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F문서2021년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자료집(웹용).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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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 성 호

삼국시대 마갑의 구조와 계보

621-900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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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김해박물관

Gimhae National Mus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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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 성 호

삼국시대 마갑의 구조와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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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김해박물관

Gimhae National Musrum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

고은별 (서울대학교)

토론문

김헌석(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

이상율(부경대학교)

토론문

류창환(극동문화재연구원)

05

27

31

47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

임지영(부산대학교)

53

토론문

박윤미(단국대학교)

71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

이현우(부산대학교)

75

토론문

이현정(울산시청)

91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 습속을 중심으로-

장윤정(경남대학교)

97

토론문

김현희(국립광주박물관)

117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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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김해박물관

Gimhae National Musrum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

고은별 (서울대학교)

토론문

김헌석(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

이상율(부경대학교)

토론문

류창환(극동문화재연구원)

05

27

31

47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

임지영(부산대학교)

53

토론문

박윤미(단국대학교)

71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

이현우(부산대학교)

75

토론문

이현정(울산시청)

91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 습속을 중심으로-

장윤정(경남대학교)

97

토론문

김현희(국립광주박물관)

117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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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

고 은 별(서울대학교)

주제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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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고 은 별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

I. 서론

5~6세기를 중심으로 축조된 신라·가야의 분묘유적에서는 동물유존체가 빈번히 출토된

다. 이는 이 시기 신라와 가야의 장송의례에 종종 동물희생이 수반되었다는 것을 시사한
다(고은별 2020a). 일찍이 40여 년 전 조사된 고령 지산동고분군에서 말을 비롯해 꿩1), 누
치 등 포유류와 조류, 어류 유존체가 보고된 이래로 김해 예안리고분군, 함안 도항리고분
군, 합천 반계제고분군, 남원 두락리고분군 등 가야의 고분군에서 동물희생의 증거가 확
인되어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그런데 유독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의 동물희생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다. 2000년에 발간된 보고서를 통해 1호분 주곽 보강토 
내에서 소의 하악골을 비롯한 소뼈가 편으로 확인되었다고(

申敬澈·金宰佑 2000: 91) 보

고된 것이 알려진 전부였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아마 대성동고분군에서도 다른 가야의 고

1) 한국고고학 유적에서 출토된 조류 유존체에 대한 자료가 축적되면서 과거에 닭으로 보고되었

던 자료들이 꿩으로 재동정되는 사례가 다수 확인되고 있다. 고령 지산동 44호분에서 출토된 

조류 유존체도 1979년 최초 보고될 당시에는 닭으로 보고되었으나(모기철 1979) 보고된 계측

치를 볼 때 꿩으로 판단된다.

Ⅰ. 서론
Ⅱ. 가야의 동물희생의례
Ⅲ. 대성동고분군 출토 동물유존체

Ⅳ. 대성동고분군 말 희생의례
Ⅴ. 결론

목 차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

고 은 별

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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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분군에서와 유사한 방식의 동물희생의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만 가능했을 뿐이었다. 

이번 <말을 탄 가야> 특별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30여 년 전 경성대학교박물관에서 

대성동고분군을 발굴조사하면서 수습했던 동물유존체에 대한 동물고고학적 분석이 이루
어졌고 그 결과를 다른 가야 고분군에서 출토된 동물유존체들과 한 자리에서 비교해볼 수 
있었다. 분석 결과, 대성동고분군에서는 기존에 보고된 어느 가야의 고분군들에서보다 더 
많은 동물유존체가 출토되었으며, 더 다양한 희생 동물이 확인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동물희생의 방식에 있어서는 다른 가야의 고분군들과 공유되는 지점이 있어 대성동고분
군에서 이루어진 동물희생의례가 이곳에서만 이루어진 특수한 것이 아니며 당시 가야 사
회에서 공유한 일정한 규범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이처럼 가야의 고분군에서 행해진 동물희생의례는 신라의 그것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신라와는 구분되는 가야만의 특징을 가지는데, 그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이 
말을 제물로 한 희생의례이다. 신라와 가야 모두 장송의례 과정에서 말을 희생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국 고대사회에서 말은 신분을 나타내는 동물이
자 큰 경제적 가치를 지닌 재산이었다(김정숙 2003). 그러므로 말을 희생한다는 것은 당
시 사회에서 상당히 큰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정도의 유형·무형의 이익이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당시 
사회의 일면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대성동고분군에서의 동물희생의례가 어떠한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고 어떤 의미를 가

지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야의 분묘유적에서 동물희생의례가 전반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겠다. 

II. 가야의 동물희생의례

일반적으로 동물희생의례는 크게 두 가지로 성격을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희생 동

물이 일종의 음식물로서 ‘부장’되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동물이 생명을 가진 하나의 존재
로서 의례 과정에서‘희생’되는 경우이다(Russell 2012). 첫 번째 경우는 동물이 식재료와 
같이 처리되어 일종의 음식으로 토기 등의 용기 안에 담기고, 두 번째 경우는 한 존재의 생
명을 앗고 이를 공헌하는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에 대부분 동물의 전신이나 혹은 
머리와 같이 상징적인 부위가 특별한 시설 없이 매납된다. 전자는 다른 부장물이나 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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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고 은 별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

(

祭需)와 함께 준비되고, 후자는 의식이 진행되는 도중에 일종의 이벤트로 이루어지게 되

므로 양자 사이에는 시차(

時差)가 존재하게 된다. 의례 행위는 나름의 의미가 부여된 여러 

단계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므로 두 행위 사이에 시간차가 존재한다면 그 행위의 결과물
은 각기 서로 다른 공간에 배치될 가능성이 크다(고은별 2020a: 71).

가야의 분묘유적에서 동물희생의례가 이루어진 공간을 살펴보면(그림 1) 의례에 참석

한 이들이 피장자와 여러 부장물이 놓인 공간을 더 이상 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개석이나 목개와 같은 마감재가 일차적인 구분의 기준이 되고, 그다음은 분묘의 축
조가 마무리되는 봉토를 기준으로 분묘의 내·외부가 구분된다(고은별 2018, 2020a). 장송
의례의 전 과정 속에서 보자면 주·부곽의 내부에서 이루어진 동물희생은 사후세계로 망자
와 함께 떠나보내는 부장의 의미를, 개석 또는 목개 위는 주·부곽을 마감함으로써 죽은 자
와 산 자의 공간을 구분하는 의미를, 봉토 내부는 분묘의 축조를 완성하는 의미를, 봉토 밖 
분묘 외부는 장송의례 이후의 분묘 제사와 관련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각각의 공간에서 각기 다른 의미가 부여된 동물희생은 그 방식에 있어서도 차이

를 보인다. 먼저 주곽과 부곽의 내부에서는 동물이 주로 토기에 담긴 채 출토된다. 하나의 
토기 안에 여러 동물이 담기기도 하고 특정 부위가 복수로 담기기도 하는데, 이것은 희생 
동물이 부장물의 일부로 매납된 것이다. 따라서 이때는 동물부장이라는 용어로 별도로 지
칭하기도 한다. 다음은 개석이나 목개 위, 또는 봉토 내부에서 동물희생이 이루어진 경우
이다. 이때는 희생 방식이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먼저 주·부곽의 부장토기안에 담긴 것과 
마찬가지로 토기 내부에서 동물이 출토되는 경우와 동물의 전신 또는 일부 부위가 특별한 
시설없이 그대로 출토되는 경우이다. 전자는 의례 과정에서 일종의 음식물로 공헌된 것

<그림 1> 공간별 동물희생의례 모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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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을 그대로 매납한 것이고, 후자는 제물의 생명을 앗는 행위가 이루어지고 이를 그대로 매
납한 것인데 양자 모두 분묘의 축조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장송의례의 일부로 행해진 것이
다. 마지막은 봉토 바깥, 분묘 외부에서 동물희생이 이루어진 경우인데 이때 역시 희생 방
식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분묘 완성 이후에 이루어지는 제사 행위의 일환으로 동물이 음
식물의 형태로 준비되어 제수로서 매납되거나 동물을 제물로서 희생하어 매납하는 경우
이다(고은별 2018). 

지금까지 알려진 가야의 주요 고분군에서 출토된 동물유존체의 양상을 살펴보면 먼저 

예안리고분군과 지산동고분군 44호분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예안리고분군에서는 
말의 치아와 척추골, 사지골이 30여 점 출토되었고 이와 함께 소, 농어 

目, 민어 科 유존

체 등이 소량 확인되었다(

金子浩昌·徐姈男 1993). 지산동고분군 44호분에서는 말의 치아 

10점과 함께 꿩과 누치가 다수 출토되었다(모기철 1979; 

楊洪準 1979). 어류와 조류는 토

<그림 2> 고령 지산동 44호분 동물유존체 출토 위치 (

朴天秀 외 2009 도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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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고 은 별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

기 안에 담긴 채 부장된 것으로 보이며, 말, 소 등 포유류는 장송의례 과정에서 희생된 것
으로 판단된다. 이때 포유류는 모두 분묘와 분묘 사이의 공지에서 특별한 시설없이 매납
되었다(그림 2). 

지산동고분군 73호분에서의 양상은 다소 다른데 묘광 내부 서쪽 모서리에서 서북 장벽

으로 약 1m 떨어진 지점에서 말 한 개체분의 두개골이 출토되었다. 이는 목곽이 붕괴되면
서 내려앉은 봉토의 함몰토 일부로 묘광과 그 상부의 제상성토 내부를 충전한 다음에 말
의 머리를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이준정·고은별 2016). 한편, 두락리고분군 32호분에
서도 이와 유사한 방식의 동물희생의례가 확인되었는데 주석곽에 피장자를 매장한 뒤 개
석을 덮고 봉분을 성토하는 과정에서 말 한 개체분의 머리가 매납되었다(이준정·고은별 
2015). 

반계제고분군과 도항리고분군에서는 아쉽게도 전문적인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

지만 반계제고분군에서는 봉토 내에서 말 한 개체분의 머리가 있었다고 보고된 것으로(김
정완 외 1987: 20) 보아 지산동 73호분이나 두락리고분군과 유사한 방식으로 추정된다. 
도항리고분군에서는 횡혈식석실의 연도부에 말 머리뼈가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國立昌原

文化財硏究所 1999: 49). 이는 구조적인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의례 단계에 있어서는 개
석 위나 봉토 내부에 매납된 경우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가야 고분군에서의 동물희생의 종류와 방식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제 

대성동고분군에서의 동물희생의례는 어떠한 양상으로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겠다. 

III. 대성동고분군 출토 동물유존체

대성동고분군에서는 1호분, 3호분, 4호분, 13호분, 14호분, 16호분, 20호분, 23호분, 24

호분, 33호분, 38호분, 46호분, 55호분, 57호분, 62호분 등 15기의 분묘와 12-14호분 사
이 도굴갱, Tr. 1-2 둑 사이에서 동물유존체가 수습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이에 대한 분석 
결과 동물유존체 총 123점을 확인하였다. 먼저 포유류 동물유존체로는 말과 소가, 조류로
는 꿩이 확인되었다. 이 외에 굴, 꼬막 등의 패류도 함께 확인되었다. 23호분과 57호분에
서는 어골도 수습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직 분석이 진행되지 않았다.

1호분에서는 말, 소, 꿩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말 최소 1개체, 소 최소 3개체, 꿩 최소 1

개체가 확인되었고, 1호분 부곽에서도 꿩이 최소 1개체가 확인되었다. 말 유존체와 소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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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존체가 함께 확인된 분묘는 38호분으로 각 1개체씩 확인되었고, 말 유존체만 수습된 분묘
는 33호분과 55호분으로 각 1개체씩 확인되었다. 또 4, 11, 14, 20, 24, 62호분에서는 각
각 소가 최소 1개체씩 확인되었다. 23호분에서는 조류와 어류가 함께 출토되었는데 조류
는 꿩이 최소 5개체 확인되었고, 57호분에서는 조류, 어류, 패류가 함께 출토되었는데, 꿩
이 최소 4개체, 굴과 꼬막 등 해수산 패류가 확인되었다. 46호분 86번 단경호 내에서는 꿩 
유존체가 토양에 섞인 채 단단히 고화된 상태로 출토되기도 했다. 외면으로 드러난 바로
는 꿩의 관골, 경족근골 등이 관찰되어 단경호 내에 최소 1개체 이상의 꿩이 부장되어있었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표 1> 김해 대성동 고분군 출토 동물유존체

출토 
유구

부위

상세 부위

좌우

수량

합계

동정가능표본수 / 최소개

체수

1

호분

치아

하악 제2대구치

1

7 / 1

36 / 6

하악 제3대구치

1

하악 치아

?

5

치아

상악 대구치

1

4 / 1

하악골

제4소구치-제3대구치

1

치아

하악 전치

?

2

소구치

?

1

치아

상악 대구치

1

2 / 1

하악골

제2대구치-제3대구치

1

하악골

제2대구치-제3대구치

1

1 / 1

치아

상악 제2+대구치

1

16 / 1

상악 대구치

2

?

1

하악 제3대구치

1

1

하악 대구치

?

1

소구치

?

1

치아 파편

?

8

척추골

추체

-

1

6 / 1

관골

복합선골-좌우측 관골

-

1

대퇴골

전체

1

1

경족근골

근위부

1

원위부

1

1

호분 부곽

오구골

원위부

1

2 / 1

2 / 1

경족근골

원위부

1

3

호분

동정
불가

?

?

?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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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고 은 별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

출토 
유구

부위

상세 부위

좌우

수량

합계

동정가능표본수 / 최소개

체수

4

호분

치아

치아 파편

?

1

1 / 1

1 / 1

11

호분

흉추

전체

-

3

18 / 1

18 / 1

흉추

추체

-

3

흉추

극돌기

-

3

요추

추체

-

1

천골

천골저

-

1

관골

파편

?

