청동 세발 솥 / 김해 양동리 / 16cm

봉황동 배 / 김해 봉황동 / 390cm

기원전 1세기~기원후1세기경 중국 황하 유역에서 만들어진 청동솥입니다. 후대에 가야로 전해져 기원후 3세기에 해당하는 이 덧널무덤에 묻힌 것으로 추정합니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무게는 2.3kg가량이며 부피는 1.98로 지금의 큰 콜라 한 병보다 더 많은 양을 담을 수 있습니다. 실생활보다는 제사같은 의식이나 어떤 물품의 부피를 재기 위한 그릇으로 추정합니다.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노와 배의 일부분으로 추정되는 목제품을 확인했습니다. 금관가야의 활발한 해상 교류와 관련된 운송 수단인 배를 실제로 확인한 최초의 사례입니다. 이 배 조각은 노와 돌로 만든 닻과 발견되었으며, 배모양 토기와 함께 가야의 배 구조와 제작 기술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배는 녹나무, 쐐기는 삼나무, 노는 상수리나무로 만들었습니다. 녹나무와 삼나무는 일본에서 많이 자라는 나무이며, 창녕 송현동 무덥의 통나무관도 녹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주제2. 국립김해박물관의 건축물을 활용한 이야기

국립김해박물관 본관 이야기

건축가

성 명 장세양

출생 / 사망 1946년 ~ 1996년 9월 5일

소 속 공간건축사사무소

국립김해박물관은 사적지인 구지봉 자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기에 역사적 장소와 문화적 상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박물관 건물과의 조화를 이루어야합니다. 하지만 기존의 사각형의 틀로 박물관을 만들면 주변과 조화를 이루기가 힘듭니다.

박물관은 과거와 현재가 함께하는 공간입니다. 이 시간성을 나타내기 위해 원형의 울타리를 먼저 생각해냈습니다. 그리고 원형의 울타리 안에 사각형을 넣어 공간을 나누었습니다. 원과 사각형이 만나고 남은 바깥 부분은 외부공간으로서 구지봉과 조화를 이루게 했습니다.

전체 정문을 통해 김해라는 도시와 만나게 하였고, 박물관이 구지봉 공원에 녹아들게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김해라는 현재와 구지봉이라는 과거가 만나는 박물관이 완성되었습니다.

원형의 울타리 안에서 사각형으로 솟아오른 박물관 전시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철판의 색이 변하도록 하여 철기문화와 시간의 흐름이 쌓이는 모습을 상징하도록 했습니다.

국립김해박물관 가야누리 이야기

건축가

성명 공순구

출생 1960년 ~

소속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 원장

관람객들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주5일근무제에 대비한 지역주민의 평생학습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사회교육관으로 건립되었습니다.

교육관 건립은 정부와 지자체가 지역주민을 위해 상호 협력사업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김해시가 설계비와 건립부지를 제공하였으며 정부가 공사비를 부담하는 형태로 추진되었습니다.

사회교육관 건립 작업은 이미 하나로 완성된 본관과의 조화를 이루어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비례를 사용하여 박물관 본관과의 이질감을 줄이도록 했습니다. 본관과 마찬가지로 원과 사각형을 사용하였으며, 하나의 배경 같은 요소로 설계되었습니다.

가야누리라는 이름은 2006년 교육관의 명칭 공모로 결정되었습니다. '가야누리'란 옛 가야의 지역에 위치한 건물로 널리 선조들의 정신과 생활을 알리는 좋은 터전이 되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