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 성 호
삼국시대 마갑의 구조와 계보
가야의 화살통
이성훈(부산박물관)
토론문
오동선(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장상갑(의령박물관)
토론문
김승신(국립해양박물관)
05
41
45
69
가야의 환두대도
박경도(국립광주박물관)
73
토론문
김도영(경북대학교)
87
4~5세기 김해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신동조(부산박물관)
91
토론문
장기명(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19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
김혁중(국립김해박물관)
123
토론문
김영민(울산대학교)
139
무기체계로 본 가야전사
우병철(영남문화재연구원)
143
토론문
이현주(부산박물관)
181
Contents
가야의 화살통
이성훈(부산박물관)
토론문
오동선(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장상갑(의령박물관)
토론문
김승신(국립해양박물관)
05
41
45
69
가야의 환두대도
박경도(국립광주박물관)
73
토론문
김도영(경북대학교)
87
4~5세기 김해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신동조(부산박물관)
91
토론문
장기명(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19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
김혁중(국립김해박물관)
123
토론문
김영민(울산대학교)
139
무기체계로 본 가야전사
우병철(영남문화재연구원)
143
토론문
이현주(부산박물관)
181
Contents
주제발표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이 성 훈(부산박물관)
7
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Ⅰ. 들어가며
弓矢(궁시)는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사용해 온 도구이다. 화살통은 弓具(궁구) 중 하
나로 화살을 수납하기 위한 도구이다. 궁시를 사용하기 위한 필수의 보조도구라 할 수 있
다. 화살통을 인류가 언제부터 제작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첫 출현은 다른 도구들
처럼 가공이 쉬운
木製(목제)나 皮製(피제)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각 지자체의 문화재 정비사업과 관련하여, 특히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삼국시대
고총고분의 조사가 늘어나며 화살통 관련 실물자료가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것은 목제·
피제의 실용적인 목적으로 화살통을 제작하던 것에 차츰 장식성을 더하기 위해 금·은·금
동 등으로 제작한
金具(금구)가 현재 고고자료로 확인되는 것이다(전옥련 1992). 화살통
에서 금구를 제외한 여타 유기질 부분은 거의 대부분 발굴 당시 부식된 채로 확인된다.
때문에 고고학적인 연구로는 금구를 중심으로 한 편년과 지역성에 관한 연구가 주로 진
행되어 왔으며,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복원안과 계보를 구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Ⅰ. 들어가며
Ⅱ. 용어의 검토
Ⅲ. 비교자료 검토
Ⅳ. 가야고분 출토 사례
Ⅴ. 가야 화살통의 특징
Ⅵ. 나가며
목 차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이 성 훈
부산박물관
8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1. 연구사
화살통에 관한 고고학적인 연구는 일본
末永雅雄의 연구가 시초라 할 수 있다. 일본은
토양학적인 특성상 유기질의 물질자료가 현재에도 잘 남아 있다. 목제·피제 등 유기질로
일부 부위가 구성된 고대 화살통도 한반도 보다 잘 남아 있는 편이다.
末永雅雄는 1941년
『
日本上代の武器』를 발간하였는데, 여기에 화살통에 관한 연구가 수록되어 있다. 末永
雅雄는 화살통을 두 종류 이상의 것으로 추정하고, 문헌에서는 靭(인, ゆき)과 胡籙(호록,
ころく)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여러 가지의 화살 수용구의 형태로부터 호록을
矢立式(시
립식), 인을
矢筒式(시통식)으로 해서 수법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화살통을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였다.
한국에서는 부산 복천동21·22호 발굴조사에서 화살통이 처음 확인되어 주목을 끌었으
며, 이를 토대로 시원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최종규(1986)는
盛矢具(성시구)란 화살을
담는 도구를 가르키는 용어로, 호록·시통·전통과 같은 용어의 사용을 피하고 단지 화살을
담는 도구라는 뜻을 가지는 성시구란 용어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문헌과 실물자료
를 먼저 검토하고, 한국 고분출토품과 고구려벽화에 묘사된 것을 분석하여 성시구를 분류
하였다. 이를 토대로 성시구의 복원안을 제시하였으며 한국 고분 출토 ‘
山’자형 方立式(방
립식)이 붙는 성시구의 보다 정확한 명칭은
矢箙(시복)이라고 하였다. 이 연구는 무비판적
으로 일본측의 용어를 수용하여 사용하던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성시구라는 동아시아 전
체에 적용시킬 수 있는 개념을 명확하게 제시한 것에 의의가 있다. 또한 한국의 고분출토
품을 처음으로 집대성·분석하고, 이를 통해 복원안을 제시한 한국 화살통 연구의 시원적
인 연구라 할 수 있다.
전옥련(1992)은 최종규가 제안한 성시구라는 용어를 받아들이고, 우리나라 고분출토
품을 검토하여 금구류의 출토위치·잔존상태, 그리고 고구려 벽화분에 묘사된 형태를 통해
전반적인 형태와 착장방법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성시구를 둘러싸고 있는 계보와
원류, 복원, 착장 방법에 대한 여러 문제에 대해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 연구는 기
존에 정리되지 못했던 복천동고분군 출토품의 출토양상을 토대로 복원안을 제시하였다는
큰 의의가 있다.
김창호(1997)는 부산 복천동22호분의 화살통의 출토양상을 먼저 검토하고, 당시까지
진행되었던 선학들의 복원안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 후 화살통을 구성하는 각
금구에 사용된 못을
釘(정)과 鋲(병)으로 구분하고, 이를 통해 못이 가죽에 연결된 것인지
나무에 연결된 것인지 분석하여 복천동22호분 화살통의 복원안을 제시하였다. 이 연구는
발굴조사 당시 부패되어 사라진 나무, 끈. 가죽 등의 부분을 유추하여 기존 선학들의 복원
안과 다른 새로운 의견을 제시한 것에 큰 의의가 있다.
9
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부산 복천동22호분을 통해 삼국시대 화살통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한국과 달리, 일본에
서는 60~80년대 발굴조사 사례가 증가하면서 고분출토품,
埴輪(하니와)에 묘사된 화살
통 등 관련 자료가 다수 확보되었다.
早乙女雅博(1988)은 그때까지의 자료를 집대성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우선
胡籙(호록), 靭(인)과 같은 용어 대신 최종규가 제시하였던 성시
구라는 용어를 채용하고, 성시구를 구성하는 금구를 분류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한
국, 중국의 성시구 다수를 검토하였으며, 출토상황 등을 통해 각 금구의 용도를 추정하였
다. 그후 성시구의 복원을 시도하였으며 나아가 계보를 구하고자 하였다. 이 연구는 일본
을 포함한 한국·중국 동아시아 3국의 성시구를 분석하여, 복원안을 제시한 첫 번째 연구로
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동아시아 3국 출토 성시구간의 계보와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연구이다.
일본의 최근 연구로는
坂靖과 土屋隆史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坂靖(2014)은 우선 고분
시대 호록이 전체 형상이나 계보가 불분명하고 각부 명칭의 표기에 대해서도 연구자에 따
라 각각 다르게 표기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호록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하였다. 그 후 화
살통을 구성하는 각 금구를 통합한 전체 형태를 크게 네 종류로 대별하여 복원을 시도하
였다. 또한 각 류의 계보를 구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당시 대가야지역과 일본열도 간의 교
섭 관계를 엿볼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 연구는 큰 틀에서 호록을 정의하고 대별 한 것에
큰 의의가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출토된 고대 시복 대부분이 그의 분류안에 포함될 수 있
다는 장점이 있다.
土屋隆史는 근래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가장 최신의 연구를 참고할 만 하
다(
土屋隆史 2019). 그는 이 연구에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에서 출토된 화살통 금구
를 집대성하고자 하였다. 화살통 금구의 각 부위에 따라 속성을 검토하고 이를 조합하
여 형식을 분류하였으며, 다시 각 금구의 공반 사례를 검토하여 화살통금구군을 설정하
였다. 그리고 화살통 금구 안에서 시간적 변화를 예상할 수 있는 핵심 부위인
吊手金具
(적수금구=현수식금구=걸이금구)와
收納部金具(수납부금구=전면식금구=수납부 틀)
의 변화를 검토하고, 변화의 특성 및 각 단계의 역연대를 제시하였다. 또한 한반도 남부
의 분포상황을 검토하고 그 지역성을 정치 영역과 결부시켜 백제, 신라, 대가야, 아라가
야의 지역성을 확인하였다.
土屋隆史는 여러차례 논문의 발표를 통해 한반도 남부와 일
본열도의 성시구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특히 중국-한반도-일본과의 자료를 비교·
검토하여 각국과의 관련성을 검토하고 계보를 구한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도 발굴조사 사례의 증가와 함께 고분출토 자료가 다수 확인되며 백제, 가야,
신라 등 각 지역의 출토품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이현숙(1999)은 천안 용원리 출토
화살통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 백제지역 화살통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우선 용
원리 출토 화살통의 분류 실시하고, 선학들이 제시한 복원안을 토대로 하여 용원리 출토
10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품의 복원안을 제시하였다. 그 후 기존에 가야·신라 지역에 비해 연구가 미진하였던 백제
지역의 화살통 자료를 집성하여 검토·분석하였다. 이 연구는 기존에 미진하였던, 백제지
역에 대한 자료를 집성하여 분석하고, 용원리 출토품과 비교·분석하여 용원리 출토품의
특성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였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최근 화살통에 관한 연구로는 오동선의 연구(2018)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는 삼국시대
한국의 화살통을 집성하여 형식별 변천과 계통, 기원지, 착용방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다른 선학들과 달리 화살통 걸이금구(=현수식금구, 적수금구)를 주 대상으로 분석을 진
행하였다. 우선 걸이금구의 형식분류를 실시하고, 변천과정을 통해 분기별 특징을 살펴보
았다. 나아가 화살통 걸이금구의 형식별 기원과 전개과정을 살펴보았으며, 또한 화살통의
착용방법과 계통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 연구는 기존에 한 번도 대상이 되지 않았
던 한반도 전체 자료를 집대성하여 고고학적으로 분석하였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2. 연구목적 및 방법
기존 화살통에 대한 연구는 현재 확인되는 금구를 중심으로 하여 편년·지역성을 살펴보
고 이를 토대로 복원안의 제시, 그리고 계보를 구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필자는 삼국시
대 무기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해오고 있는데, 무기의 조합과 전투 양상, 이에 따른 사회
적인 변화 등 거시적인 관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편이다. 화살통의 경우도 (
攻擊用)
武器-弓矢-弓具라는 흐름 속에서 분석을 진행해 보고자 한다.
삼국시대 무기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하나는 실용성이고 하
나는 장식성이다.
실용성은 무기 본연(1차적)의 기능이라 할 수 있다. 화살통은 화살을 수납하고 보관하
는 것이 본연의 기능이다. 이것은 착장과 패용의 편의성과 직결된다. 예를 들면 전장에서
화살을 최단 시간에 빼내어 쏘기 위해 최적화된 화살통을 제작하는 것은 무기 본연의 기
능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장식성은 무기의 2차적 기능이라 할 수 있다. 패용구이자 착장구로서의 기능인데, 이것
은 관, 관식, 경식, 과대와 같이 무기가 아닌 착장구와 기능적으로 동일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무기의 경우 특히 갑주나 장식대도에서 이런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신분이
나 계층을 나타낼 수 있는 수단으로, 당대 최고의 금공기술을 반영하고 있다.
화살통은 아니지만 궁시의 경우 고서를 통해 오래전부터 중요한 기물로 당시 사람들에
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1
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魏書(北魏) 卷100 列傳第88 百濟傳
九夷之國 民居海外道暢則奉藩惠戢則保境故羈縻著於前典楛貢曠於歲時
구이(九夷) 나라 사람들은 바다 밖에 살면서 왕도(王道)가 널리 퍼질 때는 번신(藩
臣)이 되어 왕명을 받들지만 은혜가 그치면 자기 땅을 지킬 뿐이었다. 과거 종속
관계가 옛 책에 적혀 있기는 하지만 싸리 화살 공물은 때가 되어도 보내오지 않았
다.
晉書 卷 97 列傳第 67 四夷 肅愼傳
有石砮皮骨之甲檀弓三尺五寸楛矢長尺有咫.…(중략)…周武王時獻其楛矢石砮
…(중략)…及文帝作相魏景元末來貢楛矢石砮弓甲貂皮之屬
숙신에는 돌로 만든 살촉(石砮)과,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과, 석자 다섯치의 단궁
(檀弓)과, 한 자(尺) 몇 치(咫)쯤 되는 길이의 화살(楛矢)가 있다.…(중략)…
주(周) 무왕(武王) 때에 그 화살(楛矢)과 화살촉(石砮)를 바쳤다.…(중략)…문제
(文帝) 위(魏)나라 경원(景元, 260-264)말 숙신이 와서 싸리나무 화살, 돌 화살
촉, 활, 갑옷, 담비 가죽 등을 바쳤다.
위의 기록에는 궁시가 공물로 사용되었다는 기사가 남아 있다. 이것은 궁시가 당시의
최첨단 기술이 반영된 무기임을 방증하는 것으로, 예로부터 무기 조성에 큰 비중을 차지
하고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멀리 있는 목표물을 정확히 쏴서 맞춰야 하는 궁시는 제작 및 운용에 정교함이 필요한
무기이다. 화살의 운동은 활대에 저장된 탄성에너지를 시위가 받아 화살 뒤쪽의 운동에너
지로 전달하여 발사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 활에서 발사된 화살은 시위의 반동에 의해
구불구불하게 비행을 하는 ‘궁사의 패러독스’ 현상을 발생시키는데(정낙현 2015), 패러독
스 운동에 의해 발사되는 화살은 여러 조건에 따라 비행의 특성이 달라진다. 특히 촉신의
중량·무게중심 등과 같은 조건은 화살의 비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변수이다(이
성훈 2017). 이는 곧 궁시의 제작에 정밀한 최첨단 기술과 함께 많은 수고로움이 필요했
음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으로, 궁시의 비싼 가치를 의미한다. 궁시가 공물로 사용될 만큼
중요한 기물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궁시의 구성품인 궁구로서 화살집과 화살통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
살통의 경우 최첨단 무기의 일부로 기술적인 측면에서 화살을 쏘는데 최적화되도록 제작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누구나 소유하기 쉽지 않은 고가의 제품으로 장식성이 구현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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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본고는 이러한 점에 초점을 두고 화살통의 실용성과 장식성이라는 측면에서 연구를 진
행하고자 한다.
Ⅱ. 용어의 검토
본고의 연구 대상인 삼국시대 화살통은 연구자들마다 용어에 있어 개념과 사용을 조금
씩 달리하고 있다. 본 장에서는 선학들이 화살통에 대해 어떠한 개념을 적용시키고, 사용
하였는지 살펴보고 적절한 용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1. 화살통(성시구)관련 용어의 사용
1)
末永雅雄(1982)
2)
早乙女雅博(1988)
화살 수용구에는 두 종류 이상의 것이 추정된다. 문헌에서는 靭(인, ゆき)과 胡
籙(호록, ころく)이 있다. 필자는 여러 가지의 화살 수용구의 형태로부터 호록을
矢立式(시립식), 인을 矢筒式(시통식)으로 해서 수법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고 생
각한다. 또한 여기에 있어서는 인과 호록은 그 명칭과 실례와의 관계도 또 절대적
이지 않기 때문에 단정을 하기가 꺼려진다. 필자는 종래의 관습대로 기술을 진행
하고자 하기에, 명칭의 개발에 대해서 지금은 잠시 피해 두고 싶다.
시통식은 화살을 담는 용기가 화살의 대부분을 그 무구의 용기에 수용되는 방식
이다. 시립식은 화살의 일부만 용기에 지지해서 화살의 기타 부분이 노출되는 방
식이다.
화살을 담는 무구로 하는 일반적인 명칭을 최종규씨가 사용하였는데, 盛矢具(성
시구)라고 부르고 사용하였다. 성시구에는 箙(복), 蘭(란), 韇(독), 犢丸(독환) 胡祿
13
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3)
坂靖(2014)
4)
土屋隆史(2018)
(호록), 靭(인) 등으로 불리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古墳時代(고분시대)부터 출토
되는 성시구는 유기질로 만들어진 부분은 부식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금구
가 부착되어 있는 칠이 도색 된 것의 경우는 그 흔적이 알려져 있다. 촉이 아래를
향하여 수납되어 있는 것과 위로 향하여 수납되어 있는 것이 있는데 埴輪(하니와)
를 참고하면 전자를 矢立式(시립식), 후자를 矢筒式(시통식)으로 구별할 수 있다.
성시구 중에서 鏃部(촉부)가 아래로 향하도록 본체에 수납하는 것을 호록으로
부르고자 한다. 단, 伊勢신궁의 『神宮神宝図卷』(무로마치시대)에는 다수의 성시
구가 그려졌는데 筒狀(통상)의 형태로 활을 묶어 보관하는 靭(유기), 裾廣狀(거광
상) 형상으로 화살이 방사상으로 넓게 수납되는 平胡祿(평호록)이 있다. 또 쇼쇼
잉(正倉院)에는 33개체의 葛胡籙(갈호록)이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考備狀(狀
差し樣) 형태와 裾廣 형상인 것이 있다. 이 가운데 후자는 후세에 평호록이라 불
리는 것이 일부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전자의 고비상 호록에는 여러 가
지 형태가 있다. 背板部(배판부)를 보면 상단부가 약간 넓어지는 것과 장방형인
것의 2종류가 있고, 방입부의 경우 상단의 단면형이 장방형이고 하단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의 것, 저판이 있고 蒲鉾(카마보코 : 가운데가 볼록한) 형상인 것,
단면형이 장방형의 형태인 것 등이 있다. 이것이 후세의 靭 일부와 대응하는 것이
다.
일본열도의 성시구로는 전통(箭筒=靭)과 호록(胡祿)이 알려져 있다. 전통은 일본
열도의 재래계 성시구이며 호록은 한반도에서 건너 온 외래계 성시구이다. 이 둘
은 화살의 수납 방법과 인체에 부착하는 방법을 기준으로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
데 화살촉이 위를 향하도록 화살을 수납하여 등에 메는 것이 전통, 화살촉이 아래
를 향하도록 화살을 수납하고 오른쪽 허리에 메는 것이 호록이다.
正倉院宝物(정창원보물)에는 奈良時代(나라시대)에 제작된 33구의 호록이 아직
남아 있는데 좁고 높은 형태의 「호록(胡祿)」과 짧고 옷자락이 벌어진 형태의 「平
胡祿(평호록)」으로 구분된다. 이것들의 조형으로 생각되는 성시구가 고분시대에
도 확인되므로 필자는 「호록」과 「평호록」이라는 명칭을 고분시대의 성시구에도
사용한다.
14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5) 최종규(1986)
6) 김창호(1988)
7) 전옥련(1992)
盛矢具(성시구)란 화살을 담는 도구를 가르키는 용어로, 문자로서의 성립은 殷
代(은대)의 갑골문에서부터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시구를 가르키는 용
어로 胡籙(호록), 矢筒(시통), 箭筒(전통) 등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용어는
방·원형의 筒狀物(통상물)을 가르키는 단어이므로, 우리나라의 고분시대 고총급
분묘에서 출토되는 특징적인 성시구-扁平狀(편평상)의 물체인 矢箙(시복)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따라서 호록·시통·전통과 같은 용어의 사용을 피하고 단지 화살을
담는 도구라는 뜻을 가지는 성시구란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최근 일부 연구자들이 일본 고고학계에서 사용되는 오용된 의미의 호록이란 용
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우리나라 고분시대의 고총급 분묘에서 출토되
는 편평상 성시구-시복에 대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
편평상의 성시구를 호록이라 부르는 것은 문헌기록과도 일치되지 않는 것으로 보
여, 중국의 문헌과 출토 예를 통해 우리나라 고분 출토의 편평상 성시구의 명칭을
특정코자 한다.
한국 고분 출토 ‘山’자형 方立式(방립식)이 붙는 성시구의 보다 정확한 명칭은 矢
箙(시복)이다. 시복은 장식적인 성격이 강하다.
『史記』 信陸君列伝에는 「平原君負韊矢, (索隱) 韊音蘭謂以盛矢如之胡簏而短
也…」라고 되어 있다. 索隱 부분은 『史記』에 唐의 司馬貞이 注를 단 것이다.
이 자료에 근거하면 호록에 관한 앞의 규정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여기에서는 한
국 고분에서 출토된 화살통에 대한 정확한 문헌적 규명이 있을 때까지 일반적으
로 널리 알려진 호록이란 용어로 사용하기로 한다. 앞으로 관계 전문가의 연구가
기대된다.
盛矢具(성시구), 盛矢器(성시기), 盛入具(성입구), 盛藏具(성장구) 등 더 이상의
언어의 혼돈을 피하기 위해 胡籙(호록)·靭(인) 등을 포함한 화살을 담는 도구, 또
는 용기라는 의미를 포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은 최종규가 제안한 성시구라
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한다. 다만 호록 또는 인이 일본 고유의 극히 일본적인 용
어라 하여 사용을 피하는 점에는 반대한다.
15
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8) 이현숙(1999)
9) 오동선(2018)
2. 화살통(성시구)관련 용어의 적용
기존의 연구를 종합해 보면, 한국의 경우 가장 포괄적이고 대중적인 용어인 ‘화살통’이
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여기에 더해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한자 용어로서 ‘
盛矢具’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많은 이가 동의하고 있다. 세부적
으로는 형태에 의거하여 시통식과 시립식(방립식)의 두 부류로 분류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 같으며, 일본 연구자들의 경우에는 [
矢筒式=靭=어깨에 메는 것=
촉두가 위로 수납], [
矢立式=胡祿=허리에 메는 것=촉두가 아래로 수납]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일본의 경우
早乙女雅博(1981)의 연구에서
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전의
末永雅雄(1941)의 연구에서부터 정창원 자료와 헤이안
盛矢具(성시구)란 화살을 담는 도구를 가르키는 용어로, 우리나라에서는 성시구
이외에 胡籙(호록), 시통, 전통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화살을 담는 도구라는 뜻을 가진 성시구란 용어가 적극
적으로 채용되고 있는 추세이다. 성시구는 크게 등에 메는 靭(인)과 허리에 차는
胡祿(호록)·시복으로 구분되는데, 말을 탈 때나 보행시 대부분 허리에 차는 형태
를 선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살통은 화살을 담기 위한 도구로 화살통의 틀을 이루는 각종 금속 부품과 장식
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는 가급적 한자어를 피하기 위해 화살통이라는 용
어를 사용했다.
『東大寺獻物帳』에는 「白阿蘇胡籙」, 「柒阿蘇胡籙」을 시작으로 해서 ‘胡祿’이라
는 문자가 다수 보인다. 이와 함께 正倉院(쇼쇼잉) 문헌자료, 平安時代(헤이안시
대)에는 ‘胡祿’과 같은 단어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쇼
쇼잉의 中倉(중창)에는 幕製胡祿(막제호록)이 33구 전하는데 法隆寺獻納宝物 가
운데에도 背板(배판)이 있는 彩絵(채회)호록이 확인된다. 그것들은 장방형 배판의
하방에 方立(방립)을 가지고 있는 方立式(방립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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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시대 문헌자료에서 보이는 ‘
胡祿’, ‘靭’의 개념을 고분시대까지 소급적용 한 것 이라 할 수
있다.
한국도 조선시대의 실물자료, 회화자료 등을 통해
矢筒, 箭筒, 竹筒, 矢服, 弓袋, 筒箇
등과 같은 표현이 확인되고 있다. 필자는 삼국시대도 이와 같은 개념의 적용이 가능하다
고 생각하는 바이다. 즉, 기본적으로 큰 범주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한글 표현으론 화살
통, 한자 표현으론
盛矢具라는 용어가 좋다고 생각한다. 또한 메는 방법과 화살의 수납 방
법과 같이 기능적인 부분은 차치해 두더라도, 단순하게 형태에 따라 시통식(=
矢筒)과 시
립식(=
矢箙)으로 구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좀 더 상세한 분석이 필요하지
만, 본고에서는 우선 형태적인 개념에 초점을 두고 Ⅲ·Ⅳ장을 기술하고자 한다. 폐쇄형이
거나 폐쇄형에 가깝게 화살의 2/3이 상이 수납되는 형태를 시통(
矢筒)으로, 촉두부를 포
함한 일부만이 주머니와 같은 것에 담기는 형태를 시복(
矢箙)이라 하겠다.
17
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Ⅲ. 비교자료 검토
Ⅲ장에서는 고대 중국·일본, 그리고 고구려벽화분,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 화살통
관련 자료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가야의 화살통을 검토하기 이전, 시간적으로 수평선
상에서 각국의 화살통이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 그리고 공간적으로 수직선상에서 화살통
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1. 고구려 벽화분
고구려 벽화분에는 활, 화살과 관련된 다수의 자료가 확인된다. 삽도1은 고구려 벽화분
삽도1
안 악3호분
동암리 벽 화분
약수 리 벽화분
덕흥 리 수렵도 부 분
대안 리1호 분
쌍 영총
수렵 총
장천1호분
무 용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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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에 묘사된 화살통의 사례를 집합한 것이다.
고구려 벽화분에 묘사된 화살통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특징이 있다.
① 확인되는 화살통은 모두 시복(=시립식)이다. 착장방법은 허리에 메는 방식으로 끈의
길이로 인해 자연스레 기울어져 있다.
② 시복의 입구부는 하늘이나 사람 몸의 뒤쪽 방향을 향하고 있고, 수납부는 그 반대 방
향을 향하고 있다. 화살은 깃이 입구부 쪽으로 올라오게 수납되어 있다.
③ 활은 복합궁(만궁)으로 판단된다.
④
弓袋(궁대)가 묘사되어 있는 것 있다.(장천1호, 쌍영총)
⑤ 안악3호분, 동암리 벽화분 일부를 제외하곤
騎射(기사)를 하면서 수렵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⑥ 파르티잔 샷과 같이 뒤로 쏘기와 앞으로 쏘기 모두 묘사되어 있다.
2. 중국
중국의 경우 한반도 보다 이른시기부터 화살통의 존재가 확인 된다. 삽도2는 중국
漢대
삽도2
見於漢代金銀錯車飾( 漢)
(
前燕)
돈황 막고 굴 제285굴 (
西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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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
隋·唐대에 이르기까지 벽화·화상석에 묘사된 화살통 사례이다.
중국 벽화분 및 화상석에 묘사된 화살통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특징이 확인된다.
삽도3
돈 황 막고굴 제 285굴 (
西魏)
돈황 막고굴 제296굴(
北周)
河北磁县东晋村東魏
墓( 南北朝)
河北磁县东魏茹茹公主墓( 南
北朝)
河北磁县北齐元良墓( 南北朝)
山西省太原市南郊王郭村北齐娄睿墓( 南北朝)
山西省太原市南郊王郭村北齐娄睿墓( 南北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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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① 확인되는 화살통은 시복(=시립식)과 시통(=시통식)이 모두 확인된다. 착장법은 시
복, 시통 구분 없이 허리에 메는 것으로 판단된다.
② 시복의 경우 입구부가 사람 몸의 뒤쪽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시통의 경우 입구부가
사람 몸의 앞쪽 방향을 향하고 있다. 서로 반대되는 방향이다. 특히 돈황 막고굴 제285굴
에서는 이 두 방식이 한 면에 묘사되어 있는데, 말을 타고 있는 병사는 시통을, 보병은 시
삽도4
鄧县彩色画像砖墓( 南北朝)
陜西省潼关稅村隨代壁画墓( 隋)
河南省洛阳市新区翠云路唐安相
王孺人崔氏墓( 唐)
돈 황 막고굴 제 156굴(
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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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복을 패용하고 있다.
③ 활은 복합궁(만궁)이 대부분으로 추정되지만,
隋代 이후로 장궁이 확인 된다(陜西省
潼关稅村隨代壁画墓). 남북조시대 山西省太原市南郊王郭村北齐娄睿墓에 묘사된 것도
장궁일 가능성 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④
弓袋(궁대)가 묘사되어 있는 것이 있다.(山西省太原市南郊王郭村北齐娄睿墓 남북조)
⑤ 돈황 막고굴 285굴 일부·막고굴 346굴(
五代)에서는 화살통 없이 허리에 화살 소수
를 패용하고 있는 그림이 있다. 조선시대 국궁도 이와 같다. 돈황 막고굴 285굴 창을 들고
있는 기병의 경우 활도 궁대 없이 패용하고 있다.
⑥ 파르티잔 샷과 같은 뒤로 쏘기와 앞으로 쏘기가 모두 묘사되어 있다.
⑦ 남북조 시대부터 궁시+대도 또는 궁시+모의 조합을 가진 병사들 확인된다. 이 경우
의 화살통은 전통형이다.
3. 일본 고분시대
일본 활의 고유성은 「
短下長上」이라고 하는 長弓으로 대표된다(戶田藤成 1994). 이
는 「
上弱下强」의 구조로, 활의 손잡이 부분이 위에서 아래로 2/3 지점에 위치하는 것
이다. 이런 일본의 장궁은 죠몽시대 만기~야요이시대 초경에 성립되었다고 판단된다(
戶
田藤成 1994). 삼국지 위지동이전 왜인전에도 당시 일본에서 사용된 활의 특징에 대하여
「
木弓短下長上」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런 장궁은 平安時代 中期(헤이안시대 중기)까
지 주력무기로 성행하게 되는데 『
日本書紀』, 『古事記』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戶
田藤成 1994).
화살통도 이러한 장궁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 있다. 일본의 연구자들은 고분시대 화살통
에 대해서 ‘ゆき’라 불리는 ‘
靭(인)’은 재지계, ‘胡籙(호록)’은 외래계라고 지적하고 있다.
인은 호록과 달리 긴 통에 들어 있는
矢筒式의 용기로 실물 출토품을 비롯하여 埴輪(하니
와), 벽화 등에서 다수의 자료가 확인된다.
일본 고분시대 자료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특징이 확인된다.
① 실물자료로서 장식성이 강한
胡籙(호록=시복)이 고분에서 다수 출토된다.
②
靭(인, ゆき)이라 불리는 시통도 실물자료, 埴輪(하니와) 등에 다수 확인된다.
③ 특히 하니와에는
胡籙(호록)보다 靭(인)이 더 많이 묘사되어 있다.
④
靭(인)은 일본 재지계의 것, 胡籙(호록)은 기마문화와 함께 한반도 남부로부터 유입
된 것으로 연구자들은 이해하고 있다.
⑤ 하니와,
石物(석물) 등에 다수가 묘사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중요한 기물로 인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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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삽도5
會津大塚山古墳
メ スリ
山古墳
東京国立博物館 소장埴輪
池田9号墳出土埴輪
石山古墳埴輪
宮山古墳埴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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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삽도6
福岡県岩戶山古墳
福岡県珍敷塚古墳 石室壁畵
參考館セレクション 武人植輪
大谷山22号墳埴輪
大日山35号墳埴輪
神宮神宝図卷 御靭( 좌) , 平胡籙(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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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다수의 회화, 의궤 등에서 화살통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삽도7은 조
선시대 회화, 의궤 등에 묘사된 화살통의 사례를 집합한 것이다.
조선시대 회화 및 의궤 등에 묘사된 화살통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특징이 확인된다.
① 확인되는 화살통은 시복과 시통(=
箭筒)이 모두 확인된다. 또한, 화살통 없이 허리에
허리띠(씨름의 샅바와 같은)를 이용해 소수의 화살을 패용한 사례도 확인된다. 시복의 착
장 방법은 허리에 메는 방식이다.
②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궁시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중 동개는 작은활로
서 이와 함께 화살, 궁대, 시복을 포함한 세트를 동개일습이라 칭했다. 회화나 의궤에 묘사
된 것을 보면 궁대는 좌측에, 시복은 우측에 패용하고 있다. 동개일습은 삼국시대 단궁(복
삽도7
『 국조 오례서 례(
國朝五禮序例) 』 궁대와 시복
『 무신진찬의궤(
戊申進饌
儀軌) 』 동개( 1848)
『 임인진연의궤(
壬寅進宴
儀軌) 』 동개( 1902)
궁대 와 시복( 국립 고궁박 물관, 2020)
전 통( 국립고 궁박물 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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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삽도8
현종 명성왕 후가례 도감의 궤( 1651)
북새 선은도 ( 1664)
영 조정순 왕후가 례도감 의궤( 1759)
영조 정순왕 후가례 도감의 궤( 1759)
강희언 , 사인 삼경도 첩 18세기 중엽 ( 개 인소장 )
김 홍도, 안릉신 영도 1786( 국립중 앙박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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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삽도9
김 홍도, 평양감 사향연 도,
18~ 19세 기( 국립중 앙박물 관)
武藝圖譜通志 騎槍交戰譜
김홍도 , 활쏘 기, 18세 기 후반( 국립 중앙박 물관)
김준 근, 활 공 부허고 , 연대 미상
김 준근, 선전관 복색, 연대미 상
『 조선 의 궁술』 , 만개 궁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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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합궁)과 궁대·시복의 계보가 조선시대까지 연결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③ 시통은 전통, 죽통 등으로 불리는 원통형 보관함이다. 폐쇄형으로 만들어서 화살이
비에 젖지 않도록 했으며, 어깨에 멜 수 있도록 끈을 달았다(김성혜 2015). 전쟁이나 사냥
을 할 때 화살을 담아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시복에 있는 화살이 떨어지면 전
통에 있는 화살을 꺼내 보충하는 방식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국립고궁박물관
2020).
④ 시복의 입구부는 하늘이나 사람 몸의 뒤쪽 방향을 향하고 있고, 수납부는 그 반대 방
향을 향하고 있다. 화살은 깃이 입구부 쪽으로 올라오게 수납되어 있다.
⑤ 활은 복합궁(만궁)이 대부분으로 추정된다.