1

늑골

늑골두-늑골경

?

2

늑골

늑골체 파편

?

1

대퇴골

원위부

1

슬개골

전체

?

1

경골

근위부

1

14

호분

상완골

근위부

1

5 / 1

5 / 1

원위부

1

요골

전체

1

수근골

전체

?

2

16

호분

소?

치아

하악 치아?

?

1

-

-

20

호분

치아

상악 대구치

1

1 / 1

1 / 1

23

호분

오구골

근위부

1

18 / 3

28 / 5

3

원위부

1

흉골

오구골 접합부

-

1

대퇴골

근위부

1

원위부

2

1

경족근골

근위부

1

2

원위부

1

3

골간부

1

관골

관골구 파편

?

1

10 / 2

오구골

근위부

1

1

견갑골

근위부

2

중수골

근위부

1

대퇴골

근위부

1

2

경족근골

근위부

1

24

호분

상완골

원위부

1

1 / 1

1 / 1

33

호분

치아

상악 제2대구치

1

2 / 1

2 / 1

상악 치아 파편

1

38

호분

치아

상악 제2대구치

1

1 / 1

2 / 2

치아

하악 치아

?

1

1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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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대성동고분군에서 말, 소 외에 가장 빈번히 출토된 꿩의 출토 양상을 보면 하나의 토기 

안에 1~3마리 가량이 부장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동정된 부위를 보면 척추골, 관골, 흉
골, 오구골, 견갑골, 상완골, 대퇴골, 경족근골 등 몸통과 날개 윗부분, 다리 윗부분에 해당
하는 부위가 확인되고 있어 머리, 발, 날개 끝 등이 제거된 채 부장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는 고령 지산동고분군(모기철 1979)는 물론, 경산 임당 유적(고은별 2018)이나 청주 봉산
리 유적(조태섭 2017)과 같이 4-6세기 한반도 분묘 유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꿩의 
부장 방식으로, 대성동고분군에서도 역시 이러한 부장 방법이 공유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꿩을 해체하는 일반적인 방식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조류를 식

출토 
유구

부위

상세 부위

좌우

수량

합계

동정가능표본수 / 최소개

체수

46

호분

복합선골

산정 불가

? / 1

사지골

55

호분

상악골

제4소구치-제3대구치

1

1 / 1

1 / 1  

57

호분

오구골

전체

1

17 / 2

21 / 4

1

근위부

1

견갑골

근위부

1

상완골

전체

1

근위부

1

대퇴골

근위부

1

1

원위부

1

1

골간부

1

경족근골

근위부

1

1

원위부

2

2

패각

패각 파편

1

2 / 1

?

1

꼬막

패각

패각 파편

1

2 / 1

1

62

호분

치아

상악 제2대구치

1

1 / 1

1 / 1

12

-14호분 사

이 도굴갱

치아

구치 파편

?

1

1 / 1

1 / 1

Tr.1-2 둑 

사이

치아

상악 대구치

1

3 / 1

3 / 1

구치 파편

?

2

합 계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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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고 은 별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

용할 때의 해체 방식2)이 의례적 도살과 해체에 그대로 적용된 결과라고 이해된다(고은별 
2018: 154-155). 

지금까지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동물유존체의 양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대성

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말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IV장에서 살펴보겠다. 

IV. 대성동고분군 말 희생의례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말 유존체는 1호분, 33호분, 38호분, 55호분에서 출토되었는

데(표 2) 대부분 정확한 출토 위치는 파악하기 어렵고 출토유구 번호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이다. 모두 치아로, 다른 부위는 일체 확인되지 않았다. 대성동고분군에서 말과 더불어 다
량 출토된 소의 경우는 유구에 따라 척추골, 사지골 등 두부 외에 다른 신체 부위들도 확인
되고 있어 이와 차이를 보인다. 대성동고분군도 다른 가야의 고분군들과 마찬가지로 말은 
오로지 머리에 해당하는 부위만 선별적으로 매납된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1호분에서는 말의 치아 파편이 다수 확인되었는데, 잔존 상태가 좋지 않다. 최소 

2) 시간차가 다소 있긴 하지만 조선시대 요리서에서 꿩에 대한 요리 방법 중 가장 빈번하게 등장

하는 것은 구이로 과거인들이 가장 즐기는 꿩 조리 방식이었는데, 이때 꿩구이에 대한 설명에

서 ‘대가리와 발을 자르고’양념하여 굽는다고 언급되어 있다(김태홍 1996: 90). 이를 고려하면 

머리와 발을 자르는 것이 과거 꿩을 식재료로서 손질하는 일반적인 방식이었던 것이 아닌가 추

정된다(고은별 2021).

<표 2> 김해 대성동 고분군 말 유존체 출토 양상

출토 유구

부위

좌우

유물 봉투 기록 내용

1호분

하악 

제3소구치

-

하악 

제3대구치

-

하악

치아 파편

?

북동쪽 평면 190㎝ 지점

?

치아 파편 다수 

?

-

33호분

상악

제2대구치

자2호 9

상악

치아 파편

자2호 9

38호분

상악

제2대구치

수습 유물

55호분

상악 

제4소구치, 제1대구치, 제2대구

치, 제3대구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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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말 한 개체분의3) 머리 부위가 매납되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추정 가능한 개체의 연령은 
생후 4~5년4) 가량으로 인간에 의한 활용도가 높은 젊은 개체이다(사진 1). 1호분에서 말 
머리의 정확한 매납 위치는 현재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말의 치아가 소의 치아와 다수 뒤
섞인 채 수습되었고, 최초 보고 당시 주곽의 보강토 내에서 소 뼈가 출토되었다고 언급되
었던 것을 고려하면 말의 머리는 소의 머리와 함께 주곽 보강토 내에 매납되었을 가능성
이 크다고 판단된다. 

33호분과 38호분에서는 말의 상악 치아가 출토되었다(사진 2, 3). 33호분에서는 말의 

우측 상악 제2대구치가, 38호분에서는 좌측 상악 제2대구치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생후 
3~4년 가량의 개체의 것으로 추정된다.5)  

55호분에서는 말 한 개체분의 우측 상악 제4소구치, 제1대구치, 제2대구치, 제3대구치

가 출토되었다(사진 4). 구체적인 출토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생후 7~8년6) 가량된 개체 한 
마리분의 머리가 매납된 것으로 보인다. 55호분에서 출토된 말은 대성동고분군의 1호분, 
33호분, 38호분에서 출토된 말의 치아와 형태나 크기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검토하겠다. 

3) 대성동고분군 1호분에서 출토된 말의 치아 가운데 2점은 각각 좌측 하악 제2대구치, 우측 하악

제3대구치이다. 중복되는 위치의 치아가 없어 최소개체수는 1마리로 추산되었다.

4) 치아를 기준으로 한 연령 추정은 Hillson(1990)에 제시된 종별·부위별 출아 시점(pp. 214-215)을 

따랐으며, 말의 잔존 치관 높이를 통한 연령 추정은 일본의 연구 사례를 기준으로 하였다

(Matsui 2007). 대성동고분군 1호분에서 출토된 말의 좌측 하악 제2대구치는 치관 높이가 

65.3㎜로 계측되어 생후 4~5년 정도의 개체로 판단되었다.

5) 33호분에서 출토된 말의 우측 상악 제2대구치는 치관 높이가 78.7㎜이고, 38호분에서 출토된 

말의 좌측 상악 제2대구치는 치관 높이가 76.0㎜로 계측되어 두 점 모두 생후 3~4년 가량된 개

체의 것으로 판단하였다.

6) 55호분에서 출토된 말의 우측 상악 제2대구치와 제3대구치는 치관 높이가 각각 50.7, 47㎜로 

생후 7~8년 가량된 개체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 3> 말 상·하악 치아 개념도와 치아면의 분류와 명칭
                 (Matsui 2007: 51, 53 수정; Schmid 1972: 8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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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은 별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

<사진 1> 김해 대성동고분군 1호분 출토 말 하악 치아 협면(상)와 저작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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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사진 2> 김해 대성동고분군 33호분 출토 말 우측 상악 치아 저작면 

<사진 3> 김해 대성동고분군 38호분 출토 말 좌측 상악 치아 저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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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은 별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말의 치아는 거의 대부분 파편에 불과해 본래의 형태를 추정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는 유독 대성동고분군에서만 나타나는 문제는 아닌데, 한국고고
학 유적에서 출토된 말 유존체는 상당량이 이처럼 상·하악골에서 분리된 유리치의 형태이
고 말의 두개골이 온전히 출토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한반도의 토양이나 기후 등 환경 
조건이 이러한 유기물의 보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치아가 가
진 고유한 특성이나 한국고고학 유적에서 말이 출토되는 맥락 또한 이와 밀접하게 관련되
어있다. 

두개골과 상·하악골은 피질 두께가 얇은 편으로 잔존도가 유독 낮은 반면 치아는 표면

의 단단한 법랑질(

琺瑯質, enamel) 때문에 신체 부위 가운데 잔존도가 가장 높다. 이러한 

이유로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부위가 남지 않게 되더라도 치아만은 남아 있게 된다. 그리
고 한국고고학 유적에서 말은 특별한 시설없이 얕은 굴광 안에 매납된 경우가 많다. 이러
한 매납 방식으로 인해 외부 환경에 노출되기 쉬워 특히 잔존도가 낮은 부위들은 고고학 
유적에서 출토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고고학 유적에서 말은 머리가 매납
된다고 하더라도 두개골이 온전히 출토되는 사례가 극히 드물고 대부분 유리된 치아들만 
확인되는 것이다. 

<사진 4> 김해 대성동고분군 55호분 출토 말 우측 상악 제2대구치와 제3대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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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그런데 이처럼 유리치 상태로 치아가 출토되면 이것만으로 말 두개골의 전체적인 형태

나 크기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특히 말의 체고는 주로 사지골의 길이를 이용해 추산되며, 
사지골 외의 부위들로는 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한국 고대사회의 말이 어떠한 모
습이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계측치

치아

길이

너비

치관 높이

출토 유구 / 추정 연령

우측 상악

제2대구치

계측 불가

계측 불가

78.7

대성동 고분군 33호분/ ?

좌측 상악

제2대구치

29.6

25.8

76.0

대성동 고분군 38호분

/ 생후 3~4년

우측 상악

제2대구치

25

25.6

50.7

대성동 고분군 55호분

/ 생후 7~8년

제3대구치

24.9

21.5

47

우측 상악

제2대구치

26

27.9

51.3

지산동고분군 44호분

/생후 6~7년

제3대구치7)

27

25.2

56.2

우측 상악

제3대구치

28.30

23.88

?

예안리 고분군 34호분/ ? 

우측 상악

제3대구치

29.36

21.23

?

예안리 고분군 채집품/ ?

대성동고분군 55호분에서 출토된 말의 우측 상악 치아는 유독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

된 다른 말의 치아들에 비해 크기가 작다. 이를 치아에 대한 계측치가 보고된 지산동고분
군과 예안리고분군에서 출토된 말의 치아와 비교해보았다(표 38)). 대성동고분군 38호분
에서 출토된 치아는 예안리고분군에서 출토된 말의 치아와 크기가 거의 흡사하다.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말의 치아는 이보다는 작지만 대성동고분군 55호분에서 출토된 것보
다는 크다(사진 5). 대성동고분군 55호분에서 출토된 말은 지금까지 가야 고분군에서 출
토된 말의 치아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림 4). 

동물의 치아는 암·수에 따라서도 차이가 크고, 개체에 따라서도 차이가 크다.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치아가 마모되고 크기도 감소한다. 즉 말의 치아의 길이와 너비 계측치로 판
단하는 크기만으로는 어떠한 결론에도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말을 탄 
가야> 특별전에서 전시되는 말 유존체 가운데 대성동고분군 55호분과 유사한 크기의 치
아를 가진 개체가 여럿 확인되었다. 이 중에는 암컷도 있고 수컷도 있으며, 아주 나이 든 

7) 1979년에 발간된 보고서에는 상악 제3대구치가 좌측 치아로 보고되었는데(모기철 1979), 이

번에 자료를 실제로 보고 우측 치아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8) 치아의 계측은 Driesch(1976)의 계측방법을 따랐다.

<표 3> 김해 대성동 고분군 출토 말 치아 계측치                                                                              (단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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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은 별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

개체도 포함되어 있다. 또 이들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과 몽골국립박물관·몽골과학아카
데미 고고학연구소와 함께 발굴조사한 몽골 도르릭나르스 흉노유적 출토 말의 치아 계측
치와도 매우 근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직 정식 보고서가 나오지 않은 자료들이 포함
되어 있어서 본고를 통해 이 자료들의 계측치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가야 고
분군에서 출토되는 말 가운데 크기가 다른 두 종류의 말이 혼재되어있을 가능성은 제기해볼 
수 있겠다. 

<그림 4> 가야 고분군 출토 말 상악 치아 크기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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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V. 결론

본고에서는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말 유존체를 통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이루어

진 동물희생의례의 양상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가야의 동물희생의례의 일면을 복원해보
고자 했다. 대성동고분군의 동물희생의례는 다른 가야의 주요 고분군들과 공통점을 가진 
동시에 차이점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는 대성동고분군만의 특수한 양상이라기보다는 
가야의 여러 집단들이 희생의례 방식을 공유하면서도 각각의 사회경제적 기반에 의해 다
른 선택을 하게 됨으로써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된다. 

먼저 가야의 말 희생의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말의 머리를 몸통으로부터 분리

해 별도로 매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말 머리가 매납되는 양상은 대성동고
분군, 예안리고분군, 지산동고분군, 두락리고분군, 도항리고분군, 반계제고분군에서 예외

<사진 5> 고령 지산동고분군 44호분(좌)과 김해 대성동고분군 55호분(우)에서 출토된 말 우측 상악 제2
                 대구치와 제3대구치를 비교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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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은 별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

없이 공통적으로 행해진다. 이는 신
라의 말 희생 방식과 대비되는 것으
로 경주와 경산지역에서는 말의 전
신이 매납된 말무덤이 확인된다. 이
와 같이 신라와 가야의 말 희생 방
식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여러 연구
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는데 

松井 

章와 神谷正弘(1994)는 신라의 경
우 고분에 부속된 소형 무덤에 말을 
매납하는 것이 특징이고, 가야의 경
우는 피장자를 묻은 후 분구를 축조
할 때 말을 순살하여 분구 내에 매납
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김
건수(2000)는 신라·가야 지역에서는 석곽 내부에 마갱을 두어 말을 매장하는 특징이 있으
나 영산강 유역의 고분에서는 이러한 특징을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해 신라·가야 지역과 
영산강 유역 간 동물희생의례의 양상이 상이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말 머리만 
매납되는 것은 가야 말 희생의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말 머리가 매납되는 위치는 다소간의 차이가 관찰되는데, 전술한 바와 같이 예

안리고분군과 지산동고분군 44호분에서는 분묘와 분묘 사이의 공지에 말 머리가 매납되
고, 지산동고분군 73호분과 두락리고분군 32호분에서는 봉토 내부에 말 머리가 매납된다. 
대성동고분군과 반계제고분군 가A호도 봉토 내부에 말 머리를 매납하는 방식을 택한 것
으로 보인다. 분묘 사이의 공지나 봉토 내부에 말 머리를 매납하는 것은 피장자와 부장물
들이 놓인 공간을 마감한 뒤 분묘 축조를 완성하는 단계의 의례와 관련되며9), 가야의 장
송의레에서는 이 단계에서 말의 희생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도항리고분군에서는 
횡혈식석실의 연도에서 말 머리가 확인되었다고 보고되었는데, 보고자는 이를 연도를 폐
쇄하는 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國立昌原文化財硏究所 1999: 49). 이는 묘

제가 바뀌더라도 유사한 성격의 의례 방식이 고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되는 말의 연령은 고분군마다 차이가 있는데, 대성동고분군에서 가장 어린 개체가 

확인되고 두락리고분군 32호분에서 가장 노쇠한 개체가 확인된다(표 4). 동물희생의례는 

9) 반계제고분군 가A호분은 봉토 내 부장곽의 북동쪽 약 80cm지점에서 말 이빨 1마리분이 발견

되었는데 보고자는 이를 무덤을 어느 정도 축조한 후 묘사(墓祀)를 지냈던 흔적으로 추정하였

다(김정완 외 1987: 20). 

       <표 4> 가야 고분군 출토 말 추정 연령 

출토 분묘

말 추정 연령

대성동고분군 1호분

생후 4~5년

대성동고분군 33호분

생후 3~4년

대성동고분군 38호분

생후 3~4년

대성동고분군 55호분

생후 7~8년

예안리고분군

생후 10년

지산동고분군 44호분

생후 6~7년

지산동고분군 73호분

생후 5~8년

반계제고분군 가A호분

생후 4년 가량

두락리고분군 32호분

생후 18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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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가치를 포기하는 행위라는(

李俊貞 2011) 점에서 노쇠한 개체보다

는 인간에 의한 활용도가 높은 젊은 개체를 희생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비용을 지
불한 것이라고 해석 가능하다. 따라서 대성동고분군과 지산동고분군에서는 다른 고분군
에 비해 말 희생의례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이 축조집단의 사회
경제적 위치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대성동고분군에서는 크기가 다른 두 종류의 말이 희생 동물로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대성동고분군 55호분에서 출토된 말의 치아가 지금까지 가야의 분
묘유적에서 출토되었던 말 치아 가운데 크기가 가장 작은 것이 추정의 근거였다. 동물의 
치아만으로 개체의 크기를 논하는 데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아직 미보고된 

자료 가운데 이와 유사한 크기의 개체들이 확인되어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된다.

최근에 한국고고학 유적에서 출토된 말의 추정 체고와 몽골의 흉노 유적에서 출토된 말

의 추정 체고를 비교해 현재의 몽골 말은 2천 년 전 흉노 무덤에 묻힌 말과 크기가 비슷하
며, 이와 유사한 크기의 개체가 경주의 신라 유적을 중심으로 출토되고 연천 호로고루 유
적에서는 이보다 큰 개체가 출토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고은별 2020b). 이번에 확인된 
대성동고분군 55호분의 말이 다른 가야 고분군에서 출토된 개체들보다 다소 작은 종류라
고 한다면 삼국시대 한반도에는 크기가 다른 여러 종류의 말이 공존했다고 할 수 있다. 앞
으로 좀 더 많은 자료가 축적되어 이에 대해 좀 더 발전적인 논의가 가능하기를 기대한다.

<그림 5> 한국과 몽골의 고고학 유적에서 출토된 말의 추정 체고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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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은 별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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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李俊貞, 2011, 「飼育種 돼지의 韓半島 出現 時點 및 그 社會經濟的·象徵的 意味」,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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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정·고은별, 2016, 「고령 지산동 제73호분 출토 말 두개골에 대하여」, 『고령 지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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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섭, 2017, 「청주 봉산리 삼국시대 토광묘 출토 꿩뼈의 연구」, 『고고학』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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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a: Kansai Process Lim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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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Zooarchaeology: Humans and Animals in 

Prehistor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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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las of Animal Bones: For Prehistorians, Archaeologists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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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에 대한 토론문_김헌석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에 
 대한 토론문

김 헌 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본 발표문은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하는 동물유체를 정리하고 결과를 바탕으로 대성동고분군에

서 이루어진 의례 행위 속에서 동물의 이용 양상을 파악한 논문이다. 산성 토양의 영향으로 유기질

의 뼈가 남기 힘든 조건 속에서 고분에 남은 동물유체는 삼국시대 의례행위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

한 요소이다. 삼국시대 중요한 자원으로 취급되는 소와 말을 희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점은 고분

을 축조한 집단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로 볼 수 있는 점에서 고분의 매납과정

에서 이용하는 동물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가야고분군 속의 동물희생의 사례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 토기 내부에서 확인되는 어류

와 조류가 소수 확인되는 점에서 신라고분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번 발표를 통해서 가야의 중

심고분 중 하나인 대성동고분군 집단의 동물희생에 대한 사례가 정리되고 이를 통해 가야고분 축조

과정에서의 의례행위가 더욱 선명해질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토론자의 본분을 다하고자 몇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1.대성동 고분 속의 소는 어떠한 의미인가?

말과 함께 소는 삼국시대 가축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동물이다. 대성동고분군에서는 다

수의 유구에서 소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출토 빈도수를 살펴보면 말이 나온 유구수는 2개, 소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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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개, 소와 말이 함께 나온 곳은 2개이다. 이러한 비중을 보면 대성동고분군의 동물의례는 소를 중심

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하는 부위는 이빨이 주로 확인되는 점에서 두개골을 중심으로 한 부위가 매납된 것으로 파악

된다. 이러한 양상을 본다면 대성동고분군 속의 동물 희생의례의 주된 대상은 소로 보는 것은 어떠

한지 여쭈어 보고 싶다. 

삼국시대 다른 고분군에서 말이 주된 비중을 차지한다면 소가 다수 확인되는 점이 오히려 대성동

고분군의 특징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없을지 의견을 구하고자 한다. 

2.두개골 희생 의례는 가야고분의 특징인가?

동물 두개골을 희생하는 것은 한 마리에 해당하는 가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

고 두개골 매납은 경주지역을 비롯한 신라시대 고분에서도 확인된다(유병일 2002). 두개골을 매납

하는 사례는 경주지역에서는 우물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동궁과월지(안압지)의 연못에서도 다수

의 말 두개골이 확인되는 경우가 있다. 동궁과 월지의 경우는 의례 상황 속에서 확인된 것인지 명확

하지 않다. 시기는 다르지만 재매정지와 같은 경우는 말 두개골 4개가 확인되는 점에서 의례의 상황의 

폐기가 의심되고 있다. 동물 희생의레에서 두개골 매납은 일반적인 양상으로 보는 것은 어떠한가? 

3.대성동고분군 매장의례 속에서 동물희생 의례의 공간 구성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한 동물의 양상의 설명을 부탁드리고자 한다. 다른 지역 고분에서는 봉분 

혹은 호석의 주위에 말을 매납하는 경우가 많다. 발표자도 언급한 바와 같이 매장의례 행위의 과정

에서 개석을 덮은 후인지 혹은 매장주체부 속에 소와 말을 매납한 것인지에 따라서 희생의례의 특징

이 보일 것으로 생각된다. 경주지역의 경우에는 호석의 외부에 별도의 공간 혹은 봉토분 속에 말을 

매납하는 사례가 보이고 있다. 신라의 경우 적석목곽분이라는 대형 분구의 축조의 시작 혹은 중간에 

동물희생의례가 진행되고 있다. 

이에 반해 대성동고분군에서는 88호분의 마갱으로 추정되는 것이 확인된 사례를 제외하면 매장

주체부와 근접해 매납된 것으로 생각된다. 지산동44호분의 경우 매장주체부 외의 별도의 석곽에서 

다수의 유물과 순장의 양상이 확인되는 점에서 대성동고분군과는 다른 매장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러한 차이는 대성동고분군의 매장과정의 특징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한 발표자의 

의견을 듣고 싶다. 

유병일, 2002, 「新羅·伽耶의 무덤에서 출토한 馬骨의 意味」, 과기고고연구8, 아주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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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김해 대성동고분군 동물희생의례」에 대한 토론문_김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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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

이 상 율(부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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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 율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

Ⅰ. 머리말

가야의 마구는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가야세력의 추이에 따라 전기가야 마구와 

후기가야 마구로 나눌 수 있다. 전기가야 마구는 4세기에 낙동강하류역의 금관가야를 중
심으로 기승용마구가 등장한 이래 고구려남정을 계기로 낙동강서안의 가야 제 지역으로 
확산되는 5세기전반까지의 마구를 말한다. 그 중심지가 금관가야였던 탓에 전기가야 마구
는 좁은 의미로 금관가야 마구를 대변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후기가야 마구는 5세기후반
부터 가야 제 지역에서 기왕의 전기마구에서 벗어나 각자 지역성을 띠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마구를 통칭한다. 더하여 신라도 이때부터 자기만의 독자적인 마장체제를 갖추게 
되므로 영남지방이 신라마구와 가야마구의 두 색채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시기이기도 하
다. 가야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색채가 신라와 대치하던 대가야를 중심으로 발휘되고 있어
서 후기가야 마구는 대가야 마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다. 

이처럼 전·후기의 금관가야와 대가야로 대표되는 가야마구는 4세기대에 금관가야에 기

승용마구가 출현하고, 5세기에 주변으로 확산되면서 분화되어 지역성을 발휘한 후 6세기
에는 신라·백제마구와 혼재하는 양상 속에서 점차 색채를 잃어가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
다. 특히 6세기후반대는 신라의 영향력이 심화되면서 마구도 신라중심으로 전개되고, 분

Ⅰ. 머리말
Ⅱ. 금관가야 마구의 동향
Ⅲ. 대가야 마구의 성립과 확립

Ⅳ. 아라가야 마구의 수용과 실상
Ⅴ. 소가야 마구의 교역과 의미
Ⅵ. 맺음말

목 차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

이 상 율

부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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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말과 말갖춤

묘 매납도 감소하기 때문에 가야마구의 본질을 파악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래서 가야마구
의 전개는 4세기부터 6세기전반대까지가 중심연대가 된다. 

전·후기에 걸친 가야마구는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각 형식의 출현과 분화, 지역상을 

어느 지역보다도 상세하게 반영해주고 있어서 가야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전개된 유물이
라고 할 만하다. 특히 제국의 수장급을 대표하는 중심고분군의 마구는 당시의 정치·사회
적 동향, 선도집단의 성격, 문물전파와 수용 등을 폭넓게 시사한다. 특히 말을 제어하는 기
본장구인 재갈은 출토량도 많고 다양한 형식과 변화를 반영하므로 이를 통해 제가야 마구
문화의 특징과 교류의 일단을 잘 살필 수 있다.

Ⅱ. 금관가야 마구의 동향

금관가야 마구는 수장묘를 대표하는 대성동과 복천동고분군에 집중되어 있다. 여기에

는 한반도 남부지방의 삼국시대 마구 중 최고식(

最古式)에 속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4

세기전반부터 재갈을 필두로 늦어도 4세기후반에는 등자, 안교 등 각종의 실용마구가 금
속제로 등장한다. 

전기에 속하는 대성동과 복천동고분군의 재갈을 공반유물에 따라 단계별로 나눈 <

1>에서 이외의 주목할 만한 마구로는 Ⅱ단계에 목심의 일부만을 부분 보강한 등자와 철
제안교, Ⅲ단계에 심엽형행엽, 환형운주, 상판분할 마주, Ⅳ단계에 지판과 상판을 결합한 
정형화된 심엽형행엽, 병하반부와 윤부에 철봉을 덧댄 등자, Ⅴ단계에 윤부에 스파이크를 
가진 등자 등이 공반된다. 