⑥ 기본적으로
弓袋(궁대)가 시복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⑦
騎射(기사), 步射(보사)가 모두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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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Ⅳ. 가야고분 출토 사례
1. 시통
가야고분에서는 김해 대성동14호분, 기장 고촌리유적 등에서 시통이 확인되었다.
삽도10
대성 동14호분 시 통 출토양 상
대성 동14호분 시 통 상세
대 성동14호 분 시통 상세
고 촌유적 출 토 시통
고촌 유적 출토 시 통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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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삽도11. 부산 복천동22호 출토 [1:성시구류(1/4), 2~3: 마구류(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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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삽도12. 함안 말이산25호 출토 [1:성시구류 출토양상(1/8), 2:성시구A 3:성시구B 4:마구류(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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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삽도13. 합천 옥전28호 출토 [1:성시구류, 2:재갈·교구류(1·2:1/4), 3:등자, 4:안교(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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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2. 시복
가야지역 고분에서는 약50여 개체의 시복이 확인되었다. 대부분 자료가 5세기 중반 이
후의 것들로 금동·철지금동장·철지은장 등으로 제작하여 장식성이 강하다. 또한 마구류와
공반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삽도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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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Ⅴ. 가야 화살통의 특징
Ⅴ장에선 Ⅲ·Ⅳ장에서 검토한 내용을 토대로 가야지역에서 확인되는 화살통의 특징을
실용성과 장식성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곧 Ⅴ장의 내용이 본고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1. 가야 화살통의 특징
가야유적 출토 화살통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특징이 확인된다.
1) 확인되는 화살통은 시복과 시통이 모두 확인된다.
2) 시통
① 시통은 피혁제로 거치문·집선문 등을 시문한 형태의 것과 목제로 단면 (반)원형의
길다란 형태의 것이 확인된다. 전자는 일본열도에서 다수 확인되는
靭(인)과, 그리고 후자
는 조선시대의
箭筒(전통)의 형태와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② 화살의 몸체가 2/3이상 수납될 수 있도록, 그리고 촉두부가 입구쪽을 향하도록 패
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③ 일본의 하니와에 묘사된 것으로 미루어 허리가 아닌 어깨에 메는 방식으로 패용되
었을 가능성이 높다.
3) 시복
① 시복에 담겨 공반되는 철촉은 세신계열 촉의 비중이 높다.
② 출토양상으로 보아 화살은 촉두가 수납부에, 깃은 위로 향하도록 수납되었던 것으
로 판단된다.
③ 5세기 중반 이후 마구류와 함께 매납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로써 고구려 벽화분의
사례와 같이
騎射(기사)시에 시복을 패용하였던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④ 금동·철지금동장·철지은장 등으로 제작한 금구에 파상점열문·용문, 원두정 등으로
장식성을 더하고 있는 자료가 많으며, 이런 현상은 대형분일수록 강하게 나타난다.
⑤
弓袋(궁대)는 확인되지 않는다. 앞으로 발굴조사 결과 확인될 가능성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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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⑥ 중국·일본·고구려·조선시대의 자료를 비교 검토 결과 가야의 화살통에 한해서는 ‘시
복=허리에 패용’, ‘시통=어깨에 패용’이라는 방식을 대입시킬 수 있다.
⑦
步射(보사), 騎射(기사)에 모두 시복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에서 활쏘
기와 관련한 것 중 ‘
射·習射·射臺·西臺’의 표현이 확인된다(표1). 射臺(사대), 西臺(서대)
와 같은 기록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제자리에서 활쏘기를 하는 훈련 등이 행해졌음을 유
추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삽도1)에도 시복을 패용하고 있는
궁병이 보병으로 묘사되고 있어 보사시에도 시복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2. 가야 화살통의 실용성
앞서 언급하였듯이 실용성은 무기 본연의 기능과 관련이 깊다. 화살통의 경우 화살을
수납하고 보관하는 것이 본연의 기능으로 이는 착장과 패용의 편의성과 직결된다. 본 절
에서는 시통·시복의 착장과 패용의 편의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표1 수렵과 훈련 관련된 문헌기사
1
三國史記,卷第1,新羅本紀
第1,儒理尼師今19年
十九年秋八月貊帥獵得禽獸獻之
獵
수렵
2
三國史記,卷第14,高句麗
本紀第2,閔中王2年
三年秋七月王東狩獲白獐
狩
獲白獐
수렵
3
三國史記,卷第19,高句麗
本紀第7,文咨明王15年
十五年秋八月王獵於龍山之陽五日而還
獵
수렵
4
三國史記,卷第23,百濟本
紀第1,始祖溫祚王5年
五年冬十月巡撫北邊獵獲神鹿
獵獲
수렵
5
北史,列傳,高句麗傳,東明
聖王
以朱蒙善射給之一矢朱蒙雖一矢殪獸甚多 .
射,
一矢
수렵
6
三國史記,卷第10,新羅本
紀第10,興德王9年
九年春正月祐徵復爲侍中秋九月王幸西兄山下大
閱御武平門觀射
射
훈련
7
三國史記,卷第24,百濟本
紀第2,比流王17年
十七年秋八月築射臺於宮西每以朔望習射
射臺
習射
훈련
8
三國史記,卷第25,百濟本
紀第3,阿莘王7年
九月集都人習射於西臺
習射
西臺
훈련
9
隋書,卷81,列傳第46,東夷
百濟傳
俗尚騎射讀書史能吏事
射
훈련
35
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1) 시통
(1) 장점
① 도보로 이동하는 것에 적합하다. 이는 현대인이 착용하는 백팩과 같은 개념이다.
② 앉고 일어서는데 걸리적 거림이 없다1).
③ 때문에 은폐·엄폐와 같은 전술에 적합하다. 화살 공격은 소리도 없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 상대방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무기이다. 은폐·엄폐하여 공격할 필요가 있는 전장
에서는 화살 공격이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④ 다량의 화살 수납이 가능하다. 어깨에 메는 방법은 비교적 무거운 무게도 감당이
가능하다.
⑤ 유실의 가능성이 비교적 덜한 편이다.
(2) 단점
① 화살을 꺼내 장전하기 불편하다. 어깨 위에 입구부가 있고 화살 몸체의 대부분이
시통에 수납되어 있기에 화살 끝을 잡고 꺼내어 재빨리 장전하기 까다롭다.
② 때문에 연사력이 떨어진다.
③ 화살의 숫자가 많을수록 무게가 무거워 기동성이 떨어진다.
2) 시복
(1) 장점
① 화살의 연사력을 높일 수 있다. 어깨에 비해 허리에서 빼내는 화살은 활에 장전하
기까지의 시간이 짧다.
② 때문에
騎射(기사)에 최적화 되어 있다. 움직임이 큰 달리는 馬上(마상)에서는 화
살의 장전 시간이 길면 그만큼 화살을 떨어뜨릴 위험이 있는데, 시복은 그럴 위험이 적다.
(2) 단점
① 도보 이동에 불리하다. 허리에 패용하면 도보 이동 중 불편하다.
1) 중국 명나라시대 병법이자, 무예서인 『武備志(무비지)』권85, 「腰開弩總序(요개노총서)」, 箭筒
圖(전통도)에는 <전통은 허리에 메, 노의 시위를 당겨 화살을 쏠 때, 앉고 일어나기가 불편하
다.> 라는 기록이 있다. 노의 운영에 사용된 화살통이지만 어깨, 허리에 메는 방식에 대한 일면
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36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② 시통에 비해 유실의 가능성이 높다.
③ 다량의 화살을 패용하기 어렵다.
3. 가야 화살통의 장식성
앞서 언급하였듯이 장식성은 무기의 2차적 기능으로 이해 할 수 있다. 패용구이자 착
장구로서의 기능으로 신분이나 계층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옥련(1992)의 지적처
럼 화살통은 완전한 무장을 갖추었을 때, 또는 수렵 시 가장 몸 가까이에 착장해야 하는 무
구로, 금공 장신구 문화가 꽃피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의장화도 두드러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금공품 문화 도입 이전의 자료인 시통에서도 거치문, 집선문 등의 무늬를
가죽에 시문하여 장식성을 표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절에서는 가야 화살통의
장식적인 특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시통
사례가 많지 않아 아직까지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삼국시대에 확인되는 시통 중 피
혁제로 거치문·집선문 등을 시문한 형태의 것은 장식성을 극대화한 화살통이라 할 수 있
다. 이런 거치문·집선문은 피혁제 방패, 갑옷에서도 확인되는데, 대형급 수장층의 무덤에
서 주로 확인되는 것이 특징이다. 궁시와 화살통 자체가 소유에 제한이 있었던 무기이며,
이는 곧 신분을 나타내는 수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 시복
김성혜(2015)는 장전된 활을 보관하는 궁대와 화살촉 부분을 화살집에 꽂아 화살깃 부
분은 화려하게 부채처럼 보이도록 한 의례용 장구를 시복이라고 하여, 조선시대 시복이
가지고 있는 장식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는 삼국시대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화살의 깃이 장식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복에 구현된 다양한 금
공기술은 그 자체가 장식적인 요소임을 부정할 수 없다.
가야지역 고분에서는 약50여 개의 시복이 확인되었다. 대다수의 자료가 대형급의 수장
층 분묘에서 확인되었으며, 금동·철지금동장·철지은장 등으로 제작한 금구에 파상점열문·
용문, 원두정 등으로 장식성을 더하고 있는 자료가 많다. 철제로만 제작된 예는 부산 복천
동11호·47호, 고령 지산동 연결석곽 출토품 정도이다. 합천 옥전 M3호분 같은 경우는 5
개체 이상 복수 매납됐지만 모든 화살통이 화려한 금공품으로 구성되었을 정도로 장식성
37
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이 화려하다.
이들 시복은 선학들에 의해 기마문화와 함께 북방으로부터 유입되었음이 수 차례 지적
되어 왔다. 화려한 마장구류들과 함께 고분에 매납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형급의 분묘에
서 대다수의 자료가 확인되는 것은 기마문화가 상위 일부 계층에서만 향유되었던 것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상위계층은 기마문화의 일부로 시복을 받아들였으며, 시복을 패
용하고 사냥·군사훈련 등의 기사 행위를 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문헌 기록을 통해
서도, 고구려 벽화분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한 것으로 가야의 시복 또한 그 연장선 상에
서 파악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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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Ⅵ. 나가며
본고에서는 삼국시대 가야고분 출토 화살통의 특징을 살펴보고 무기의 실용성과 장식
성이라는 측면에서 화살통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간략하게 특징적인 내용을 요약하며 본
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가야 화살통은 아래와 같은 특징이 확인되었다.
첫째, 화살통은 시복과 시통이 모두 확인된다.
둘째, 시통은 피혁제로 거치문 집선문 등을 시문한 형태의 것과 목제로 단면 (반)원형의
길다란 형태의 것이 확인된다.
셋째, 시복의 기본몸체 구성은 나무와 가죽으로 구성되었으나, 일부 구성품은 금동·철
지금동장·철지은장 등으로 제작한 금구로 이루어져 자체의 장식성을 더하고 있다.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확인되는 화살통과 같은 형태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중국·일본·고구려·조선시대의 자료를 비교 검토 결과 가야의 화살통에 한해서는
시복=허리에 패용, 시통=어깨에 패용이라는 방식을 대입시킬 수 있다.
다섯째,
步射(보사), 騎射(기사)에 모두 시복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 화살통의 실용성은 시통과 사복에 따라 장단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통은 도보로 이동하는 것에 적합하며, 은폐·엄폐와 같은 전술에 적합한 무기이다. 다
량의 화살 수납이 가능하며, 유실의 가능성이 적다. 그렇지만 화살을 꺼내 장전하기 불편
하며 이 때문에 연사력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시복은 장전하기가 비교적 수월하여 연사력이 높아, 기사에 유리하다. 하지만 도보로
장시간 이동하기엔 불편하며, 다량의 화살을 패용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장식적인 측면에선 시통과 시복 모두 장식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시복의 경우 북방의 기마문화와 함께 마장구의 일부로서 가야지역에 유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위계층은 시복을 패용하고 사냥·군사훈련 등의 기사 행위를 하였던 것으
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시복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9
이 성 훈
가야의 화살통(
盛矢具)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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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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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의 화살통(盛矢具)」에 대한 토론문_오동선
「가야의 화살통(盛矢具)」에
대한 토론문
오 동 선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이성훈 선생님은 ‘가야의 화살통’이라는 주제로 화살통에 대한 연구사와 용어를 정리하
고 많은 양의 비교자료를 검토한 다음 가야 화살통의 특징을 정의하셨습니다. 선행 연구
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한국 화살통을 크게 ‘시통형’과 ‘시복형’으로 구분하여 논의를 전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화살통 개별 부속품의 형식분류와 조합에서 벗어나 화살통의 전체
형태와 화살촉이 화살통에 담기는 방식에 주목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가야의 화살통은
시통과 시복이 모두 확인되며 시복은 허리, 시통은 양쪽 어깨에 매는 것으로 정리하셨습
니다.
그러나 시통의 착용법을 양쪽 어깨에 매는 것으로 일반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
문이 있습니다. 발표자가 제시한 자료처럼 양쪽 어깨에 매는 방식은 일본 형상하니와 자
료가 유일합니다. 토론자가 아는 바로는 국내 자료에서 착용법이 분명한 사례는 없다고
봅니다. 관련하여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삽도 2-하단> 돈황 막고굴 285굴 회화자료에 대해 ‘말 탄 병사는 시통, 보병은 시복
패용’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 장면은 서로 다른 두 부대의 전투 장면이어서 동일 집단에
서 시통과 시복을 함께 사용한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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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2. 일본의 시통은 <삽도 5>의 형상하니와로 보건데, 단면이 납작해서 양쪽 어깨에 맸
을 때 착용감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삽도 5-최상단>의 ‘
會津大塚山古墳’, ‘メスリ
山古墳’ 출토 화살통은 단면형이 명확치 않은데, 형상하니와처럼 세장한 방형인지 여부에
대한 부연설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3. 중국의 시통은 말 그대로 통형으로 납작한 형태가 아니며 모두 허리에 패용하는 것
임을 회화자료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삼국시대의 시통도 모두 중국과 비슷한데, 사례는 희소합니다. 고창 봉덕리 1-4호
석곽의 목재에 칠을 바른 화살통, 발표자가 제시한 기장 고촌 유적 출토품만이 이에 해당
하며구체적인 착용법은 특정하기가 어렵다고 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자가 시통을
가방처럼 양쪽 어깨에 매는 형태로 판단하는 이유에 대한 부연설명을 부탁드립니다.
4. 토론자가 삼국시대 한국의 화살통을 정리했을 때 확인한 사실은 가야권 대부분의 화
살통은 백제권과 유사도가 높은 가운데, ‘
山’자형 틀장식은 고구려·신라권과의 유사성도
간취된다는 점입니다.
백제권과의 관련성은 화살통 틀의 형태가 위에서 보면 반원형인 것들이 많다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주 수촌리 2지구 4호, 고창 봉덕리 1-4호, 합천 옥전 M1호
B, 합천 반계제 가A호, 합천 옥전 M4호, 고령 지산동 34-35호 연결부 석곽, 고령 지산동
47호, 함양 백천리 1-3호, 장수 동촌리 28-1호 출토품 등 다수입니다. 대부분의 화살통은
길이 차가 있는 걸이금구 2개와 공반하고 있어서 허리띠에 매다는 것이었음 알 수 있습니다.
즉 백제와 가야권에서 확인되는 화살통은 발표자가 제시한 ‘시통형’과 ‘시복형’의 중간
형태이면서 허리띠에 매다는 형태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토론자의 판단으로는 한국의 ‘시통형’이라고 하는 것은 화살을 보관하는 용도이고 ‘시
복형’은 회화자료로 보건데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발표자의‘시통형’과
‘시복형’의 구분은 중국 중원지역의 한족과 북방지역 기마민족의 차이로서 이해가 가능하
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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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의 화살통(盛矢具)」에 대한 토론문_오동선
주제발표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장 상 갑(의령군 의병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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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상 갑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Ⅰ. 머리말
가야고분에서 출토되는 무장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형식적인 변화와 보유현황을 파악
하여 가야의 성격을 해명할 수 있는 주요한 방법이다. 군사적 성격을 띠는 무기와 무구, 마
구로 구성된 가야무장은 상호 연동되어 기능적 개량이 이루어지며, 전투형태의 변화를 판
단할 수 있는 자료이다. 공격용 무기는 충격무기와 투사무기로 구분되며, 철촉은 대표적
인 투사무기로 원거리 상대를 공격한다. 살상력 강화라는 기능적 개량과 함께 일회성 소
모품으로 가야고분에서 출토되는 철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철촉에 대한 연구는 촉두의 형태적인 속성에 주목하여 특정한 지역성과 계층성을 도출
하고 있다. 상징성이 강한 철촉 형식을 대상으로 특정한 고분의 지역적인 분포를 통하여
집단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김성태 1988; 김길식 1993; 우병철 2005;
이성훈 2017). 무기 본연의 기능성을 상실한 철촉 형식은 무장체계 내에서 철촉이 가지는
역할을 이해하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다.
기능적인 속성에 주목한 연구는 철촉의 변화에서 보이는 공격용 무기로서의 성격을 강
조하고 있다. 슴베와 경부의 유무, 길이 등을 우선적인 속성으로 파악하였으며, 철촉 변화
Ⅰ. 머리말
Ⅱ. 철촉의 분류와 기능
1. 무경촉
2. 광형촉
3. 세형촉
Ⅲ. 가야 철촉의 변천과 지역성
1. 최신 철촉의 출현
2. 가야 철촉의 변천
3. 철촉 부장의 지역적 전개
Ⅳ. 맺음말
목 차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장 상 갑
의령군 의병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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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의 시간성을 파악하는데 대단히 유효하고, 관통력의 증대와 같은 기능적 개량을 높이 평
가하고 있다(안순천 1984; 이현주 1993; 김두철 2006). 그리고 후기가야의 실전용 철촉
의 소유양상을 분석하여 각 정치체 간의 서로 다른 계층구조를 살펴본 연구도 있다(장상
갑 2009).
이상과 같은 철촉에 대한 관점을 토대로 가야지역 철촉에 대해 기능적인 측면에서 분류
를 시도하고, 최신 철촉의 부장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양한 형식의 철촉에 대해 세밀
한 분류보다 기능성 개량에 주목하여 최신의 철촉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도식화하였다. 여
러 지역으로 분립되어 있는 가야의 철촉 보유현황을 통해 가야 정치체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목적을 두고자 한다.
Ⅱ. 철촉의 분류와 기능
철촉의 기능은 보다 원거리에 있는 상대를 공격할 수 있도록 비거리를 증대시키며, 방어
용의 갑주에 대응하여 관통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살상의 기
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철촉과 화살대를 견고하게 착장할 수 있는 구조적인 변화
도 중요하게 인식된다. 기능의 개량은 주로 시간성을 반영하는 요소이며, 철촉의 다양한
형태적인 차이는 용도와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철촉은 일회성의 화살을 구성하는
부속품으로서 소모성이 강하며, 효과적인 운용체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대량생산에 적
합한 형태로 규격화가 이루어진다.
분류는 화살대의 착장구조와 촉두의 너비를 기준으로 먼저 3개의 촉군으로 대별하고자
한다. 촉은 슴베의 유무에 따라서 무경식과 유경식으로 구분이 되며, 촉두의 너비는 광형
과 세형이 있다. 철촉의 대분류는 무경촉과 광형촉, 세형촉으로 설정이 가능하며, 촉두의
세부적인 형태에 따라서 각각의 형식명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각 형식의 철촉은 착장구조
의 변화나 촉신의 장경화 정도에 따라서 단경식, 중경식, 장경식으로 세분하였다.
1. 무경촉군
무경촉은 슴베를 가지지 않은 구조로 장삼각형의 평면형태를 기본으로 한다. 기능성과
관련된 속성으로는 촉두의 장신화와 소형화가 주목된다. Ⅰ형식은 촉신이 삼각형을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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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상 갑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고, 양 날개가 벌어져 넓은 형태이다. 결입부에 삼각상으로 돌출된 슴베가 확인되며, 이를
기준으로 세분하였다. Ⅰa식은 슴베가 있는 무경촉으로 창원 다호리 104호묘, 47호묘, 함
안 소포리 3호묘에서 확인된다. 슴베가 없는 Ⅰb식은 함안 소포리 3호묘에서 Ⅰa식과 공
반하며, 창원 다호리 51호묘, 김해 대성동 60호묘, 양동리 99호묘와 같이 전기와질토기가
부장되는 목관묘에서 출토된다.
Ⅱ형식은 가장 일반적인 무경촉으로 촉두의 너비가 좁아지면서 세장한 형태를 띤다. 장
신화의 정도에 따라 세분되며, Ⅱa식은 촉신의 너비와 길이가 1:3의 비율로 길이가 10㎝
미만이다. 창원 다호리 51호묘에서 처음 출현한다. Ⅱb식은 촉신의 길이가 10㎝ 이상으로
세장화된 형태로 김해 양동리 Ⅳ-32호묘에서 확인되며, 이후 부산 복천동 145호묘, 함안
말산리 (삼)15호묘, 창원 도계동 (경)32호묘와 같이 후기와질토기에 들어서 출토예가 급
증한다.
Ⅲ형식은 촉두의 크기가 소형화된 무경촉으로 Ⅲa식은 소형화가 시작되는 단계로 촉두
의 너비는 2㎝ 이상이며, 전기와질토기가 부장되는 김해 양동리 55호묘에서 확인되고, 이
후 후기와질토기와 공반하여 주로 확인된다. Ⅲb식은 2㎝ 이하로 촉두의 너비와 길이가
극단적으로 축약되면서 함안 말산리 (삼)3호묘, 김해 양동리 (문)5호묘에서 확인된다. 김
해 대성동 (주)1호묘, 구지로 38호묘에서는 다량 부장이 이루어지며, 고식도질토기 단계
까지 지속적으로 부장되고 있다.
Ⅳ형식은 촉신 내부에 투공이 있거나 결입부에 판상의 슴베가 잔존하면서 다양한 장식
적인 요소가 있는 무경촉이다. 일반적으로 부장되는 다른 무경촉에 비해 출토예가 극히
한정되어 있다. Ⅳa형식은 촉두 중앙의 양쪽에 구멍이 뚫려 있어 소리를 내는 명적으로 사
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Ⅳb식은 실전용의 세형촉과 공반되는 특수 목적의 철촉일 가
능성이 있다.
2. 광형촉
그림 1. 무경촉의 형식분류 (S=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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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슴베가 있는 유경식 가운데 촉두 너비가 2㎝ 이상으로 넓은 철촉이다. 형태적인 차이에
따라서 계기적인 변화의 양상이 간취되는 양익형과 광엽형, 능형, 부형이 확인되며, 출토
예가 한정되어 있으나 주변지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특수한 형태적 특징을 보이는 정각
형, 조설형, 이단역자형, 이지형, 삼익형 철촉도 광형촉에 포함할 수 있다.
양익형 철촉은 역자식 유엽형철촉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역자형철촉으
로 독자적인 계통성을 가지는 형식으로 분류하고 있다. 유경식인 Ⅰ형식은 촉두의 너비
는 1.5~2.5㎝ 정도로 비교적 안정된 광형을 띠고 있다. 노포동 6호분에서 확인되기 시작
하며, 대성동 29호분에서 6점, 노포동 31호분에서 23점 등 출토빈도와 함께 수량도 급증
하고 있다. Ⅱ형식은 슴베단이 명확해지는 형식으로 경부의 길이는 짧으나, 촉두가 장신
화되어 전체적인 촉신의 길이는 장신화되고 있다. 날개의 형태가 다소 벌어지는 방향으로
변화하며, 복천동 38호분에서 확인된다. Ⅲ형식은 학소대 2ㆍ3호분에서 전형이 보이며,
촉두가 대형화되고, 중경이 부착되고 있다. Ⅳ형식은 촉신의 가운데 구멍이 있는 형식으
로 대성동 70호분에서 확인되기 시작한다.
광엽형 철촉은 기존의 유엽형철촉과 함께 분류되고 있었으나, 촉두의 너비에 있어서 뚜
렷한 차이가 있는 독자적인 형식이다. Ⅰ형식은 경부와 슴베의 경계에 단이 없는 유경식
구조이며, 후기와질토기를 공반하는 김해 대성동 (주)1호묘와 부산 노포동 다1호묘에서
확인되며, 촉두의 너비는 비교적 세장하다. Ⅱ형식은 경부와 슴베의 경계에 단을 이루는
단경식으로 착장법이 강화된 구조로 김해 예안리 150호분에서 확인된다. Ⅲ형식은 경부
가 길어진 중경식으로 촉두가 넓어지면서 부산 복천동 11호분에서 확인되며, 실제적인 기
능보다는 의장성을 강화한 형식으로 이해된다. 중앙에 투공이 있는 형식은 Ⅳ형식으로 설
정하였으며, 대성동 (주)4호분, 양동리 453호분, 노포동 31호분에서 출토예가 있다.
능형 철촉은 광형촉 가운데 주류를 이루는 형식으로 촉두의 너비가 2㎝ 이상으로 평면
형태는 능형을 띠고 있다. 촉의 선단부가 삼각형으로 세형계 사두형 철촉을 포함하여 형
식명이 부여되는 경우가 많다. 화살대의 착장구조에 따라서 유경식인 Ⅰ형식과 단경 혹은
중경식인 Ⅱ형식으로 대별할 수 있다. 고식도질토기와 공반하여 김해 대성동 29호분에서
13점의 능형 Ⅰ식이 다량으로 확인되며, 능형 Ⅱ식은 고식도질토기와 공반하여 김해 망덕
리 Ⅱ-29호 목곽묘에서 확인된다.
부형 철촉은 착두형 철촉으로 알려진 형식으로 인부가 수평을 이루며, 촉두의 너비가 넓
은 형태이다. 분류는 촉두의 너비가 3㎝ 이상으로 넓으면서 역삼각형을 이루는 형태를 Ⅰ
형식, 촉두가 좁아지면서 촉신이 길어져 세장한 역삼각형인 형태를 Ⅱ형식으로 대별하였
다. Ⅰa식은 촉신의 측변이 직선적으로 이어지는 형태이며, 김해 대성동 45호묘에서 출토
되었고, Ⅰb식은 김해 망덕리 Ⅱ-22호 목곽묘에서 확인된다. Ⅱ형식은 촉두의 너비가 좁
아진 형태로 촉신과 경부가 길어졌으며, 창원 현동 Ⅰ-9호, 함안 말이산 47호분에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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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상 갑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된다.
그 밖에 정각형 철촉은 고식도질토기가 출현하는 김해 대성동 29호분과 양동리 58호분
에서 다량으로 확인되며, 단경식 철촉이 공반되는 대성동 88호분과 예안리 93ㆍ100호분
까지 지속되고 있다. 조설형 철촉은 촉신 하단에 산형돌기가 특징적이며, 일본 고분시대
중기의 특징적인 철촉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김해 망덕리 Ⅱ-79호 목곽묘에서 20점 이상
으로 다량 부장되었으며, 합천 봉계리 39호분, 산청 묵곡리 67호분과 같이 서부경남 지역
에서 일부 확인되고 있다.
이단역자형 철촉은 일본 고분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철촉으로 인식되며, 가야지역에서는
현재까지 부산 연산동 M10호분을 중심으로 인접한 반여동 21호분, 복천동 79호분에서
확인되며, 거창 무릉리 3-1호분에서도 5개체가 확인된다. 이지형 철촉은 안고형으로 알
려져 있으며, Y자형으로 촉두가 벌어지는 형태로 내측에 편인의 인부를 가지고 있다. 가
야지역에서는 출토예가 극히 희박하며, 진주 가좌동 2호 목곽묘, 김해 죽곡리 87호분에서
그림 2. 광형촉의 형식분류 (S=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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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출토되었다.
삼익형 철촉은 촉두에 세 갈래의 날개가 있는 형태로 신라지역에서 주로 출토되는 특수
한 형식이다. 가야지역에서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 철촉이다. 날개가 방형을 띠고, 촉
의 선단이 직선적인 형태는 경주 황남동 110호분을 비롯하여 천마총에서도 확인된다. 날
개에 역자가 부가되어 촉두는 유선형을 띠는 형태는 창녕 교동 (日)89호분과 양산 부부총
에서 확인된다.
3. 세형촉
세형촉은 촉두의 너비가 2㎝ 미만인 철촉으로 형태적인 차이에 따라 사두형, 유엽형, 골
촉형, 착두형, 추형, 도자형으로 구분된다. 무경촉이나 광형촉과 비교하여 촉두의 너비가
세형을 띠면서 관통력이 향상되어 실전에서 기능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철촉이다.
촉신의 착장법과 경부의 길이를 감안하여 유경식, 단경식, 중경식, 장경식으로 세분1)되며
(장상갑 2009), 철촉의 기능적인 개량을 반영한다. 또한 각 형식의 세형촉은 촉두의 형태
변화나 역자의 유무를 통해서 세분할 수 있다.
사두형 철촉은 촉두의 인부는 약하게 호상을 이루고 있으나 거의 직선적이며, 인부 길이
와 촉두의 너비가 거의 비슷하거나 작은 형태이다. 형식의 분류는 유경식을 Ⅰ형식, 단경
식을 Ⅱ형식, 중경식을 Ⅲ형식, 장경식을 Ⅳ형식으로 구분하였다. Ⅰ형식은 전기가야의 실
전용 주력촉(김두철 2006)으로 인정되며2), 김해 대성동 45호분에서 처음 확인되고, 대성
동 (주)1호분에서 175점, 구지로 38호분에서 63점 등 다량 부장되는 양상을 보인다. 단경
식의 Ⅱ형식과 중경식의 Ⅲ형식이 고식도질토기와 공반하여 부장되며, 김해 예안리 104
호분에서는 양 형식의 철촉이 조합을 이루고 있다. 후기가야 단계에는 장경식인 Ⅳ형식이
출현한다. 최신의 형식으로 파악되는 사두형 Ⅳ형식은 실전용의 주력촉을 구성하는 유엽
형과 도자형 철촉에 비해서는 낮은 부장빈도를 보인다.
유엽형 철촉은 촉두의 인부가 곡선적이며, 인부 길이가 촉두의 너비에 비해 2배 이상으
1) 5~6세기대 후기가야의 사두형 철촉은 촉신의 길이가 5.5㎝ 미만인 경우 단경식으로 구분되며,
5.5~9.0㎝는 중경식, 9.0㎝ 이상을 장경식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촉두가 비교적 긴 유엽형 철
촉은 촉신의 길이가 6.5㎝ 미만이면 단경식, 6.5~10.0㎝는 중경식, 10.0㎝ 이상을 장경식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도자형 철촉을 비롯하여 다른 세형촉에 대해서는 유엽형 철촉의 구분 기준
을 적용하였다.
2) 전기가야의 주력촉은 有莖細圭頭形鏃이며, 有頸의 蛇頭形鏃을 5세기대 이후 후기가야의 주력
촉으로 보았다. 경부 구조의 차이는 기능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속성으로 본고에서는 사두형 철
촉 내에서 유경식과 단경식으로 구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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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상 갑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로 세장한 형태이다. 중경식의 Ⅲ형식과 장경식의 Ⅳ형식은 역자의 유무에 따라서 a식과
b식으로 세분하였다. Ⅰ형식은 김해 양동리 81호분이나 부산 노포동 31호분에서 30점 정
도의 다량 부장이 확인되고, 단경식 철촉이 부장되기 전까지 주력촉을 형성한다. 부산 복
천동 38호분에서는 단경식의 Ⅱ형식과 중경식의 Ⅲ형식은 동시기에 출현하며, 김해 망덕
리 Ⅱ-4호 목곽묘에서 처음으로 장경식인 Ⅳ형식이 확인된다. 다만, 장경식 유엽형 철촉
은 후기가야토기가 부장되는 석곽묘 단계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부장되며, 사두형 철촉보
다 장경화가 집중된다.
골촉형 철촉은 촉두의 단면이 V자형을 이루며, 유기질제 골촉이 철제로 전환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유경식의 Ⅰ형식이 주류를 이루며, 이후 단경화 과정에서 출토예는 극히
낮아진다. 세분하여 김해 예안리 160호분 출토 골촉형 철촉과 같이 역자가 없는 형태를
Ⅰa식, 대성동 29호분에서 출토된 역자가 있는 형태를 Ⅰb식으로 구분된다. 부산 노포동
6호분과 16호분에서 1~2점 부장되며, 이후 노포동 31호분, 대성동 29호분에서 40~50점
그림 3. 세형촉의 형식분류 (S=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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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씩 다량 부장된다. 단경식 철촉이 출현하기 전까지 사두형과 유엽형 Ⅰ형식과 함께 높은
출토빈도를 보이며, 역자가 부가된 Ⅰb식의 골촉형 철촉이 주류를 이룬다.
착두형 철촉은 촉두의 너비가 세형을 이루면서 인부가 직선적인 형태로 충격력을 강화
한 구조이다. 슴베의 구조와 촉신의 길이에 따라서 Ⅰ형식부터 Ⅳ형식으로 구분이 가능하
다. 부산 노포동 31호분에서 착두형 Ⅰ형식이 출토되었고, 단경식 철촉의 출현과 동시에
Ⅱ형식이 김해 대성동 18호분에서 9점, 대성동 88호분에서 27점, 대성동 70호분에서 12
점 부장되고 있다. 그리고 후기가야토기가 공반하는 석곽묘 단계에는 지산동 30호분에서
중경화된 Ⅲ형식이 15점 확인된다.
추형 철촉은 촉두의 단면 형태가 두터운 삼각형 혹은 방형을 띠는 형태이며, 골촉형 철촉
에 포함되기도 한다. 관통력을 극대화한 구조적인 특징으로 철제갑주를 비롯한 방어용 무
구에 대응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개량된 형태이다. 부산 노포동 31호분과 김해 예안리 160
호분에서 짧은 형태의 Ⅰ형식이 1점씩 확인된다. 단경식 철촉의 출현과 함께 부산 복천동
38호분에서 장신화된 Ⅰ형식과 함께 단경식의 Ⅱ형식 추형 철촉이 200여점 부장되고 있
다.