이를 통해 금관가야 전기마구의 성격을 간추리면, 첫째, 금관가야에서 기승용마구의 등

장은 적어도 4세기초까지 소급이 가능하며 중국 동북지방으로부터 입수한 마구를 빠르게 
변용시킨 독창적인 제품이라는 것이다. 각 단계별 변화상은 북방으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파급 혹은 교류와 그때마다 주체적인 개량화를 통해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금관
가야의 마구는 북방의 영향에 힘입되 끊임없는 변용과 개량을 통해 창출한 독자적인 마구
라 할 수 있다. 둘째, 마구 소유의 제한성으로 초기의 마구 매납은 중심집단의 묘역, 그 중
에서도 수장 혹은 상위지배자에 해당하는 대형분에 집중된다. 이때의 중심집단은 당연히 
금관가야의 중추였던 대성동과 복천동집단이다. 이는 이 시기에 마구를 소유할 수 있는 
집단 혹은 신분이 금관가야의 지배자급으로 한정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셋째, 금관가야 
내 주도세력의 동향을 엿볼 수 있다. 금관가야를 대표하던 대성동과 복천동 마구는 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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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 율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

분을 중심으로 그 연속
성과 단절성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  곧  대성
동의 경우 Ⅳ단계 이후
에 대형분의 마구 매납
이 급속히 감소하고 주
변의 소형묘로 흩어지
는 반면 복천동에서는 
여전히 대형분을 중심
으로 지속되는 가운데 
새로운 마구의 개발까
지  시도하고  있다.  이
것은 금관가야의 주도
권이 대성동집단의 약
화와 더불어 복천동으
로 넘어간 여러 정황과
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넷째,  5세기전엽을  전
후하여 가야 제 지역과 
왜에 출현하는 마구의 
진원지는  금관가야에 
있다. 금관가야 이외의 
제  가야지역에서는  5
세기전엽부터  마구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데, 표비는 물론 각종 환판비나 사다리꼴판비 등의 형태나 제작법에
서 금관가야 마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거나 이로부터 파생된 것들이다. 일본열도에 기승
용마구가 출현하는 것도 이때부터이다. 이 시기의 것으로 시가(

滋賀) 신카이(新開)1호분, 

오사카(

大阪) 구라츠카(鞍塚)고분, 마루야마(丸山)고분, 시치칸(七觀)고분 마구 등이 대

표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역시 금관가야 마구의 형식과 맥을 같이 하는 점에서 일본 
초기마구의 주력은 이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각지에 입수된 초기마구
에 대해 그 계보를 기왕의 낙동강이동(신라·가야) 중심에서 점차 중서부지방(백제)까지 넓

<

圖1> 전기 금관가야 재갈의 편년-대성동/복천동고분군- [대:대성동, 복:

복천동]

1 복38호, 2 복69호, 3 大91호 4 복71호, 5 대68호, 6·7·15 대2호, 8 
대47호, 9 복60호, 10 복42호, 11 대1호, 12·13 복21·22호, 14·25 복
10호, 16 대42호, 17 대41호, 18·19 대57호, 20 복54호, 21 복95호, 
22 복35호, 23 복39호, 24 복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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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말과 말갖춤

혀보려는 시각1)도 있으나 일본 내 각지에서 직접교섭에 의한 산물로 보기는 어렵다. 말의 
도래와 사육, 

牧의 설치와 마구의 제작 등 기마문화의 성립은 그 배후에 강력한 수용주체

의 존재가 필요하고, 이는 왜왕권의 성립과도 직결된다. 이는 왜에서 금관가야의 마구가 
출현하는 시점이 왜왕권의 성립시점과도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금관가야 후기의 마구는 복천동과 연산동고분군을 통해 살필 수 있다. 5세기후엽

부터 집중 조영된 연산동고분군의 주체를 둘러싸고 기존의 금관가야 한 축을 담당하던 복
천동집단이 묘역의 이동을 통해 새로운 매장공간을 확보한 것으로 보거나2) 이와는 반대
로 복천동집단이 쇠퇴하고 신라의 세력확장에 편승하여 새로이 등장한 지배집단으로 인
식하는 견해 등이 있으나3) 매장주체시설의 묘형과 구조, 유물부장방법, 주변의 생활유적 
등을 종합해 볼 때 연산동고분군은 복천동의 연장선상에 조영된 가야의 수장묘일 가능성
이 크다. 마구도 유환을 가진 표비나 병부단면오각형의 목심등자, 안교, 마갑 등 실용적이
고 무장성이 강한 가야 특유의 마구상을 여전히 유지하는 특징이 있다. 다만 이전까지 볼 
수 없던 새로운 마구가 등장하는데, M10호분 및 M8호분의 편원어미형행엽, M3호분의 
용문투조 편원어미형행엽과 검릉형행엽, 무각이단식의 좌목선금구 등 장식용마구가 대
표적이다. 이들의 출자는 신라나 대가야로 보이는데, 특히 신라마구의 유입은 5세기후엽
부터 본격적으로 신라세력이 부상한 것과도 관련이 깊다. 신라의 마장체제가 완비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신라는 이를 통해 자신들의 위상을 과시하는 발로에서 주변에 마장을 선보
였다. 그러나 이를 수용한 금관가야의 마구가 여전히 독자적인 형태로 운용된 것은 신라
마구의 영향력이 제한적이었음을 말해준다.

Ⅲ. 대가야 마구의 성립과 확립

고령 지산동과 합천 옥전고분군은 대가야를 대표하는 중심고분군이다. 대가야 마구의 

전개와 특징은 <

圖2>에 제시된 재갈-좁게는 신식판비-의 변화상을 통해 엿볼 수 있다. 

1) 諫早直人, 『東北アジアにおける騎馬文化の考古學的硏究』, 雄山閣, 2012.
2) 이희준, 『신라고고학연구』, 사회평론, 2007.

    김세기, 「고분자료로 본 가야제국의 존재형태와 연산동고분군」, 『가야제국의 존재형태와 연산

동고분군』, 고산문화재단 제2회 학술세미나 발표자료집, 2013.

3) 申敬澈, 「金海大成洞·東萊福泉洞古墳群 點描」『釜大史學19』, 釜山大學校史學會, 1995.

김두철, 「연산동고분군과 복천동고분군」, 『연산동고분군의 의의와 평가』, 부산대학교박물관·

부산시 연제구청,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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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 율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

단계별로 재갈 이외의 
주목할 만한 마구는 Ⅱ
단계에 윤부 단면오각
형을  이루는  소위  ‘대
가야형등자’와  편원어
미형행엽, Ⅲ단계에 검
릉형행엽,  철제등자, 
Ⅳ단계에 호등이 공반
된다. 

이상의 변화에서 간

취되는  특징은  첫째, 
대가야 마구의 출현이 
처음부터 매우 돌발적
이라는  점이다.  5세기
전반부터 출현하는 마
구의 대부분은 표비와 
정ㅗ자형환판비,  철제
안교,  등자,  심엽형행
엽,  환형운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앞서 금관가야 Ⅴ단계
의 마구와 같거나 변형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산물이거나  이로부터 
활발한 토착화에 따라 탄생한 것들이다. 또한 마구가 대형분에 한정되는 점에서 수용기의 
특징인 소유의 제한성과도 잘 부합하고 있다. 

둘째, 대가야 특징적인 마구의 시발은 Ⅱ단계부터이다. 판비로 보자면 전기마구 내 고

식판비와는 달리 이 지역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신식판비로서 전형적인 후기마구에 속하
는 것들이다. 특히 옥전M2호분 판비가 주목되는데, 신라요소로 간주되는 십자문양을 제
외하면 함유금구의 미채용, 내만타원형의 함유, 유환이나 인수호의 존재 등 새로운 속성
에서 대가야화한 판비라 할 수 있다. 신라의 장식성이 강한 타원형판비에 자극을 받되 이
로부터 가야화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제품이다. 대가야를 대표하는 내만타원형판비
의 출현은 이로부터 비롯되며, 점차 고령과 백제로 확산되는 가운데 신라판비에 대응하는 

<

圖2> 대가야 재갈의 편년-지산동/옥전고분군- [지:지산동, 옥:옥전]

1 옥42호, 2 옥8호, 3 지32호, 4 지3호석곽, 5 옥24호, 6 지97호석곽, 
7 옥M2호, 8 지75호, 9 지35호, 10 옥20호, 11·12 옥M3호, 13·14 지
44호, 15 지44호25석곽, 16 지18호석곽, 17 옥68호, 18 옥23호, 19 
옥35호, 20 지73호, 21 옥M1호, 22 옥28호, 23 옥85호, 24 지45호, 
25 옥M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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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독자성을  갖추어  나간
다. 그래서 대가야 신식
판비의 성립은 내만타원
형판비에서  구할  수  있
으며  이를  바탕으로  새
로운  마장의  확립과  정
점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셋째,  이러한  내만타

원형판비의 출현이 대가
야의 독자적인 마장체제
를  구축하는  시발점이
었다면,  대가야의  독자
적인  마장문화의  확립
은 ㅗ자형환판비의 소멸
과  f자형판비의  등장에
서 찾을 수 있다. ㅗ자형
환판비는  금관가야에서 
출현초기부터  실용성과 
동시에 무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 변화
는 ㅗ자형→정

人자형→

人자형→곡人자형으

로 변해 나간다(

圖3). 특

히 대가야에서는 절인자형과 곡인자형이 수장묘를 중심으로 출토되는 특징이 있다. 이것
은 점차 안정된 체제구축에 따라 그 기능을 장식적으로 변질시켜 나갔음을 의미한다. 이
러한 상황에서 장식성이 강한 판비는 그들의 욕구를 더욱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좋은 대상
이었다. 대가야에서 환판비의 쇠퇴는 이와 관련이 깊다. 더불어 기왕의 내만타원형판비를 
변형시킨 새로운 f자형판비를 생산하면서 독자성을 과시한다. 행엽도 신라에서 입수한 편
원어미형을 변형시킨 검릉형을 채택하였다. 이들의 출자가 가야 내 어디인지 검토의 여지
가 있으나 비신라권임은 분명하다. 또한 양자의 조합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이견4)

4)  김두철은 이들이 옥전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권에서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반면, 필자는 

<

圖3> ㅗ자형환판비의 편년

1 복천동31호, 2 복천동10호, 3 지산동10호, 4 옥전68호, 5 옥전
67-A호, 6 신봉동채집 7 지산동73호, 8·20 옥전M1호, 9 옥전28호, 
10 도항리(경)13호, 11 옥전23호, 12 조영EⅠ-1호, 13 옥전35호, 14 
황남대총남분, 15 조영EⅢ-2호, 16 조영EⅢ-3호, 17 황성동39호, 18 
탑리봉토, 19 황남동110호, 21 옥전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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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 율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

이 있으나 지금으로서는 이러한 마장을 공유한 백제와 대가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f자
형판비와 검릉형행엽으로 대표되는 마장체제를 완성하여 신라에 대응하는 대외위상과 서
로의 결속을 강화해 나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조합이 대가야 마장문화의 확
립이자 정점이었다. 

Ⅳ. 아라가야 마구의 수용과 실상

아라가야 마구의 수용과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자료는 중심고분군인 도항리

․말산리고분

군에 집중해 있다. 출토양상을 중시하자면, 금관가야나 대가야보다 산발적이면서도 형식
마다 특정 시기에 집중되는 경향이며 고분군 내에서도 수장급에 한정되는 경우가 타지역
보다 특히 강하다. 그래서 좁게는 중심고분군 자체의 변화양상, 넓게는 권역 내 전반적인 
동향을 세밀하게 파악하기 힘든 단점이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아라가야 마구의 실상
을 대변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

圖4>의 Ⅰ단계는 아라가야 마구의 출현기로 대부분 금관가야 Ⅳ·Ⅴ단계 마구의 계보

를 잇는 것들이다. 자체적으로 고안한 형식은 거의 없고 변용의 수준도 모방하는 정도에 
머물러 질적으로 떨어지는 마구가 대부분이다. Ⅱ단계 이후에는 마구의 공백기라 할 정도
로 출토량이 빈약하며 여전히 아라가야 특유의 속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 이러한 현상
은 Ⅲ단계까지 지속된다. 공반마구도 넓게 보아 대가야에서 유행한 요소이거나 이에 상응
하는 제품이 많다. 편원어미형행엽 등 신라마구는 대가야와 유사한 양상으로 특정시점에 
소량이 공반되는데, 대가야의 경우 신라로부터 직접 이입된 것들인데 비해 이들은 대가야
를 경유하여 이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실용 위주의 자체생산품에는 전기가야에서 
유행하던 고식요소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아라가야 마구는 금관가야
나 대가야 마구와 비교하여 일률적으로 같은 시기를 부여하기 어려우며 신구요소의 조합
과 모방, 공반유물의 상황을 종합하여 제작이나 입수시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아라가
야의 장식마구에 자체생산품으로 추정되는 것도 드물다. 

이로써 드러나는 아라가야 마구의 수용과 특징은 첫째, 아라가야 마구의 등장 역시 처

음부터 매우 돌발적이고 그 출자가 금관가야인 점에서 대가야권과 공통된다. 그러나 마구
의 활용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변용해 나간 대가야와는 달리 아라가야에서는 기왕의 제

백제에서 웅진천도 후 새로운 마장체제의 정립과 함께 채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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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요소를 모방하거나 조합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
었다.  그래서  아라가야
의  색채를  지닌  형식은 
보이지  않고  생산과  활
용도 적극적이지 못하였
다.