도자형 철촉은 촉두의 한쪽 측면에 인부가 있는 형태로 다른 세형촉에 비해 가장 늦게
출현한다. 촉두의 형태와 촉신의 길이를 기준으로 대별하며, 각 형식 내에서 역자가 없는
형태를 a식, 자상력을 향상시키는 역자가 있는 형태를 b식으로 세분된다. 촉두가 긴 장도
형의 Ⅰ형식은 김해 양동리 75호분, 부산 복천동 168호분, 창원 도계동 (창)19호분과 같
이 주로 중소형묘에서 확인된다. 촉두가 짧은 Ⅱ식은 옥전 68호분에서 처음 확인되며, 후
기가야토기가 정형화되는 단계에 장경식인 Ⅲ형식과 함께 부장이 이루어진다. 도자형 철
촉은 다른 세형촉과 같이 장경화를 통해 점진적인 규격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장경식으로
정형화된 Ⅲ식이 거의 동시기에 출현하여 주력촉을 형성한다.
Ⅲ. 가야 철촉의 변천과 지역성
1. 최신 철촉의 출현
1) 무경촉과 유경촉
가야 철촉의 변천과정을 파악하기에 앞서 변한 단계에서 보이는 철촉의 출현과 구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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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상 갑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영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철촉은 슴베를 가지지 않는 광형
의 무경촉이며, 다른 공격용 무기인 철검과 철모에 비해 한 단계 늦게 확인된다. 목관묘에
처음 부장되는 무경촉은 형식상으로 돌기상의 슴베가 부가된 Ⅰa식과 Ⅰb식으로 창원 다
호리 104호묘와 함안 소포리 3호묘에서 확인된다. 무경촉 Ⅰa식은 출현기 이후 자취를 감
추며, Ⅰb식이 전기와질토기 단계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촉신은 넓은 삼각
형으로 양 날개가 벌어져 구조적으로 관통력이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다호리 32호, 48호묘 단계에는 촉신의 너비가 점차 세장해지면서 무경촉 Ⅱa식의
출토빈도가 증가하고, 목관묘 단계의 늦은 시기가 되면서 Ⅲa식으로 소형화가 진행된다.
다호리 70호묘와 대성동 60호묘에서는 이러한 형식이 확인되며, 양동리 55호와 99호묘에
그림 4. 변한 단계의 철촉의 형식변화 (S=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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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서는 Ⅱa식과 Ⅲa식이 조합을 이루고 있으나, 출토량은 10점 이내로 높지 않다.
철촉의 본격적인 형식변화는 후기와질토기 단계에 들어서 진행되며, 광형촉을 비롯하여
사두형과 유엽형의 세형촉이 등장하여 기능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보이게 된다. 무경촉의
장신화와 소형화가 더욱더 진행되어 무경촉 Ⅰb식은 거의 소멸되고, 극단적으로 장신화
된 Ⅱb식이 양동리 162호묘, 복천동 145호묘, 말산리 (삼)15호묘에서 출토된다. 소형화된
무경촉 Ⅲb식은 말산리 (삼)3호묘, 도계동 (동)10호묘에서 확인된다. 대성동 45호묘에서
유경식의 부형 철촉과 사두형 철촉이 확인되며, 노포동 다1호묘에서는 광엽형 Ⅰ식, 노포
동 6호묘에서 양익형 Ⅰ식이 확인된다.
유경식의 세형촉은 후기와질토기 단계의 부장이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대
성동 (주)1호묘에서 200여점의 철촉이 다량으로 출토되었으며,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형
식은 유경식인 사두형 Ⅰ식이다. 구지로 38호묘에서도 60여점의 철촉이 확인되며, 양동리
(문)4호묘, 노포동 다1호묘 등에서도 10여점의 철촉의 출토되고 있다. 노포동 6호, 8호,
41호묘에서는 유엽형 Ⅰ식 철촉이 보이고, 노포동 6호, 16호묘에서는 골촉형 Ⅰ식 철촉이
확인된다.
이와 같이 가야 성립 직전의 후기와질토기 단계에는 새로운 유경식의 광형촉과 세형촉
이 출현하고 있으나, 철촉의 구성은 여전히 무경촉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촉신의 길이
가 10㎝ 이상으로 장신화된 무경촉 Ⅱb식이 다수 확인되며, 극단적으로 소형화된 무경촉
Ⅲb식이 주력을 이룬다. 대성동 (주)1호묘, 구지로 38호묘, 양동리 (문)4호묘, 노포동 16
호묘에서 무경촉 Ⅲb식이 10~20점 정도로 다량 부장되는 양상이다. 후기와질토기 단계
의 철촉 구성에서 무경촉이 부장된 분묘는 65기로 전체의 70%를 차지하며, 새로운 광형
촉 10%, 유경식 세형촉 2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 단경촉과 중경촉
가야의 철촉은 앞서 후기와질토기 단계에 새롭게 출현한 사두형 Ⅰ식, 유엽형 Ⅰ식, 골촉
형 Ⅰ식 등 유경식 세형촉의 보유가 확대되면서 실전용 철촉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
나 철촉의 본격적인 기능 변화는 철제갑주의 출현과 함께 4세기 중엽에 확인되기 시작한
다. 가야의 성립을 대표하는 김해 대성동 29호분에서 다량의 철촉이 부장되고 있으나, 형
식적으로 대부분 전대의 철촉 형식이 주류를 이룬다. 광형촉을 비롯하여 다양한 철촉 구
성을 보이고 있으나, 유경식의 사두형 세형촉이 실전용 철촉으로 다량 부장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이후 김해 대성동 88호분, 18호분, 구지로 2호분, 예안리 104-118호분,
복천동 38호분 단계에서 새로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실전용의 세형촉은 유경식에서
슴베단이 형성되면서 화살대와의 고정이 강화되고, 경부가 길어져 관통력을 증대되는 형
식으로 전환된다. 단경촉은 출현 이후 점진적으로 장경화를 통해서 기능 개량을 거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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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상 갑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단경촉 출현기의 철촉 구성에는 다수의 중경촉이 확인되고 있다.
중경촉은 유엽형 철촉을 중심으로 사두형과 골촉형, 추형 등 세형촉에서 확인되며, 장신
화를 통한 기능적 발전은 출현기부터 철촉 생산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촉신의 길이 변
화를 통한 살상력의 증대라는 기능성 향상이 시도되었으나, 철촉 길이의 다양성으로 규격
화는 진행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최신 기능의 철촉 형식과 일회성 소모품이라는 철
촉의 성격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3) 장경촉
가야의 최신 철촉은 촉신의 길이가 10㎝ 이상인 장경식 세형촉의 등장으로 완성된다. 장
경촉의 주류를 이루는 형식은 도자형 Ⅲ식으로 유엽형 Ⅳ식과 사두형 Ⅳ식도 다수 확인되
그림 5. 유경촉에서 단경촉으로의 전환과정 (S=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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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며, 세부적으로 촉두에 역자가 부가되어 살상력을 강화한 기능성 향상이 두드러진다. 5세
기 중엽 이후 후기가야 단계에는 최신 철촉으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나, 기존의 단경촉
과 중경촉이 다수 확인되고 있어 장경촉의 실용성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촉신의 장경화
는 구조적인 개량을 반영하며, 가야 철촉의 구성에서 장경촉이 차지하는 비중을 통해 성
격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장경촉이 가장 먼저 확인되는 고분은 김해 망덕리 Ⅱ-44호 목곽묘이며, 잔존상태는 양
호하지 못하나 철촉 14점과 철모 1점, 판상철모 2점이 공반되고 있다. 고분 편년에 유효한
노형기대가 확인되고 있으며, 김해 대성동 1호분 단계인 5세기 전엽으로 비정할 수 있다.
철촉은 피장자의 우측 허리부분에서 1군으로 출토되었으며, 양익형 Ⅱ식 4점과 능형 Ⅱ식
2점과 함께 실전용의 세형촉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형촉 가운데 사두형 철촉은 모두 6점
으로 촉신 길이가 5㎝ 정도인 Ⅱ식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유엽형 철촉 2점은 촉신의 길이
12㎝ 정도로 장경화가 진행된 형식으로 촉두의 너비도 소형화된 형태이다. 현재까지 가야
지역에서 확인된 가장 빠른 장경촉으로 볼 수 있다.
가야 철촉의 장경화와 관련하여 일찍부터 주목받은 자료는 복천동 10-11호분으로 5세
기 중엽의 이른 시기로 비정된다. 이에 한 단계 선행하는 복천동 21-22호분에서는 유협형
과 사두형의 단경촉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전기가야 단계의 대표적인 고분인 대성동 2
그림 6. 출현기의 장경촉과 비교자료 (S=철촉 1/6, 철모 1/8, 토기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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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상 갑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호, 1호분에서도 단경화된 유엽형과 사두형 철촉이 규격화되어 다량 부장되는 양상이다.
철촉의 장경화와 관련하여 동시기의 대형분보다 먼저 주변지역의 중소형급 고분에서 장
경촉의 부장이 확인된다. 상위집단에 의한 최신 무기의 독점과 배치되는 양상으로 최신
철촉의 실제 사용과 고분 부장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중심지역의 영향권을 벗어나 주
변지역에서는 실용적인 최신 철촉이 위세품으로 역할을 하였거나, 중심 정치체의 무기 부
장에 대한 규제가 작용하지 못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이러한 장경촉의 출현과 함께 후기가야 지역에서는 최신의 철촉으로 부장 확대가
명확하지 않다. 철촉의 실용성과 함께 고분 부장에 대한 접근은 철촉의 장경화가 실제 사
용에 있어서 제한적이었을 가능성과 함께 가야 철촉에 대한 변화의 방향성을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 대해서 가야 종말기의 철촉 부장 양상이 주목되며, 이 시기를 대표하
는 거창 성기리고분군을 통해 접근이 가능하다. 후기가야 단계에 장경촉의 부장이 상대적
으로 빈약하였던 대가야권에서 장경촉 일색의 철촉 구성이 확인되고 있다. 대부분 사두형
과 유엽형 철촉으로 촉신의 길이가 10㎝를 넘는 장경촉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가야의 멸
망을 즈음하여 주변지역에서 장경촉이 다수 확인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최신 철촉으로서
장경촉의 실제 사용 비중은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2. 가야 철촉의 변천
철촉의 기능적 개량을 통한 최신 철촉은 변한 단계부터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출현하면
서 무장체계의 발전을 이룬다. 특정 시기에 출현하는 철촉의 형식을 통해서 새로운 획기
를 설정할 수 있으나, 다양한 철촉이 공존하는 가야 철촉의 변천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
는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기존 고분편년에 대한 연구성과(안재호 1997; 신경철
그림 7. 거창 성기리고분군 출토 장경촉 (S=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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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2000; 조영제 2006; 박승규 2010; 홍보식 2014)를 토대로 새롭게 출현하는 최신 철촉과
함께 기존 실용촉의 출토빈도를 통해서 가야 철촉의 보유현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Ⅰ기는 3세기 후엽에서 4세기 전엽으로 도질토기의 출현과 함께 가야가 성립하는 단계
로 대성동 29호분을 필두로 양동리와 노포동고분군에서 철촉 부장 고분이 다수 확인된다.
철촉의 형식에 있어서는 후기와질토기 단계에 주력을 이루던 무경촉이 30% 이내로 감소
하며, 이를 대체하여 양익형과 광엽형을 중심으로 광형촉이 확대되고 있다. 세형촉은 사
두형과 유엽형, 골촉형이 모두 10% 이상의 비중이며, 점진적으로 광형촉의 비중이 감소
하면서 세형촉의 비중이 확대된다. 최신 철촉의 보유에 있어서는 기존의 유경촉이 점진적
으로 확대되어 전체 철촉 구성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Ⅱ기는 4세기 중엽부터 후엽으로 비정되며, 전기가야 지역에서 이혈주부곽식 목곽묘가
조영되면서 철제갑주와 기승용 마구가 확인된다. 다른 공격용 무기와 마찬가지로 철촉도
기능적인 개량이 이루어지며, 단경식과 중경식 철촉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전대와 마
찬가지로 점진적으로 무경촉이 감소하며, Ⅱb기에 이르러 비중이 급격하게 감한다. 이에
비해 광형촉은 여전히 20% 정도의 비중이 유지하며, 능형 철촉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세형촉에 있어서 골촉형 철촉의 비중은 점차 감소하고, 유엽형 철촉은 그다지 확대되지
못하며, 사두형 철촉이 다수 부장되면서 전체 구성의 40%를 차지하는 주력촉으로 입지를
굳히게 된다.
최신 철촉으로의 변화에 있어서도 Ⅲa기에는 단경촉과 함께 중경촉이 출현하게 된다. 다
만, 각 철촉의 비중에 있어서 중경촉은 5%, 단경촉은 20% 이내이며, 유경식 세형촉의 여
전히 주력촉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보유현황은 Ⅱb기에 들어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
는데, 무경촉과 유경촉의 출토빈도는 급격히 감소하고, 새로운 최신의 철촉이 본격적으로
확대된다. 특히 중경촉도 20% 비중으로 확대되고 있으나, 주력을 이루는 형식은 단경촉
으로 전체의 50% 정도를 차지하게 된다. 철촉의 규격화를 통한 최신의 철촉의 다량 보유
로 이해할 수 있다.
Ⅲ기는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으로 가야 사회가 재편되는 5세기 전엽이며, 지역적으로
철촉의 부장이 급격히 확산된다. 철촉의 규격화가 진행되며, 전대에 출현한 단경식 사두
형, 유엽형 철촉이 주력을 이룬다. 무경촉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광형촉은 양익형, 광엽
형, 능형이 다수 확인되어 전체적인 출토빈도가 증가하고 있다. 세형촉에 있어서는 여전
히 유엽형에 비해 사두형 철촉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새롭게 도자형 철촉이 확인되기
시작한다. 기능적 보유현황에 있어서는 최신의 장경촉이 확인되기 시작하지만, 고분 부장
에 있어서는 단경촉 중심으로 더욱 확대되는 양상이다. 최신 철촉의 보유 확대와는 역행
하는 양상으로 새롭게 출현한 장경촉에도 불구하고, 중경촉의 고분 부장은 오히려 감소하
고 있다. 이 시기 가야지역에서 단경촉의 비중은 전체의 65% 정도로 주력을 이루며, 규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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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상 갑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화에 용이한 사두형 철촉이 중심으로 이루고 있다.
Ⅳ기는 대형 고총고분군이 조영되는 5세기 중ㆍ후엽에 해당하며, 복천동 10ㆍ11호분,
옥전 23호분, 말이산 마갑총, 지산동 73호분과 같이 후기가야 정치체가 본격적으로 성장
하는 단계이다. 이 시기부터 다양한 형식의 광형촉이 20% 이내로 점진적 감소하며, 세형
촉에서 있어서도 도자형 철촉이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15%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Ⅳa기에는 일시적으로 사두형 철촉보다 유엽형 철촉의 비중이 확대되었으나,
이후 Ⅳb기에는 도자형과 사두형 철촉이 확대되면서 유엽형 철촉의 비중은 감소하게 된
다. 기능적 변화에 있어서는 최신 철촉의 고분 부장이 본격적으로 일어난다. 이전 시기에
주력을 이루던 단경촉은 점차 비중이 감소하며, 중경촉과 장경촉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Ⅳb기에 이르러 중경촉이 30% 이상으로 가장 높은 보유를 보이고,
장경촉도 20% 이상의 출토빈도를 보이게 된다.
그림 8. 가야 철촉 구성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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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Ⅴ기는 6세기 전ㆍ중엽으로 지산동 44호분, 옥전 M3호분, 말이산 26호분, 송학동 1A호
분이 대표적이다. 철촉의 장경화를 통한 기능성 강화가 고분 부장에 반영되지 않으며, 최
신의 장경식과 중경식 철촉의 비중이 더욱더 확대되는 못하고 있다. 철촉의 형식에 있어
서는 사두형 철촉이 60%의 높은 비중을 유지하고 있으며, 유엽형 철촉은 다른 세형촉에
비해 비중이 확대되지 못한다. 도자형 철촉은 6세기대에 들어서 비중이 20% 정도까지 확
대되지만, 이후 보유가 정체되는 양상을 보인다. 철촉의 기능적인 측면에서도 이러한 양
상이 확인되며, 최신의 장경촉은 20% 정도로 지속되고 있다. Ⅴa기에는 일시적으로 단경
촉이 증가하고 있으나, 중경촉의 비중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최신 철촉으로의 전환
과정에서 고분 부장을 통한 보유 확대가 더 이상 확인되지 않으며, 각 지역별로 서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3)이 높다.
3. 최신 철촉의 지역적 전개
철촉이 출토된 가야 고분은 현재까지 1,556기가 알려져 있으며, 지역적으로는 김해지역
에서 406기가 보고되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부산을 포함하여 대부분
의 지역에서도 100여기 정도의 철촉 부장 고분이 축적되어 가야의 지역적인 부장 형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수 형식의 철촉 분포를 통한 지역성이나 집단 간의 교
섭을 벗어나 가야 무장의 주요 구성을 차지하는 주력 철촉의 지역적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가야 동남부권
전기가야의 중심지역인 동남부권은 가야 무장체계에 대한 연구(이현주 2005, 2010)가
축적되어 있으며, 김해와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철촉의 보유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주력
을 이루는 철촉 형식은 사두형 33%, 유엽형 24%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도자형
6%, 착두형 3%, 골촉형과 추형 2% 정도이다. 이에 비해 광형촉은 24%의 비중으로 다른
가야지역과 비교하여 높으며, 양익형 9%, 광엽형 6%, 능형 8% 정도이다. 이와 함께 무경
촉도 62기 고분에서 출토되어 6% 비중을 차지한다. 다른 가야지역과 비교하여 전기가야
단계의 자료가 집중되는 양상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3) 후기가야의 최신 장경촉의 계층적 보유양상에 대한 검토에서 대가야권은 최상위 계층까지 중
경촉과 단경촉이 부장되고 있으며, 이에 비해 아라가야나 소가야권은 다소 느슨한 계층구조로
최신 철촉 부장이 중하위 계층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았다(장상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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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상 갑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최신 철촉의 보유에 있어서는 무경촉은 Ⅰa기에 여전히 40%의 비중이며, 점진적인 감소
하여 Ⅱb기에 5% 이하로 급격하게 낮아진다. 광형촉은 가야 성립기의 Ⅰ기 이후 20% 정
도로 지속되고, 전기가야에서 후기가야로 전환되는 Ⅲ기에는 57기의 고분에서 출토되어
전체 구성의 30%를 차지하면서 6세기 중엽의 Ⅴ기까지 지속적으로 부장되고 있다.
후기와질토기 단계에 새로운 실용촉으로 출현한 유경식 세형촉은 Ⅰa기에는 40% 정도
의 비중을 차지하다가, 4세기 전엽에 해당하는 Ⅰb기에는 가장 일반적인 철촉으로 고분에
부장되고 있다. 이후 철제갑주의 출현과 함께 Ⅱa기에 단경식과 중경식 세형촉이 출현하
면서, 15% 내외의 비중으로 감소하면서 실용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를 대체하여 단경식 세형촉은 Ⅱ기 이후 가야 동남부권에서 주력을 이루는 철촉이 되
며, Ⅱa기에는 35%, Ⅱb기에는 50% 비중을 차지하며, Ⅲ기까지 지속된다. Ⅳ기 이후에는
중경촉과 함께 장경촉이 점차 비중을 높아지면서 단경촉은 30% 정도로 비중이 낮아지고
있다. 중경촉은 Ⅱa기에 단경촉과 함께 출현하여 Ⅱb기에는 비중이 20% 정도 확대되다가
Ⅲ기에는 오히려 비중이 감소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후 후기가야의 Ⅳ기와 Ⅴ기에는 25%
정도의 일정한 비중을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야 최신 철촉인 장경식 세형촉은 Ⅲ기에 일부 확인되고 있으나, Ⅳa기부터
점진적인 비중 증가를 보이다가 Ⅴa기에는 30%를 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실전
용 철촉인 단경식이나 중경식 세형촉과 거의 대등한 비중을 보인다. 다만, 가야 종말기에
해당하는 Ⅴb기에는 이러한 장경촉의 비중이 확대되지 못하고, 오히려 감소하는 양상이
다. 철촉 부장의 쇠퇴와 함께 최신의 장경촉의 고분 부장에 제약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2) 가야 남부권
그림 9. 가야 동남부권의 형식 구성과 최신 철촉의 보유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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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가야 남부권은 함안의 아라가야와 남강과 남해안지역의 소가야권4)을 중심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가야 동남부권과 비교하여 광형촉의 비중은 14% 정도로 양익형 철촉은 8% 정
도로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다른 광형촉의 출토빈도는 높지 못하다. 실전용 철
촉으로서 세형촉의 비중은 사두형 38%, 유엽형 28%, 도자형 12%으로 확인된다. 특히 도
자형 철촉은 동남권과 비교하여 2배 정도 높은 비중을 보이며, 그 외 착두형을 비롯하여
추형과 골촉형은 극히 낮은 비중이다.
가야 성립기의 해당하는 자료는 지극히 제한적으로 철촉 구성의 변화를 단정하기 어려
우나, 무경촉의 구성비는 Ⅰa기 이후 Ⅱb기까지 점진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광형촉은 전
기가야 단계에는 동남권보다 낮은 비중을 보이다가 후기가야의 정치체가 성립하는 Ⅲ기
이후에는 20% 이상의 비중을 보이며, Ⅳb기 이후 10% 정도로 감소한다. 특정 시기에 광
형촉의 비중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나 가야 동남부권에 비해서 전체 구성에서 낮은 비중
을 보인다.
다음으로 전기가야 단계에는 최신 형식으로서 유경식 세형촉의 전환은 지체되는 양상을
보인다. Ⅰa기 이후 출토예가 보이며, 단경식 철촉이 출현하는 Ⅱa기에도 여전히 44기의
고분에서 확인되고 있다. 다음 단계인 4세기 후엽의 Ⅱb기에 들어서 단경촉이 주력촉으로
전환되면서, 유경촉의 비중은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 가야 동남부권에 비해서 최신 철촉
으로의 전환은 한 단계 지체되고 있다.
Ⅱa기에 해당하는 최상위 고분은 가야 남부지역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새롭게 출현하는
단경식과 중경식 세형촉은 비중은 10% 정도로 낮은 출토빈도를 보인다. 이후 Ⅱb기에는
단경촉은 50%, 중경촉은 20% 정도의 비중으로 확대되어 Ⅳa기까지 지속되는 양상이다.
4) 지역권 설정에 있어서 산청의 단성권, 합천의 삼가권, 의령 남부권은 소가야권역 판단되며, 가
야 남부권에 포함하였고, 그 이북을 가야 북부권으로 설정하였다.
그림 10. 가야 남부권의 형식 구성과 최신 철촉의 보유현황
65
장 상 갑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그리고 최신 철촉의 보유 확대는 Ⅳb기 이후에 보이며, 단경촉보다 중경촉의 비중은 높아
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단경촉과 중경촉의 비중은 가야 종말기에 해당하는 6세기 중엽
의 Ⅴb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단경촉 감소는 장경촉의 확대 과정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으며, Ⅳa기에 10% 비
중을 차지하던 장경촉은 이후 Ⅳb기가 되면서 25%의 비중으로 확대가 지속된다. 그리고
Ⅴb기에는 이르러서도 가야 동남부권과 비교하여 비중의 확대가 지속되어 장경촉은 30%
에 가까운 비중으로 실용된 것으로 보인다.
가야 남부권의 철촉 보유현황은 전기가야 단계에는 동남부권에 비해 지체되고 있으나,
후기가야 단계에 접어들면서 중경촉과 장경촉이라는 최신의 철촉이 빠르게 전환되고 있
다. 가야 남부권의 소지역 단위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아라가야의 중심지역인 함안지역
에서 이러한 장경촉으로의 전환이 가장 뚜렷히 확인되며, 잘 확인된다. Ⅳa기 이후 출현하
는 장경촉은 15%의 점유율을 보이다가 점진적으로 확대되면서 Ⅴb기에는 기존의 단경촉
을 대체하여 5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3) 가야 북부권
대가야의 권역으로 상정되는 가야 북부권에서는 현재까지 4세기대 전기가야에 해당하
는 고분이 제한적이다. 무경촉의 비중은 1% 이내로 극히 낮으며, 광형촉도 10% 이내로
양익형, 5%, 광엽형과 능형은 2% 정도 이다. 이에 비해 세형촉군은 전체의 90% 정도로
사두형 철촉이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비중을 보인다. 다음으로 유엽형은 26%, 도자형은
14%로 차지하며, 그 외 세형촉은 착두형이 8기의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으나, 추형과 골촉
형은 확인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가야 동남부권과 남부권에 비교하여 북부권에서는 최신 철촉의 부장이 정
체되는 양상을 보인다. 가야 성립기에 해당하는 Ⅰ기의 고분은 아직 확인되지 않으며, 이
후 전기가야 단계의 철촉 부장 고분 역시 제한적이다. 다만, 방향성에서는 기본의 무경촉
을 대체하여 유경촉이 증가할 것으로 판단되며, Ⅲ기에는 다른 가야지역과 마찬가지로 광
형촉이 일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나, 이후 철촉 구성의 비중은 급격히 감소한다.
Ⅱ기에 들어서 단경촉과 함께 중경촉의 존재도 확인되며, Ⅱb기에는 가야 북부권의 주력
철촉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Ⅲ기에는 가야 동남부권과 비슷하게 새롭게 출현한 중경촉
이 확대되지 못하고, 오히려 단경촉의 비중이 높아지는 양상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단경촉의 비중은 Ⅳ기 이후 점진적으로 감소하는 경향이며, 이를 대체하여 중경촉의 보유
확대가 이루어진다. 다만, 세부적으로 Ⅳb기에는 단경촉을 대체하여 중경촉이 가장 높은
비중을 보이나, Ⅴb기까지 단경촉의 부장이 일반적이다. 최신 철촉으로 단경촉보다 중경
촉의 비중이 높은 가야 남부권과는 다른 보유현황으로 이해된다.
66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한편, 최신의 장경촉 부장에 있어서도 가야 남부권과 차이가 있다. 장경촉의 출현 이후
Ⅳb기에는 20% 정도의 비중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이후 6세기대에 접
어들면서 오히려 감소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단위지역의 보유현황에 있어서도 대가야
의 중심지역인 고령지역에서 최신 철촉의 부장 쇠퇴는 뚜렷하며, 합천과 거창, 함양, 생초
지역을 포함한 주변지역에서 장경촉의 고분 부장이 비교적 많이 확인된다. 대가야의 무장
(김승신 2018; 장상갑 2019)의 전체적인 변화 속에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가야 후기 최
신 철촉의 부장에 있어서 정치체의 규제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으며, 이러한 영향력은 중
심지역을 벗어나면서 느슨한 형태를 보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 11. 가야 북부권의 형식 구성과 최신 철촉의 보유현황
67
장 상 갑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
Ⅳ. 맺음말
가야의 철촉은 원거리 공격무기로 장경화를 통한 살상력의 증대와 함께 일회성 소모품
적 성격을 가진다. 무기 본연의 기능과 함께 매장의례나 특수한 용도로 사용된 다양한 형
식의 철촉은 지역과 계층에 따라 부장양상을 달리한다. 이러한 가야 철촉을 고고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복잡한 형식에 대한 일관된 분류와 보유현황의 변천을 파악할 필요가 있
다. 기존의 일반적인 철촉 형식은 연속적으로 부장되는 시간성을 보이며, 새로운 최신 철
촉이 가야 무장체계에 어떠한 역할 담당하였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에 철촉의 기본적인 성격을 고려하여 무경촉, 광형촉, 세형촉으로 대분류하고, 각 철촉
군 내에서 세부 형식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실전용 철촉으로 인식되는 세형촉은 각 형식
별로 기능적 발전과정을 염두에 두고 유경식에서 장경식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토대로 가야고분에 대한 단계와 지역을 구분하여 가야지역 철촉의 보유현황을 살펴보았
다. 후기와질토기 단계에 등장한 유경식 세형촉은 가야의 성립과 함께 보유가 확대되었으
며, 이후 철제갑주의 출현과 함께 4세기 중엽에 단경식과 중경식 세형촉이 등장하면서 새
로운 실전용 철촉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가야 최신의 철촉인 장경촉이 5세기대에
들어서 출현하지만, 기존의 단경촉과 중경촉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가야지역 장경촉의 전반적인 보유현황은 6세기대에 들어서 지역적인 차이를 보
이기 시작하였다. 아라가야와 소가야권을 중심으로 가야 남부지역에서는 장경촉과 중경
촉의 부장이 점진적으로 확대되며, 단경촉은 비중이 감소하게 된다. 이에 비해 김해와 부
산지역에서는 6세기 전엽까지 이러한 최신 철촉의 부장 확대가 이어지다가 6세기 중엽 이
후에는 다시 감소한다. 최신 철촉의 부장 쇠퇴는 고령을 중심으로 대가야권에서 뚜렷하
며, 장경촉의 부장은 6세기대 이후 감소하는 양상을 보이고, 특히 대가야의 중심지역인 고
령에서 단경촉 중심의 철촉 부장이 이어진다.
이와 같이 가야의 최신 철촉 부장은 지역 정치체의 구조에 따라서 변화를 보인다. 실제
사용에 있어서 철촉의 기능적인 개량에 따른 변화와 함께 소모성 전쟁 물품에 대한 정치
체의 규제와 위세품으로서의 기능이 일정 부분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한적인 자료
분석으로 지나친 확대 해석의 우려가 있으나, 향후 고분 부장품으로서 가야 철촉의 성격
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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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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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토론문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에 대한 토론문_김승신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에
대한 토론문
김 승 신
국립해양박물관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사병기(투사무기)로 이용되었던 활과 화
살은 사냥 등 생업 뿐만 아니라 전투시 적을 원거리에서 타격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무기이
다. 오늘 발표를 맡아주신 장상갑 선생님은 후기가야 실전용 철촉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가야 무장 전반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분석을 해오셨으며 사병기 내 실질적인 타격 기능을
담당하는 화살의 촉두부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통해 시기별ㆍ지역별 가야 철촉의 분포 및
변화양상에 대해 검토하였다. 발표자께서는 이번 발표에서 변한 ~ 후기 가야에 이루기까
지 폭넓은 시기를 관통하여 철촉의 시기에 따른 등장과 소멸, 지역별 분포양상 등에 대해
자세히 다루어 주셨다. 논고의 주제 및 전개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대체적으로 동
의하는 바이며 논지 전개상 토론자가 평소 가지고 있었던 의문점에 대해 질의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고자 한다.
1. 철촉 분류상 용어에 대한 질의이다. 경부(
頸部)의 유무를 통해 무경촉과 유경촉으로 나
누고 유경식 가운데 촉두가 넓이에 따라 광형촉과 세형촉으로 분류하였다. 이는 선행
연구성과에서도 세부적인 형태, 계측 속성에 대한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분류되는
형태로 생각된다. 다만 세형촉 분류에 있어 유경식, 단경식, 중경식, 장경식으로 나누
고 있다. 본문의 전개상 유경식은 [촉두+슴베]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확인 부탁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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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린다. 또한 유경식(
有莖式)은 논고의 이해를 높이기 위한 용어의 변경 혹은 한자 병기
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 시기 및 지역별 철촉의 종류나 수량의 집중도에 따라 주력촉이라는 개념을 이용하고 있
으며 토론자 역시 적극 수용하고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광형계 촉의 기능상 위치에 대
한 질의 드리고 싶다. 촉두 너비에 따라 나눈 분류안에서 양익형, 광엽형, 능형, 부형 등
다수의 출토 사례가 확인되고 있으나 시기ㆍ지역별 출토 양상에서 주력촉으로 보기엔
점유율이 낮은 편이다. 그렇다면 시기별 광형촉의 기능이나 용도에 대해 염두에 두신
점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란다.
3. 5세기 전엽 이후 후기가야 각지에서 유행하는 주력촉은 세형촉 가운데 사두형, 유엽형,
도자형으로 집약되며 이외 양익형, 착두형 등이 소량 출토되는 양상이다. 반면 전기가
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 동남부권에서 유행했던 골촉형, 추형 철촉들은 지속적으로 이
용되지 못했던 원인에 대해 여쭙고자 한다. 토론자는 위 철촉의 경우 형태상 중·장경촉
으로 경부를 늘리는데 제한사항이 있으며 제작이 용이한 유엽형 혹은 사두형에 역자를
다는 형태로 대체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4. 철촉은 사병기 내 구성품 가운데 소모성이 강한 병기로 철촉의 장신화(무게 증가, 관통
력 증대)는 시기의 흐름에 따라 철촉 생산에 직접적인 영향이 있었다고 본다. 특히 후
기가야의 주력촉이 주로 세가지 형식(사두형, 유엽형, 도자형)에 집중되는 양상은 최신
기능 철촉의 대량 생산 및 빠른 보급(소모성 무기)과 함께 발사기로서 활의 규격화(장
력)도 고려해야 한다고 보는데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5. 후기가야 주력촉 가운데 가장 널리 사용되는 형식은 제작상 용이점이 높은 사두형 철촉
으로 높은 점유율이 지속된다. 다만 Ⅳa기 일시적으로 유엽형 철촉의 출토비율이 확대
되었다가(p.13) Ⅳb기 이후 유엽형 철촉 출토비율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는 특징은
주목된다. 발표자께서는 Ⅳ기 이후 후기가야 각 지역의 정치체의 성장과 연계하여 설
정이 가능한지 궁금하다.