둘째,  5세기중∼후엽 

사이에 마구가 상대적으
로 빈약한 현상이다. 이
는  대가야에서  입수  당
시부터  활발한  변형을 
통해 지속적으로 생산해 
나간  현상과는  매우  대
조적이다.  입수  초기에 
마구의 제작기술이 정착
되었다면 이후부터 토착
화된  마구가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이어져야 하나 
그렇지  못한  점에서  마
구생산의 연속성이 떨어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이러한  마구의 

빈약성과 더불어 전기마
구의  속성을  띠는  마구
가 이 시기에도 여전히 남아있는데, 아라가야에서는 형식을 불구하고 두드러지게 나타난
다. 제작법상 앞 시기를 모방한 것들이 많은데, 환판비에서 ㅗ자형함유의 말단을 접거나 
인수외환을 단순히 말아 제작한 점 등이 좋은 예이다. 이처럼 종래의 형식을 답습한 마구
가 많은 것은 이 시기까지 마구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탓인지 타지역에 비해 개발이 늦고 
대외적 흐름을 반영하는 마구의 입수도 한정된 데 따른 지체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외형만으로 아라가야 마구를 편년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넷째, 아라가야 마구의 전성기에도 자신만의 색채가 보이지 않는다. Ⅲ단계 이후부터 

등장하는 장식마구는 옥전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에서 이입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외 

<

圖4> 아라가야 재갈의 편년–도항리/말산리고분군- [문:가야문화재

연구소, 현:함안군, 창:창원대, 경:경남고고학연구소, 역:경남발
전연구원, 동: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1 문43호, 2 마갑총, 3 경파괴분, 4 문38호, 5·9 현5호, 6 문3호, 7 문
48호, 8 문54호, 10 창14-1호, 11 현22호, 12 문36호, 13 문10호, 
14 경13호, 15 동6호, 16 암각화고분, 17 창14-2호, 18 역45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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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 율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

신라마구나 백제요소도 해당 지역으로부터 직접 입수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들 역
시 대가야를 경유하여 입수된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동일 형식이라도 대가야에 비해 
한 단계 늦게 출현하는 특징이 있다. 최신의 마구로 타지역과 보조를 함께 하는 시점은 빨
라야 원환비가 출현하는 6세기이후부터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자체생산보다는 백제나 신
라로부터 입수한 예가 많다. 아라가야에서 마구의 운용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섯째, 이러한 단절적, 비색채적 성격에서 아라가야의 마구의 수용은 기본마구든 장식

마구이든 실용보다는 시종일관 수장층의 전유물로 매납되는 수준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지속적인 활용에 따른 개량이나 혹은 신분과 용도에 따른 마구

․마장의 

분화는 아라가야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외부의 영향에 따라 그때마다 입수하여 수
장층에 한정하여 매납되었을 뿐이다. 아라가야에서 마구가 널리 보급되지 않고 지배층의 
전유물이나 위세적 성격이 강한 것은 여기에 기인한다. 

Ⅴ. 소가야 마구의 교역과 의미

소가야 지역의 마구는 주로 고성이나 산청 일대의 수장급 고분을 중심으로 출토되나 전

반적으로 마구의 출토량이 적고 종류도 빈약하다. 무엇보다도 소가야 마구는 수장급에서 
출토되는 장식마구일수록 외부에서 그대로 입수되었거나 대외적 색채가 강한 것들이 대
부분이어서 아라가야 마구처럼 특징을 도출해내기가 쉽지 않다. 특히 산청일대의 마구가 
그러한데, 대부분이 대가야 마구의 영향 하에 제작되었거나 바로 입수된 것들이며 형식도 
고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양치 못하다. 

소가야식토기와 공반하는 유물을 조합하여 단계별로 나눈 <

圖5>에서 이외의 마구는 

Ⅳ단계에 철제등자, 호등, 마령, 검릉형행엽이, 그 이후에는 신라계의 종(자엽)형행엽이 
공반된다. 재갈은 늦은 시기의 내만타원형판비, f자형판비, 원환비가 대세이다. 송학동1
호분 주석실(1A 1호)의 내만타원형판비는 가야 후기에 유행한 신식판비로서 그 출자는 대
가야와 백제에 있으나 표주박형인수호가 본체와 접합된 일체형 인수인 점에서 대가야와 
관련이 깊다. 이와 동떨어져 출토된 f자형판비는 함유의 만곡도가 심하지 않고 인수가 함
유내측에 물리는 특징이 있다. 잔편에서 외환이 꺾인 인수편이 이 재갈의 인수였을 것이
다. 이 경우 인수호는 붙지 않는다. f자형판비에서 이러한 처리는 다소 늦은 시기의 백제
에서 유행하였다. 앞서 내만타원형판비와는 약간의 시기차도 나는 점에서 복수 지역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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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향과 입수루트가 상정된
다. 또한 1A 6호의 f자형
판비는 함유의 만곡도가 
거의  직각에  가까운  제
품이다. 이 판비는 만곡
도가  큰  것과  작은  2계
통으로 구분되는데 전자
는 대가야, 후자는 백제
에서 유례를 찾을 수 있
어 그 루트를 예상할 수 
있다. 

이로써  보자면,  소가

야를  대표하는  송학동 
마구의 루트는 6세기전
엽까지 대가야와 연관되
다가  6세기중엽경에는 
백제로  연결되고  있음
이 간취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판비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출토된 원환비에도 잘 드
러난다. 원환비는 6세기대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중남부지방에 유행한 특징적인 신식마구
로서 소가야뿐만 아니고 백제, 가야, 신라 등 

凡남부지방에서 애용된 것이다. 그 출현은 6

세기초에 백제와 대가야에서 구해진다. 제작법은 함과 인수를 연결하는 유환의 유무에 따
라 유환이 있는 것(A식)과 없는 것(B식)으로 구분되며 전자는 다시 원환이 함외환에 끼워
진 것(A1식)과 유환에 끼워진 것(A2식)으로, 후자는 원환이 함외환에 끼워진 것(B1식)과 
함과 인수를 함께 건 것(B2식)으로 각각 나누어진다. 원환비의 출현기에는 A1식을 백제와 
대가야가 공유하지만, 6세기전엽에 백제에서는 유환이 없는 B1식으로 빠르게 변하며 이
후에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형식을 취한다. 반면 대가야는 유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곧 A1식에서 변화한 A2식을 비롯하여 유환을 극대화시켜 원환화한 B2식을 채용하는 등
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점차 B1식의 확산과 더불어 대가야도 이러한 형식을 취하게 되는
데, 이는 대가야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 확대와도 관련이 있다5). 소가야의 원환비를 공반
유물을 통해 가장 이른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대가야에서 유행하던 형식에서 점차 백제식
으로 이행하는 점에서 남부지방 원환비의 형식 변화와 그 추이를 함께하고 있음을 알 수 

5) 李尙律, 「三國時代 圓環轡考」, 『古文化 65』, 韓國大學博物館協會, 2005.

<

圖5> 소가야 재갈의 편년-송학동/내산리/율대리/가좌동고분군- 

[내:내산리, 송:송학동, 율:율대리]

1·15·16  내34호주곽,  2  내28-2곽,  3·7  송1A-1호,  4  내21-8곽, 
5·18·19 내28-1곽, 6 송1A-6호, 8·13·14 내8호주곽, 9 송1A-8호, 
10·17 내21-1곽, 11·21 율2호, 12 송1A-11호, 20 가좌동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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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 율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

있다. 달리 말해 이러한 변화는 소가야 마구에 수용되는 대외적인 영향이나 혹은 소가야
의 대외교역의 주된 루트가 대가야에서 점차 백제로 기울어졌음을 반영한다.

이처럼 소가야의 마구는 자체적인 전개상 보다는 이를 통해 대외적인 교류와 영향 및 

소가야의 교역상황을 반영해 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장식마구의 경우 자체
생산보다는 영역 내 지위에 따라 여러 루트를 통해 이를 입수, 활용보다는 권위의 상징으
로 소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장급의 장식마구로 보자면 대가야, 백제, 왜 등이 입수의 
배후지가 되겠는데, 처음에는 대가야를 통해, 이후에는 점차 백제와 왜로 루트가 바뀌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마구가 대부분 6세기전∼중엽대에 밀집하여 연대
폭이 비교적 짧은 점도 소가야 마구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고성의 소가야는 바로 이때
가 최전성기였을 것이다.

Ⅵ. 맺음말

가야에서 기승용마구의 진원지는 금관가야의 대성동

․복천동집단이다. 적어도 4세기초

까지 소급 가능한 이들 마구의 원향은 중국 동북지방에 있다. 이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파
급과 그때마다 자체적으로 끊임없는 변용과 개량을 통해 금관가야 특유의 마구가 완성되
었다. 그래서 4세기대는 토착화한 표비와 판비가 주축을 이루는데, 판비도 장식보다 기능
위주의 철제로 제작하여 실용적이었다. 그러나 넓게 보자면, 더욱 실용적인 표비나 곧이
어 개발된 환판비에 밀려 그 보급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유행한 시기폭도 좁은 편이며 이
때를 정점으로 하여 이후에는 급감하는데, 이는 효용을 중시하는 가야마구의 습성에 따라 
판상을 환판으로 빠르게 개량한 데 따른 것이다. 요컨대 금관가야의 전기마구는 다분히 
실용적, 무장적 성격을 띠는 것들이며 이러한 특징은 고구려남정을 계기로 최고조에 이르
게 된다. 

고구려남정으로 대성동과 복천동의 전기마구는 각각 단절과 연속성이라는 상반된 변화 

속에서 복천동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와 함께 마구의 확산에 힘입어 대가야와 아라가야
에서도 수장층을 중심으로 마구가 본격적으로 출현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금관가야 Ⅳ
∼Ⅴ단계의 마구를 축으로 삼아 그 전후의 산물이거나 이로부터 변형된 것들로서 그 출자
를 짐작할 수 있다. 대가야는 입수 이후 적극적인 변용과 생산을 통해 지속성을 유지해 나
가는 가운데 점차 새로운 마장체제를 창출한다. 후기마구의 시작이자 대가야 장식마구의 
시발이 되는 이러한 계기는 안정된 체제구축과 함께 신라의 마장체제에 대응하는 독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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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을 갖추기 위함이었다. 

반면에 아라가야는 대가야보다 빠르게 마구를 입수하였지만, 지속적인 활용에 따른 개

량이나 혹은 신분과 용도에 따른 마구

․마장의 분화는 아라가야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

다. 실용마구의 생산도 모방이나 조합으로 조잡한 것이 많고 꽤 오랜 기간 동안 종래의 형
식을 답습하는 등 소극적이었다. 후기의 장식마구도 외부로부터 입수에 의지한 채 실용보
다는 수장층의 전유물로 매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 점에서 아라가야 수장층의 마구는 
자체생산보다는 영역 내 지위에 따라 여러 루트를 통해 장식마구를 입수하여 권위의 상징
으로 소유하였던 소가야 수장층의 마구와 그 성격이 잘 닮아 있다. 달리 말해 금관가야나 
대가야의 경우 마구의 출현기부터 수장층이 체제 확립과 수호를 위해 실용적, 무장적으로 
마구를 활용하고 있었다면, 아라가야와 소가야의 수장층은 주변정세에 따라 대외교류나 
외교수단으로 마구를 활용하였다. 아라가야와 소가야의 수장층이 장식마구를 지향한 것
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대가야의 수장급 중심고분에도 장식마구는 많다. 그러나 이
는 초기에 실용마구를 통한 체제의 안정 이후에야 비로소 세력과시를 위해 자체 개발한 
수순을 거친 소산물이었다. 아라가야와 소가야에서는 수장층을 중심으로 주변정세에 따
라 이러한 마구를 입수하여 실용보다는 권위의 상징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금관가야의 영
향을 받은 아라가야 초기마구를 제외하자면, 이들의 입수루트는 대가야-백제-신라의 수
순으로 상정되며 대가야나 백제(혹은 왜)와 적극적으로 교감한 반면 신라의 영향력은 적
어도 6세기중엽까지는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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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 율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

참고문헌

諫早直人, 『東北アジアにおける騎馬文化の考古學的硏究』, 雄山閣, 2012.
이희준, 『신라고고학연구』, 사회평론, 2007.
김세기, 「고분자료로 본 가야제국의 존재형태와 연산동고분군」, 『가야제국의 존재형태

와 연산동고분군』, 고산문화재단 제2회 학술세미나 발표자료집, 2013.

申敬澈, 「金海大成洞·東萊福泉洞古墳群 點描」『釜大史學19』, 釜山大學校史學會, 1995.
김두철, 「연산동고분군과 복천동고분군」, 『연산동고분군의 의의와 평가』, 부산대학교

박물관·부산시 연제구청, 2013.

李尙律, 「三國時代 圓環轡考」, 『古文化 65』, 韓國大學博物館協會,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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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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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에 대한 토론문_류창환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에 
 대한 토론문

류 창 환

극동문화재연구원

문헌에 전하는 가야제국 중에서 금관가야와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의 왕과 지배자가 

묻힌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고령 지산동고분군, 함안 말이산고분군, 고성 송학동고분군에
서는 각종  기승용 마구가 발견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그 수량이 많아서 놀랍기
도 하지만 삼연과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 고대 동북아시아 제국의 마구와 상호 관련되
는 자료가 많아서 가야의 성장과 발전, 대외관계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유효한 고고자료
로 다루어지고 있다. 

오늘 발표자가 제출한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에 대한 논고 역시 위와 같은 

관점을 바탕으로 금관가야와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의 마구에 대한 최신 성과를 반영
하여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발표자의 가야제국 마구에 대한 이해와 관점에 대
해 토론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따라서 발표문에 대해 특별히 지적하거나 질의할 내용은 
없으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의를 통하여 토론자의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 

1. 「금관가야 마구의 동향」에 대한 질의

발표자는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부산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마구를 금관가야 마구, 

즉 전기가야 마구로 규정하고 이를 재갈과 공반유물에 따라 Ⅰ~Ⅴ단계로 나누고, 그 성격
을 다음과 같은 네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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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첫째, 금관가야에서 기승용마구의 등장은 적어도 4세기초까지 소급이 가능하며, 중국 

동북지방으로부터 입수한 마구를 변용과 개량을 통해 창출한 독자적인 마구이다. 둘째, 
마구의 소유는 금관가야의 중추였던 대성동과 복천동집단의 지배계층에 한정되어 있었
다. 셋째, Ⅳ단계 이후에 대성동의 경우 대형분의 마구 매납이 급속히 감소하고 주변의 소
형묘로 흩어지는 반면 복천동에서는 여전히 대형분을 중심으로 지속되는 가운데 새로운 
마구의 개발까지 시도되고 있어 이는 금관가야의 주도권이 대성동에서 복천동으로 넘어
간 여러 정황과 일맥상통한다. 넷째, 5세기 전엽을 전후하여 가야 제 지역과 왜에 출현하
는 마구의 진원지는 금관가야에 있다.