6. 전ㆍ후기 가야 철촉의 전반적인 변화 양상은 촉두의 크기가 줄어들고 경부의 길이가 증
가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최신 형식 철촉은 대체로 가야 각 소국의 중심집단 지배계층
고분군에서 확인되며 동 시기 여타 집단 고분군에 비해 수량적 우위를 점하고 있어 주
력촉으로 파악되는 경우가 많다. 중심집단 고분군에서 벗어난 주변지역 집단 고분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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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 철촉의 변천과 보유양상」에 대한 토론문_김승신
촉두의 형태는 유사하나 경부의 길이, 제작 상태 등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소국 내 중심집단의 주력촉으로서 설정은 가능하나 지역별 무장의 통제 혹은 보급상의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발표자의 견해를 여쭙고 싶다.
7. 지역별 철촉 부장에 있어 가야 남부권(아라가야, 소가야)는 장경촉의 부장 빈도가 타 지
역권에 비해 높은 편으로 늦은 단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발표자께서 본문 내 언
급하셨으나(p.13 각주 3, p.16) 철촉의 장신화에 있어 장경촉의 출토 빈도는 기능적 향
상 이외 위세품으로서 용도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제발표
가야의 장식대도
박 경 도(국립광주박물관)
75
박 경 도
가야의 장식대도
Ⅰ. 머리말
고대 전쟁에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단병기인 대도는 적을 마주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고
적에게 상해를 입히기 위해 사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무기의 한 종류이다. 실용성을 가진
대도의 특정 부분에 금, 은, 금동 등의 귀금속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장식대도는 본래의 대
도가 가진 기능적인 실용성보다는 관, 이식, 대장식구, 식리 등과 함께 위세품으로서 소유
자의 지위나 권위를 반영하고 있다. 삼국시대 장식대도로는 소환두대도, 이엽환두대도, 삼
엽환두대도, 삼루환두대도, 용봉환두대도가 비교적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드물게
원두대도, 규두대도, 귀면장식대도 등이 출토되기도 한다.
출토된 장식대도의 종류와 수량이 가장 많고 뚜렷한 위계와 정형성이 확인되는 등 장식
대도를 통치에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은 신라이다. 백제와 가야는 신라에 비해 확
인되는 종류와 출토된 수량이 훨씬 적은 편이다. 신라보다 적다고는 하지만 중앙과 지방
의 위계가 높은 분묘에서 출토되고 상호 연관성을 보이며 신라와는 구분되는 특징들이 확
인된다.
5-6세기에 집중적으로 제작ㆍ활용된 가야의 장식대도는 낙동강 이서에서 호남 동부지
역 일부를 포함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분포 양상을 보면 대가야 권역에
Ⅰ. 머리말
Ⅱ. 연구사 검토
Ⅲ. 가야 장식대도에 관한 검토
1. 가야식 용봉환두대도의 제작기술
2. 오각형소환두대도의 계보
3. 영산강 유역 출토 장식대도의 계보
Ⅳ. 맺음말
목 차
가야의 장식대도
박 경 도
국립광주박물관
76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가장 위계가 높은 것으로 판단되는 용봉환두대도를
비롯해 소환두대도와 삼엽ㆍ이엽환두대도 등 환두대도가 중심이다. 본 발표에서는 최근
연구성과를 살펴보고 가야의 장식대도와 관련하여 몇 가지 사안을 살펴보고 제작기술과
계보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미리 밝혀두면 발표자는 가야 장식대도에 관한 형식분류, 편
년, 제작기술의 계보와 전파, 제작과 유통 등에 관해 김우대, 김도영 두 연구자의 연구성과
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본 발표문에서는 이에 대해 별도로 서술하기 보다는 두
연구자와 의견이 다른 부분이나 기존의 연구성과를 살펴보고 논의가 필요한 부분을 찾아
살펴보기로 한다.
Ⅱ. 연구사 검토
신라에 비해 수량이 현저히 적다고는 하지만 가야 유적에서도 용봉환두대도와 소환두
대도 등의 장식대도가 적지 않게 출토되었다. 확인된 장식대도 가운데 비교적 수량이 많
고 다른 지역과 비교가 가능한 소환두대도와 용봉환두대도를 대상으로 한다.
삼국시대 장식대도에 관한 전반적인 연구사는 기왕의 연구(김우대 2011, 김도영 2012
ㆍ2014, 김낙중 2014, 우병철 2015 등)에서 이미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전체적인 장식대
도 연구사의 구체적인 내용을 모두 언급하지는 않고, 가야의 장식대도 가운데 대상으로
삼은 용봉환두대도와 소환두대도에 관한 최근 연구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가야 장식대도의 성립에 백제가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용봉환두대도를 비롯한 장식대
도 연구에서 여러 연구자들이 인정하는 바이며, 외환과 중앙 장식을 따로 만들어 결합하
고 환 외면을 금 또는 은판으로 씌워 장식하는 방식의 용봉환두대도를 가야의 특징적인
장식대도로 이해하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야 지역에서 확인되는 용봉환두대도는 백제와 기술적 계보가 연결되는 요소가 많아
백제의 것과 함께 살펴보면서 크게 환과 환내 장식을 (금)동으로 한꺼번에 만드는 것, 환
과 환내 장식을 철로 한꺼번에 만들고 상감으로 장식하는 것, 환과 환내 장식을 각기 철과
청동으로 따로 만들어 결합한 뒤 환 외면을 금 또는 은판으로 감싸 장식하는 방식의 세 가
지로 분류한 연구가 있다(김우대 2011, 김도영 2012ㆍ2014). 이들 연구는 대상자료를 모
두 집성하여 본격적으로 제작기술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보와 기술전파에 관해 살
펴보았다.
김우대는 일체형(용봉ⅠㆍⅡ군)은 모두 백제에서 계보가 구해지며 옥전 M3호분 피장
77
박 경 도
가야의 장식대도
자 단계에 이르러 백제계 기술의 전파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정비된 대도 제작 공방에서
별주식(용봉Ⅲ군)의 대도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계기
는 백제 웅진천도에 따른 공인의 이동이 용봉Ⅲ군과 같은 고도의 금공기술을 요하는 대도
를 제작할 수 있는 공방을 대가야에 성립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보았다.(김우대 2011) 소
환두대도는 환두부의 평면형태와 장식방법을 중심으로 원형ㆍ타원형 환에 상감이 베풀
어진 소환Ⅰ군, 타원형 환에 은장으로 장식한 소환Ⅱ군, 오각형ㆍ상원하방형 환에 은장으
로 장식한 소환Ⅲ군 등 3개의 군으로 나누었으며 환은 모두 철로 제작하였다. 소환Ⅰ군과
Ⅱ군은 백제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으며, 소환Ⅲ군은 출현시기, 백제권역에서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인 점 등을 감안하여 오히려 대가야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다고 파악하였
다.(김우대 2011)
김도영은 일체형의 것을 ‘백제계 AㆍB형식대도’라고 부르고 제작기술의 계보를 모두
백제에서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백제계A형식대도는 백제에서 제
작된 것이 이입된 것으로 보았으며, 상감이 이루어진 백제계B형식대도는 환두부의 용문
양을 입체적으로 제작한 뒤 열처리를 거쳐 주철에 상감이 가능한 주철탈탄기술을 이용해
제작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백제계 AㆍB형식대도의 제작기술에서 영향을 받아 대
가야계 용봉문환두대도(C형식)가 성립되었으며, 그 배경은 역시 웅진천도를 계기로 백제
계 공인들이 대가야지역으로 이동함으로써 대도 제작기술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지방을 간접통치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가 금동관을 사여한 것과
달리 대가야에서는 장식대도와 같은 도검을 매개로 한 위신재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
며 그 증표가 바로 용봉환두대도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김도영 2014)
이한상은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용봉환두대도를 분석하면서 외환과 환내 장식을 금
동ㆍ동으로 한꺼번에 주조한 것은 기본적으로 백제에서 계보를 찾을 수 있으나 지산동 73
호분 출토품과 같이 초기부터 대가야적인 도상을 만들어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
다. 철로 환과 환내 장식을 한꺼번에 주조하고 상감으로 장식한 것도 백제의 것과 유사도
가 높다고 하였다. 5세기 후반 이후 옥전 M3호분 출토품 등 별주식으로 제작된 용봉환두
대도는 백제 대도와는 제작기법과 의장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대가야적인 대도로 보았다.
이러한 용봉환두대도는 외환을 철로 주조해서 만들었지만 단면이 ‘∩’ 모양으로
中空인
점이 특징이라고 하였다.(이한상 2010ㆍ2013ㆍ2015) 소환두대도는 상감, 은장된 것 모두
백제의 영향으로 등장한 것으로 파악하였다.(이한상 2004)
김낙중은 가야지역 출토 장식대도를 백제에서 일괄 제작하여 가야지역으로 사여하였다
고 보았다가(김낙중 2007) 이를 철회하였으나 여전히 가야계 용봉문 환두대도에서 보이
는 병두금구 등의 쌍용문, 능삼문 및 환두의 주룡문 등이 백제에서 이미 사용되었으며 별
주식 환두 또한 백제에서도 인지되고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가야계 용봉문 환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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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대도는 대가야에서만 제작되어 유행한 것이 아니라 백제에서도 그와 유사한 용봉문대도
가 병행하여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김낙중 2014)
우병철은 삼국시대 장식대도의 제작기술과 지역성을 중심으로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였
다.(우병철 2015) 용봉환두대도는 초기에 백제 기술의 영향을 받지만 이후 외환과 중앙장
식을 별도로 제작하여 결합하는 형식을 독자적 기술로 제작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상의 연구성과를 살펴보면 용봉환두대도의 경우 일주식의 두 형식은 백제에서 계보
를 구할 수 있으며,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사례들도 백제에서 반입되거나 백제 공인의 이
주 또는 기술의 전파로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가야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별주식
은 백제 용봉환두대도의 영향을 받아 가야에서 독창적으로 성립된 형식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지만 백제에서도 이와 유사한 대도가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소환두대도는 대체로 백제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다고 보고 있으나, 오각형ㆍ상원하방
형 소환두대도는 대가야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또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된 장식대도의 계보와 제작지에 관해 백제중앙, 대가야, 재지
등 각기 다른 곳에서 찾고 있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이는 영산강 유역의 당시 정치적 동
향을 이해하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어 관심이 큰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는 가야식 용봉환두대도의 제작기술, 오각형 소환두대도의 계보, 영산강 유역
출토 장식대도의 계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Ⅲ. 가야 장식대도에 관한 검토
1. 가야식 용봉환두대도의 제작기술
먼저 가야식 용봉환두대도라고 하는 환과 중앙장식을 별주해 결합하는 형식의 대도 제
작기법을 파악하는데 차이를 보인다. 김도영은 이 형식의 용봉환두대도 외환의 제작 복원
실험을 통해 제작방법을 살펴보았는데, 모두
中實인 것으로 파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
다.(김도영 2011) 이에 비해 이한상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단면이 ‘∩’ 모양의
中空이
라고 파악하였다. 김도영이 주조흔적(Parting Line)이라고 본 외환의 정부를 따라 남아 있
는 금판이 주름진 부분을 이한상은 외환에 금ㆍ은판을 감쌀 때 정부를 기준으로 양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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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경 도
가야의 장식대도
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중첩된 부분으로 이해하였다.(이한상 2013)(도1)
가야식 용봉환두대도 가운데 중공의 것이 존재한다는 점은 이미 제시된 바가 있다.(
町
田章 1987) 하지만 발굴조사를 거쳐 출토된 자료들은 대부분 육안으로는 환두부의 구조
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x-ray 촬영 결과를 활용하고 여기에서도 확인
되지 않는 요소들은 CT 촬영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XRF와
전자현미경 등을 이용하여 성분 및 세부적인 제작기법을 파악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모두 이런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조사를 진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실제로 수촌리 Ⅱ-1호 출토 용문환두대도의 경우에도 CT 촬영 결과를
통해 정확한 구조 파악이 가능하였다. 현재 가야식 용봉환두대도의 외환이
中空인지 中實
인지를 육안이나 x-ray 촬영 결과만으로 판단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정확한 구조 파악을
위해 향후 CT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조사연구를 진행할 필요성이 절실히 제기되는 부분
이다.
그럼에도 현재 상황에서 x-ray 촬영 결과나 육안으로 관찰 가능한 범위에서 외환의 구
조를 밝히는 시도는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형식의 용봉환두대도가 기본적으로 별주식
이라는 큰 틀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세부적인 제작기법에서는 전혀 다른 제
작기술이 적용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한상의 견해처럼 옥전 M3호분 출토품 등 국내에서 출토된 별주식 용봉환두대
도 가운데 명확하게 중공이라는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x-ray 사진(도2)과 외환을
감싼 금판의 중첩 부분, 동일한 형식의 용봉환두대도로 분류되는 경주 호우총 출토품의
외환 단면 관찰 결과 등을 근거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이한상 2013)
발표자도 호우총 출토품을 관찰하면서, 그리고 별주하여 끼워넣은 중앙장식을 고정하
기 위해 따로 만들어 머리에 꽂은 뿔의 윗부분이 외환 안쪽을 마감한 금판 또는 은판에 구
멍을 뚫어 끼워 넣어져 있는 구조, 옥전 M3호분 출토 용봉환두대도A에서 보이는 용문이
<도1> 주조흔적 또는 금ㆍ은판의 중첩 흔적
① 주조흔적
(옥전 M3호분 용봉환두대도 B)
② 금은판의 중첩 흔적
(옥전 M3호분 용봉환두대도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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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없는 부분에 구멍이 뚫린 듯한 현상 등을 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
다. 이한상이 제시한 x-ray 사진 등의 자료를 근거로 보더라도 가능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가야식 용봉환두대도의 외환이 중공식인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한상이 중공식으로 판단한 지산동 47호분 출토품은 다른 용봉환두대
도에 비해 매우 무거운 편이다. 만약 중공식으로 제작되었다면 이렇게 무겁지 않을 것이
다. 또한 나주 신촌리 9호분 을관 출토 용봉환두대도는 외환의 일부가 파손되어 속심 일부
가 노출되었는데 중공이 아니다. 그리고 호우총 출토품의 파손된 외환의 단면을 보면 철
로 보이는 속심이 있고 그 바깥을 금동판으로 감싼 것으로 보인다. 이를 중공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속이 빈 채로 마감하는 것과는 제작방식이 다르므
로 별도의 형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지금까지 ‘가야식 용봉환두대도’라
고 하나의 형식으로 분류했던 별주식은 서로 다른 2~3가지로 나누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향후 CT를 활용한 조사연구를 진행하여 이에 대해 확실히 규명해 보고자 한다. 그와 함께
이러한 제작기술의 연원이 어디인지도 함께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다만 중공의 외환이
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백제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가야권역에서 주로 확인된다는 점
은 이 형식의 대도를 가야식 용봉환두대도라고 분류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
된다.
2. 오각형소환두대도의 계보
은판으로 환을 감싸 장식한 소환두대도는 백제, 신라, 가야 모두에서 확인되는데, 그
김우대는 가야 소환두대도의 제작기법을 분석한 연구에서 평면형태와 환의 장식방법을
기준으로 3개의 군을 설정하였다. 이 가운데 상감으로 장식한 소환Ⅰ군과 타원형의 외환
<도2> 가야식 용봉환두대도 참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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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경 도
가야의 장식대도
을 은장한 소환Ⅱ군은 백제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다고 파악하였다. 다만 오각형ㆍ상원하
방형 환두를 가진 소환Ⅲ군은 논산 표정리 사례를 제외하면 분포지역이 대가야 지역에 한
정되고, 능삼문이 새겨진 손잡이 고정금구가 함양 백천리 1-3호 출토예에서 확인되는데,
이는 가야식 용봉환두대도의 병두금구와 초구금구에서 확인되고 대가야에서 출토된 마구
나 성시구에서도 확인되는 특징으로 파악하였다. 또 백제권역에서 출토된 은장소환두대
도는 외환 평면형이 타원형이 많은 한편 대가야 대도제작 초기에 상원하방형의 은장소환
두대도가 이른 시기부터 존재한 신라의 기술공인이 관여한 것을 감안하면 소환Ⅲ군은 오
히려 대가야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와 함께 계보를 신중히 평가해야 하지
만 논산 표정리 채집품은 대가야에서 백제로 반입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김우
대 2011)
이에 비해 이한상은 세 가지 형식 모두 백제에서 가야로 기술이 전해져 제작된 것으로
파악하였다.(이한상 2004ㆍ2006)
백제권역에서 출토된 장식 소환두대도 가운데 김우대의 소환Ⅲ군에 속하는 사례가 추
가되었는데, 나주 정촌고분 1호 석실 목관3에서 출토된 모자소환두대도이다. 표정리 채
집품과 같이 환두 평면형이 오각형이고 환의 길이 3.7cm, 너비 4.5cm로 크기도 비슷하
다. 또 손잡이에 각목이 새겨진 은선을 나선상으로 감은 점도 같다. 손잡이에 은선을 나선
<도3> 은선을 나선상으로 감은 사례
①표정리 채집
②정촌고분
③복암리 3호분
④부장리 12호
⑤옥전 M3( 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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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상으로 감은 사례는 백제권역에서 표정리 채집품, 정촌고분 출토품, 복암리 3호분 96석실
출토품, 서산 부장리 12호 분구 1호 토광묘 출토품 등이 있고, 가야권역에서는 옥전 M3호
분 출토 용문환두대도가 있다. 옥전 M3호분 출토 용문환두대도에서도 은선을 나선상으
로 감아 놓은 것이 확인되는데, 이 대도는 대체로 백제에서 이입된 것이거나 백제공인이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렇다면 손잡이에 은선을 나선상으로 감는 요소는
백제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백제의 지방에서 출토되고 있기는 하
지만 분포가 백제권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함께 고려하여 손잡이에 은선을 감는 요
소로 파악할 수 있다. 환두 평면형도 표정리 채집품과 정촌고분 출토품은 가야권역 출토
품이 대체로 상원하방형인데 비해 뚜렷하게 오각형을 하고 있고, 환두의 크기도 비슷하게
작다는 차이점이 있다. 소환Ⅲ군의 가야지역 출토품의 시기가 조금 빠른 것으로 보여 <백
제→가야>라는 영향관계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김우대의 견해처럼 대가야에서 백제로
반입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3. 영산강 유역 출토 장식대도의 계보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된 장식대도는 나주 신촌리 9호 을관 출토 용봉환두대도 1점, 은
장삼엽환두대도 2점, 복암리 3호분 96석실 출토 금은장삼엽환두대도 1점, 정촌고분 1호
석실 목관3 출토 은장소환두대도 1점 등이다. 이 지역에서 확인되는 5-6세기의 유적과 유
물에는 외래적인 요소가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외부에서 반입된 것도 있고, 하나의 요소
에 여러 다른 계통의 속성이 섞여 나타나기도 한다. 장식대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계보와
제작지를 비정하는데 연구자들의 의견이 갈리고 있다.
백제 중앙에서 제작하여 지역에 하사한 것으로 보는 견해(
高田貫太 2005, 김낙중 2007
ㆍ2014), 용봉환두대도와 삼엽환두대도를 대가야에서 제작된 것이 이 지역으로 이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박천수 2009, 김우대 2011), 제작기법이 백제 중앙에서 제작한 것에 비
해 질적으로 떨어지고 도상의 차이가 있으며, 유사한 대도가 백제지역 내에서 보이지 않
는다는 점에서(이한상 2004, 이귀영 2011) 또 신촌리와 복암리 출토 삼엽환두대도를 백제
중앙의 영향하에 신라와 대가야의 제작기술 요소가 혼합되어 있어 백제중앙이나 대가야
에서 제작하여 분여하였다고는 무리가 있어(우병철 2015) 영산강 유역에서 직접 제작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지역 출토 장식대도의 계보를 밝히기 위해 먼저 신촌리 9호분 을관, 복암리 3호분
96석실 출토 삼엽환두대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신촌리 9호 출토품은 철로 만든 후 은판으
로 감싸 장식한 원형에 가까운 환두 안쪽에 별도로 만든 금동으로 만든 삼엽 장식이 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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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경 도
가야의 장식대도
져 있다. 손잡이는 어린문을 타출한 은판으로 감쌌으며
裏面에서 겹쳐 원두정을 박아 고
정하였다. 병판의 문양과 고정방식은 백제와 가야 장식대도의 특징으로 볼 수 있는데, 사
실 백제권역에서 확인된 사례는 신촌리 출토품밖에 없고 대부분 대가야권역에서 확인되
고 있다. 복암리 96석실 출토 삼엽환두대도 역시 외환과 환내의 삼엽장식을 따로 만들어
결합한 것인데 신촌리 출토품과 비교하면 약간의 차이가 확인된다. x-ray 사진을 보면 신
촌리 9호분 출토품은 가야식 용봉환두대도에서 보이는 별주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
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삼엽장식 아래에 짧은 촉을 만들어 기부에 끼우도록 만들어 용
봉환두대도의 용이나 봉황장식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복암리 3호분 출토품
은 x-ray 사진을 보면 슴베와 삼엽을 한꺼번에 만들고 외환과 접합시켜 완성한 것으로 보
인다. 복암리 3호분 출토품과 비슷한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장식대도의 사례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가 없지만, 최근 용원리 12호 석곽 출토 용봉환두대도를 분석하여 슴베와 환내
봉황장식을 한꺼번에 만든 것으로 본 연구가 있어 주목된다.(이영범 2009) x-ray 사진을
분석하여 판단한 것이어서 향후 추가 조사와 검토가 필요하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
진 사례가 존재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두 삼엽환두대도의 제작에 적용된 기법을 고려하면 신촌리 9호분 출
토품은 가야에서 제작된 것이 이입되었을 가능성이, 복암리 3호분 출토품은 백제중앙에서
제작된 것이 이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복암리 3호분 출토품은 용원리 12호분 출토
품의 제작방식에 대해 좀더 명확하게 확인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가능성만 열어두고자 한다.
이와 연계해서 본다면 신촌리 9호분 출토 용봉환두대도 역시 전형적인 가야식 용봉환
두대도의 제작기술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되므로 역시 대가야에서 제작된 것이 양 지역
의 교섭과정에서 이입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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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촌고분 출토 오각형소환두대도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대가야의 상원하방형 은장소
환두대도와 차이가 확인되므로 대가야와 관련시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표정리와
함께 두 사례밖에 없고 모두 지방에서 출토된 점, 모자대도라는 독특한 형식을 채용한 점
등을 검토할 사항들이 있어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은선을 나선상으로 감는 특징적인 요소
를 우선 고려하여 일단 백제 중앙과 관련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본다.
Ⅳ. 맺음말
이상 가야 장식대도의 연구성과와 몇 가지 사항에 관해 검토하고, 대도 제작기술과 계
보에 관해 밝히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구조에 관한 내용
도 있어 앞으로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한 연구를 진행할 필요성이 제기되며, 향후 장
식대도의 제작기술과 계보를 밝히기 위해 이러한 연구를 과제로 삼아 진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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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경 도
가야의 장식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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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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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의 장식대도」에 대한 토론문_김도영
「가야의 장식대도」에
대한 토론문
김 도 영
경북대학교
박경도 선생님은 가야 장식대도의 연구사를 검토하고 관련된 몇 가지 사안을 정리하면
서
私見을 제시하셨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박경도 선생님의 견해와 크게 다르
지 않아 제대로 된 토론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궁금한 점을 질
문드리면서 토론자의 소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1. 가야식 용봉환두대도의 제작기술
가야식 용봉환두대도의 외환 제작기술과 관련하여 그것이 주조로 제작되었는지, 아닌
지 논란이 있다. 고령, 합천에서 출토된 여러 용봉환두대도의 외환에서 공통적으로 보이
는 미세한 흔적, 이를 개인적으로 parting line이라 부르는데(그림 1) 토론자는 이러한 흔
적이 합범을 사용하는 주조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복원실험을 통해서 이를
증명해보고자 하였다(그림 2).
발표자가 언급한 것처럼 이한상 선생님은 이런 현상이 외환의 정부를 기준으로 양쪽에
서 금판을 접착하였기 때문에 금판이 중첩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며 외환이
中空이므로 주
조제가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각자의 주장만 반복되는 현 상황에서 더 구체
적인 논의가 진척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中實과 中空의 여부가 주조제인지 아닌지를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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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할 수 있는 근거는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최근 정밀주조기술과 관련된 연구성과를 보면 식
리총 식리(
鈴木勉 2013), 수촌리Ⅱ-1호분 귀면문대장식구(鈴木勉・金跳咏 2017) 등 주
조제의 금공품이 늦어도 삼국시대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발표자가 지적한 것
처럼 과학적인 조사가 병행되어야 해결될 문제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발표자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2. 영산강유역 출토 장식대도의 계보
본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지역에서는 외래계 요소가 많이 확인되어 장식대도의 제작
지를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발표자의 견해를 요약하면 ‘신촌리9호 을관 삼엽환두대도=가
야제, 복암리3호분 96석실 삼엽문환두대도 = 백제 중앙제작 후 (현지로) 이입’이라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촌리9호 을관 삼엽환두대도는 중앙장식인 삼엽문을 따로 제
작하여 환 내부에 삽입한 점, 어린문을 타출한 은판을 손잡이에 감고 원두정으로 고정한
점 등 가야지역의 장식대도에서 보이는 속성이 확인되어 가야제의 가능성에 동의한다.
또 복암리3호분 96석실 삼엽문환두대도는 중앙장식(삼엽문)과 슴베를 일체로 주조(무
그림1. 가야권역에서 출토된 용봉환두대도 외환에 보이는 주조 흔적(parting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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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의 장식대도」에 대한 토론문_김도영
그림3. 무령왕릉 대도(1)와 무령왕릉계대도(2·3)
그림2. parting line이 있는 외환의 제작공정(
金宇大 2019, p.6)
령왕릉 대도), 쌍연주철어어자문(
雙連球(凸)魚々子文)이라는 대도 부속구가 주로 백제에
서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백제 중앙에서 제작된 후
現地로 이입되었을 가능성에 역시 동
의한다.
한편 발표자는 정촌고분 오각형소환두대도에 대해 단정하기 어렵다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은선을 나선상으로 감는 요소를 고려하여 백제 중앙과 관련될 가능성이 큰 것
으로 보고 있다. 물론 은선을 나선상으로 감는 요소는 표정리, 부장리, 복암리 등 여러 장
식대도에서 확인되지만 2개의
子刀가 붙은 점은 아직 백제에서 확인된 사례가 없고 오히
려 신라 장식대도에서 확인되는 요소이다. 최근 연구 성과에 의하면 정촌고분 오각형소환
두대도는 ‘낙동강 수계권의 모자도에 영향을 받은 현지 유력자의 개입(의도) 아래 (현지
의) 공인들이 제작하고 이를 부장한 것’(이건용 2019: 61)으로 보았다. 여러 요소들이
錯
綜된 상태인 장식대도인만큼 제작지 논쟁은 간단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
래도 이에 관한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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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西考古學會.
주제발표
4~5세기 김해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신 동 조(부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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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동 조
4~5세기 김해
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Ⅰ. 머리말
무기는 기능과 용도에 따라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구로 나눌 수 있으며, 무기와 무구
는 상호 유기적 관계 속에서 발전한다. 공격용 무기는 궁시
弓矢와 쇠뇌弩와 같이 멀리 있
는 적을 대상으로 투척하는 투사무기
投射武器와 비교적 근거리에 있는 적에게 충격을 가
하여 상해를 입히는 충격무기
衝激武器로 구분된다. 충격무기는 도와 검으로 대표되는 단
병무기
短柄武器와 모와 창으로 대표되는 장병무기長柄武器로 세분된다. 도검류는 개인
호신용 무기로, 환두나 병부에 각종 장식을 베풀어 소유자의 사회적 계층을 상징하는 의
장성이 반영된다. 장병무기는 개인 호신의 기능도 있지만, 밀집대형과 같은 대열을 이루
어 사용하면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군사체제의 조직적 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원삼국시대 대형 목곽묘가 축조되면서 철모의 복수부장이 늘어나고, 포항 옥성리(나)
78호에 104점의 철모를 부장하는 것은
國과 國 사이 혹은 國 내의 읍락 사이에 긴장과 갈
등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무력기반의 확보, 즉 군사체제의 조직적 운용이 가능하였
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재현 2003).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4~5세기는 원삼
국시대 각 소국들이 특정 정치체를 중심으로 통합되면서 고대 국가로 진입하는 중요한 시
기로, 정치체간의 통합과정에서 철제무기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특
Ⅰ. 머리말
Ⅱ. 장병무기의 종류와 형식분류
Ⅲ. 김해ㆍ부산지역 장병무기의 변천
Ⅳ. 4~5세기 김해ㆍ부산지역 장병무기
체계 차이와 배경
Ⅴ. 맺음말
목 차
4~5세기 김해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신 동 조
부산박물관
94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히 철제갑주의 출현과 확산, 기승용 마구의 도입에 따라 철모의 개량이 집중되고 이전 단
계에 보이지 않던 다지창과 철창이 출현하는 등 장병무기가 더욱 풍성해지는 단계이다.
새로운 무기류의 등장은 단순히 무기 종류가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
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 김해만을 둘러싸고 위치한 김해와 부산지역은 외절구연고배ㆍ파수부노형기대ㆍ통
형동기 등의 분포정형을 통해 소위 ‘금관가야 연맹체’의 권역으로 평가받고 있다(신경철
1995, 홍보식 2000, 김영민 2008, 심재용 2019). 그러나 부산지역과 김해지역의 무장체제
분석을 통해 김해지역은 대외교역의 거점으로 왜의 무기가 편입되고 장식성이 강조된 판
갑이 부장되며, 부산지역은 일찍이 군사적 엘리트집단이 등장하여 실용적이고 강력한 무
장체제를 통한 군사적 권위를 지배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등 차이가 확인된다는 점이
지적된 바 있다(이현주 2010).
본고에서는 김해와 부산지역의 장병무기를 중심으로 신 자료들을 추가하여 장병무기의
변천과 분포양상을 검토하여 양 지역 간의 차이점을 확인하고 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장병무기의 종류와 형식분류
장병무기는 긴 자루의 끝에 상대방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날을 만들어 공격하는 무
기로, 근접전을 치를 때 공격 거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데 필
요한 훈련시간도 검이나 도, 활 등에 비해 짧은 편이다. 또 구조가 간단하고 무기의 전체
부분 중 금속(철ㆍ청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제작하는 데 소요되
는 비용과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 오랜 시간동안 널리 사용된 무기이다. 자루 끝에 부착되
는 날의 형태에 따라 모(
矛ㆍ鉾), 과(戈), 창(槍), 피(鈹), 극(戟) 등 종류가 다양하다1). 김
해ㆍ부산지역에서 확인된 장병무기는 철모, 철창, 다지창이 있다2).
장병무기에서 적에게 상해를 입히는 날의 형태도 중요하지만 자루를 포함한 전체 길이
1) 중국측 자료를 참조하여 끝이 뾰족하고 폭이 넓은 양날의 신부를 가진 것을 모矛, 양인兩刃
의 검을 닮은 피鈹, 단면 능형으로 찌르는 기능이 강조된 것을 창槍으로 구분하기도 한다(김두
철 2003:97~99). 용어의 정리가 필요하지만 혼동될 여지가 있어 본고에서는 발굴조사보고서
등에서 통용되고 있는 철모와 철창 그대로 사용하고자 한다.
2) 분묘에 부장된 철겸과 곡도 중 일부는 장병무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본고에서는 제
외한다.
95
신 동 조
4~5세기 김해
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표 1. 출토 상태로 본 장병무기의 추정길이
도1. 김해ㆍ부산지역 출토 상태로 본 장병무기 길이 추정
유구명
기준
추정길이
(날~물미(자루끝)
유구명
기준
추정길이
(날~물미(자루끝)
구지로 18호
철모-물미
180㎝ 내외
대성동 18호
철창-통형동기
170/220㎝ 내외
대성동 87호
철모-물미
170㎝ 내외
복천동 38호
철창-통형동기
300/350㎝ 내외
복천동 22호
철모-물미
250㎝ 내외
망덕리Ⅰ-16호
철창-물미
200㎝ 내외
복천동 7호
철모-물미
200㎝ 내외
복천동 10호
삼지창-토기군앞
200㎝ 이하
연산동 15호
철모-토기군 앞
180㎝ 이하
미음동 24호
삼지창-단벽
230㎝ 이하
망덕리Ⅰ-24호
철모-토기군 앞
240㎝ 이하
합천 옥전M3호
철창-물미
210/300㎝ 내외
96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는 무기의 활용ㆍ전술ㆍ무장체계 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제의
祭
儀의 장’인 분묘에는 (나무)자루 없이 날 부분만을 부장하거나 나무자루와 함께 매납하였
지만 자루가 부식되어 전체 길이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병무기 날의 반
대편, 자루 끝에 박아 공격력을 더하는 물미(창고달)도 도굴 등에 의해 부장위치를 벗어나
는 예가 많아 장병무기의 전체 길이를 복원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비록 소수에 불과하지만 날과 물미(통형동기)가 직선상으로 놓여있거나 공부가 열려있
는 방향으로 직선상에 토기 부장궤나 단벽이 위치한 장병무기의 (최대)길이를 추정해보면
4~5세기 장병무기의 길이는 170~350㎝ 내외로 추정된다3).
1. 철모
장병무기 중 가장 대표적인 철모는 나무자루를 끼울 수 있는 투겁, 공부
銎部를 가진다.
철모는 일반적으로 신부 단면이 볼록렌즈형에서 점차 능형으로, 관부는 유관식4)에서 무
관식으로, 공부단은 직기형에서 연미형으로의 변화과정이 확인된다(김길식 1993,
高久健
二 1997).
신부 단면의 변화는 철모가 양날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베는 기능에서 찔러서 위해를 가
하는 기능이 점차 강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부 단면 형태의 변화와 더불어 신부
너비도 철모의 기능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신부의 폭이 좁아질수록 상대방을 찌
를 때 동일한 힘으로 더욱 깊게 찔러 공격력이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부 너비가 2.5㎝
이상의 것을 광형계로, 그 미만인 것을 세형계로 분류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철모는 투겁에 나무자루를 끼워 사용하는 무기이므로, 철모와 나무
자루의 결합력을 높이기 위해 공부에 (철제)못 등을 박거나 공부를 다각형으로 만드는 등
다양한 방법이 사용된다. 공부단의 형태도 직기형보다 나무자루에 좀 더 안정적으로 장
착될 수 있는 연미형을 점차 선호한다. 따라서 공부단의 형태는 직기형과 연미형으로 크
게 구분한다. 공부 단면의 형태는 김해와 부산지역의 경우 육각형 내지 팔각형의 것이 소
수 확인될 뿐이므로 별도 속성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철모의 전장은 점차 짧아지는 경향
이 확인되는데, 신부 폭에 따라 기준을 달리한다. 광형계는 전장 40㎝를 기준으로 단신형
과 장신형으로, 세형계는 30㎝를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
3) 조선시대 『무예도보통지』 등의 기록으로 확인되는 창ㆍ모ㆍ당파 등 장병무기의 길이도 약 170~
360㎝ 내외로 삼국시대의 것과 큰 차이가 없다(국립고궁박물관 2021).
4) 유관식 중 이단관식은 1세기 후반~2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확인되며, 본고의 연구범위인 3세기
후반 이후는 확인되지 않으므로 형식분류 속성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97
신 동 조
4~5세기 김해
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이 외에 철모의 기부를 은판으로 감싼 은장철모나 반부
盤部 등이 철모의 중요한 속성으
로 지적되고 있지만 본고의 검토대상에서는 은장철모는 확인되지 않고 반부철모도 1점만
확인되므로 형식 설정에서 제외한다.
위에서 언급한 속성들을 조합하여 도면 2와 같이 형식분류할 수 있다.
표 2. 철모 속성 분류
도2. 철모 형식분류
ⅠA1
ⅠA2
ⅠB1
ⅠB2
ⅡA1
ⅡA2
ⅡB1
ⅡB2
ⅡB3
ⅡB4
양동리
58호
복천동
80호
복천동
38호
복천동
11호
복천동
57호
복천동
60호(주)
복천동
22호
양동리
95호
예안리
60호
대성동
87호
신부너비
공부단 형태
관부형태
전장
형식
광형계(Ⅰ)
(2.5cm 이상)
직기형(A)
유관식(a)
40㎝ 이하(1)
ⅠA1
40㎝ 초과(2)
ⅠA2
연미형(B)
유관식(a)
40㎝ 이하(1)
ⅠB1
40㎝ 초과(2)
ⅠB2
세형계(Ⅱ)
(2.5cm 미만)
직기형(A)
유관식(a)
30㎝ 이하(1)
ⅡA1
30㎝ 초과(2)
ⅡA2
연미형(B)
유관식(a)
30㎝ 이하(1)
ⅡB1
30㎝ 초과(2)
ⅡB2
무관식(b)
30㎝ 이하(1)
ⅡB3
30㎝ 초과(2)
Ⅱ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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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2. 철창
철창은 검과 같이 양날을 가지며 신부단면도 볼록렌즈형을 띠어 검과의 구분이 쉽지 않
으나, 복수의 부재를 이용해 나무자루를 조립하고 실과 칠로 고정하며 나무자루가 슴베
외에도 신부 하단까지 확인되는 특징을 가진다(
細川晉太郞 2012:97). 철창은 4세기 전반
김해와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일시에 등장한다. 김해지역은 중심 고분군인 대성동 1호에서
13점, 대성동 2호에서 14점 등 대형분묘에서 다수 부장되고, 중하위 고분군인 양동리, 두
곡, 망덕리고분군에서는 한 분묘 내 1~2점 출토되었다. 부산지역에서는 중심 고분군인 복
천동고분군과 연산동고분군의 일부 분묘에 1~2점 부장되었다. 무덤의 규모가 크거나 부
장유물이 비교적 풍부한 분묘에서 출토되는 편이다.
반면 일본열도에서는 나라현 메스리야마メスリ
山 고분에서 212점 이상의 철창이 부장
되었으며 이 외에도 다량 부장된 고분이 확인된다. 일본 고분시대 전기를 중심으로 기내
畿內 외에도 동북지방~구주지방에 걸쳐 약 60기의 고분에서 출토되므로 철장은 왜계 유
물로 이해된다(
細川晉太郞 2012:104)5).
철창은 전장 30㎝를 기준으로 단신형과 장신형으로 대별되고, 신부폭은 3.0㎝를 기준
으로 광형계와 세형계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외에 관부형태(직각과 둔각), 나무자루단의
형태(직선/삼각형) 등 다양한 형식학적 속성을 가지지만 철창이 김해지역에 처음 부장되
는 대성동 18호 및 13호에 여러 형식의 철창이 함께 부장되고 이후에도 다양한 형식이 부
장되어 현재 김해ㆍ부산지역에서 확인된 철창의 형식분류 및 변천은 뚜렷하지 않다6).
3. 다지창
신부가 여러 개로 갈라진 다지창은 상대방을 찌르는 것 외에도 가지 사이에 상대방의
무기를 넣어 잡아챌 수 있어서 상대의 공격을 방어할 때에도 유리한 무기이다. 다지창을
무기가 아닌 어구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김재홍 2015), 방패와 철창(대성동 88호묘), 철창
과 곡도(구지로 9호), 철모(여래리Ⅱ-37호ㆍ40호) 등 주로 무기류와 함께 출토되는 점으
로 보아 기본적으로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다지창은 가지의 갯수와 형태, 나무자루와의 결합방법으로 세분할 수 있다. 나무자루와
5) 통형동기를 금관가야계 유물로 보아 통형동기와의 공반관계를 고려하여 철검형 철창이라 명
명하고 한반도산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김영민 2008:139)
6) 일본 출토 자료를 포함하여 형식분류한다면 철창의 변천이나 지역색 등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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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동 조
4~5세기 김해
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의 결합은 공부를 제작하여 나무자루를 끼우는 공부식(A)과 여러 개의 철봉을 단접하여
나무자루에 끼우는 슴베식(B)으로 나뉜다. 이지창은 모두 공부식이며, 신부가 수직상으로
뻗는 것(a)과 외반하거나 S자상을 이루는 것(b)으로 구별된다. 공부식과 슴베식이 모두 확
인되는 삼지창은 미늘이 있는 것(i)과 없는 것(ⅱ)으로 나눌 수 있다.
김해지역에서는 신부가 외반하는 Ab식의 이지창이 확인되며, 삼지창은 모두 미늘이 있
는 ⅰ식이다. 미음동 24호 석곽묘 출토 삼지창만 공부식(Aⅰ식)일 뿐 그 외는 모두 슴베식
(Bⅰ식)이다. 한편, 부산지역에서는 복천동 10호에서 Bⅰ식이, 청강ㆍ대라리 유적 Ⅳ지구
60호 수혈에서 Aⅰ식 삼지창이 출토되었다.
Ⅲ. 김해ㆍ부산지역 장병무기의 변천
1. Ⅰ단계(3세기 후엽~4세기 초)
원삼국시대 목관묘 단계부터 부장된 신부 너비 3.0㎝ 내외의 광형계 직기형 철모, ⅠA1
식과ⅠA2식이 주로 부장된다. 김해 대성동 76호(도4-2)와 예안리 74호(도4-9) 출토 철
모는 신부 단면이 여전히 얇은 볼록렌즈형을 띠지만, 너비가 2.4㎝ 내외로 세형화되는 경
도3. 다지창의 형식분류(축척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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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도4. 김해ㆍ부산지역 Ⅰ단계 철모(s=1/8)
1. 구지로 18호, 2. 대성동 76호, 3
ㆍ
4. 양동리 58호, 5. 양동리 240
호, 6~8. 양동리 15호, 9ㆍ10. 예
안리 74호, 11. 예안리 160호, 12.
노포동 1호, 13ㆍ14. 노포동 21호,
15ㆍ16. 노포동 31호, 17. 노포동
35호, 18. 노포동 수습, 19~21. 복
천동 80호
101
신 동 조
4~5세기 김해
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향이 확인된다. 더욱이 예안리 74호 출토품은 공부단의 형태도 연미형을 띠어 김해와 부
산지역에서는 늦어도 이 단계부터 연미형 철모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7).
이 시기 경주를 중심으로 포항ㆍ울산지역은 관부돌출 철모, 궐수문 철모 등 실제 무기
의 기능을 상실한 의기성 철모를 위주로 분묘에 부장된다(신동조 2007, 김상현 2020). 김
해 양동리고분군과 부산 노포동고분군에서 관부돌출B식 철모의 부장이 확인되지만(도
4-5ㆍ15), 경주ㆍ포항ㆍ울산지역처럼 한 분묘 내 복수부장되지 않고 1~2점 가량만 부장
되어 이 지역들과의 교류를 통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 시기 김해와 부산지역에서는 ⅠA2식 철모가 다수 확인되는데, 전장 50㎝ 이상
의 초장신형 철모도 복천동 80호에서 3점, 양동리 15호에서 2점, 노포동고분군에서 2점
출토되었다8).
ⅠA2식 철모는 김해ㆍ부산지역 외에 마한권역의 아산ㆍ천안ㆍ연기 등 아산만 일대 곡
교천 유역에서 다수 확인된다(이용범 2014). 이 지역을 포함한 중서부지방은 늦어도 2세
기 전반~3세기 중반 무렵의 이단관식 철모ㆍ관부돌출A식 철모 등 영남지방과 동일한 철
모가 부장되어 양 지역 간의 무기교류가 활발하였으며, 경주지역을 구심점으로 교류가 이
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김새봄 2011:117) ⅠA2식 철모는 3세기 중반 이후 경주 일대에
서 확인되는 사례가 적고, 마한계 단경호와 금박유리옥 등 중서부지방, 즉 마한과의 교류
를 보여주는 유물이 김해ㆍ부산지역에서 다수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홍보식 2007, 서현
7) 광형계 신부를 가지고 공부단이 ⅠB식 철모는 3세기 전~중반으로 편년할 수 있는 포항 옥성
리(나) 78호, 옥성리(나) 69호, 울산 하대 42호 등에서 출토되었다. 부산ㆍ김해지역에서 연미형
철모의 출현도 이와 유사한 시기로 상향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8) 노포동고분군에서는 노포동 21호묘에서 1점, 지표에서 1점 수습되었다(도4-18).
도5. 김해ㆍ부산지역과 마한의 교류(토기ㆍ장신구: 축척부동, 철모:s=1/12)
1. 아산 명암리 밖지므레2-1지점 10호, 2. 아산 명암리 밖지므레2-1지점11호, 3. 연기 응암리
5호, 4. 천안 청당동 22호
102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주 2013) 아산만 일대 곡교천 유역에서 확인되는 ⅠA2식 철모는 김해ㆍ부산지역과의 교
류를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해ㆍ부산지역이 풍부한 철자원과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대외교역의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2. Ⅱ단계(4세기 전엽~4세기 중엽)
철모는 여전히 광형계의 ⅠA1식 중심으로 부장되지만, 장신형인 ⅠA2식의 부장은 줄
어든다. 이전 단계에 등장한 세형화된 신부에 두께가 두꺼워지며 단면 능형으로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공부단의 형태는 직기형과 연미형 모두 사용되며, 출토 비중은 비슷하다. 볼
록렌즈형의 광형계 철모는 공부에 비해 신부의 길이가 비슷하거나 조금 더 길지만, 단면
능형의 세형계 철모는 신부의 길이가 짧아지는 경향이 보인다. 이러한 신부 형태의 변화
는 철모의 기능이 상대방을 베어서 위해를 가하는 인병기
刃兵器에서 찌르는 기능을 강화
한 자병기
刺兵器로 변화하였음을 의미한다.철모의 성능 개량은 방어구의 변화, 특히 철제
갑주와 관련 있다. 평양 석암리 219호, 창원 다호리 2호, 경산 임당동 저습지, 서울 몽촌
토성 등지에서 유기질제 갑옷(
革甲ㆍ木甲ㆍ骨甲)의 존재가 확인됨에 따라 철제 갑주 출
현 이전에도 방어구로서 갑옷이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인병기
刃兵器적 기능이 강조된
단면 볼록렌즈형 철모의 날카로운 날로 유기질제 갑옷을 공격하면 갑옷의 성능을 떨어뜨
릴 수 있지만 철제 갑주는 철제 지판이 쉽게 잘리지 않는다. 따라서 적은 힘으로도 지판을
뚫어 상대방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철모의 개량화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복천동 38호 판갑의 우측 전동부에는 관통당한 지판에 부정형의 철판을 가죽으로 시침
질하여 보수한 흔적이 확인된다. 관통 구멍은 크기 0.8~1.6㎝의 부정형으로 1㎝ 내외의
두께나 너비를 가진 무기로 추정된
다9). 철제 판갑이라는 새로운 방어구
를 극복하기 위해 철모의 신부 단면
을 두껍게 하고 신부폭을 줄여 관통
력을 향상시키는 개량화가 확인된다.
화살촉의 형태도 이전 단계의 무경촉
과 단면 볼록렌즈형이 아닌 단면삼각
형촉, 삼각추형촉으로 변화하는데(이
9) 복천동 38호에 공반된 추형 철촉의 촉신 너비는 0.8~1㎝, 신부 단면 능형 철모의 두께도 0.6~
1.0㎝ 내외이다.
도6. 복천동 38호 판갑 보수흔
103
신 동 조
4~5세기 김해
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현주 2010:60), 관통력 증대라는 성능 향상과 무관하지 않다.
Ⅱ단계에는 새로운 장병무기인 철창과 다지창이 출현한다. 왜계 무기로 추정되는 철창
은 김해 대성동고분군에 집중 부장되지만 양동리와 망덕리에서도 확인된다. 부산지역에
서는 복천동 38호에서 2점 부장되었다. 이에 반해 다지창은 대성동고분군에서만 출토되
었는데, 이지창 3점, 삼지창 1점으로 이지창의 비중이 더 높다.
복천동고분군에서는 대형 목곽묘인 38호에서 14점(의기성 철모), 복천동 60호(주)에서
10점 등 이전 단계보다 한 분묘에 부장되는 철모의 수량이 크게 늘어나고, 경주지역을 중
도7. 김해ㆍ부산지역
Ⅱ단계 출토 철모ㆍ다지창(s=1/8)
1. 대성동 18호, 2. 대성동 68호, 3ㆍ4. 대성동 70호, 5. 대성동 94호, 6ㆍ7ㆍ13. 대성동 2호, 8. 양
동리 37호, 9. 양동리 45호, 10~12. 양동리Ⅳ지구1호, 14. 대성동 95호, 15. 대성동 88호, 16.
대성동 94호, 17. 구지로 9호, 18~26. 복천동 38호, 27~32. 복천동60호(주), 33ㆍ34. 복천동 57호
104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심으로 부장되는 궐수문철모도 확인된다. 이에 반해 김해지역에서는 부장품이 풍부한 대
형 목곽묘라 할지라도 한 분묘 내에 1~2내외의 철모만을 부장하고 복수의 철창과 다지창
을 함께 부장하여 두 지역 간 장병무기 체계에 차이점이 부각된다.
표 3. Ⅱ단계 김해ㆍ부산지역 장병무기 공반 관계
유구명
철모
철창
다지창
기타
김해
대성동 2호
1(물미2)
14
1(삼지)
철정110, 판갑, 괘갑, 투구,
파형동기2, 통형동기2, 곡도
대성동 13호
-
4
-
철촉 85, 파형동기6, 벽옥제석촉
대성동 18호
1
2
-
방추차형 석제품, 통형동기2
대성동 23호
-
1
-
파형토기2, 찰갑, 철정60, 곡도
대성동 70호(주)
2
4
-
철촉429+, 연호문경, 대금구, 종장판주, 판갑,
등자, 재갈, 철정, 곡도, 통형동기2
대성동 88호
-
1
1(이지)
파형동기13, 통형동기3, 금동대구, 방추차형석제
품2, 비취곡옥1, 벽옥제관옥8, 광형동모1,
방형판삽날, 유공식철촉, 철정4
대성동 95호
-
-
1(이지)
철정 60+, 투구
구지로 9호
-
2
1(이지)
곡도1
양동리 254호
1
3
-
유자이기 1
양동리 Ⅳ-1호
5
1
-
종장판갑, 경갑,통형동기1,통형철기1,
판상철모, 유자이기
망덕리 Ⅰ-13호
1
2
-
통형동기2, 판상철모, 유자이기
망덕리 Ⅰ-16호
물미1
1
-
판갑, 경갑, 통형동기1, 삽날
부산
복천동 38호
14
2
-
통형동기2, 비취곡옥, 마노제석촉, 궐수문철모3,
판갑, 경갑, 찰갑, 재갈2,
복천동 57호
2
-
-
경갑2, 판상철모2, 유자이기
복천동 60호(주)
10
-
-
통형동기3, 삼엽문환두대도
유자이기1, 궐수문철모2
105
신 동 조
4~5세기 김해
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3. Ⅲ단계(4세기 후엽~5세기 전반)
철모는 광형계의 부장이 매우 빈약해지고 세형계 위주로 부장된다. 직기형 철모도 계속
확인되지만, 연미형의 비중이 훨씬 높아지며 전장 30㎝ 이하의 것, ⅡB1식이 다수를 점한
다. 이 중 철모의 전체 길이는 비슷한데, 신부의 길이비(신부길이/전장)가 0.35 이하로 공
부에 비해 신부 길이가 짧은 철모가 확인된다(도9-3ㆍ26ㆍ27) 4세기 후반부터 기승용마
구가 본격 부장되는데, 신부 길이비 0.35 이하의 것은 대성동 1호, 복천동 21ㆍ22호, 복천
동 95호 등 마구와 공반되고 있어 마상에서 사용이 용이한 형태로 개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불안정한 말 위에서 자루가 긴 철모를 좀 더 안정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나무자루와
의 결합력을 높이는 공부는 길게 만들고 신부를 짧게 만들어 무게를 줄여 무게중심을 맞
춘 것으로 생각된다.
광형계 철모는 학소대 1구-3호와 복천동 10ㆍ11호에서 확인된다(도9-32ㆍ45). 공부
단은 연미형을 띠고 있으나 전장이 모두 40㎝가 넘어 실제 살상을 위한 무기로 사용되었
다기보다 의장 또는 의기적 역할을 강조하여 부장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김해지역에서는 대성동고분군 외에도 두곡과 여래리 석곽묘에서 다지창이 확인된다.
두곡 33호에서는 철창과 이지창이, 여래리에서는 무려 3기의 분묘(도10-4ㆍ5ㆍ6호)에서
도8. 김해ㆍ부산지역
Ⅱ
단계 출토 철창
(s=1/8)
1ㆍ2. 대성동 18
호, 3~ 6. 대성
동 13호, 7. 대성
동 52호, 8~11.
대 성 동 7 0 호 ,
12~14. 대성동2
호, 15ㆍ16. 구지
로 9호, 17ㆍ18.
양동리 210호,
19. 양동리 254
호, 20. 양동리
Ⅳ지구-1호, 21ㆍ
22. 망덕Ⅰ-13호,
23ㆍ24. 복천동
38호
106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도9. 김해ㆍ부산지역 Ⅲ단계 철모ㆍ철창
1. 구지로 41호, 2ㆍ3ㆍ17~21. 대성동 1호, 4~6. 대성동 93, 7ㆍ8ㆍ22 두곡 33호, 9. 양동리 46
호, 10. 양동리 48호, 11. 양동리 74호, 12ㆍ13.양동리 78호, 14ㆍ15. 양동리 95호, 16. 양동리
190호, 23. 복천동 35호, 24ㆍ25. 복천동 95호, 26~30. 복천동 21ㆍ22호, 31~35. 복천동 10ㆍ
11호, 36~39. 복천동 53호, 40~44. 학소대1구-3호
107
신 동 조
4~5세기 김해
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삼지창이 확인되었다.
철창은 대성동 1호묘에 한 분묘 내 가장 많은 수량인 14점이 부장되지만, 그 외에는 두
곡 33호에서만 1점 확인되어 이전 단계보다 철창의 부장빈도가 크게 줄어든다.
이 시기 부산지역에서는 철창은 확인되지 않지만 최고 위계묘라 할 수 있는 복천동 10
ㆍ11호묘에서 삼지창이 출토되었으며, 여전히 한 분묘 내 3~10점 내외의 철모를 복수부
장 한다.
4. Ⅳ단계(5세기 후반~6세기 전반)
철모는 세형계 신부에 연미형 공부단을 가지는 ⅡB식 철모가 대다수이다. 그 중에서도
전장 30㎝ 이하이면서 무관형인 ⅡB3식이 다수를 차지하며, ⅡB1식이라 할지라도 관부가
미약한 것이 많다. 철모의 규격화 및 무관형이라는 형태의 단순화가 간취된다. 이는 지역
내 거점마다 철모를 부장한 중소형 석곽묘가 다수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철모 제작의 효
율성을 높여 대량생산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었다(이현주 2010:62).
직기형 철모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확인된다. 신부 너비가 1.8㎝ 이하의 초세형
계 철모의 부장 비율이 매우 높아지지만 광형계 철모도 확인된다. 김해 죽곡리 53호 석곽
묘에서 반부철모 1점이(도11-10) ⅡB1식, ⅡB3식 철모 1점 및 은상감환두대도, 장경촉 9
점이 함께 출토되었다. 미음동 46호 석곽묘에는 신부의 형태가 칼을 닮은 도신형 철모 1
점이 환두대도 1점과 함께 부장되었다(도11-13).
도10. 김해ㆍ부산지역
Ⅲ단계 다지창(s=1/8)
1. 대성동 14호, 2. 망덕리 Ⅱ-93호, 3. 두곡 33호, 4. 여래리Ⅱ-18호, 5. 여래리Ⅱ-37호, 6. 여
래리 Ⅱ-40호, 7. 양동리 226호, 8. 복천동 10호
108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5세기 중반 김해지역에서는 이전까지 중심고분군 역할을 담당하던 대성동고분군의
위상이 크게 약화되고 양동리와 망덕리에서도 무기 부장 고분이 급감한다. 능동ㆍ죽곡
리ㆍ예안리ㆍ미음동ㆍ가달 고분군 등 중소형고분군들이 다수 축조되면서 중하위 집단이
중심이 되는 시기이다. 중소형 고분군 내 상위위계 분묘에서만 철모 1~2점 가량을 철촉,
대도류와 함께 부장하거나 철모만 단독 부장하는 경우가 많다10).
부산지역에서도 복천동과 온천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구릉인 연산동에 고총
10) 이 시기 낙동강 하구역 무장은 철모 단독 부장(F형)은 급감하고, 도검이 단독 부장되는 E형으
로 대체되며, 단위집단의 상위 무장으로 철모와 도검이 함께 출토되는 D형 무장이 다소 증가
한 것으로 파악된다(장상갑 2019:132)
도11. 김해ㆍ부산지역
Ⅳ단계 철모
1. 능동 가-4호, 2. 예안리39호, 3. 예안리 57호, 4. 예안리 60호, 5. 가달 8호, 6. 예안리 8호,
7. 예안리 65호, 8. 예안리 43호, 9. 칠산동 22호, 10~12. 죽곡리 53호, 13. 미음동 46호, 14.
대성동 85호, 15. 대성동 87호, 16. 연산동 8호, 17. 연산동 1호, 18ㆍ19. 연산동 M3호, 20~22.
복천동 4호, 23. 임석 2호, 24. 임석 9호, 25. 당감동 9호, 26. 당감동 7호, 27. 당감동 23호,
28. 반여동 12호, 29. 반여동 13호, 30. 반여동 15호, 31. 반여동 19호, 32. 반여동 21호
109
신 동 조
4~5세기 김해
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고분이 조영되고 당감동ㆍ반여동ㆍ오륜대 등 중소형 고분군이 본격 축조된다. 중소형 고
분에는 1~2점 내외의 철모가 10여점 이내의 철촉과 함께 부장되지만, 중심고분군인 연
산동 고총고분에서는 M3호-8점, M8호-4점, M10호-3점(물미 2점 포함)이 확인되었
다. 도굴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철모는 이보다 많은 수량을 부장한 것으로 보인다. 연산
동 M3호에서는 전형적인 왜계 철창의 특징을 가지는 슴베편이 2점 출토되었다11). 하나
(도14-3)는 슴베의 나무자루흔이 삼각형을 이루며 신부 하단까지 감싸며, 다른 하나(도
14-4)는 가는 실을 촘촘히 감고 흑칠로 고정하였다. 연산동 M3호에서 왜 왕권의 중심 수
장층만이 보유하는 것으로 알려진 후동부 상연이 돌출된 금부단갑
襟附短甲편이 공반되
었다.
Ⅳ. 4~5세기 김해ㆍ부산지역 장병무기 체계 차이와 배경
분묘에 부장된 무기 구성이 실제 무기체계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없지만, 대다수
무기류가 실제 사용할 수 있는 형태이고 다양한 기종이 조합을 이루어 부장되는 점으로
보아 전투를 위해 조직된 현실의 무기체계를 일정부분 반영하였다고 전제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해와 부산지역은 철모나 철창ㆍ다지창의 형식학적 변천은
대동소이하지만, 철창과 다지창의 부장 여부, 철모의 부장수량 등에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두 지역 내 장병무기 체계가 서로 달랐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김해ㆍ부산지역 장병무기 구성에서 가장 큰 차이는 왜계 무기인 철창의 부장빈도
라 할 수 있다. 3세기 후반 이후 낙동강 하류역은 낙랑(중국)-마한-왜를 연결하는 대외교
류의 거점으로 활약하며 이를 증명하듯 다양한 외래계 문물이 분묘에 부장된다. 4세기대
에 들어서면서 왜계 유물이 다량 부장되어 안정적인 철소재와 철제품을 확보하기 위한 일
본열도의 움직임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대성동고분군을 중심으로 한 김해지역에서는 방패나 화살통장식으로 추정되는 파
형동기와 응회암으로 만든 촉형ㆍ방추차형ㆍ통형의 석제품이 출토되었다. 파형동기는 현
재 김해 대성동고분군 13호ㆍ88호ㆍ2호ㆍ23호 4기의 고분에서만 확인되었다. 응회암제
석제품은 양동리 303호에서 방추차형이, 망덕리 Ⅱ-55호에서 원통형이 1점씩 부장되었
11) 발굴조사 보고서에서는 철도 병부편 등으로 파악하였다.
110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을 뿐 그 외 다수는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 또 정각식 철촉(대성동 29호ㆍ양동리
58호), 유공식 철촉(구지로 18호ㆍ대성동 88호), 동촉(대성동 88호) 등 왜계 화살촉이 부
장된다. 왜계 장병무기인 철창은 대성동 13호(4점)ㆍ18호(2점) 부장을 시작으로 대성동 1
호(14점) 등 대성동고분군에 다수 부장되고, 망덕리와 양동리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왜계 유물은 일본열도 내에서는
近畿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므로, 대성동고분
군 세력과
畿內세력의 교섭으로 이해된다(井上主稅 2008). 즉, 왜는 철생산 뿐만 아니라
철제품의 집산지였던 김해-대성동 세력과의 교섭을 통해 안정적인 철자원을 확보하고 내
부에서의 세력 강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왜왕권의 위신재라 할 수 있는 기물인 동경
銅
鏡과 팔찌형 석제품 등의 석제품은 대성동고분군에 부장되지 않는다. 대신 대성동고분군
세력은 촉형 석제품처럼 실전에서 사용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기물도 있지만 ‘무기’의 형
태를 띠고 있는 왜계 유물을 주로 부장하였다.
이러한 왜계 유물의 구성은 왜왕권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반영하기
도 하지만, 대성동고분군 세력도 다른 위신재보다 무기에 집중하여 입수함으로써 대성동
고분군 세력의 ‘무장
武裝 ’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금관가야는 철소재와 중국 선
진문물을 바탕으로 한 왜와의 교섭에서 반대급부로 왜의 군사적 지원을 요구하였음을 상
정할 수 있다12). 따라서 분묘에 부장되는 ‘왜계 무기’는 김해지역에 머무르는 왜계 병사
들에 대한 지휘ㆍ통솔권을 상징하는 의미로 왜 왕권이 제공한 것으로 이해된다(조성원
2017:50). 다만 왜로부터 제공된 군사력은 지휘관이 아닌 일반병사의 역할을 수행하였으
며, 금관가야 군사체제에 편입되어 통제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철창은 금관가야의 중요한
장병무기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한편, 복천동고분군에서도 김해지역에 철창이 출현하는 13호ㆍ18호와 동시기인 38호
에서 철창 2점이 통형동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복천동고분군에 철창이 입수된 배경은 먼
저 대성동고분군을 경유하였거나 복천동고분군 세력과 일본열도와의 직접 교류를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복천동고분군이 위치한 구릉 아래에 형성된 동래패총 일대에 바닷물이 들어온 것이 확
인되므로 이 일대에 복천동고분군 집단이 운영한 포구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동래
패총에서는 3세기 후반부터 다수의 하지키계 토기가 출토되어 일본열도와의 교류가 활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井上主稅 2008). 3세기 말~4세기 전반으로 편년할 수 있는 복천동
80호와 38호에서 복수의 철정이 부장되는 것으로 보아 철자원의 확보도 비교적 원활하였
다13). 이렇듯 바다와 인접하고 철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복천동고분군 세력
12) 이 외에 왜로부터 쌀ㆍ소금 및 생구生口와 같은 인력도 제공되었을 것이다.
13) 복천동고분군에서 철정이 확인된 유구는 27기이다. 부산지역에서 철을 제련하여 철소재를
111
신 동 조
4~5세기 김해
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은 김해 대성동고분군 세력을 경유하지 않고 독자적 대외 활동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여
건을 갖추었다. 일본열도에서도 대성동고분군 세력과의 단일화된 교섭 창구보다는 다원
적 교섭 창구를 마련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복천동 38
호에 철창을 비롯하여 경옥제 곡옥14)ㆍ통형동기 등 왜계 유물이 직접 유입되었을 가능성
이 있다. 복천동 42호ㆍ60호(주)ㆍ64호ㆍ71호ㆍ73호에서 통형동기가 출토되고 복천동
54호ㆍ57호ㆍ64호에서 경옥제 곡옥, 이외에 하지키계 토기 등 왜계 유물이 복천동고분군
내에서 연속 부장되는 것으로 왜와의 교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왜계 유물의 부장양상에서 유물의 종류 및 위계는 물론 양적으로도 대성동고분군 세력이
압도적 우세함을 보이므로 한반도와 일본열도와의 대외교섭의 중심은 대성동고분군 세력
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렇듯 복천동고분군과 일본열도와의 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
성동고분군과 달리 복천동고분군에서는 철창이 다량, 그리고 연속 확인되지 않는다. 복천
동에서 철창이 처음 부장된 38호의 무기 부장양상을 살펴보면 판갑ㆍ찰갑ㆍ투구 등의 무
구와 다종다양한 14점의 철모, 환두대도, 철촉 383점이 확인된다. 이후 57호와 60호(주)
에서도 각각 2점, 10점의 철모가 부장되는 등 복천동고분군 세력은 ‘철모’ 중심의 장병무
기 체계를 일찍이 갖추었다. 즉, 복천동고분군은 당시 널리 보급된 판갑ㆍ찰갑의 대응무
기로 효과적인 철모를 선택, 개량화를 통해 주력무기로 활용하였기에 철창을 새로운 무기
로 적극 도입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 외에 왜계 무장의 최고 위신재인 파형동기와 벽옥제 석제품이 대성동고분군에만 부
장되고 4세기 중엽~5세기 전반 철창은 김해지역에서만 확인되고 있으므로 대성동고분군
세력에 의해 부산지역으로의 철창 유입이 통제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이는 복
천동고분군으로 유입되는 왜계 유물이 대성동고분군을 경유하였을 경우에 성립 가능한
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복천동고분군은 왜와 직접 교류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고, 망덕
리와 양동리처럼 주변고분군에서 철창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통제하였을 가능성은 낮
아 보인다. 더군다나 철창의 제작이 비교적 용이하다는 점 역시 대성동고분군의 통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복천동고분군 세력의 무기체계로 편입되지 못한 것으로 보는 편이 좀
더 타당할 것이다.
다지창의 부장도 철창과 유사하게 4세기대는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김해지
직접 생산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된 바 없으나, 철정 부장량 및 부장철기의 양으로 보
아 철소재의 확보가 비교적 용이하였던 지역이라 할 수 있다.
14) 복천동 38호보다 1단계 빠른 복천동 80호에서도 경옥제 곡옥이 출토되었다. 4세기대 김해와
부산지역에서 확인되는 경옥제 곡옥이 일본 近畿와 北九州에서도 동일한 형식이 확인되고
공반되는 위세품 중 하지키계는 山陰계와 北九州계 등으로 다양하게 파악되므로 한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유입경로를 단정짓기 어렵다(최혜린 2018).
112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도12. 복천동고분군 출토 왜계유물
113
신 동 조
4~5세기 김해
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역에서는 4세기대부터 5세
기대까지 10여점의 다지창
이 확인되었지만, 부산지역
에서 현재 확인된 다지창은
복천동고분군 10ㆍ11호와
청강ㆍ대라리 Ⅳ지구-60호
수혈 출토품 2점에 불과하
며 모두 5세기대 자료이다.