이상과 같은 발표자의 금관가야 마구에 대한 이해와 관점에 대해 토론자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의를 통하여 토론자의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

먼저 발표자가 정리했듯이 금관가야 지역에 기승용마구가 등장한 것은 4세기초로, 그 

진원지는 중국 동북지방의 삼연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2012년 김
해 대성동 91호분에서 2공입문식 표비 4점과 금동제 용문운주ㆍ입형령 등을 비롯한 삼연
계 마구가 다수 출토됨으로써 입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북방계 혹은 삼연계 마구가 어떤 경로와 어떤 관계를 통해 김해지역까지 도달
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고고자료만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발표자의 
고견을 듣고 싶다.  

다음은 5세기 전엽을 전후하여 가야의 여러 지역과 일본열도의 왜에서 출현하는 마구

의 진원지는 금관가야라는 관점에 대해서이다. 가야의 여러 지역에서 보이는 표비를 비롯
한 각종 환판비나 사다리꼴판비 등의 형태나 제작법이 금관가야 마구와 밀접히 연관 또는 
파생된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일본열도에 기승용마구가 출현하는 것도 이때부터로, 시가
(

滋賀) 신카이(新開)1호분, 오사카(大阪) 구라츠카(鞍塚)고분, 마루야마(丸山)고분, 시치

칸(

七觀)고분 마구 역시 금관가야 마구의 형식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토론자 

역시 합천 옥전고분군과 함안 말이산고분군, 발표자가 열거한 일본열도의 초기마구 모두 
그러하다는 점에서  동의한다. 그런데 최근 한반도 중서부지방과 낙동강 이동지방에서 4
세기대에 해당되는 기승용 마구 출토 예가 증가하고 있는 것에 따라 전기가야 마구와 후
기가야 마구의 연속성 혹은 후기가야 마구의 진원지를 금관가야로 특정하기 어렵다는 견
해도 나와 있다. 또한 복천동 10호분을 이미 신라화된 고분으로 보아 위의 일본열도 출토 
마구를 신라산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는데, 이에 대한 발표자의 생각은 어떠한지 알고 
싶다.  

2. 「대가야 마구의 성립과 확립」에 대한 질의

발표자는 고령 지산동과 합천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마구를 대가야 마구로 규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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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에 대한 토론문_류창환

판비의 변화에 주목하여 Ⅰ~Ⅳ단계로 나누고,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대가야 마구의 출현은 매우 돌발적으로, 금관가야 Ⅴ단계의 마구와 같거나 변형

된 것이다. 또한 마구가 대형분에 한정되는 점에서 수용기의 특징인 소유의 제한성과도 
잘 부합하고 있다. 둘째, 대가야 마구의 시작은 Ⅱ단계부터로, 전기마구의 고식판비와 달
리 이 지역의 특징적인 내만타원형판비의 등장과 함께 대가야 마장의 확립과 정점의 발판
을 마련하게 된다. 셋째, 내만타원형판비의 출현 이후 이를 변형시킨 f자형판비와 신라에
서 입수한 편원어미형을 변형시킨 검릉형행엽을 채택함으로써 대가야의 독자성을 과시하
는 대가야 마장문화를 확립하였다. 

이상과 같은 발표자의 대가야 마구에 대한 이해와 관점은 토론자 역시 기본적으로 공감

하기 때문에 특별히 질의할 문제는 없다. 다만 토론자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발표자가 지
적한 대가야 Ⅱ단계에 마구와 관련하여 질의하고자 한다. 발표자도 지적하였듯이 대가야 
Ⅱ단계 마구야 말로 진정한 대가야 마구의 시작이라 해도 좋다. 이에 토론자는 과거 이 단
계 마구의 특징으로, ①재갈, 등자와 같은 기본마구의 본격적인 재지 생산, ②전기가야 마
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대가야형 등자(단면 오각형 등자)의 성립, ③편원어미형행엽과 무
각소반구형운주로 구성된 신라계 장식마구의 유행, ④최고지배자의 장식적·전투적인 성
격이 강한 복수의 마구 소유 등으로 정리한 바 있다. 또한 그 형식과 사례로 보아 대가야 
Ⅱ단계 마구는 전기가야 마구의 형식과 제작기술을 기반으로 백제마구와 신라마구를 입
수, 변용, 개량하여 성립한 것으로 파악한 바 있다. 

한편 대가야 Ⅱ단계의 편원어미형행엽과 무각소반구형운주, 대가야 Ⅳ단계의 옥전 M6

호분 출토 인동타원문심엽형행엽, 전고령 출토 십자문심엽형판비와 행엽 등에 대해서는 
이 마구류가 신라 당대의 최고지배자 혹은 지배자가 소유했던 위세품이라는 점에서 6세
기대 신라와 대가야의 긴밀한 정치ㆍ외교적 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고고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발표자의 고견을 듣고 싶다. 

3. 「아라가야 마구의 수용과 실상」에 대한 질의

발표자는 아라가야 마구를 Ⅰ~Ⅳ단계로 나누고,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①아라가야 마구의 등장 역시 처음부터 매우 돌발적이고 그 출자가 금관가야인 점에서 

대가야권과 공통되지만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변용해 나간 대가야와는 달리 아라가야에
서는 기왕의 제요소를 모방하거나 조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②Ⅱ단계 이후에는 마
구의 공백기라 할 정도로 출토량이 빈약하며 여전히 아라가야 특유의 속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③편원어미형행엽 등 신라마구는 대가야와 유사한 양상으로 특정 시점에 소량이 
공반되는데, 대가야의 경우 신라로부터 직접 이입된 것들인 데 비해 이들은 대가야를 경
유하여 이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④아라가야의 마구의 수용은 기본마구든 장식마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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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말과 말갖춤

든 실용보다는 시종일관 수장층의 전유물로 매납되는 수준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지속적인 활용에 따른 개량이나 혹은 신분과 용도에 따른 마구ㆍ마장의 분화
는 아라가야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발표자의 아라가야 마구의 이해와 관점에 대해서 토론자 역시 기본적으로 공

감한다. 다만 Ⅱ단계 이후에 보이는 편원어미형행엽과 무각소반구형운주로 구성된 신라
계 장식마구에 대해서 신라로부터 직접 입수한 것이 아니라 대가야를 통해 입수한 것이라 
하였는데, 특정할만한 근거가 있는 것인지 설명을 부탁드린다. 그리고 마갑총 출토 마주
와 마갑이 상징하듯이 5세기 전반대는 무장적 성격이 강한 실용마구가, 5세기 후반대부터
는 말이산의 대형분 출토품과 같이 위세성이 강한 장식마구 중심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 
관찰된다. 이는 아라가야 수장들의 성격 변화를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발표자의 고견을 부탁드린다.   

4. 「소가야 마구의 교역과 의미」에 대한 질의

발표자는 소가야 마구에 대해 자체적인 전개상 보다는 이를 통해 대외적인 교류와 영향 

및 소가야의 교역상황을 반영해 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특히 장식
마구의 경우 자체생산보다는 영역 내 지위에 따라 여러 루트를 통해 이를 입수, 활용보다
는 권위의 상징으로 소유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그 입수의 배후지로 대가야, 백제, 왜 등을 
지목하여 처음에는 대가야를 통해, 이후에는 점차 백제와 왜로 루트가 바뀌어 간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이러한 마구가 대부분 6세기 전∼중엽 대에 밀집하여 연대폭이 비교적 짧은 
점도 소가야 마구의 한 특징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발표자의 소가야 마구에 대한 이해는 소가야의 수장묘로 알려져 있는 고성 

송학동고분군과 고성 내산리고분군 출토품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과거 토론자가 제기한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즉, 고성 송학동 1A-1호분과 1A-6호분에서 출토된 내만타원형판
비와 f자형판비, 검릉형행엽 등은 대가야와 백제, 유환이 없는 B1식 원환비는 백제와 관련
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고성 송학동 1C호분에서 출토된 종(자엽)형행엽과 1각식 
좌목선교구는 호우총 출토품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에서 입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
리고 송학동 1A-1호분 출토 쌍엽검릉형행엽과 내산리 34호분 출토 병부에 겹사슬을 동
반하는 철제윤등은 일본열도의 왜와 관련된 마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지역의 마구가 고성지역으로 이입된 계기나 경로, 배경 등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한 발표자의 고견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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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제국의 마구 수용과 교류」에 대한 토론문_류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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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

임 지 영(부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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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지 영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

Ⅰ. 머리말 

마구(

馬具)란 말에 장치하는 도구의 총칭이다. 사람이 타고 이동하거나 마차나 수레를 

끌 때 말을 용이하게 부리기 위한 재갈과 굴레, 안정적으로 말을 타기 위한 안장과 등자, 
말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운주와 행엽 등이 있는데 각각 제어구, 안정구, 장식구로 구분된
다. 그리고 개별 마구를 연결하여 말에 고정하는 용도로 계(

繫)가 있다. 

가야고분에서는 이미 4세기부터 제어구나 안정구 뿐만 아니라 마면이나 행엽과 같은 

장식구가 등장한다. 5세기 이후에는 다수의 고분에서 다양한 장식마구가 출토되고 있지
만 그  구조나 연결방식을 복원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송현동 고분과 같은 특수한 사례
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마구는 유기물 부분이 남아있지 않고 금속 부분
만 잔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동제, 또는 철제 마구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유물 표면에
서 유기물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유기물의 성질은 남아있지 않더라도 금속 마구 주
변의 유기물이 금속녹으로 잔존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금속 마구에 잔존하는 유기물 흔적에 주목하여 가야 마구의 복원 가능성을 가늠

해보고자 한다. 먼저 유기물 흔적을 실체현미경으로 3,40배까지 확대하여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기물의 재질과 그 구조에 대해 고찰한다.  

Ⅰ. 머리말
Ⅱ. 유기물 잔존 메커니즘
Ⅲ. 가야 마구의 유기물 사례

Ⅳ. 고찰
Ⅴ. 맺음말

목 차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

임 지 영

부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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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본고에서는 유기물 동정(

同定)을 위한 주사전자현미경 관찰이나 시편 채취가 수반되는 

프레파라트 관찰 등 분석조사는 실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서두에 밝혀둔다. 조사상의 한계
를 인지하는 바 시론적(

試論的) 연구에 그쳤다는 점에 대해서 양해를 구하며 다음 장에서

는 금속화된 유기물의 잔존 메커니즘에 대해 먼저 살펴보도록 한다. 

Ⅱ. 유기물 잔존 메커니즘

발굴조사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대부분은 석기, 토기, 철기와 같은 무기물이다. 유기물

은 땅속 지중동물이나 미생물이 분해하여 형체가 남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저습지나 패
총과  같이 유적을 둘러싼 국지적 환경이나 특정 기후에서는 부식이 억제되어 목기나 칠
기, 직물, 동물뼈와 같이 다양한 유기물이 출토되기도 한다. 그런데 유적 내 환경요인으로 
유기물이 잔존하는 현상은 금속유물 주변의 미세환경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들면 
철부의 공부(

銎斧) 안쪽에 남아있는 목질흔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금속 유물 주변에 유기

물이 잔존하는 과정을 조금 더 상세히 알아보자. 

청동기나 철기는 광물을 제련하여 인공적으로 분리한 소재이다. 불안정한 존재인 금속

이 본래의 안정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산소와 결합하는 과정을 부식이라고 하는데, 부식과
정에서 생성된 부식생성물인 녹이 유기물의 구조 공극을 메우는 과정에서 그 흔적이 보존
된다. 지질시대의 생물이 암석으로 보존된 화석처럼 금속 주변의 유기물이 부식생성물의 
화석화 작용에 의해 유기물이라는 원래의 성질은 잃고 금속화된다.

도 1은 동래 복천동 19호분 출토 소찰편의 표면 흔적을 주사전자현미경(HITACHI 

도 1. 복천동 19호분 출토 소찰의 곡물흔. 왼쪽은 벼 외영, 또는 내영의 상표피와 표피하섬유조직(x150), 

오른쪽은 유조직(x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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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지 영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

S-4800)으로 관찰한 것이다. 왼쪽은 토기 압흔에서 흔히 관찰되는 벼껍질의 상표피인데, 
토기 압흔과 달리 외영과 내영의 특징적인 종방향 돌기부를 내부에서 본 모습이다. 상표
피 안쪽에는 표피하섬유조직이 관찰되며 오른쪽의 그 상부에는 유조직도 관찰된다. 

이처럼 금속 유물의 잔존 유기물은 세포단위까지 관찰 가능하다. 그리고 유기물 구조의 

형태적 특징을 활용하면 유기물의 식별뿐만 아니라 수종(

樹種)이나 섬유의 재질, 가죽이

나 털의 동물종 등을 동정 할 수 있다. 

Ⅲ. 가야 마구의 유기물 사례

가야 마구의 유기물 조사는 김해박물관 특별전 <말을 탄 가야>의 전시 유물을 대상으

로 실시하였다. 함안 도항리 6, 8, 15, 문4호, 말이산 구4(34)호, 합천 옥전 M3호, 고령 지
산동 44, 45, 73호 출토 마구를 실견하고 광학현미경(Leica M205A)로 관찰하였다. 