경주ㆍ창녕ㆍ울산ㆍ경산
등 신라권에서 확인되는 다
지창이 공부를 가지며 미늘
이 없는 신부가 수직상으로
뻗는 Aⅱ식이라는 점과 비
교하면 Ab식의 이지창과 B
ⅰ식의 삼지창은 김해ㆍ부
산지역의 특징적인 무기라
할 수 있다. 중심 고분군인 대성동고분군 외에도 망덕리, 여래리, 미음동 등 중소형고분군
에서도 확인되어 다지창이 낙동강 하류역 일대 무기체계에서 철창ㆍ철모와 함께 중요한
장병기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김해지역은 철모 외에도 철창과 다지창이라는 새로운 장병무기 체계를 갖추고
운용하였기에 무기체계 내 철모의 편성 비중은 축소되었고, 따라서 최고위계의 수장급 분
묘임에도 불구하고 철모의 분묘 내 부장비중이 부산ㆍ경주지역보다 매우 적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무기를 개발 혹은 수용하는 것은 단순히 형태가 바뀐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
니라 이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군사 양성과 조직의 운영, 전술의 변화 등 사회 내부
의 성장과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4세기 전반 김해지역은 대성동고분군 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장병기인 철창과 다지
창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빠르게 중심집단인 대성동고분군 외에도 양동리Ⅳ-1호, 망덕리
Ⅰ-14호, 17호 목곽묘 등 주변집단에서도 철창을 비롯하여 판갑과 찰갑 등을 갖춘 새로
운 무장체계가 이식된다. 이전까지 중심집단에 독점되던 무장이 김해지역 내 주변집단까
지 확산되는 등 좀 더 조직화되어 간다(장상갑 2019:136). 금관가야 무장의 조직화 및 확
산은 대외교역의 거점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는 대내외 교역을 통한 경제적 이득과
정치사회적 제반여건의 성장을 바탕으로 전개될 수 있었을 것이다.
도13. 신라권역 출토 다지창(우병철, 2019:136)
1.창녕 송현동7호, 2.울산 조일리49-2호, 3.안동 조탑동C
호, 4.창녕 교동고분(횡구식석실묘), 5.경산 임당동6A호,
6.대구 죽곡리고분, 7.구미 황상동1호, 8~10.경주 황남대
총북분, 11.경주 천마총
114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부산지역은 4세기대 고분군의 조사 사례가 부족하지만 인접한 단위집단으로의 무장확
산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복천동고분군 세력 중심으로 무장이 독점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더군다나 고분군 조영집단의 무장비율이 70% 내외로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
구, 마구 등을 함께 부장한 예가 대부분을 차지한다(이현주 2005:91). 복천동고분군 내에
무장이 집중되었다는 것은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고도의 군사훈련을 받은 전문 군사집
단이 운영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정치적ㆍ사회적 성장을 이끌어 나간 것으로 보인다.
5세기 후엽에 들어서서야 부산지역은 수영강 인근에 중소형 고분군이 활발하게 조영되
며 중심유적ㆍ거점유적ㆍ근시유적ㆍ주변유적으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조직적인 군사
체계를 갖추었다(이현주 2005:91~92). 이 시기에는 중심고분군이 복천동에서 연산동으
로 이동하며 대형 고총고분 14기가 축조된다. 연산동고분군에서는 다수의 왜계 판갑과 철
촉이 확인된다. 일본열도에서도 출토사례가 드물고 왜왕권의 중심지역에 한정되어 부장
되는 금부판갑이 출토된 M3호에서 나무자루의 단부가 삼각형을 이루는 왜계 철창도 2점
확인되었다. 연산동고분군에 부장된 출토된 대금식판갑은 찰갑이 공반되는 것으로 보아
실제 사용한 것이라기보다 소유품, 위세품으로 부장되었다(김혁중 2019:146). 도굴이 워
낙 심해 정확한 양상을 알 수 없지만 조사된 고분군 내에서 다수의 철모편은 확인되지만
도14. 연산동고분군 출토 왜계무기ㆍ무구(축척부동)
1. M2호, 2~4. M3호, 5. M8호, 6ㆍ7. M10호, 8. 오구라컬렉션_傳 연산동
115
신 동 조
4~5세기 김해
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철창은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M3호분에 부장된 철창 역시 실제 무기체계에 편입되
었다 볼 수 없으며, 일본열도와의 교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물품으로 대금식판갑(금부
단갑)과 함께 부장되었다.
5세기대 김해지역은 대성동고분군의 위상이 크게 약화되면서 두곡, 죽곡, 여래리, 칠산
동 등 중소형 고분군 내 철모1~2점을 중심으로 도검류와 철촉이 부장될 뿐 타 고분군을
압도하는 무장체계가 확인되지 않는다. 두곡, 가달, 율하, 죽곡리 등 중소형고분군에 부장
되는 왜계 갑주류에 대해 일본 내 지역세력과의 교섭을 통해 입수하고 실제 피장자가 사
용한 것으로 파악되며(김영민 2018:216), 미음동 46호에서도 왜계 도신형 철모 1점이 환
두대도와 함께 출토되었다. 4세기대와 달리 이 시기 김해지역은 탁월한 중심집단의 부재
로 조직적인 군사체계가 운영되었다기보다 중소집단이 개별적으로 무장집단을 갖추어 운
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Ⅴ. 맺음말
긴 자루 끝에 날이 달린 장병무기는 다른 무기에 비해 제작이 용이하고 익히는 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공격력이 뛰어나다는 점 때문에 오랫동안 주력무기로 사용되
어 왔지만 연구사적으로는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본 연구에서도 장병무기
중 일부 기종의 부장 정형성에 주목하고 이를 통해 인접한 김해와 부산 두 지역의 장병무
기 체계의 차이가 있음을 살피고 그 배경에 대해 추론해 보았다.
무기와 무구는 전쟁에서 사용되는 도구를 일컫는 말이지만, 소유자 더 나아가 소유집단
의 정치ㆍ경제적 세력 유지와 확대, 그리고 지배체제의 확립 등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작
용한다. 따라서 김해와 부산, 인접한 두 지역의 장병무기 체계 차이는 양 지역이 서로 다른
무장체계를 운영하는 독자적 정치체였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유기적으로
운영되었을 당시 무장체계를 일부 무기에 대한 검토만으로 살펴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추후 단병무기인 검과 도, 투사무기인 활과 화살, 판갑ㆍ투구 등의 무구류, 기마무사를 위
한 마구 등에 대한 심도 깊은 자료 분석을 통해 두 지역의 무장체계에 대한 종합적 검토가
이루어진다면 이를 운영한 정치체를 이해하는 데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한다.
116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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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119
토론문
「4~5세기 김해·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에 대한 토론문_장기명
「4~5세기 김해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에 대한 토론문
장 기 명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4~5세기 김해ㆍ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 발표문은 김해, 부산지역의 분묘에
서 출토된 장병무기 중에 실전용으로 추정되는 철모, 철창, 다지창을 선별하여 형식 분류
하고 그 분포 정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로 두 지역은 철창과 다지창의 부장 여부, 철모의
부장 수량 등에서 차이를 확인하였고, 그러한 장병무기의 구성 차이는 서로 다른 무장체
계를 운영한 독자적 정치체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하였다. 토론자는 큰 틀에서 발표문
의 내용이나 논리 전개에 이의 사항이 없고 대부분 동의하기 때문에, 추가 설명을 요청하
거나 세부적으로 궁금한 점에 대해 질의하도록 하겠다.
1. 김해지역에서 다양한 형식이 일정 수량 이상으로 출토되는 철창은 금관가야의 중요
한 장병무기 중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또 철창이 왜 왕권과의 교류에서 무장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왜계 병사들에 대한 지휘ㆍ통솔권을 상징한다고 이해하였다. 그렇다면 철창은
금관가야의 일반 군대(왜계 병사 제외)에서 보편적 무기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지휘권을
가진 상위자가 관련 군대를 통솔하기 위해 배타적으로 소유했다고 보아야 하는지 궁금하
다. 사실, 철창의 부장 맥락 또한 중대형급 이상의 분묘에 한해 교류적 의미로 다양한 형식
이 일괄 부장되는 양상으로 보여 추가 설명을 요청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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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2. 발표문의 주요 내용은 아니지만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 마한권역 아산만 일대, 곡
교천 유역 일대와 김해ㆍ부산지역 간의 초장신형 ⅠA2식 철모 교류를 통해 양자 간의 대
외교역 사례를 제시하였다. 실전용(?) ⅠA2식 철모는 경주 일대에서 출토 사례가 적고, 관
부돌출형 철모, 판상 철모와 같은 의기성 철기의 교류, 유입과 구분된다고 지적한 듯하다.
분묘에 부장된 철기만으로 논의하는 것이 한계가 있겠지만, 같은 철모 기종이라도 실전용
과 부장용의 교류, 유입이 달랐다고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마한권역의 정치체마다 선호
되는 철모 기종이 달랐다고 상정해야 하는지 궁금하여 질문을 드린다.
3. 4세기 후엽~5세기 전반 철모에서 신부 길이가 짧아지는 형태 변화에 대해 대성동 1
호묘, 복천동 21ㆍ22호묘, 복천동 95호묘 등의 마구와 공반 현상과 관련하여 마상에서 사
용하기 적합하도록 신부 무게를 줄여 무게 중심을 맞춘 것이라 추정하였다. 예시로 든 분
묘들은 대형급 분묘라서 마구가 당연히 공반될 수 있는바, 추가 사례와 출토 정황을 상세
히 설명 들으면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또 철모에 결합된 나무 자루의 길이 또한
마상에서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 개량되어야 할 요소라고 판단되는데 이에 대한 답변도
함께 부탁드린다.
4. Ab식 이지창과 Bi식 삼지창에 대해 신라권역에서 출토되는 다른 형식과 달리 김
해ㆍ부산지역의 특징적 무기로 제시하였다. 김해ㆍ부산지역에서 출토되는 이런 형식의
이지창과 삼지창이 형태적으로 다른 이유에 대해 제작 방식의 차이, 혹은 기능적 차이로
볼 수 있는지, 아니면 특정한 부장 배경이 따로 있는지 의견을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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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4~5세기 김해·부산지역 장병무기 비교 검토」에 대한 토론문_장기명
주제발표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
김 혁 중(국립김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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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혁 중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
Ⅰ. 머리말 – 연구사 검토와 연구 목적ㆍ방법
삼국시대에 전사들은 다양한 무기와 갑주를 사용하였다. 이 중 갑주는 방호구라는 실용
적인 목적 이외에도 그 형태나 희소성 때문에 여러 중층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정확하
게 말하자면, 갑주를 대상으로 연구자들은 갑주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그 해석도
달랐을 것이다.
삼국시대 갑주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아니나 갑주가 많이 출토되어 관련 연구가 활발한
일본 고고학계에서 연구관을 구체적으로 나누어 본
阪口의 연구(2000)가 참고된다. 그는
갑주에 대한 연구자들의 이미지는 기술 및 편년과 계통을 논하는 연구와 정치적 관계와
군사조직을 논하는 연구로 나눌 수 있다고 보면서 전자는 갑주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이
고 후자는 갑주를 재료로써 하는 연구로 언급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전자를 기초로 하여
후자로 진행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시점은 전자를 통해 검증과정을 기초하여
후자로 진행된다고 볼 수 있으며 연구자의 갑주관으로 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연구
관은 한국에서 진행되어온 갑주 연구를 보건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발표자는 판단한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검증을 거친 연구관을 ‘결론으로써의 갑주관’으로
볼 수 있고 검증을 거치지 않은 연구관을 ‘전제로써의 갑주관’으로 나누었다(
阪口 2000).
Ⅰ. 머리말
– 연구사 검토와 연구 목적ㆍ방법
Ⅱ. 고대 갑주의 의례 관련 사례
Ⅲ. 고분 출토 갑주의 의례 양상
– 복천동고분군의 사례 검토
Ⅳ. 맺음말
목 차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
김 혁 중
국립김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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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그러면서 갑주관의 구체적인 예시로 ‘결론으로써 갑주관’은 ‘하이테크 제품’, ‘일원화된 집
중 생산품’, ‘의장무구’라는 세 가지를 들었으며 ‘전제로써 갑주관’은 ‘실용무구’, ‘위신재
(위세품)’라는 두 가지 예시를 들었다. 그러면서 갑주의 라이프사이클(life cycle)을 검토하
면서 제작, 배포, 사용, 부장이라는 4가지의 장면을 언급하였다1). 이 중 부장이라는 측면
에서 출토 상황을 검토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는 부장이라는 행위는 피장자의 무
위를 해체하는 행위이며 이 행위가 다음 대의 수장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결론을 내렸다.
한국의 갑주 연구도 짧은 연구사에도 불구하고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많은 연구가 이
루어지고 있다. 특히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대한 연구는 상당한 수준으로 축적되고
있다. 문제는 갑주의 라이프사이클이라는 측면에서 이것이 어떻게 사용되고 폐기되었는
가에 대한 부분을 고려하는 연구가 미흡하다는 점이다. 이점은 우리가 갑주라는 연구 대
상을 기술적인 측면을 강하게 고려하고 인식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아직 기초적인 자료
분석에만 크게 치중하고 있다는 점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므로 앞으로 갑주는 검토되어야 할 부분들이 적지 않은데 이제까지 활발하게 언급
되지 않았던 과정 중 폐기(부장)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를 통해서 갑주
의 의례적 측면도 같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갑주의 의례적 성격은 이제까지 전혀 논의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종장판갑의 실용성
이나 장식적인 측면에서 언급된 바 있다. 그렇지만 기왕의 연구들은 의례라는 행위의 물
품에서 그 가능성만 언급되고 어떤 과정에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검토는 없기에 부장을
하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적석목곽묘의 의례
행위나 과정을 다루면서 적극적으로 상장의례를 복원하려는 최근의 성과들은 갑주 부장
행위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유적조사에서 확인된 양상이 당시 행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고 조
사 기록 등의 제한적 여건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발표자는 의례와 관련된 초보적
인 논의를 통해서 어떤 결과를 도출한다기보다 새로운 과제를 함께 논의해 보자는 목적에
서 본고를 작성하게 되었다.
1) 鈴木(2016)는 생산 →보관→유통→보유·사용→폐기(부장)로 좀 더 세분화한 바 있다.
127
김 혁 중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
Ⅱ. 고대 갑주의 의례 관련 사례2)
1. 종장판갑의 의례적 양상 검토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종장판갑의 용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 이유는 다양
한 형태로 제작되고 다른 갑옷보다 장식이 화려하며 일부는 재단이 불량하다고 생각될 만
큼 크기가 다른 철판 여러 매를 이어 만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종장판갑의 용도는 실
전용과 부장용으로 견해가 나뉜다. 실전용으로 보는 견해(이현주 2002)는 복천동 38호·57
호, 대성동 57호에 확인되는 수리흔을 근거로 철판을 덧댄 흔적을 중요시 한다. 부장용으
로 보는 견해(송계현 1995)는 철판 여러 매를 연결하여 1매의 도련판 내지 진동판을 제작
한 소위 ‘비규격성’을 갖춘 사례에 주목한다.
최근에는 종장판갑의 의례적 기능을 주목한 연구가 있었다. 그러한 해석의 근거에는 종
장판갑 중 일부는 경판에 새 모양을 장식하거나 짐승 털을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이를 새
를 신성시하는 전통에서 비롯된 장식 즉 조장으로 보는 것이다(오광섭 2004). 또한 종장
판갑은 와문도 장식되어 있다. 와문은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종장판갑의 착장자를 태
양과 같이 신성화하여 무운을 기원하는 벽사적 기복신앙으로 표현하거나 통과의례와 같
은 의식에 종장판갑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종장판갑의 수리흔이
나 재단의 부정확성, 장식에 주목하여 성년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 종장판갑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송정식 2012). 특히 와문과 새를 표현한 유자이기와 종장판갑의
상관성은 주목할 만하다. 최근에 확인된 가동고분군 Ⅱ-43호 목곽묘 출토 종장판갑은 조
문, 와문, 털장식에 침선까지 문양을 넣어 가장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2. 소찰의 의례적 양상 검토
신라의 국찰이었던 황룡사에서도 갑옷의 부분을 구성하는 소찰이 출토되었다. 삼국시
대 대다수 갑옷이 고분에서 출토되는 상황과는 달라서 매납의 배경이 흥미를 주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갑주를 매납한 목적이나 용도가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이
해에서 접근해보고 생각해 볼 필요성을 제시해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2) Ⅱ장은 발표자의 박사학위논문 Ⅵ-1-2)의례 부분을 수정 보완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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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황룡사에서 출토된 소찰은 1984년도에 간행된 ‘황룔사’ 발굴조사보고서(문화재관리국)
에 따르면 모두 2곳으로 서금당지와 목탑지이다. 서금당지는 기단토로 2점이 출토되었고
목탑지는 기단부로 모두 3개의 층위로 나뉘는데 중층에서 출토되었다. 보고서에 기록된
소찰의 제원과 특징은 현존 길이가 4.5㎝이고 폭은 2.3㎝ 정도로 상부에 상하로 작은 구멍
이 마련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소찰은 모두 2
점으로 각각 형태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중에 한 점은 일부가 결실되어 정확한 형태를
알기 어렵다. 다른 한 점도 전체가 완형에 가깝게 남아있다. 이 소찰의 평면형태는 상변보
다 하변이 넓으며 상변의 모서리는 각이 죽은 상태이다. 일부가 결실된 소찰 한 점은 뒷면
에 유기질이 넓게 수착된 특징이 있다. 이러한 소찰들은 찰갑을 구성하는 일부로 추정된
그림 1. 가동 고분 Ⅱ-43호 목곽묘 출토 종장판갑의 장식(김혁중 2018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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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혁 중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
다. 그러나 소찰의 종류나 수량이 빈약해서 찰갑의 전체적 형태나 구조를 추정하기 어렵다.
삼국시대 갑주는 여러 유적에서 상당한 수량이 확인되었으나 황룡사 출토품과 같은 늦
은 시기 자료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황룡사 출토 소찰과 비교해서 살펴볼 자료로 압압
지 출토품과 재매정지 출토품을 들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유사한 자료는 안압지 출토품이
다. 또 두 자료는 대부분의 갑옷이 무덤에서 출토되는 정황과 달리 건물지에서 출토되어
황룡사와 상당히 유사한 출토 정황을 보여준다. 그러한 사정은 이 시기에 무덤에 부장되
는 물품이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줄어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기는 좀 늦지만 황룡사처럼 사지에서 출토된 찰갑은 익산 미륵사지와 여주 고달사지
자료가 있다. 그런 이 자료들은 고려시대 자료로 추정되고 있어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운
그림 2. 종장판갑의 수리흔(송정식 2012 개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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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상황이다. 그렇지만 사지에 찰갑을 매납하는 행위가 이 시기까지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웃의 일본도 우리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고분시대로 명명하고 있는데 그 당시의 갑
주의 용도가 우리의 삼국시대 갑주와 많이 비슷하다. 주거지나 사지에서 갑주가 출토된
사례도 적지 않다. 최근 이러한 사례가 있는 각지의 출토품을 모아 특별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元興寺文化財硏究所 2017). 고분시대부터 막부가 통치하는 중세시대까지 넓은
시기와 분포를 보이는 특징이 있다.
이중에 황룡사와 같은 사지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사례로 비조사와 동대사 출토품이 있
다. 비조사는 7~8세기에 창건된 곳으로 일본의 불교 도입기에 해당된다. 사리장엄구가 있
그림 3. 종장판갑의 깃털 위치(송정식 2012 개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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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혁 중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
는 탑 심초에서 소찰이 여러 점 출토되었는데 찰갑 일식으로 보인다. 그 구조는 삼국시대
찰갑의 일반적인 구조와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동대사는 8세기에 창건된 곳으로 이곳
에서도 찰갑 일식이 금당지 진단구에서 출토되었는데 소찰 형태 등이 미륵사지나 고달사
지에 출토된 것처럼 세장한 형태로 보고서(기전문화재연구원 2007)에 의하면 소찰의 종
류가 모두 3종류로 나뉜다고 한다.
황룡사 목탑 심초석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공양이나 의식을 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
다(경주문화재연구소 2013). 매우 다양한 종류의 출토품이 있는데 다른 사지와 달리 찰갑
이라는 갑옷의 일부를 이루는 소찰이 출토된 것은 동 시기 다른 사지의 매납된 상황과는
특이한 사례이다.
그렇다면 황룡사에서 소찰을 매납한 배경은 현재로서 유사한 사례를 비교하여 추정할
수 밖 에 없는데 발표자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3가지 관점에서 소찰을 매납한 배경을 검토
해 볼 수 있다.
심초석에 출토된 유물의 성격을 의식과 공양으로 나누어 보고 있는데 대개 심초석 하부
출토품을 의식과 관련된 물품으로 보는 것 같다(경주문화재연구소 2013). 그러나 발표자
는 소찰이 중층에서 출토되었지만 공양보다 의식의 성격에 좀 더 주목해보고자 한다.
첫째, 전쟁의 승리에 대한 기원과 신라의 안전을 위하여 매납했을 가능성이다. 황룡사는
국찰로 신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통합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호국 사찰이다. 이
러한 점을 감안하면 사리장엄구나 탑에 표현된 사천왕이 입은 갑옷과 같은 의미로 소찰을
목탑이나 금당지에 매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 4. 경주 재매정지 출토 이형철기와 황룡사 출토 소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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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둘째, 진단구적 성격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가지 영남지방의 진단구를 검토한 연
구(박호숙 2017)에 따르면 경주지역에는 일찍부터 다양한 유형의 진단구가 확인된다고
한다. 이 중에 사찰의 여러 유형 중 사찰 관련 건물지와 탑의 적심 등에 진단구 관련 유물
이 출토된다고 보고 있어 금당지와 심초석 중층에 매납된 소찰도 이와 같은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경주 재매정지에서 출토된 갑옷도 유사한 사례로 보이며 신라지
역은 아니나 백제지역의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갑옷의 일부분인 소찰도 진단구와 관련된
의례적 성격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재매정지에서는 사람 모양을 띠는 소찰도 출토되었는
데 국내에서는 출토 사례가 드물지만 일본에 유사한 사례가 있어 향후 자료 증가가 기대
된다. 가야는 최근 함안 아라가야 추정왕성지 유적에서 확인된 주거지에서 소찰이 출토된
바 있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8). 이 소찰의 성격도 진단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
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양적 성격을 감안한다면 사지 내에 갑옷을 제작한 공방이 있어서 관련 물
품을 매납했을 가능성이다. 황룡사에서는 금속제품을 만들 수 있는 도구나 도가니 등이
출토되어 공방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공방과 관련한 중요 물품을 공양적
으로 매납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위의 검토로 보건대 소찰을 매납한 배경과 관련된 여러 가설 중에 가장 타당성이 높은
설명은 진단구적 관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진단구가 건물의 안전을 염원하는 의례에
적합하다면 무적 성격이 강한 갑옷을 매납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다. 그러므로 좀 더 다른 의미의 의례적 성격을 염두해 본다면 황룡사가 호국사찰이고 당
시 국내외적 환경이 전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신보다 신라의
승리와 안전을 염원하는 물품으로 갑옷을 부장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갑옷을 묻는 행위는 삼국유사에도 기록된 바 있다. 삼국유사
䥐藏寺 彌陀殿에 의하면
무장사로 불리게 된 연유가 ‘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
추어 두었기 때문에 무장사라고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태종은 병장기를 묻음
으로써 전쟁이 끝나고 앞으로 평화를 기원하고자 하는 뜻을 담고자 하였을 것이다. 황룡
사에 묻힌 소찰도 신라를 지키고자 하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133
김 혁 중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
Ⅲ. 고분 출토 갑주의 의례 양상 – 복천동고분군의
사례 검토
앞에서는 갑주의 형태와 고분 이외의 유구에서의 출토 양상을 토대로 의례적 성격이 있
을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이로 보건대 갑주는 당시에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방어구 이상의 의미가 고대인들에게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앞 장에서 살펴본 것은
정황적 증거 등을 통해서 갑주의 의례적 성격을 추론한 것이다. 갑주의 의례적 성격을 분
명하게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갑주의 라이프사이클에서 부장(폐기)과 관련된다. 따라서 이
번 장은 고분에서 갑주를 부장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의례의 종류와 유
형을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자세하게 분류하고 검토한 김은경의 연구(2020)를 참고하고자
한다. 그는 의례를 크게 Ⅰ~Ⅵ유형으로 분류하였는데 표 1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중에 부장품으로 갑주가 가장 많이 확인되었다고 판단되는 의례는 장송의례이며 표
에서 분류한 유형을 보면 Ⅱ유형과 Ⅲ유형이다. 김은경은 각 유형에 대한 성격도 정리해
두었는데 Ⅱ유형은 김용성의 연구(2015)를 참고하여 피장자의 머리맡이나 유물부장궤에
공헌유물은 석단 위, 장례행렬과 관련되거나 묘곽의 축조와 관련된 유물은 내곽의 목곽
위에 부장된다고 하였다. 또 부곽은 사후에 생활하기 위한 모든 유물이 부장되었다고 하
였다(2020: 73). Ⅲ유형은 피장자를 안치 후 개복하고 석단에 유물을 부장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의례로 철기류는 피장자의 소유품 혹은 의례용품으로 보았다.
그러면 갑주를 부장한 양상은 이러한 의례 양상에서 어떠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렇지만 이번 발표에서 모든 사례를 살펴보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특정고분군의 사례를 중
심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발표자가 갑주의 부장 양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대상은 복천동고분군이다. 복천동고
분군을 선정한 이유는 이 고분군이 단일고분군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갑주를 부장
하고 있으며 가야에서 신라로 정치적 성격이 변화하면서 장례라는 고유의 문화적 풍습은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표 2는 복천동고분군 출토 갑주의 부장양상을 발간된 자료를 참고로 정리해 보았다. 도
표 1. 의례의 종류 및 유형(김은경 2020)
빈의례
장송의례
묘제
Ⅰ
Ⅱ-1
Ⅱ-2
Ⅲ
Ⅳ
Ⅴ
Ⅵ
빈의례
정지의례
유물부장의례
곽상부의례
적석부의례
봉토의례
묘제
134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굴이나 자료의 미발간으로 정확한 양상을 알기 어려운 자료도 존재한다. 이중 공식보고서
가 미간인 것은 바탕색으로 별도로 표시해 두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출토된 갑주의 출
토 양상의 대강은 정리가 가능하였다.
먼저 복천동고분군에서 갑주가 부장된 위치를 살펴보겠다. 앞에서 살펴본 상장의례의
유형을 감안하면 복천동고분군에서 갑주는 현재까지 무덤에서 확인되는 양상은 대부분
Ⅱ-2와 Ⅲ의 유형에 해당된다. Ⅱ-2 유형은 곽이나 관내에 갑주가 부장되었다. 이러한 부
장 방법이 특정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피장자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정해진 위치를 두고 갑주를 부장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주곽과 부곽으로 나뉘
는 경우에도 양쪽에 부장하거나 한쪽에만 부장하는 등 다양한 부장양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고분에는 공헌유물, 장례유물, 사후생활을 위한 유물로 그 성격을 나누어 볼 수
있는데(김용성 2009) 갑주는 이중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표 2. 복천동고분군 출토 갑주의 부장양상(
공식보고서 미발간)
연번
고분명
크기(길이×폭×깊이)
출토 갑옷
부장위치
비고
1
4호
420×90×60
대금식판갑 1
서장벽 – 목관 외부 정치
왜계
2
7호
(600)×150×120
찰갑 1(경갑편)
도굴로 불분명
3
10·11호
주곽: 430×150×150
부곽: 600×350×200
종장판주 2
종장판갑 1
찰갑 1
마주 1
주곽
찰갑
종장판주
부곽
목곽 상부: 종장판갑, 종장판주
목곽 상부: 마주
4
15호
705×160×120
찰갑 1
북단벽
5
16호
370×180×(65)
찰갑 1(경갑)
목관 위 부장(남쪽 중앙)
6
19호
주곽: 660×310×225
부곽: 470×260×220
찰갑 1
부곽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음
7
21·22호
주곽: 475×160×160
부곽: 630×420×270
경갑 1
종장판주 1
찰갑 1(경갑,요찰)
주곽
남동 모서리: 경갑
부곽
동반부: 찰갑, 종장판주
8
34호
415×180×(92)
종장판주 1
찰갑 1
마갑 1
목관 위
서단부: 마갑
북반부: 찰갑
9
35·36호
주곽: 700×400×350
부곽: 600×350×210
찰갑 1
경갑 1 –찰갑?
마갑 1
주곽
목관 북쪽 위: 찰갑
부곽
곽(서장벽 부근) 상부: 마
갑, 경갑
10
38호
주곽: 750×360×135
부곽: 280×340×(40)
종장판주 1
종장판갑 1
찰갑 1
주곽
서쪽 할석단 공간: 종장판
주
북동 장벽 : 찰갑
북단벽 모서리: 종장판갑
부곽
-
11
39호
670×405×230
종장판주 1
경갑 1 – 찰갑?
서장벽 배치
12
42호
주곽: 740×360×70
부곽: 400×220×70
종장판주 2
종장판갑 1
찰갑 1
주곽
종장판갑: 동장벽(시상위)
종장판주/찰갑:서단벽
135
김 혁 중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
복천동고분군은 갑주가 복수로 여러 곳에 부장된 경우가 있다. 이를 테면 복천동고분군
에서 갑주가 부장되기 시작한 초기의 대표적 고분인 복천동 38호의 경우 주곽 내에서도
여러 방향에서 투구와 갑옷이 나누어 부장되어 있다. 매장의례의 절차가 있고 앞서 언급
13
43호
주곽: 570×264×143
부곽: 346×156×76
종장판갑 1
14
44호
544×242×(160)
종장판주 2
종장판갑 1
찰갑 1
동단벽 남쪽
15
46호
주곽: 432×257×110
부곽: 400×(164)×(67)
종장판주 1
종장판갑 1
부곽 중앙부
16
47호
890×330×160
종장판주
찰갑 2 ?
석실 중앙
17
54호
주곽: 760×370×185
부곽: 585×285×80
종장판주 1
부곽 목개 위(?)
18
56호
주곽: 600×285×140
부곽: 340×320×80
종장판주1
종장판갑1
비갑1
주곽
종장판주 1, 종장판갑 1
부곽
비갑 2
19
57호
주곽: 590×280×150
부곽: 390×180×95
종장판갑 2
주곽 북쪽 모서리
20
64호
660×300×170
종장판주 1
방형판혁철판갑 1
찰갑 1
비갑 2
21
69호
주곽: 550×250×150
부곽: 518×212×89
종장판주 2
종장판갑 2
주곽
-
부곽
목곽 상부 ?(토기 위)
22
71호
주곽: 644×356×272
부곽: 496×216×46
종장판갑 2
측경판 2 ?
주곽
측경판 2
부곽
종장판갑 2
23
73호
주곽: 680×370×96
부곽: 380×210×20
종장판갑
주곽
-
부곽
종장판갑
24
78호
467×242×165
종장판주 1
찰갑 1
서단벽과 북장벽 모서리 - 교란
25
86호
523×(167)×137
종장판주 3
종장판갑 4
주곽
-
단독분?
부곽
종장판주 3 종장판갑 4
26
89호
316×153×34
27
93호
주곽: 548×288×183
부곽: 430×180×(34)
종장판주 1
부곽 남쪽 단벽
28
112호
650×245×(130)
종장판주 1
대금식판갑 1
상박갑 1
왜계
29
140호
찰갑 1
경갑 1
30
164호
(462)×147×(55)
종장판갑 1
남단벽
31
165호
(174)×129×(10)
종장판갑 1
중앙? 곽 상부
32 (동)2호분
580×120×120
견갑
왜계?
33 (동)8호분
420×100×100
찰갑 1
중앙에 가까이 경갑과 요찰 사이에 빈 공간 확인
34
학소대
1-2,3호분
주곽:650×300×(130)
부곽:370×140×(100)
종장판주 2
찰갑 1
주곽 중앙에서 서쪽: 종장판주
주곽 동단벽: 찰갑
136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한 것처럼 부장품마다 성격이 나누어진다면 이러한 경향성은 갑주가 공헌유물, 장례유물,
사후생활을 위한 유물 중 어떠한 목적으로 부장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천동고분군에 부장된 Ⅱ-2와 Ⅲ의 유형은 어떤 성격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우선 Ⅱ-2 유형은 피장자를 안치하는 과정에서 부장되었을 것인데 갑주는 기본적으로 복
식품이기에 피장자가 생전에 갖고 있던 지위를 나타내는 위세품으로 공헌유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생각해볼 점은 기왕에 이러한 갑주가 출토되면 그 집단의 성격이
무장성이 강하다고 언급한 연구가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장례를 위한 공헌유물의 성격으
로 이해한다면 이를 집단의 성격과 과연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 신중한 접근이 필요
하다.
앞서 종장판갑의 문양을 언급하였다. 문양 중 와문은 벽사적 기복신앙이 있다고 보았
다. 갑주가 훼기된 점 등을 성년의례와 연결지을 수도 있지만 무기류 부장을 방상시의 행
위와 연관하여 언급한 견해(김용성 2009: 260)를 참고한다면 갑주 부장은 피장자가 고분
에 부장되기 전에 잡귀와 액을 쫓는 방상시와 관련된 의례의 결과물로 부장되었을 가능성
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발표자가 그렇게 보는 이유 중 하나는 적석목곽묘에서 여성의 무덤이 분명한 고분에서
도 갑주가 출토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이라고 해서 갑주를 위세품으로 지닐 수 있다는
점은 아니다. 기왕에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갑주도 부장 여부도 포함
되었으나 그렇지 않은 상황도 있으므로 부장된 배경을 신분에 따른 구성품의 차이로 간단
하게 설명하기보다 앞의 의례적 절차에 따른 이유로 부장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필요
가 있다. 또한 갑옷은 칠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이 언급된다. 주칠은 벽사의 의미가 있으므
로 갑옷의 기능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상장의례와 관련하여 의도적으로 칠을 했을 가능성
은 없는지도 의문을 제기해 본다.