유기물 흔적은 운주와 십금구, 행엽과 같은 장식구에서 주로 확인되고 재갈과 등자에서 

관찰되는 사례는 적었다. 유기물 종류는 피혁과 직물, 섬유 외에도 모피로 추정되는 동물
털과 목질, 초본류가 관찰된다. 도항리 6호(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조사) 교구에서는 볍씨 
흔적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금속재질의 마구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유기물은 마구의 부속구 외에도 부장의

례와 관련되거나 매납 과정에서 마구 주변에 안치된 부장품의 가능성도 있다. 본 장에서
는 재질별 잔존 유기물의 양상을 소개한다.          

1. 마구 부속구

행엽의 입문, 운주의 각부와 구금구, 십금구 뒷면에서 주로 관찰되며 대부분 계의 일부

로 추정된다. 피혁 조직인 섬유다발만 관찰되는 사례, 동물털과 가죽이 확인되는 모피, 섬
유 조직이나 직물이 관찰되는 복수 소재가 있다.  

 1) 계   

A. 단일 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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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말과 말갖춤

피혁 섬유조직이 관찰된다. 피혁의 진위 여부는 섬유다발의 유무로 판별할 수 있다. 2

매 이상 겹친 형태가 도항리 8, 15호 출토 편원어미형행엽, 말이산 100ㆍ101호 식금구, 지
산동 44호 목심철제등자에서 확인된다.  

도항리 15호 행엽 뒷면의 입문 상부(도 2, 좌)에는 직경 20~30㎛의 피혁 섬유다발이 

(도 2, 중), 8호 행엽의 입문에서는 피혁 접지부를 바느질한 것으로 추정되는 S자 꼬임의 
섬유가 확인된다(도 2 우의 원 내부). 길이 방향의 양쪽 끝단이 마주보도록 접은 후 바느질
로 고정한 것이다. 

폭은 도항리 4(구34호)와 8, 15가 15㎜, 54호가 17~19㎜이고 두께는 8호가 3㎜, 48호

와 54호, HM 101호 십금구가 4~5㎜인데, HM 101호 십금구에는 2매의 피혁을 겹친 흔
적이 관찰된다(도 3 우).    

B. 직물심 피혁   

피혁 조직 사이에 직물흔이 확인되는 복수 재질의 계로 추정된다. 지산동 44호 십금구

와 검릉형행엽, 옥전 M3호 청동 귀면문운주에서 확인된다. 도 4의 지산동 44호 십금구 각
부 내면에는 피혁과 피혁 사이에 평직 직물이 위치한다. 위사와 경사 모두 S자 꼬임의 평
직물은 피혁 내부의 심과 같은 역할로 추정된다. 동일한 양상이 도 4 우의 검릉형행엽 입
문에서도 관찰된다. 피혁 중앙의 섬유는 S꼬임으로 폭 17~18㎜, 두께는 3㎜이다.

도 2. 도항리 15호 행엽 입문 피혁(좌)의 섬유다발(중), 8호 행엽 입문 가죽흔

도 3. 도항리 48호(좌), 도항리 HM 101호(중, 우) 식금구 가죽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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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지 영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

C. 모피

피혁흔과 동물털이 관찰되는 사례이다. 도 5의 도항리 15, 22호와 같이 모두 무각소반

구형운주의 단부에서 확인된다(c~f). 기왕에 주사전자현미경 조사로 큐티클과 메듈라 분
석을 실시한 복천동 7호 무각소반구형운주1)의 양상과도 일치하므로 가죽 표면에 동물털
이 있는 모피로 분류하였다.  

D. 피혁 끈목

리본상으로 가늘게 재단한 피혁끈을 엮어 제작한 끈목이다. 함안 도항리 문4호 철지금

1) 임지영·강나리, 「복천동 7호분 출토 무각소반구형운주 부착유기물의 동정」, 『복천동고분군

 Ⅷ』, 2018

도 4. 지산동 44호 십금구 내면(좌)와 각부 확대(중) 및 검릉형행엽의 입문(우) 

도 5 함안 도항리 15호(a~d), 22호(e, f) 무각소반주운주와 단부의 모피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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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은장운주 4점(도 6a 외)의 각부와 운주편 일부(도 6c)에서 확인되며 모두 폭 2㎜의 리본
상 끈 모양으로 잔존한다. 도 6f의 유기물 표면에서 피혁 다발이 관찰되었다. 끈목의 폭은 
18~20㎜이다. 복원 끈목(h)2)는 잔존 피혁흔을 바탕으로 복원 제작한 2조 엮음의 4

畝平

組紐이다. 유기물 잔존상태가 불량한 현 상태에서 4묘인지 또는 2묘인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견사를 합사하여 엮은 끈목 사례는 지산동 44호 십금구와 은장반원형금구, 연산동 M8

호 소찰, 생초 9호 청동경 등이 이미 소개3)되어 있지만 피혁제 끈목 사례는 2묘, 4묘 모두 
국내에서는 첫 보고 자료이다. 일본 고분시대 마구 가운데 4묘의 사례가 2례(

金鈴塚古墳, 

2) 도 5h의 피혁제 복원 끈목은 단국대학교 박윤미 선생님의 복원제작품이다. 
3) 박윤미, 「고대 끈목의 특성과 제작 기법에 관한 연구」, 『아시아민족조형학보』15, 아시아민족

조형학회, 2015, p135 

도 6 함안 도항리 문4호 운주(a~c)와 내면의 끈목흔(d~g) 및 복원 끈목(h:박윤미 선생님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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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지 영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

下石橋愛宕塚古墳), 2묘는 大谷古墳 외에 다수 보고되고 있다4).     

E. 견사 끈목

견사를 합사하여 엮은 끈목의 흔적이 지산동 45호 운주 각부와 검릉형행엽의 구금구에

서 관찰되었다. 운주 각부에 2묘의 끈목 2조가 같이 사용(도 7c)되고 있는데 각부에서 단
부로 갈수록 끈목의 간격이 밖으로 벌어지는 모양이다(b). 잔존 섬유의 두께와 단면 형태
(f)로 보아 견사 다발로 추정하였다. 구금구에서는 2묘 2조와 2묘 1조흔이 확인되어 후걸
이 구조 복원의 주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선행연구를 통해 유사한 형태의 끈목이 지산동 44호 십금구와 은장반원형금구, 연산동 

4) 片山健太郎, 「古墳時代馬具におけるの基礎的研究」, 『史林』 99-6, 史学研究会, 2016, p36~74

도 7 지산동 45호 운주(a, b)의 각부 끈목(c) 및 단부 피혁(d)과 확대(f)(g), 바느질한 실(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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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M8호 소찰, 생초 9호 청동경, 무령왕릉, 천마총에서 확인되었다5). 그런데 지산동 44호 십
금구의 끈목은 고정용 병의 폭 보다 좁고 십금구 내면과 접하는 가장 바닥부분에 위치한
다(도 4의 좌 참조). 이로 보아 44호 십금구에 잔존한 유기물 가운데 계의 용도로 사용된 
것은 직물심 피혁으로 판단되고, 구조상 피혁 최상부에 위치하는 끈목은 보조적인 역할로 
각 장식마구의 위치를 고정하거나 금구의 간격을 정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트
인 검릉형행엽의 유기물 흔적도 끈목이 아닌 직물심 피혁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현재까지 확인된 가야 마구 가운데 견사를 합사한 끈목을 계로 사용한 예는 지

산동 45호가 유일하다. 특히 45호 운주의 각부 4곳에 모두 2묘 2조의 끈목흔이 남아있는
데 검릉형행엽의 구금구에는 2묘 1조만 확인되고, 또, 수하식이 아닌 횡방향으로 이어지
는 끈목의 흔적이 관찰되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2) 행엽

A. 덧판 

운주나 행엽 뒷면에 유기물이 잔존하는 사례이다. 도 9의 도항리 문 54호 편원어미형행

엽은 철제 지판을 은장하였는데 뒷면의 은피와 철제 지판 사이에서 단면 40~50㎛로 불규
칙하게 얽혀있는 피혁 섬유다발이 관찰되었다(c). 

또 하나 특기할 점은 뒷면에 보이는 은장의 가장자리에 2㎜ 간격의 비교적 규칙적인 투

공 흔적이 확인된다는 것이다(d). 철제 지판을 둘러싼 은장 선단을 끌 등으로 눌러 고정한 

5) 박윤미, 전게서, 2015, p144

도 8. 지산동 45호 행엽 가상 복원도(a)와 구금구 뒷면(b)(복원 끈목은 박윤미 선생님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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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지 영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

흔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투공의 형태가 오목하지 않고 돌출되어 있다는 점(e)을 고려하
면 1. 은피를 두르기 전 지판 뒷면에 일정 간격의 돌출부가 존재했거나 2. 지판을 씌우기 
전에 은피 내면에서 투공한 가능성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자라면 철지행엽 뒷면에 일정 간격으로 바느질한 피혁을 부착한 후 은피를 씌웠는

데 실이나 가죽 등과 같은 돌출부로 인해 은피가 닿은 부분이 볼록하게 돌출되었다가 이
후 마모로 인해 닳은 흔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후자라면 은피를 고정하는 공정에서 발
생한 투공이나 행엽 바닥의 피혁과 연결하기 위한 바늘구멍으로 등의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B. 장식

도 10b는 도항리 현4(구34)호 심엽형행엽이다. 소문으로 명명되어 있지만 은장 안쪽에 

해당하는 철 부분에서 칠막 추정부(a)와 그 상부에 유기물흔(c)이 관찰된다. e는 유기물흔
의 확대 사진이다. 실체현미경 관찰만으로는 동정에 한계가 있어 조심스럽지만6) 현생 일

6) 철기에 잔존한 유기물을 육안 및 광학현미경만으로 동정 조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향후 유물 

조사에서 다양한 자연과학적 분석이 시도되기를 기대한다.  

도 9. 함안 도항리 문 54호 출토 평원어미형행엽과 은피(d, e) 및 가죽다발(c)의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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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본산 비단벌레의 딱지날개(d)에서 확인되는 규칙적인 간격의 날개맥과 점각이라 부르는 
미세한 홈이 표면에서 관찰된다. 철지 행엽에 칠로 접착제하여 비단벌레 날개를 부착한 
사례로 경주 황오동 100번지 출토 행엽7)이 있다.

2. 부장구

마구의 용도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부장 및 포장용 재질로 추정되는 유기물로 직물류

와 초본류가 있다. 부장용 직물도 개별 포장을 한 것과 일정면을 덮는 것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A. 포장용 직물

도 11의 직물은 밀도는 모두 다르지만 약한 S자 꼬임의 평직이다. 지산동 44호 십금구

는 최상부의 유리장식까지 직물이 덮고 있고, 옥전 M3호 마령은 투공 내부까지 직물흔이 
남아있다. 도항리 4호 검릉형행엽도 직물의 잔존 상태로 보면 천으로 행엽 전체를 둘러싼 
모양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마구의 용도와는 별개의 포장용 직물로 추정된다. 세 가

7) 용병주, 『철지비단벌레장식금동투조유물의 클리닝과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용인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도 10. 도항리 현4호 심엽형행엽의 표면(a~c, e)과 현생 일본산 비단벌레의 딱지날개(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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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지 영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

지 사례 모두 단순히 천을 덮은 것이 아니라 금구 한 점 한 점을 개별 포장한 것이다. 특히 
지산동 44호 십금구 뒷면에 직물심 가죽계가 부착되어 있었던 상황을 감안하면 부장 당시 
마구 세트가 계에 부착된 상태에서 각 금구를 천으로 둘러 개별포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포장이 완료되면 매납 행위가 이루어지는 당시에는 금동이나 은장 마구의 위용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B. 덮개용 직물  

함안 마갑총의 마갑에서 소찰 전면에서 수 종의 직물흔이 확인되었다. 잔존상태가 양호

하지 않지만 동일한 직물이 일정한 범위에 걸쳐 일정한 식서방향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부위를 나누어 덮은 것으로 추정된다. 도 12는 마갑총 경갑을 덮고 있는 능직의 일부이다. 

지산동  73호의  행엽  뒷

면에서도 구겨진 흔적이 없
는  평직흔이  확인되었다. 
잔존상태를 보면 덮은 직물
로 추정할 수 있으나 함안 
도항리 문54호 은장편원어
미형행엽 사례를 감안하면 
단순히 덮개나 깔개가 아닌 
행엽의 부속구나 또는 말의 일부를 덮었던 직물일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도 11. 지산동 44호 십금구(좌), 옥전 M3호 마령 투공(중), 도항리 4호 검릉형행엽(우)

도 12. 함안 마갑총 경갑(좌)과 지산동 73호 행엽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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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Ⅳ. 고찰

이상으로 5세기부터 6세기 전엽에 해당하는 함안지역 고분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옥전 

M3, 지산동 44, 45호분 출토 마구에 부착된 유기물흔적을 살펴보았다. 이 가운데 마구의 
용도와 관련된 유기물인 피혁과 직물은 대부분 계로 특정되는데 행엽이나 운주 바닥으로 
추정되는 사례도 각각 확인되었다. 고찰에서는 마구 복원과 관련되는 유기물만 추려서 살
펴보도록 한다.

먼저 다수의 사례가 확인된 가야 지역의 계에 대하여 기존 연구내용과 비교해 본다. 도 

13은 본 조사를 통해 확인된 가야지역 계의 모식도이다. 모두 낱장의 1매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접어서 띠상으로 제작하였다. 하지만 천마총이나 노동리 4호의 계와 같이 보조 피
혁끈이나 보조 견직끈이 장식된 이은석(2012) 분류 D, E형식8)은 확인되지 않는다.   