갑주가 부장된 Ⅲ의 유형은 목곽이나 목관의 위에 부장된 유형으로 마구 등도 이러한 유
형으로 부장된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러한 행위는 공헌품으로 보기 어려우므로 장례의 행
렬과 관련되어 사용된 갑옷일 수도 있다.
137
김 혁 중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
Ⅳ. 맺음말
이번 발표는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기왕의 갑주 연구는 정치적
이고 기술적인 측면에만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진 갑주 자
료의 대부분은 무덤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이며 갑주의 기본적 용도인 방어적 기능과는 관
련이 없는 부분을 가진 것이 적지 않다. 이에 갑주가 의례적 성격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고려해볼 목적으로 사례를 중심으로 초보적인 검토를 하였다. 이를 간단하게 정
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갑주가 고분에 부장되는 물품 이외의 어떤 의례적 성격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종장
판갑은 4세기대 대표적인 갑주이면서 방어적 기능과 상관없는 다양한 문양을 가지고 있
다. 종장판갑은 문양과 더불어 완성도가 낮은 제작품으로 전쟁의 실전용에 대한 이견이
존재하고 그 중 와문과 털 장식 등은 벽사와 관련된 기복 신앙과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다.
갑주는 고분 이외에도 사찰이나 주거지에서 찰갑이 출토되는 사례가 있다. 사찰이나 주
거지에서 출토된 찰갑이나 소찰은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발표자는 사찰의 경우 공양보다
의식과 관련되며 진단구의 성격을 추정해 보았다. 최근 함안에서 확인된 아라가야 궁성지
로 추정되는 유적 출토 소찰도 소수이지만 이러한 성격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와 관련하여 백제의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소찰도 관심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부장품으로써의 갑주의 의례적 성격을 살펴보기 위해서 어떻게 부장되었는가
를 검토해 보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복천동고분군을 살펴보았는데 일정한 경향성을 찾기
는 어려웠지만 고분을 축조하면서 행해진 의례에서 공헌을 목적으로 한 부장품일 뿐만 아
니라 갑주가 가진 중요한 역할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발표로 갑주의 의례적 성격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고대인에게 갑
주라는 물품은 제작에서 폐기까지 소위 라이프사이클이라는 관점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기에 우리도 향후 다양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38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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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토론문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에 대한 토론문_김영민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에
대한 토론문
김 영 민
울산대학교
본 발표문은 유구에 부장된 갑주의 의례적인 성격을 살펴 보고자한 발표자의 치열한 노
력을 엿볼 수 있다. 발표자의 기존 연구성과는 주로–머리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 “전
제로서의 갑주관”에 중점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 발표문은 이에 한걸음 더 진전
하여 “결론으로서의 갑주관”으로 진입하고 있다. 즉 이전의 ‘갑주의 검토’에서 ‘갑주의 적
극적 해석’의 단계로 발전한 느낌이다. 이러한 발표자의 발전적 성장 과정에 즈음하여 토
론자는 발표자의 의견에 대한 몇가지 의문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향후 발표자의 발전에 일
조하고자 하는 바램을 표현하고자 한다.
먼저 “의례”라는 용어의 문제를 전제에 두고서 발표자의 갑주관의 기저에 깔려 있는-
阪
口氏가 언급한-‘의장무구’, ‘실용무구’, ‘위신재’라는 용어의 개념에 대하여 들어 보고 싶
다. 특히 4세기대 영남지방에 널리 부장된 종장판갑을 중심으로 발표자의 의견을 경청해
보았으면 한다.
아울러 무덤에 부장된 종장판갑의 용도를 ‘실전용이다’라는 관점과 ‘부장용이다’라는 관
점으로 구분한 기존의 연구성과가 있었다. 본 발표문에서 갑주의 의례적 성격을 밝히고자
한 발표자는 현시점에서 종장판갑의 용도에 대해서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입장
을 명확히 밝혀 주시기 바란다.
140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두 번째, 종장판갑의 장식성에 착목한 연구성과에서 의례적 기능으로서 기복사상, 통과
의례까지를 언급하였다. 물론 다른 연구자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본 발표문을 관통하고 있는 발표자의 견해는 이에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들 의례적 성격에 부합하는 요소를 갖춘 종장판갑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단순한 형태의
종장판갑도 다수가 확인된 바 있다. 그럼 이들 비장식적 종장판갑은 순수 실전용으로 보
아야 하는 것인가? 즉 발표자가 주장하는 갑주의 의례적 성격을 모든 종장판갑에 일원적
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발표자의 견해를 들어보고 싶다.
세 번째, 소찰의 의례적 성격에서 사찰 매납의 소찰을 호국불교와 연결된 국가 안녕 기
원, 진단구적 성격, 사찰내 갑주공방의 존재에 따른 매납행위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주
로 황룡사의 사례를 중심으로).
사찰에서 출토된 사례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 것은 연구자의 자유의지로서 존
중하고 싶다. 다만 그 가능성의 제시 속에 진단구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하면서 호국불
교와 관련된 국가안녕기원의 기복적인 요소도 의미 깊게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넓은 황
룡사지에서 확인된 소찰 한점으로서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매납된 소찰
의 기능에 정말 어떠한 합목적성을 가진 상태로 매납된 유물인지도 제대로 증명되어야 하
지 않을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연결해서 사찰이 아닌 일반 주거지와 건물지에서 출토되는 소찰들은 또 다
른 해석틀이 있는 것이지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네 번째, 갑주의 라이프사이클(life cycle) 가운데 부장단계(폐기)를 의례의 과정으로 보
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갑주에 표현된 장식적인 요소들을 통해서 벽사적 기복사상을 제시
했고, 장송의례와 연결해서는 공헌유물, 더 나아가 방상시를 언급하기도 하였다. 또 갑주
에 표현된 칠을 말하고 주칠은 상장의례의 관련성이 높다는 입장을 제기하였다. 왠지 모
르게 너무 많은 가능성을 던지고 있지만 어디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한 발표자의 애매한
입장이 아쉽다. 좀 더 일목요연하게 기왕에 제시한 내용들을 정리해서 발표자의 입장을
만들어 주기를 당부한다.
논지의 전개가 산만한 느낌이 있으므로 차라리 갑주의 변화단계를 중심으로 단계별로
의례의 방식이나 의미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의 견해를 정리해 주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종장판갑이나 갑주류의 기본 성격은 무장구이다. 그런
데 이를 부장한 유구의 성격과 결부하여 그 성격을 탐색하고자 과도하게 의미부여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방상시의 경우는 간단한 자료검색을 통해서 고려시대 이후
유입된 의례라고 나오는데 너무 급격한 비약이 아닌지 저어된다. 물론 기록으로 남겨지기
141
토론문
「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에 대한 토론문_김영민
이전에 그러한 행위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방상시의 의미도 벽사적
성격과 크게 차이가 없다고 본다면 굳이 시기상으로도 익숙하지 않은 용어를 차용해서 설
명하려는 것은 다소 억지스럽다고 할 것이다.
토론자도 유물을 통하여 관념세계에 대한 접근을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다. 그런데 이러
한 연구방식의 가장 큰 장애는 당시 상황을 현대의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강요된 우리들의
시각이라고 하겠다. 이번 발표에서도 여성의 무덤에서 갑주와 무기류가 출토된 경우, 여
성은 무장적 성격으로 약하므로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의례용품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
것은 현대적 관점이다. 한일 고대사를 통하여 강력한 여성 군주의 사례를 우리는 알고 있
다. 사족이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여성 무덤에서 무기, 무구류가 부장된 것은 당시 ‘여성의
군사적 역할을 생각해 볼 수 있다’라고 하는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단초가 되기를 기
대해 본다.
주제발표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우 병 철(영남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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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병 철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Ⅰ. 머리말
현대에도 한 국가의 무기체계와 군사조직은 그 국가가 선호하는 필요성에 따라 제 나름
의 무기체계와 군사조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마다 전투 및 전술을 수행함
에 있어 적정한 군사수의 확보 등의 국내 상황과 주변 국가의 무기체계에 대응하는 국외
상황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적정한 군사체계를 갖추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고대 국가가 출현하는 것은 삼국시대로 영남지방에는 신라와 가야가 자
리 잡고 있었다. 삼국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의 무기체계에 대해서는 문헌자료가 희
박하여 고고자료를 토대로 그 양상을 검토하여 왔다. 특히 1980년대에 조사된 김해 대성
동고분군
‧부산 복천동고분군에서는 다양한 무기 및 무구가 출토되어 여러 연구자들에 의
해 그 성격을 밝히려는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연구 성과는 가야뿐만 아니라 한반
도에 위치한 고구려, 백제, 신라 무기의 특성을 밝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가야 무기 및 무구, 마구의 진일보한 연구성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개
별 무기 및 무구, 마구를 토대로 가야의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의 실체를 복원한 연구는 아
Ⅰ. 머리말
Ⅱ. 삼국시대 무기체계의 연구방법 검토
Ⅲ.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 무기의 전개양상
1. 영남지방 초기철기시대~삼국시대
무기의 변천
2. 신라와 가야의 무기체계
3. 주변 국가 무기체계의 특성
Ⅳ.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
1. 금관가야의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
2. 대가야의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
Ⅴ. 맺음말
목 차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우 병 철
영남문화재연구원
146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직 미비한 실정이다. 이것은 물질자료로만 당시의 군사체계를 복원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제까지 확인된 삼국시대 무기, 무구, 마구는 대부분 당시 의례행
위로 무덤에 부장된 문물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 당시 집단의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으로
연결하기에는 한계가 따른다.
이 글은 기왕에 연구된 가야의 무기, 무구, 마구류를 토대로 가야를 대표하는 전기의 금
관가야와 후기의 대가야의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을 검토하고자 한다. 검토에 앞서, 무덤
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을 의례행위에서 어느 정도까지 군사 문화를 반영할 것인가에 대해
선행 검토하여 필자 나름의 기준을 설정한다. 이후 기왕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가야 무기
의 전반적 흐름을 살펴보면서 가야의 무기체계를 검토한다. 특히 ‘왜’ 이러한 무기체계가
금관가야와 대가야에 유행하는지에 주목하면서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지역의 지형과
주변국가의 무기체계 등 대내외적 상황과 함께 비교·검토하여 가야의 무기체계 및 군사조
직을 복원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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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병 철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Ⅱ. 삼국시대 무기체계의 연구방법 검토
삼국시대 무기체계와 군사조직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연구경향으로 구분할 수 있
다. 먼저 한 가지는 단위지역 및 광역의 주요 무덤군에서 출토되는 개별 무기류의 변화 양
상을 검토한 다음, 특정시기를 대상으로 한 개별 무기의 정량적 분석을 통해 단위지역 및
광역의 정치체 내에서 계급 및 계층을 구분함과 동시에 이를 군사적 신분과 연결시키는
경향이다.
이들 연구는 주요 고분군에서 출토된 무기류를 정량적으로 분석한 다음, 무기류의 조합
관계를 토대로 집단의 신분을 계급화 및 계층화하여 추론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되어 기
왕에 김재우1), 김두철2), 이현주3), 이주헌4), 장상갑5), 김승신6) 등의 연구가 있었으며, 이
연구는 영남지방 분묘에서 출토되는 무기, 무구, 마구 등을 정량적으로 분석하여 그 결과
를 토대로 제집단 혹은 집단 간 계층의 군사적 신분위치에 대해 밝히고자 하였다.
다른 하나는 광역의 정치체를 대상으로 주요 분묘에서 출토되는 무기류의 단계별 변천
양상을 검토하여 해당 정치체의 무기체계 변화를 연구하는 경향이다. 이 연구는 주로 고
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제 정치체를 대상으로 주요 고분에서 출토된 무기를 선별하여
단계별 변천과정과 무기체계 변화에 주목한다. 전자가 주로 단위지역 및 광역의 주요 고
분에서 출토된 무기류의 조합관계나 정량적 분석을 중심으로 세부적인 무기체계를 검토
하는데 집중한다고 하면 후자는 광역의 제정치체의 무기체계 변화라는 큰 틀 속에서 지
역단위별로 무기체계의 특성을 검토하는 경향이 있다. 주요 연구로는 최종택7), 김길식8),
1) 김재우, 1994, 「3・4세기 가야무기에 관한 일고찰」, 경성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 金斗喆, 2003, 「무기・무구 및 마구를 통해 본 가야의 전쟁」, 『가야고고학의 새로운 조명』, 혜안.
김두철, 2005, 「4세기 후반~5세기 초 고구려・가야・왜의 무기・무장체계비교」, 『한일관계사
연구논집』1, 한일관계사연구논집편차위원회.
김두철, 2011, 「삼국(고분)시대 한일무장체계의 비교연구」,『영남고고학』5, 영남고고학회.
3) 李賢珠, 2005, 「三韓・三國時代 釜山地域 軍事組織의 考古學的 硏究」, 釜山大學校 碩士學位
論文.
이현주, 2010, 「4~5세기 부산・김해지역 무장체제와 지역성」, 『영남고고학』제54집, 영남고고
학회.
4) 이주헌, 2009, 「영남지역 무기・무구부장묘와 피장자의 성격」, 『갈등과 전쟁의 고고학』 제33
회 한국고고학 전국대회, 한국고고학회.
5) 張相甲, 2010, 「後期加耶의 軍事組織에 대한 硏究」, 『영남고고학』제54집, 영남고고학회.
6) 김승신, 2012, 「옥전고분군 출토 무기의 변화와 편년」,『慶南硏究』6,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
센터.
7) 최종택, 2009, 「벽화와 유물을 통해 본 고구려의 군사체계」, 『갈등과 전쟁의 고고학』 제33회
한국고고학 전국대회, 한국고고학회.
8) 김길식, 1998, 「5~6世紀 新羅의 武器 變化樣相과 그 意義」,『東垣學術論文集』第1輯, 韓國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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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류창환9) 등의 연구가 있었다.
이처럼 기왕의 삼국시대 무기체계 연구는 다방면으로 시도되었고 나름 의미 있는 연구
성과도 도출되었다. 하지만 연구자간 개별 연구로 그쳤기 때문에 삼국시대라는 큰 틀 속
에서 무기체계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특히 삼국시대의 무기체계를 논의
함에 있어, 고구려는 매장의례의 특성상 유물의 수량이 타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극소
수임에도 불구하고 안악3호분의 행렬도 등 주요 벽화고분의 자료를 토대로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을 어느 정도 규명할 수 있다. 그러나 백제, 신라, 가야의 경우 무덤에서 수 만점
의 무기류가 출토함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보다 구체화된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을 복원하
기에는 어려운 실정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의 백제, 신라, 가야 중 영남지방에 위치한 신라와 가야의 무덤군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무기류가 부장되었다. 그런데 매장의례 행위로 부장된 다수의 무기류에
대하여 ‘유적에서 출토된 무기류가 우리에게 어떠한 정보를 제공해주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간과한 채 연구가 진행되면, 그 연구는 충분히 과학적이고 정량적인 분석을 시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단편적인 예로 단위집단 내 군사조직을 검토함에 있어서 화려한 장식의 칼, 다수의 창
과 화살이 출토되는 최상급 및 상급의 피장자 무덤은 일반적으로 피장자의 신분을 군사적
리더의 상급의 계층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화살만 출토되는 소규모 무덤의 피장
자에 대해서는 매장의례 행위에 있어 하급의 계층으로 판단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이를
군사조직상 바로 ‘궁병’이라는 특정 보직 또는 직책으로 연결시켜는 것은 전체의 분류 기
준에서도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 글은 큰 틀에서 삼국시대 가야의 무기체계와 군사조직을 살펴보는데 주 목적이 있다.
우선적으로 삼국시대 영남지역에 위치한 신라와 가야의 전반적 무기체계의 흐름을 살펴
보고 그 틀에서 가야의 주요 수장급묘에서 부장되는 무기류를 중심으로 가야의 전반적 무
기체계의 특성을 살펴 보고자 한다.
각 단계별 최고 수장급 무덤에서 출토된 무기류를 검토 대상으로 삼은 배경은 이러한 무
古美術硏究所.
9) 류창환, 2009, 「삼국시대 기병과 기병전술」, 『갈등과 전쟁의 고고학』 제33회 한국고고학 전국
대회, 한국고고학회.
류창환, 2012, 「부장철기로 본 아라가야의 수장들」, 『中央考古硏究』제11호, 중앙문화재연구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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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병 철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기류가 당시 무기체계를 가장 잘 반영하는 표본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상위급 무덤
을 축조하는 매장 의례 중에 다수의 무기류가 부장되는 현상은 피장자가 사후세계에서도
권력과 안위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당시의 군사체계를
어느 정도 반영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피장자의 무덤에 유물을 부장하는 행위가 피장
자가 생전에 가졌던 권력과 지위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무기 역시 그
와 같은 성격에서 매장되었을 것이다.
한 예로
中國 秦始皇陵 병마용갱,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고분 행렬도, 대가야 순장묘
등에 보이는 군사들의 모습은 사후에도 피장자를 수호하고자 하는 염원을 반영한 것이다.
신라와 가야지역 무덤에서 무기가 다량 부장되는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사후관념
이 투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특정 집단이 갖춘 무기체계는 당시 제집단의 인구 규모, 환경적 요건 등 내적 요소
의 영향을 받는다. 이와 더불어 상대 집단의 무기체계라는 외적 요소의 영향도 강하게 받
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무기체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유물 자체에 대한 분
석과 함께 제집단의 규모, 환경 및 지리적 여건, 상대의 무기체계 등 다방면에서 검토가 필
요하다. 이러한 방식의 접근에는 유물 자체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문화 체계의 구성 요소
를 함께 고려하는 과정주의 고고학적 연구방법이 효율적이다.
과정주의 고고학은 생업, 취락, 기술, 사회조직, 인구, 환경 등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가
상호작용하면서 각각의 문화가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과정주의 고고학은 문화의
진화, 과거에 대한 체계론적 접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 문화 과정과 일반화의 추
구, 문화 체계에 대한 환경의 중요성 등의 연구 방식을 강조하였다10). 특히 초기 과정주의
고고학자들은 과거 인간사회를 설명하려는 하나의 접근법으로 체계이론을 적극 권장했다.
체계이론은 자연환경 또는 사회조직들이 주위의 내적인 요인과 외적인 환경에 적응해
나가면서 유기체 또는 조직 내부의 여러 변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데 강점이 있다. 반면 체계이론은 다양한 인간 사고로부터 발생되는 행위를 설명하지 못
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주의 고고학의 체계이론은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라는 제정치체
의 무기체계를 설명하고자 하는데 유효한 연구방식이 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신라와 가
야 무기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영향을 끼치는 자연지리적 환경, 철기의 제작기술
10) 대표적으로 데이비드 클라크(Clarke)는 문화 체계가 하나의 단일한 사회문화적 시스템의 하
위체계 네트워크들 사이의 역동적 평형의 정적이고 도식적인 모델과 그것의 전체적 환경 시
스템, 문화 상호작용들에 의해 연결되는 사회문화적 체계들의 영향의 합계를 대표한다고 하
였다.
Clarke, G.(1976), “Prehistory since Childe”, Bulletin of Archaeology,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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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보유, 제집단의 규모, 상대 집단의 무기체계 등 문화의 상호작용 시스템 차원에서 접근해
야 합리적인 해석이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당시의 최첨단 기술인 철 생산과
철제무기 제작 기술력은 어느 정도 확보하였는지, 제집단내 구성원 중 전투 병력으로 동
원할 수 있는 인구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 전투 상대의 무기체계에 대응할만한 효율적 무
기체계를 구성하였는지, 산지와 크고 작은 분지가 많은 영남지방에서 기동성이 떨어지는
철제 갑옷이 과연 얼마나 효용이 있는지 등 여러 가지 요인에 대한 종합적 검토가 필요하다.
삼국시대 영남지방에는 신라와 가야라는 정치체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양 정치체는 초
기철기시대, 원삼국시대를 지나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영남지방 내에 위치한 소국들을
병합해나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를 형성하였다. 양 국가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 둘
러싸인 천혜의 요새 속에서, 영남지방 각지의 크고 작은 분지에 입지한 소국을 병합해나
가면서 국가단위로 발전해 나간 문화적 유사성이 있다. 원삼국시대에는 지리적으로
小國
간의 상호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면서 환경적 요인도 유사했기 때문에 생업, 사회조직 등
여러 면에서 동일문화권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동일성
은 신라와 가야의 무기체계의 형성과 발전과정에도 역시 유사하게 반영되었을 것으로 판
단된다.
문화생태학의 역사생태학적 접근 방식은 신라와 가야의 무기체계를 설명하는 데 도움
을 준다. 역사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신라와 가야의 실전용 무기체계는 고구려, 백제,
왜와 비교해 볼 때 유사성이 강하다. 특히 신라와 가야의 실전용 무기체계는 원삼국시대
부터 삼국시대까지 거의 유사하게 전개된다. 신라와 가야는 전체적으로 문화적인 유사성
을 띠는 가운데 세부적으로 상이성을 띠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굳이 차이점을 찾는
다면 신라와 가야의 수장급이 소유하던 정체성을 반영하는 의장 무기류와 지리 및 지형
등 문화생태를 고려한 독특한 무기류 등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세계 전쟁사에서 보듯이 제집단의 무기체계는 자연지리적 환경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몽고의 칭기즈칸은 넓은 초원지대에서 형성된 경기병 군사조직으로 광대한 영토
를 정복하였으며, 고구려는 평지와 산지의 중장기병, 경기병, 중장보병, 경보병 등의 복합
군사조직으로 맞서 수차례 중국의 대군을 물리쳤다. 신라와 가야가 위치한 영남지방은 무
기체계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남지방은 대부분 산지와
낙동강의
大小 지류가 관류하는 수많은 분지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효율적인 무기
체계는 경보병 중심 체계이다.
· 지리 및 지형에 맞는 전술 및 무기체계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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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영남지방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여 다른 지방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지형
을 형성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영남지방은
太白山脈과 小白山脈, 남부의 해안산맥(韓山
山脈)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거대한 분지인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낙동강의 대소 지류가 지
나가는 수많은 분지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남지방의 분지들은 대체로 경기, 호남, 호서
지방 등에 비해 산지가 많아 토지의 비옥도가 떨어지나 분지의 규모가 작은 곳이 많아 소
규모 공동체 집단이 자리 잡기 좋은 여건을 갖추었다. 이러한 폐쇄성이 짙은 자연지리적
인 요인으로 인해 영남지방의 정치체는 집단 내부의 통합이 빠르게 이루어 졌으며, 시간
이 흐름에 따라 영남지방에 독자적인 사회체계와 생활방식을 가진 다수의 분지 문화를 형
성하기에 이르렀다. 신라와 가야의 무기체계는 이러한 자연적인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폐쇄적이고 산지가 많은 지형조건으로 인해 그에 맞게 무기체계가 구성되
었을 가능성이 크다.
· 상대성에 영향을 받는 집단의 무기체계
각 정치체에서 제작하는 무기는 상대 집단의 무기체계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과
거의 역사에서 전투 및 전쟁의 결과로 발생되는 변화가 그 집단의 흥망을 좌우하는 결정
적 사건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기체계의 변화는 신속히 이루어진다.
원삼국시대 영남지방
小國간의 전투, 삼국시대 영남지방 안에서 이루어진 신라와 가야
의 전투, 소백산맥을 넘어 중국 동북지방까지 넓은 범위에서 벌어지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간의 전투에서 사용되는 무기체계는 각 단계별로 획기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검토하겠지만 고구려, 백제, 중국
前燕 등의 무기체계는 신라와 가야의 무기
체계에 강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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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Ⅲ.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 무기의 전개양상
삼국시대에 이르러 영남지방의 주요지역에서는 국가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전문화된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이 출현한다. 그리고 삼국시대 영남지방에 자리잡고 있던 신라와 가
야에는 실전용으로 사용된 무기체계가 큰 틀에서 볼 때 거의 동일하다고 생각될 만큼 유
사한 특징이 확인된다.
이러한 현상은 앞 장에서 언급하였듯이 신라와 가야는 유사한 자연환경에서 유사한 생
업기술을 갖고 적응하면서 비슷한 문화가 조성된다는 문화생태학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즉 신라와 가야는 한반도 동남부지역에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최적
의 자연 방어지역 내에 속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영남지방 각지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분지로 구성된 소국을 병합하면서 국가 단계
로 이행되는 유사한 과정을 거쳤다. 이 때문에 초기철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지 신라와
가야에 속한 각 지역 소국의 물질문화는 공통적이라 여겨질 만큼 유사성이 강하며, 이러
한 유사성은 오랜 기간 이어지고 있다.
1. 영남지방 초기철기시대~삼국시대 무기의 변천
1) 공격용 무기의 전개 양상
① 철검과 철도
영남지방에서 철검은 철제 무기류가 등장하는 초기철기시대(기원전 2세기 중후엽)부터
철제
短劍이 사용되다가 원삼국시대 후기(2세기 중엽)가 되면 中國 漢의 영향으로 철제
長劍이 일시적으로 유행한다. 그러나 3세기대에 大刀가 유행하면서 철검은 점차 사용하
지 않게 되었다.
철도는 중소형의 형태가 기원전 2세기대에 출현하지만 이는 공구용으로 보는 경향이 강
하다. 무기류로 본격적으로 유행하는 것은 원삼국시대 후기(2세기 중엽~3세기 중후엽)
에 이르서이다. 초기에 나타나는 철도는 손잡이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고 나무를 끼워
병부를 제작하는 목병도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곧 환두부로 병부를 만든 소환두대도가
주로 유행하게 된다. 이후 경주 월성로 가13호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환두부 금제 장
식대도가 출현한 이후, 신라와 가야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한 용봉환두대도, 삼루환
두대도, 삼엽환두대도, 소환두대도, 규두대도 등 다양한 장식대도가 유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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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병 철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② 철창(철모와 철창)
· 철모
철모가 출현한 시점은 초기철기시대이며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시기는 원삼국시대 이
후라 할 수 있다. 영남지방에서는 철모의 형태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각 시기를 대표할 만
한 표지적인 철모가 존재하여 그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초기철기시대에는 신분
의 단면이 얇은 형태(볼록렌즈형)의 단신형철모와 장신형철모(기원전 2세기 중후엽)가 출
현한다. 원삼국시대 전기에는 이단관형철모, 원삼국시대 후기에는 관부돌출형철모(2세기
중엽~3세기중후엽), 원삼국시대 후기와 삼국시대 전기에는 궐수형철모 등 의기성이 강한
철모(3세기 중후엽~4세기 전중엽)가 차례로 유행한다.
이후에도 삼국시대의 주요 실전용 철모인 직기형 및 연미형철모의 출현과 유행(3세기
후엽~6세기), 의장용 성격이 강한 고구려계 반부철모와 가지형철모, 공부다각형철모의
출현(4세기 중후엽~6세기) 등이 확인되는 등 초기철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철모의 변
천 양상을 설정할 수 있겠다.
5세기 이후에는 지역성이 확인되는데, 대가야의 대표적 철모인 공부다각형철모가 유행
한다. 공부다각형철모는 현재까지의 자료를 종합하면 고령 지산동고분군을 중심으로 가
야권역에서 집중하는 것으로 보아 대가야계 철모로 인정된다. 삼국시대 대가야권역에서
확인되는 공부다각형철모는 고령 지산동고분군을 비롯한 고령과 합천지역에 집중 확인되
며, 특히 고령지역에서 그 비율이 높다. 또한 5세기이후 대가야권역이 확대됨에 따라 아라
가야, 소가야권역과 대가야 세력이 진출하는 동부 호남지역에서도 소수 확인된다.
· 철창
자루에 신부를 끼우는 형태의 철창이 있다. 한반도 남부지역은 출현기부터 철모가 지속
적으로 유행한다. 창의 신부 형태가 검과 유사한 철창은 4세기대에 일본열도 왜에서 다수
확인되는 철창(야리)이 있는데, 이 철창(야리)가 4세기대 금관가야의 중심지역인 김해 대
성동13호, 18호, 88호 등의 김해지역 분묘에서도 소수 확인되고 있다. 한반도 남부지역에
서 백제, 신라, 가야에서 장창병의 무기인 철모가 지속적으로 유행하는 것을 고려하면 일
본열도에서 유입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4세기대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출현하여 일시
적으로 유행하다가 이것이 일본열도로 전파되어 일본열도에서 크게 유행할 가능성도 있
기 때문에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철창(야리)이 금관가야 또는 일본열도 왜의 무기냐는 논란을 배제하더라도 바다에 접한
한반도 김해지역과 해양국가인 일본열도에서 유행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바다에서 활동
하는
水軍이 주로 사용했던 무기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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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도면 1. 영남지방 철도의 단계별(원삼국시대) 변천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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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병 철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도면 2. 영남지방 환두대도의 단계별(삼국시대) 변천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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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도면 3. 영남지방 철모의 단계별(삼국시대) 변천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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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병 철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③ 철촉(화살촉)
철검과 철모가 초기철기시대에 등장하는 데 비해 철촉은 이보다 다소 늦은 원삼국시대
전기전반에 출현한다. 성주 예산리 31호묘 출토 추형철촉 등 몇 가지 예를 제외하면 대부
분 슴베가 형성되지 않은
無莖式鐵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 가지 흥미있는 점은 청동기시대에 이미 무경식석촉에서 유경식석촉으로 변화ㆍ 발
전하여 유경식석촉이 마지막까지 유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철제 기술이 도입된 이후에는
다시 무경식을 채택하여 유경식 철촉이 출현하는 2세기대까지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철제 소재의 화살촉이 등장한 것은 기원전 1세기대로 청동기시대의 무경식석촉 형태를
모방한 무경식철촉이며, 이 무경식철촉은 기원후 4세기까지 확인된다. 3세기대 후엽에는
유경식철촉이 출현하며 촉신부가 다양한 형태로 출현하다. 철촉은 일반적으로
無莖式(무
경식) →
有莖式(유경식) → 短頸式(단경식, 頸部의 출현) → 長頸式(장경식)으로 변화한
다. 즉 살상력과 비거리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무게가 점차 무거워지고 길이가 점점
길어지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원삼국시대 후기와 삼국시대 초기에 들어서면 신라 및 가야가 소규모 집단에서 국가 체
계로 전환되면서 전문적인 궁병이 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 시기의 유력 수장묘에
서
有莖式 철촉의 출현과 다수 부장 현상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철촉은 촉신부 형태가 광형계 및 세형계의 능형, 역자형, 착두형, 유협형, 도
자형, 삼익형 등 다양한 형태로 출현하기 때문에 연구자마다 여러 분류안이 제시되었다.
철촉의 분류는 초기에 주로 북한학자에 의해서 논의되었는데 주로 북한지방에서 출토된
고구려 철촉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후 국내에서도 영남지방 고분 출토품을 중심으
로 여러 안이 제시된 바 있다.
가야에서 출토된 철촉은 신라의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철촉 그 자체만으로는 지역색
이 두드러지지 않으나 철촉의 조합관계에서 지역성이 관찰된다. 금관가야의 경우 4세기
전엽에는 광형계 능형철촉이 다수 부장되거나 광형계 능형철촉과 역자형철촉이 한
組로
부장되는 양상이 보이는데, 이러한 전통은 5세기 후엽까지 이어진다. 아라가야에서는 광
형계 철촉이 부장되지 않고, 세형계 도자형철촉이나 유엽형철촉 등 실전용 철촉만 다수
부장되는 지역성이 나타난다. 한편 5세기 후엽 이후가 되면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이서지역에서는 광형계 역자형철촉과 세형계 유엽형철촉, 역자형철촉, 도자형철촉이 주
요 분묘에 부장되고 있다.
2) 방어용 무구의 전개 양상
삼국시대 방어용 무구로는 갑옷과 투구, 방패 등이 있다. 4세기대 영남지방에서 가장 유
행하는 갑주는 종장판갑이다.
全身 찰갑이 변형된 형태인 경갑과 요찰이 가미된 찰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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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도면 4. 영남지방 철촉의 단계별 변천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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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병 철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종종 확인된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당시 영남지방 내의 중심 소국들이 자신의 세력
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전투에 투입될 인구, 전술에 강한 영향을 주는 지형적 조건 등 저마
다의 군사조직과 관련성이 있다.
철제 갑주는 삼국시대 초기에 본격적으로 출현한다. 포항 마산리 목곽묘3호, 울산 하삼
정26호, 경산 조영1B-60호 등의 일부 유적에서는 고구려 등 한반도 북부지역의 영향을
받은
全身 찰갑이 확인된다.이 전신 찰갑은 곧 영남지방의 여러 조건에 적합한 나름의 갑
주로 자리잡게 된다.
도면 5. 가야의 갑주 및 가야권역 출토 대금식판갑
1 김해 대성동18호, 2 함안 도항리36호, 3 김해 대성동57호, 4 김해 양동리78호, 5 부산 복
천동71호, 6 부산 복천동57호, 7 김해 양동리78호, 8 함안 도항리13호, 9 합천 옥전68호,
10 합천 옥전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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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札甲은 일정한 크기의 작은 소찰(小札)을 횡방향으로 이어가며 고정시키고 이것을 다
시 종방향으로 연결하여 상하(
上下) 유동성을 가지도록 한 갑옷이다. 찰갑의 본격적인 도
입은 동북지방의 중장기병 무기체계의 영향으로 판단된다. 찰갑은 규격이 다양하나 상원
하방형(
上圓下方形)의 소찰 상부 중앙에 수결공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초기 신라·
가야에서 나타나는 동환식 찰갑의 특징과 동일하다. 그러나 5세기 후반대에는 상부가 직
선적인 상방하방형으로 변화하며 소형소찰의 하단부가 삼각형으로 재단되는 변화상을 보
인다.
판갑은 종장판갑→방형판갑→삼각판갑→횡장판갑 등으로 변화
․발전하였다. 철판을 연
결하는 방법으로는 혁결기법과 정결 기법이 있으며, 혁결→정결로 변화하였다. 종장판갑
은 세로로 긴 사각형의 지판을 연결하여 만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판갑은 지판
의 형태와 지판과 대판(
大板)을 연결하는 방법에 따라 세분되는데 종장판혁결판갑, 방형
판혁결판갑, 삼각판혁결판갑, 삼각판정결판갑, 횡장판정결판갑 등이 있다.
2. 신라와 가야의 무기체계
원삼국시대의 각
小國은 상호 집단 간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면서 환경, 생업, 사회조
직 등에서 유사성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유사성은 신라와 가야의 실전 무기체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 철모를 중심으로 사용하는 장창병 중심의 무기체계
4세기대 전반에 해당하는 경주 월성로 가5호 등에서 출토된 무기 양상을 보면 철도, 철
모, 철촉 등의 무기류가 한꺼번에 부장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철모가 주류이다. 이러한
조합은 원삼국시대의 양상과 유사하지만 철모의 기능이 찌르기 전용으로 전문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철모가 이처럼 기능이 변화된 배경에는 한반도 북부지역에 위치한 고구려 등 외부 세력
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직기형철모와 연미형철모가 가
장 먼저 유행하였고 영남지방에서는 원삼국시대에도 관부돌출형철모가 크게 유행하였다.
영남지방에서는 이후 관부돌출형철모의 형태와 기능이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한반도 북
부지역과 동일한 형태의 철모가 출현하고 있다.
한반도 북부지역 무기체계의 영향 관계는 철모 뿐 아니라 갑주 등의 무구에서도 확인된
다. 원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영남지방의 무구는 유행하지 않았지만 삼국시대인 4세기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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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병 철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이르러 포항 마산리3호, 울산 하삼정26호 등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찰갑이 소수 확인
된다. 하지만 신라와 가야는 이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그들이 선호하는 종장판갑, 경갑
과 요찰이 포함된 찰갑 등 나름의 갑주문화를 탄생시켰다. 그런데 신라는 4세기 후반의 경
주 월성로가13호, 경주 쪽샘지구C10호 등에서 고구려 무기체계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정
황이 보인다.
원삼국시대 진변한의 무기체계와 군사조직은 철검과 철도, 철모, 철촉을 주로 사용하는
보병 중심의 군사조직이었으며,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의 무기체계 역시 앞 시기의 전통에
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여전히 철모(창병) 중심의 보병이 중심이 된다.
삼국시대의 신라는 연미형철모와 직기형철모가 유입되어 초기에는 사용되지만 얼마 지
나지 않아 직기형철모는 사라지고 연미형철모가 주된 실전 전투용 무기로 자리 잡는다.
반면 금관가야는 각 지역의 중심 세력마다 연미형철모와 직기형철모를 혼재하여 사용하
며, 대가야는 공부의 공부형태가 직기형이고 관부가 형성되지 않는 직기무관형 공부다각
형철모를 주로 사용하기도 한다. 신라와 가야의 기술적 차별성이 일부 확인되나 큰 틀에
서 볼 때 두 나라 모두 형태적으로 거의 유사한 철모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2) 화살촉과 갑옷의 상관 관계로 본 무기체계
삼국시대에 이르러 철촉의 다수 부장으로 보아 전문화된 궁병이 운용되었다고 볼 수 있
다. 그런데 철촉의 형태를 보면 4~5세기까지는 무게가 증가한 단경식 철촉의 출현하면서
비거리 능력이 확대되어 간다. 하지만 비거리와 갑옷 등의 살상력이 높아진 장경식 철촉
의 등장은 5세기 후반~6세기대 이르러서 본격화된다. 고구려 등 한반도 북부지역에서는
이미 장경식 철촉이 유행함에도 불구하고 단경식 철촉이 오랜 기간 유행하는 것은 영남지
방에 위치한 신라와 가야에서 단경식 철촉이 더 효율성이 컸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광활한 벌판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경우 비거리가 큰 화살이 효율성이 크다. 그런데 성을
지키는 성 방어 전투나 산지가 험난한 산지나 협곡 등 지형을 이용하는 전투에는 단경식
철촉만으로도 효과적 전투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4~5세기대까지 단경식 철촉이 유행한 것으로 보아 다수의 군사는 장경식 철촉
등 높은 살상력으로 투력이 필요한 판갑, 찰갑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이유는 제작 기술이 없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 전투에 필요한 전술의 문제로 여겨진다. 다
시 말해, 철제 갑옷은 혁갑, 목갑에 비해 방어력은 높지만 이동 등의 유동성은 떨어지는 약
점이 있다.
따라서 4세기대에 유행하는 판갑과 5세기대에 유행하는 찰갑은 높은 직위의 장수들만
이 사용했던 위계적 성격의 방어구로 판단된다. 병사들이 착용했던 최상의 갑옷은 배자갑
으로 경산 임당유적 등에서 일부 확인되고 있으나 신라와 가야에서 크게 유행하였다고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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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에서는 높은 직위의 장수들 위주로 판
갑이나 찰갑 등 최첨단의 방어구를 착용하고, 일반병의 경우에는 가죽으로 만든 혁갑, 나
무로 만든 목갑이 유행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3. 주변 국가 무기체계의 특성
1) 북부지방에 위치한 고구려 및
中國 前燕
고구려에서는 중국 중원세력과 북쪽의 선비, 흉노, 말갈 등의 기마세력에 대응하여 보병
과 기마병 중심의 무기체계를 갖추고 있다. 물론 백제, 신라, 가야는 고구려의 무기체계에
많은 영향 및 상호 대응으로 무기체계를 형성함에 따라 그 유사성이 강한 특성이 있다.
고구려의 무기체계는 공격용 무기류로
刀(대도, 삼엽문환두대도), 철모(연미유관형철
모, 반부철모, 삼지형철모), 화살촉(광형계 능형, 착두형, 삼익형철촉, 세형계 장경식능형
철촉, 추형철촉)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방어용 무구류는 소찰로 제작한 갑주가 유행한
다. 전체 구성으로 보아 한반도 남부지역의 백제, 신라, 가야와 유사한
刀 + 槍(철모) + 弓
의 조합으로 장창병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안악3호분 벽화분의 행렬도 등 다수의
벽화에서 보이는 보병의 철제 갑옷 착용으로 보아 백제, 신라, 가야가 경보병이 중심인 반
면 고구려는 중보병이 중심이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고구려의 무기류는 고구려만이 독자적 문화를 이룬 것이 아니다. 서쪽으로 접한
中國 5호16국시대의 慕容의 연나라(前燕)와 교류, 전쟁 등의 상호간의 영향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탄생한 고구려 군사 문화이다.
중국
前燕과 고구려의 무기체계는 장식대도와 더불어 연미형, 직기형의 철모, 가지형철
모(삼지형), 삼익형철촉, 착두형철촉 등 형태적으로 유사한 무기류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주력 실전용 무기인 철창(철모)와 화살촉의 구성도 유사성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이들 무
기는 북쪽에 위치한 흉노 등의 기마전술 무기체계에 대응하는 무기류가 많은 특징이 있
다. 특히 삼익형철촉은 흉노에서 실전용 주력 철촉으로 주로 사용되는 무기인데, 착두형
철촉과 함께 기마에 상처를 주어 상대 적의 전력 손실을 주는 무기로 판단된다.
다만 중국
前燕과 고구려 무기체계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前燕은 병부(손잡이)를 얇
게 제작한 철검이 유행하는 점, 고구려는 전연에서 잘 확인되지 않는 반부철모를 사용하
는 점이다.
중국
前燕과 고구려의 무기체계가 유사한 것은 이들 국가가 중국 중원의 동북부지역에
위치하는 지리적 환경과 주변 국가의 상황이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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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병 철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국가는 북부지역에 흉노 등 기마전술체계를 주력으로 하는 국가가 위치하고 있고, 남서쪽
으로는 중국 중원의 여러 국가가 위치하고 있다. 즉 중국 중원의 다수 국가와 마찬가지로
보병중심의 군사조직을 기본으로 하되 북쪽지역과의 전쟁을 위해 기마병 군사조직이 활
성화되거나 흉노 등의 기마전술체계에 대응한 여러 무기류가 발달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2) 일본열도 왜의 무기체계
한반도의 영남지방과 일본열도의 왜는 보병 중심의 군사조직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무기체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영남지방에서는 창, 일본열도는 도검에 주력
했다는 점이다. 신라와 가야의 무기체계는 기본적으로 칼(도, 검), 창(철모, 철창), 화살 등
으로 구성된 창 중심의 보병 군사조직이다. 창은 원거리의 보병을 공격하기에 유리할 뿐
만 아니라 기마부대의 접근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 일본
열도는 기본적으로 칼과 화살 등으로 구성된 무기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칼이 중심이 되는
보병 군사조직이다.
이처럼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지리적으로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조
직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이는 4~5세기, 동북아시아의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신라가
기마부대를 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무기체계를 급진적으로 수용한 데 있다. 반면에 일본열
도에서는 해협을 끼고 있는 관계로 기마부대와 관련된 무기체계는 그다지 요구되지 않았
기 때문에 칼과 화살 중심의 보병 군사조직이 활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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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도면 6. 신라의 무기체계(5세기-경주 황남대총남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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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병 철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도면 7. 고구려권역 출토 각종 무기류
1·11·15. 禹山下1041호, 2.集安 麻線溝1호, 3·8·9·12·22.禹山下3560호, 4·5·18.桓人 五女
山城4期文化層, 6·31.禹山下3296호, 7·19·23∼30.集安 國內城, 10.禹山下3598호, 13.禹
山下3305호, 14.禹山下2110호, 16.集安 太王陵, 17·21·33.集安山城下145호, 20.麻線溝
2100호, 32.禹山下3103호, 34·35.禹山下3162호, 36·37.禹山下31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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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도면 8. 중국
三燕(前燕)권역 출토 각종 무기류
1·8.北票喇麻洞M196墓, 2·12.喇麻洞ⅡM3墓, 3.喇麻洞ⅠM10墓, 4.十二台88M1墓 5·11.
喇麻洞ⅠM5墓, 6·23·24.喇麻洞ⅠM202墓, 7.喇麻洞ⅡM266墓, 9·10.喇麻洞ⅠM13墓,
13.喇麻洞ⅠM14墓, 14·21.喇麻洞ⅠM108墓, 15.喇麻洞ⅠM328墓, 16.喇麻洞ⅠM209
墓, 17·18.喇麻洞ⅠM202墓, 19·20·27.喇麻洞ⅠM379墓, 22.喇麻洞ⅠM60墓, 25.喇麻
洞ⅠM229墓, 26.喇麻洞ⅠM324墓, 28·29.喇麻洞ⅠM3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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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도면 9.
日本列島倭의 무기류(大阪府紫金山古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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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Ⅳ.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
앞서 언급하였듯이, 삼국시대 영남지방에 위치하였던 신라와 가야는 한반도 동남부지
역의 유사한 지리 및 지형을 배경으로 출현한 국가이며, 가장 인접한 상대 집단으로 그에
대응한 전술 등 여러 이유로 인해 무기체계의 유사성이 강하다. 신라와 가야의 무기체계
흐름으로 보아 두 국가는 기본적으로 장창병(철모)의 보병을 중심으로 한 군사조직이 오
랜 기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각 세력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영남지방 내, 나아가 고구
려와 백제에 대응하기 위해 무기체계는 변화하였다. 이에 도병, 장창병, 궁병 등의 전문화
된 보병이 갖추어 지고 기병이 증가하는 추세로 군사조직이 편재되어 갔다고 할 수 있겠다.
1. 금관가야의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
영남지방은 장창병(철모)의 보병을 중심으로 한 군사조직이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다.
무기체계는
刀·劍 + 槍(철모) + 弓의 조합 중에 창병이 중심을 이루는 경보병 군사조직이
유행하였다.
금관가야는 전기 가야를 대표하며, 4세기대에 가장 융성하였다. 영남지방에 위치한 신
라와 가야는 초기철기시대부터 장기간 유사한 무기체계로 전개되지만 양 국가의 차이를
나누려고 한다면, 4세기대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가 가장 이질성이 강하다.
· 공격용 무기 조합에서의 특성
금관가야의 중심 집단인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확인되는 무기류 조합관계를 보면
刀
+
槍 + 弓의 조합으로 영남지방 전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타 지역은 창이 중심으로 이루는 반면, 김해지역은
刀 + 弓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 영남지방 출토 판갑의 집중화
앞서 언급하였듯이 갑옷 중 찰갑은 한반도 북부지역에 위치한 동북지방의 중장기병 무
기체계의 영향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가장 유행하는 갑옷이며, 판갑에 비해 살상력은 떨어
지나 유동성에 강점이 있다. 철제 갑옷이 출현하는 4세기대에 영남지방의 신라와 가야에
서는 판갑이 유행하다가 5세기대 이후 신라권역에서는 점차 사라지며, 가야권역에서는 판
갑과 찰갑이 함께 지속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영남지방 4~5세기대 갑옷의 분포 정형을 보면 유의미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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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도면 10. 금관가야의 무기체계(김해 대성동29호 출토 무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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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도면 11. 금관가야의 무기체계(김해 대성동13호, 18호 출토 무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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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12. 금관가야의 무기체계와 외래계 문물(김해 대성동88호 출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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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갑옷은 방어성과 더불어 유동성이 뛰어난 찰갑이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4세기대 영남지방의 신라와 가야에서는 종장판갑이 가장 유행하며 찰갑도
경갑과 요찰이 조합된 형태가 성행한다.
판갑의 경우 한반도의 가야권역을 중심으로 한 동남부지역에서 집중화되어 확인된다. 5
세기 이후 영남지방에서는 가야권역에서 대부분 확인되고 있다. 4세기대 종장판갑은 경주
인근지역, 울산지역, 부산지역, 김해지역에 집중 분포하는데 이 지역들은 바다에 인접한
곳이라는 지리적 유사성이 있다. 신라권역에서는 4세기대에 경주 구정동, 구어리, 사라리,
울산 중산리, 포항 옥성리고분군 등에서 확인되는데 왕궁이 위치한 경주 시내지역에서는
거의 출토지 않고 있다. 군사적 측면으로 보면, 신라의 왕경을 수호하는 방어체계에서 중
요한 경주 구어리, 구정동고분군과 해양과 관련된 방어체계에서 중요 지리적 요충지에 위
치한, 울산 중산리고분군과 포항 옥성리고분군 등에서 출토된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이 판갑이 출토되는 유적은 해양 전술에 능하면서 신라와 가야의 중심지를 방
어하는
守成 역할을 하는 군사적 요충지역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지역들에서는 찰갑에 비해 유동성은 떨어지나 방어력이 우수한 종장판갑이 최상위 신분
을 중심으로 성행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한편 김해지역은 철제 찰갑의 등장
이 4세기 중엽에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보다는 혁제 찰갑의 사용빈도가 많고 오랫
동안 선호하였다11). 이러한 혁제 찰갑이 유행한 것은 군사적으로 중하위의 계급에서 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최근 김해지역의 대성동고분군을 중심으로 출토된
中國 동북계(前燕) 위세품인
동경, 긍동대금구, 동복, 장식용 마구와
日本列島 왜계 위세품인 파형동기, 통형동기, 석
제품을 집대성하여 검토한 심재용의 연구가 주목된다12). 이 연구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
이, 4세기대의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금관가야가 중국과 일본의 교섭권을 독점하였다는
의견이 제시될 정도로 김해지역에서 국제 문물이 집중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심재용은 정치적 측면에서 금관가야가 특정읍락(국읍)에 강력한 왕권이 성립된 사회로 판
단하였는데, 이에 더하여 경제적 측면으로 보면 지리적 위치의 특성으로 보아 해양을 무
대로 국제 문물이 교역되는 해양 중심의 국제도시국가로 판단된다.
이상을 종합하여 볼 때, 금관가야의 무기체계는 공격용 무기로는
刀, 弓, 방어용 무구로
는 판갑을 선호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금관가야의 군사조직은 앞의 무기체계의 특
성으로 보아 해양 중심의 국제도시국가로서 이 지역과 집단의 특성에 적합한
水軍, 성을
11) 이현주, 2009, 「한국 고대갑주연구의 현황과 과제」, 『韓國의 古代甲冑』 복천박물관 학술연
구총서 제31집, 복천박물관.
12) 심재용, 2016, 「金官伽倻의 外來系 威勢品 受用과 意味」,『韓國考古學報』第74號, 韓國考古
學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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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방어하기 위한
親衛軍(친위군) 혹은 守護軍(수호군)이 중심된 군사조직이 활성화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2. 대가야의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
가야는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소가야 등 여러 정치체마다 나름의 정체성을 반영
하며, 이것이 물질문화로 주로 확인되는 것이 장식대도로 대표되는 의장 무기류이다. 대
가야는 여러 가야세력 중에 정체성을 반영하는 의장 무기류 가장 뚜렷이 확인되고 있다.
이에 대가야의 특성을 파악하기 용이한 장식대도를 중심으로 대가야 무기류의 특성을 검
토하고 이 무기류의 확산과 제작기술의 영향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대가야의 무기체계와 군사조직의 특성
대가야 무기류의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가야계 용봉환두대도는 환두부 제작
방법이 환부와 내환장식(용봉문)을 별도로 제작하여 부착한다. 외환장식은 두 마리의 용
머리가 교차하지 않게 대칭한 문양이다. 병연금구는 신라처럼 금, 은, 철제 금속판을 감싼
후 별도의 환으로 공정한 경우가 거의 없다. 병부장식은 대부분 어린문이 타출되어 장식
되어 있다. 대가야계 소환두대도는 환두부 형태를 상원하방형 혹은 오각형 형태로 제작한
도면 13. 대가야(가야) 환두대도 제작기술의 지역성(『한국의 칼』 국립대구박물관 2007년 특별전 도록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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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후 은판을 감싼 형태가 많다. 또한 용봉환두대도의 외환장식과 동일한 형태로 용머리 부
분부터 대칭한 형태가 일부 확인된다. 병연금구는 역시 별도의 환 고정없이 은판을 감싼
형태가 주류를 이룬다. 병부장식은 어린문으로 타출되어 장식되어 있다.
공부다각형철모는 전체 길이가 22㎝이상 ~ 27㎝미만이면서 공부기부가 연미형이면서
관부가 형성되지 않은 연미무관형 공부다각형철모가 대가야의 중심지역인 고령지역에 집
중되어 유행한다.
이러한 대가야계 용봉환두대도, 소환두대도, 연미무관형 공부다각형철모는 후기 가야
및 일본열도까지 확산되는 양상이 확인되며, 이는 크게 3개 권역으로 구분된다.
먼저 아라가야권역, 소가야권역 등의 연맹지역으로 확산이며, 이들 지역에서는 아라가
야 및 소가야양식 토기를 공반하여 출토되는 경우가 많고 전형적인 대가야계 무기류와는
차이성이 있어 자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함안 도항리54호분 출토 소환두대도, 함
안 오곡리58호 출토 공부다각형철모는 대가야의 전형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대가야로
부터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대가야 중심세력의 확장에 따른 권역이다. 대가야는 6세기이후 산청, 장수, 남
원, 함양, 여수지역 등의 동부 호남지역으로 그 권역을 넓히는데 이 지역에서 확인되는 대
가야계 용봉환두대도, 소환두대도, 무관연미형 공부다각형철모는 대가야 중심지역의 것
과 유사한 형태이다. 더불어 공반되는 토기 역식 고령양식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대
가야 중심세력으로부터 직접 분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일본열도로의 확산이다. 일본열도 왜의 전형적인 철모는 신부의 단면이 삼
각형형태로 한반도의 철모와 차이가 있다. 일본열도의
關東지방(埼玉縣 稲荷山古墳, 将
軍山古墳 등), 近畿지방(京都府 宇治二子山古墳, 大阪府 大塚古墳 등), 九州지방(熊本
縣 江田船山古墳 등) 등의 주요 고분에서 대가야의 전형적인 공부다각형철모와는 차이가
있지만 이를 모방한 공부다각형철모가 확인된다. 이러한 공부다각형철모는 왜인과 관련
이 있는 한반도 남부지역 고흥 야막고분, 거제도 장목고분에서 일부 확인된다.
한편 합천 옥전고분군을 축조한 합천지역 집단은 최상위 신분이 소유하는 용봉환두대
도, 소환두대도, 연미무관형 공부다각형철모의 집중현상이 확인되는데 이는 대가야의 중
심지역인 고령지역과 매우 유사한 양상이다. 대가야는 고령지역을 중심으로 한 합천지역
과의 강력한 연대 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살촉은 광형계 역자형철촉이 가장 유행하며, 실전용 철촉으로 세형계 단경식 능형, 장
경식 유협형, 도자형철촉이 유행하고 있다. 인근에 위치한 신라와 비교해 볼 때 실전용 철
촉은 유사성이 강하다.
방어용 무구는 갑옷으로 찰갑이 가장 유행하며,
日本列島 의 倭와 관련성이 깊은 차양
주, 충각부주, 대금식판갑도 종종 확인된다. 한편 5세기대 이후 대가야의 고령, 합천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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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병 철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과, 아라가야의 함안지역에 마갑류가 다수 확인되고 있어 타 지역에 비해 중장기병이 활
성화되고 있다13). 하지만 영남지방의 지형 및 지리적 요건을 고려하면, 전투 및 전술체계
에서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군사조직에서
親衛軍(친위군) 혹은 특수부대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하여 사회내부의 발전과정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분할된
정치세력을 통합한 후 확장을 통해 세력을 키워나가면서, 중심집단을 정점으로 한 위계화
현상으로 보는 견해도 주목된다14).
이상을 종합해 보면 대가야의 무기체계는 신라와 같이 장창병(철모)의 보병을 중심으로
한 군사조직이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각 세력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영남지
방 내, 나아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응하기 위해 무기체계는 변화하였다. 이에 도병, 장
창병, 궁병 등의 전문화된 경보병이 갖추어 지고 중장기병이 증가하는 추세로 군사조직이
편재되어 갔다고 할 수 있겠다.
13)류창환, 2009, 「삼국시대 기병과 기병전술」, 『갈등과 전쟁의 고고학』 제33회 한국고고학 전국
대회, 한국고고학회.
14) 李盛周, 2000, 「考古學을 통해 본 阿羅伽耶」,『考古學을 통해 본 加耶』, 韓國考古學會.
이현주, 2009, 「한국 고대갑주연구의 현황과 과제」, 『韓國의 古代甲冑』 복천박물관 학술연
구총서 제31집, 복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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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도면 14.
三國時代 大加耶의 裝飾 環頭大刀
1.합천 옥전75호분, 2.산청 생초M13호분, 3.고령 지산동39호분, 4.합천 옥전M6호분,
5·6·9.합천 옥전M3호분, 7.군산 산월리4호분, 8.합천 옥전71호분, 10.고령 지산동3호분,
11.합천 반계제가A호분, 12.함양 백천리Ⅰ-3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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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병 철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도면 15. 대가야의 무기체계(5세기)
1~6,14.고령 지산동73호분, 7~9.고령 지산동74호분, 10~13,15.고령 지산동75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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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Ⅴ. 맺음말
이 글은 영남지방 전체의 무기체계 변천에서 가야의 대표 국가라 할 수 있는 금관가야
와 대가야의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여러 지역에
서 출토되는 무기류 자체 검토에 더하여 ‘왜 이러한 무기류가 금관가야 및 대가야에 유행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가야의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의 특성을 밝히려고 접근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한 국가의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은 맞서 대응해야할 국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으며, 방어적 측면으로 볼 때도 국내적 지리 및 지형적 요건, 군사
수, 무기체계의 발달 등 복잡한 관계에서 그 체계가 확립되어 진다. 따라서 해양에 인접하
여 위치한 금관가야와 영남 내륙에 위치한 대가야를 구분하여 그 성격을 검토하였다. 더
불어 삼국시대 동북아시아 위치한
中國 前燕, 고구려, 신라, 일본열도 倭의 무기체계를 상
호 비교하여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무기체계 및 군사조직을 검토하였다.
결론적으로, 금관가야의 무기체계는 공격용 무기로는
刀, 弓, 방어용 무구로는 판갑을
선호하며, 금관가야의 군사조직은 앞의 무기체계의 특성으로 보아 해양 중심의 국제도시
국가로서 이 지역과 집단의 특성에 적합한
水軍, 성을 방어하기 위한 親衛軍(친위군) 혹
은
守護軍(수호군)이 중심된 군사조직이 활성화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내륙에 위치한 대가야의 무기체계는 기본적으로 인근에 위치한 신라의 무기체계와 아
주 유사하며, 정체성을 반영하는 의장용 무기류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가야의 무기
체계와 군사조직은 장창병(철모)의 보병을 중심으로 한 군사조직이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각 세력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영남지방 내, 나아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응하기 위해 무기체계는 변화하였다. 이에 장창병 중심의 도병, 장창병, 궁병 등의 전문
화된 경보병이 갖추어 지고 중장기병이 증가하는 추세로 군사조직이 편재되어 갔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가야권역에서는 다수의 기승용 마구 및 마갑이 확인되고 있으며, 함안 마갑총 출토
갑주로 볼 때 중장기병의 모습도 일부 엿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야가 위치한 영남지방은 태
백산맨과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험난한 산세가 많은 점으로 보아 중보병과 중장기병의
군사조직이 활성화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일부 중보병과 중
장기병이 조직되었거나 최상위 신분이 소유했던 위세적 성격의 무구 및 마구이거나 군사
조직에서 특수조직으로 구성된
親衛軍(친위군) 또는 별동부대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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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병 철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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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전사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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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에 대한 토론문_이현주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에
대한 토론문
이 현 주
부산박물관
삼한 소국들 간의 국지적인 갈등을 벌여나가던 시기에 철제로 전환된 무기는, 삼국시대
를 거치면서 영토확장과 통합을 위한 전쟁과정에서 조직적인 무기체계로 구성되기 시작
하였습니다. 단순히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개인 장비에서 출발했던 무기는 전략과 전술에
따른 무기구성, 방어 무장구의 확보, 말을 비롯한 전쟁물자의 구비, 대규모 보급시스템, 광
역에 걸친 방어선 구축과 통신체계 등 군사시스템에 있어서 극적인 전환을 이루는 시기라
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이를 구체화시켜 입체적으로 복원해내기란 대단
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특히 가야에 대해서는 문헌자료도 희박하고, 회화자료나 전쟁유구
에서 발굴된 물질문화 자료도 없는 상황에서 난감하기 그지 없습니다.
오늘 발표자이신 우병철 선생님은 오랫동안 철제무기에 천착하여 연구를 진행해 왔으
며, 그 범위도 신라, 가야를 너머 고구려, 백제와 왜, 삼연지역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연구영역을 확대하여 진행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토론자인 저 자신도 신라·가야의 군사조직을 복원함에 있어서 평소에 자료를 살펴보면
서, 그동안 봉착했던 해결하기 어려웠던 몇가지 질문들을 이 자리를 빌어서 여쭤보려고
합니다.
1. 고고학적으로 “가야전사”를 복원하기 위해서 구사할 수 있는 물질자료는 매장의례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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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정에서 공헌된 고분매납품으로서의 무기류들 뿐입니다. 이를 그대로 집단의 무기체계로
치환하여 군사조직으로 구성하여 해석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는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현세에 누렸던 사회적 지위를 매장의례에서 반영하였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러
한 연구들을 시도해오고 있습니다.
발표자께서도 무덤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으로서의 무기를 해석함에 있어서 매장의례 행
위에 어느 정도까지는 군사 문화가 반영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정도에 대해서는
나름의 기준을 설정하겠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준을 설정하셨으며, 발표자
가 규정하는 궁병, 장창병, 경보병 등의 병종구분은 어떤 기준으로 구별하셨는지 등에 관
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이유는 발표자는 화살만 출토된 소규모 분묘의 피장자를 군사조직 상 ‘궁병’으
로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원삼국시대 후기~삼국시대 초기의 유
력수장묘에서 보이는 대량의 철촉 부장 정도는 되어야 ‘전문적인 궁병’으로 인정할 수 있
다고 보셨습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철촉이 무더기로 대량부장되는 정도라면 다른 무
기도 다량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며, 이는 활쏘기에만 전문화된 것이 아니라
모든 전투활동에 전문화된 군사엘리트 이상의 신분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궁
병에만 전문화되었다고 치부될 수 없는 사례들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2. 철창에 관하여 질문드리겠습니다. 일본열도와 김해지역에서 유행했던 철창이 4세기
대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출현하여 일시적으로 유행하다가, 이것이 일본열도로 전파되어
일본열도에서 크게 유행했을 가능성을 제시하셨는데, 이를 증명할 만한 고고학적인 근거
를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철창은 1~2세기대 무기체계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이질적인 장
병기의 출현이라고 보았으며, 신부가 짧으면서도 얇고 예리하며, 자루를 끼우는 방식도
달라 같은 장병기로 철모와는 다루는 기술이 달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히려 일본 야
요이 후기 북구주 수장층들이 장병기로서 기능성이 뛰어난 철모를 한반도로부터 입수하
고자 하였으나 제약이 있자 단검을 이용하여 긴 자루에 꼽아 창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
村上恭通, 1999)가 설득력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유적명
촉
도검
모
창
갑주 마구
유적명
촉
도검
모
창
갑주
마구
김해 구지로 38호
74
2
2
김해 대성동 13호
85
1
4
김해 구지로 18호
53
2
1
김해 대성동 18호
92
2
1
2
투구
김해 대성동 29호 304
3
2
김해 대성동 88호 506
2
1
투구,경갑
김해 대성동 59호
47
김해 대성동 70호 460
8
4
4
투구 2
재갈,,등자 말장신
구
김해 구지로 대성동고분군 철촉의 대량매납과 무기보유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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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에 대한 토론문_이현주
3. 수군에 관한 질문입니다. 수군의 증거로 철창과 판갑 두 가지를 제시하신 것으로 보입
니다. 먼저 철창으로 바다에 접한 한반도 김해지역과 해양국가인 일본열도에서 유행한다
는 점에서 착안하여 바다에서 활동하는 수군이 주로 사용했던 무기일 가능성을 지적하셨
습니다. 무기 연구자로서 상당히 매력적인 가설이고, 저 역시도 그렇게 주장하고 싶긴 하
나 철창이 수전에 유리한 무기라는 점을 증명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여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지리적 여건을 본다면 육지만큼 바다를 면하고 있는 고김
해만 정치체의 군사들은 수전에 능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또 이와 관련된 논의도 진행되
어야 한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철창의 존재만으로 수군을 이야기 하기에 빈약한 것으로 보
입니다.
두 번째는 판갑입니다. 판갑과 관련하여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의견을 제시해 주셨습니
다. 판갑이 출토된 유적들이 경주 인근, 울산, 부산, 김해지역으로 지리적으로 바다와 인접
해있어서 이는 해양 전술에 능한 집단이 착용하는 방어구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물론 신
라나 가야의 왕경지를 방어하는 친위대의 장비라는 견해도 함께였습니다. 신라와 가야에
서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군사적 요충지와 왕경지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요충지라고 하면
모든 육군, 수군을 모두 포함한 대부분의 군사장비라고 생각됩니다. 육로 교통요지에 위
치한 경주 사라리유적, 울산 구미리유적도 있으며, 경주 중심부인 월성로 가29호에서도
판갑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해양 전술에 능한 집단이라고 지적해주시니 판갑
착용이 수전에서 특별히 유리한 점이라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보완설명을 부탁드립니다.
4. 결론적으로 발표자께서 복원한 가야의 전사상은, 금관가야는 도병과 궁병위주로 편성
되고, 판갑을 착장하며, 해양 중심의 국제도시국가답게 수군이 활성화되었고, 도성 방어
위주의 친위군 중심의 군사조직으로 판단하였습니다. 반면, 5세기 이후 내륙에서 융성한
대가야에서는 장창병 중심으로 도병과 궁병 등 전문화된 경보병이 갖추어지고 중장기병
이 증가하는 추세로 군사조직이 편재되었다고 보셨습니다.
사실 두 가야 사이에는 시간적인 갭도 존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금관가야가 미진한
군사조직을 갖춘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4세기대와 5세기대의 군사조
직의 비교라는 점도 함께 언급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관가야의 장
창병 존재에 대해서도 말씀드리자면, 3~4세기대 철모를 대신하여 철창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전체적인 장창병의 비중은 여타지역과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5세기대에 들어서
정치 군사적 구심점이 위축되긴 하지만 낙동강을 마주하거나 북쪽내륙과 오가는 길목인
군사요충지(두곡, 죽곡, 여래, 예안리 등) 등에서 무장이 강화되는 양상들을 볼 때도 마찬
가지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금관가야 무기체계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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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 전사의 무기
째는 왜계무기와 중국 동북지역의 금동장식 마구입니다. 이전부터 바다를 통한 왜와의 교
류가 빈번하다보니 철창, 정각식철촉 등 왜계무기가 자연스럽게 무기체계로 스며 들은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동북계 위세품의 유입되면서 금동운주, 마령 등 화려한 장식
마구 뿐 아니라 재갈, 등자, 안장 등의 기승용 마구 수용도 대단히 선제적으로 이루어집니
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장층이 권력과시를 위해 직접 무장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방어
무장에서 장식성이 강한 종장판갑과 함께 혁제찰갑이 병용된다는 점입니다. 1례를 제외하
고는 금관가야권에서 발견되어 지역적 특징이라고 볼 수 있으며, 김해 대성동유적에서는
판갑의 수량을 상회합니다. 가볍고 움직임이 수월한 실용갑주로서 혁제찰갑은 가성비가
뛰어난 찰갑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발표자님이 제시하신 금관가야의 전사상
과 좀 다르게 복원되어 도병, 장창병, 궁병으로 조직되었으며, 찰갑이나 판갑을 입은 군사
엘리트집단, 화려한 금동장식구로 치장한 말탄 수장이 직접 군사지휘하는 방향성을 제시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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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무기체계로 본 가야 전사」에 대한 토론문_이현주
ⓒ 국립김해박물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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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年 7月 20日 印刷
2021
年 7月 23日 發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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