가장 주목되는 형태는 도 13의 D와 E의 끈목이다. 삼국시대 계의 사례 가운데 초출하

는 형식이고 일본열도에서 자주 출토되는 2묘 피혁 끈목뿐만 아니라 4묘, 그리고 견사를 
합사한 끈목도 확인되었다. 특히 말이산 4호의 4묘끈목은 루프(loop)기법으로 추정된다9).

도 7, 8의 지산동 45호 운주 각부와 행엽의 구금구에 잔존한 흔적에서 운주는 각부에 2

묘끈을 2조 나열10)하여 고정하지만 행엽의 구금구에는 일반적인 결구방식인 수하식이 아
닌 횡선을 1조만 돌리도록 배치
하는 등 마장 복원에 보다 구체
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지산동  45호  운주  내면에는 

각부의  끈목  흔적만이  아니라 
대부에도 피혁흔이 확인되고(도 
7d, g) 피혁과 끈목의 가장자리
를 고정한 실의 흔적도 남아있
다(도 7e). 피혁흔이 4묘끈목과 
운주 사이에 위치하므로 말 위
를 덮은 피혁이 아닌 운주바닥

8) 이은석, 「고대 동북아시아 계(繫)에 대한 연구」, 『중앙고고연구』11, 중앙문화재연구원, 2012, p97  
9) 중국 윈난성 李家山 69호묘(전한) 출토 청동제 저패기(貯貝器) 상부에 루프를 연결한 두 사람

이 마주보는 형상이 있어 이른 시기부터 여러 지역에 걸쳐 사용된 기법으로 추정되는데 5C기

경 중국과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박윤미, 전게서, 2015, p136)

10)  계를 2조로 사용한 예로 일본 시마네현 마츠에시 平所유적의 장식말 하니와가 있다.     

도 13. 계의 분류(

片山, 2016, p52, 도 7 개변)

A. 피혁

B. 직물심

D. 4묘끈목

E. 2묘끈목

C. 모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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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지 영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

을 덮었던 피혁으로 추정된다. 함안 도항리 문 54호 출토 평
원어미형행엽 뒷면, 은피 사이의 피혁도 유사한 용도일 것으
로 추정된다. 운주 대부에 가죽을 덧대는 형태는 일본 미야
자키현 에비노시 시마우치(

島內)고분 출토 무각십금구에서

도 확인된다.  

  시기차가 있지만 마구 뒷면에 피혁 받침한 사례는 도 14

의 평양 석암리 9호 출토 금동마면에서도 볼 수 있다. 마면
의 뒷면에는 말 머리에 고정하는 가죽 끈과 함께 금동 전면
을 가죽으로 댄 흔적이 잔존한다. 보고서에서는 가죽의 용도
를 마면과 말의 머리 사이가 뜨지 않도록 한 것11)이라고 설
명하였다. 동 고분에서는 금동원형포 뒷면에도 가죽을 덧대
어 바느질한 흔적이 확인되어 피혁 제작기법의 일례를 참고
할 수 있다12). 

마지막으로 모피계이다. 동물털 흔적이 관찰된 사례는 함

안 도항리 15호, 22호, 동래 복천동 7호 모두 무각소반구형
운주의 단부에서 관찰되는데, 일본열도에서 확인되는 모피계도 모두 무각운주에서 확인
된다13). 무각소반구형운주의 세트관계가 불분명한 것도 동일한 양상을 보이므로 출토상
황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11) 국립중앙박물관, 『평양 석암리 9호분』, 2018, p295
12) 국립중앙박물관, 전게서, 2018, p311
13) 片山健太郎, 전게서, 2016, p56

도 14 평양 석암리 9호 마면

(p295, 도면 48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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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Ⅴ. 맺음말

이번에 소개한 자료는 국립김해박물관 특별전을 계기로 실시한 것이다. 유기물 자료를 

통해 마구 복원을 돕고 제작기법과 재질적 특징에 따른 마구의 조합상을 통해 가야의 지
역별, 시기별 흐름을 찾고자 하였으나 필자의 능력부족으로 가야 마구 전반에 대한 조사
가 마무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부 유기물의 잔존양상에 대한 보고 형식으로 마무리한 것
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실체현미경 관찰이라는 조사 방법면에서의 재질 동정에도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복합 소재의 가능성이 충분히 상정되지만 주사전자현미경 분석
이나 박편 조사까지 유기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도항리 비단벌레행엽처럼 결과적으로 
유기물 동정에 대한 의문점만 남게 된다. 덧붙여 제작기법과 사용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을 위해서는 복원 실험 과정 또한 필수 요소라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마구에 사용된 끈목에 대해서는 앞으로 제작기법을 비롯하여 다양한 각도

에서 조사할 필요가 있다. 2묘끈목이 출현하는 6세기 초, 그리고 피혁제 4묘끈목 사례가 
확인되는 문4호분은 6세기 전반에 비정되는데 이 시기는 마구 부장 쇠퇴기로 구분된다. 
일본열도에서는 이 단계부터 2묘끈목이, 그 다음 단계에 모피계가 출현하는데 2묘끈목은 
재지계로 파악하고 있다. 끈목기법의 마구 도입 과정과 모피계 마구의 조합상에 대한 조
사가 필요하고 이는 면밀한 유기물 조사가 밑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

謝辭>

  장시간 유물 조사가 가능하도록 배려해주신 국립김해박물관의 김혁중, 김연미, 이정

근 선생님을 비롯하여 부족한 필자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주신 부산대학교 김두철, 이현우 
선생님, 단국대학교 박윤미 선생님, 문화재연구소 이은석 선생님, 일본나라문화재연구소 
片山健太郎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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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지 영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

참고문헌

국립중앙박물관, 2018, 『평양 석암리 9호분』 국립중앙박물관.
박윤미, 2015, 「고대 끈목의 특성과 제작 기법에 관한 연구」, 『아시아민족조형학보』15, 

아시아민족조형학회.

용병주, 2008, 『철지비단벌레장식금동투조유물의 클리닝과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용

인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이은석, 2012, 「고대 동북아시아 계(繫)에 대한 연구」, 『중앙고고연구』11, 중앙문화재연

구원.

임지영·강나리, 2018, 「복천동 7호분 출토 무각소반구형운주 부착유기물의 동정」, 『복

천동고분군Ⅷ』.

片山健太郎, 2016, 「古墳時代馬具におけるの基礎的研究」, 『史林』 99-6, 史学研究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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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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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에 대한 토론문_박윤미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

」에 

 대한 토론문

박 윤 미

단국대학교

의복은 인간이 생존에 필요한 필수물품이나 한반도에 거주했던 고대인의 의복 소재는 

우리나라의 기후적 특성상 실물로 남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고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마구의 잔존 유기물은 마구뿐만 아니라 당시 통용되던 섬유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실물자료이다. 수년전부터 고대직물의 실물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져 어느 정도 밝
혀지기는 하였으나 대부분 마직물과 견직물에 국한되어 있다. 모섬유에 관해서는 임지영
선생님이 주도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모섬유의 종류와 용도까지 구분하여 문헌기록으
로만 접하던 고대 모섬유의 실체가 점차 드러나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본 논문 역시 마구에 잔존하는 유기물에 관한 내용이나 의류 소재에도 적용할 수 있는 

실물자료로 매우 중요한 연구이다. 본 논문의 내용 중 다음의 몇 가지 질문으로 토론을 대
신하고자 한다. 

- 도항리 문 4호의 피혁끈(도 6)을 2조 엮음의 4

畝平組紐로 분류했는데 4畝平組紐는 

일본의 끈목 분류명칭이다. 4

畝平組紐는 10올이나 11올로 짠 것도 포함되는데 표면상 비

슷해 보여 구조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끈목을 표현할 때 8사, 12사 등 사
용한 총 올수로 표현한다. 도항리 4호분의 피혁끈은 총 11올이며 엮어질 때 반대편의 올
을 1올씩 건너뛰면서 짠 것으로 보이므로 ‘1올뜀 11사’나 ‘11사(1올뜀)’등으로 표현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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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있다. 이같이 올수와 뜀수를 함께 표현하면 좀 더 명확하게 끈목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으
므로 추후 올수와 뜀수로 표현해주시길 부탁드린다.

- (도 8a)의 빨간색 화살표시는 무엇을 뜻하는지? 이에 대한 설명이 없으므로 추가 설

명을 부탁드린다.

- 도항리 문 54호 편원어미형 행엽은 앞면의 은피에는 투공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뒷면

의 가장자리에만 고르게 투공 흔적이 있다. 그런데 구멍의 간격으로 보아 행엽과 같이 두
꺼운 재질을 고정하기 위한 바느질 흔적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행엽 
내부 소재와 은피를 접착물질로 1차 고정하고 가장자리만 타공을 하여 2차 고정시킨 물림 
흔적으로 볼 수는 없는지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자 한다.

- 현재까지 비단벌레가 발견된 사례 가운데 직물위에 부착되어 있는 것이 발견된 적은 

있었는지에 대해 알려주시기 바란다. 

- 유물에 잔존한 직물편으로 포장용과 덮개용으로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함안 마갑총의 경갑이나 가야의 각 고분에서 발견되는 철정 등에는 비교적 넓게 직물흔이 
남아있고 식서방향이 거의 동일하여 넓게 덮거나 깔았던 직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산동 44호의 십금구는 본 토론자가 조사한 바로도 최소 4점에 비슷한 식서방향으로 

마직물이 수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혹시 개별포장이 아니라 십금구가 달린 마구 
전체를 한번에 전체 포장했을 가능성은 없는지, 이에 대한 발표자의 생각을 듣고자 한다. 

- 모섬유뿐만 아니라 마섬유나 견섬유같은 직물의 경우 가장 정확하고 편리한 성분 분

석 방법은 어떤 방법이었는지 발표자의 경험에 의한 견해를 듣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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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잔존 유기물로 살펴 본 가야의 마구」에 대한 토론문_박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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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

이 현 우(부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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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

Ⅰ. 머리말  

사람이 말에 올라 말을 자유롭게 부리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마구가 필요하며, 마구

를 안정적으로 말에 착장하기 위해서는 가죽과 끈목(박윤미 2015) 등의 유기질끈이 사용
된다. 이 중 재갈을 고정하기 위한 굴레, 안장을 고정하기 위한 가슴걸이 그리고 후걸이
를 삼계(

三繫)라고 부른다. 삼계의 교차점이나 중심에는 운주·십금구, 장식금구가 사용되

어 장구와 장구를 서로 연결하고 장식 효과를 주는데 이를 삼계장식구라 통칭하기도 한다
(이현정 2008). 삼계에는 삼계장식구 외에도 방울과 행엽 등을 달아 장식성을 높이고 음
향효과를 준다. 특히 후걸이는 여러 조의 끈을 사용하여 복잡하게 만들거나 금·금동·은이
나 패각, 유리 등으로 꾸민 행엽·운주를 달아 그 장식성을 극대화한다. 후걸이는 끈의 숫자
와 형태에 따라 단조식과 복조식 그리고 격자식으로 나뉘며(김두철 1992), 격자식 중에는 
꼬리 밑으로 돌아가는 종대의 수가 1조 뿐인 약식격자식 혹은 단순격자식이 있다(강승희 
2011). 가야에서 후걸이의 사용을 알 수 있는 것은 본격적으로 운주와 행엽이 사용되기 시
작하면서부터로, 그 출현시점은 4세기 중엽경이다. 

본고에서는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전반대까지 가야 각지의 거점고분군에서 출토된 운주

와 행엽을 통해 후걸이를 복원하고 전체적인 가야 후걸이의 전개 과정에 대해 살펴보겠다.

Ⅰ. 머리말
Ⅱ.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

1. 전기가야 마장의 후걸이
2. 후기가야 마장의 후걸이

Ⅲ. 후기가야 마장의 후걸이
Ⅳ. 맺음말

목 차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

이 현 우

부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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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Ⅱ.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 

1. 전기가야 마장의 후걸이

낙동강 하류역에서 가장 먼저 운주가 출현하는 것은 4세기 중엽경의 김해 대성동91호

로, 금동제, 철제, 패제운주가 조합된다. 금동제운주는 삼연에서 제작되어 유입된 것이며, 
철제와 패제운주는 삼연에서 유입된 후 토착화된 마구이다. 패제운주는 굴레에, 영부운주
는 가슴걸이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걸이에 사용된 운주는 금동제 일체식 반구형운
주 1점과 이를 모방하여 만든 철제의 일체식 반구형운주에 패각을 결합한 운주 3점으로, 
양자는 다른 위치에서 출토되어 각기 다른 후걸이를 구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복원이 가
능한 것은 패각부 철제 반구형운주로, 5각이 1점, 4각이 2점 조합되어 복조식 후걸이를 구
성한다. 행엽은 대성동3호에서 출토된 철판 1매로 만든 심엽형행엽이 가장 빠른데, 운주
는 공반되지 않았다. 도굴이 심하여 정확한 매수와 공반관계를 파악하기 어렵다. 부산 복
천동60호에서도 환형운주가 1점 출토되었는데, 각과 행엽은 공반되지 않는다. 환형운주 1
점으로 구성되는 단조식 후걸이로 복원된다. 

5세기대의 대성동1호에서는 청동환 7점, 각 32점, 행엽 2점이 출토되었다. 청동환은 대

형과 소형으로 구분되는데 대형 2점, 소형 5점이다. 각 역시 대형 11점, 소형 21점으로 구
분된다. 대형 청동환 2점과 대형 각 11점이 조합되어 굴레에 사용되고, 소형 청동환 5점과 
소형 각 21점이 조합되어 후걸이에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 정확한 후걸이의 형태를 복원
하기는 어렵지만 청동환의 수와 각의 수에 근거하면 5각 환형운주 1점과 4각 환형운주 4
점에 2점의 행엽이 매달리는 격자식 후걸이로 복원할 수 있다. 이후 황남대총 남분 단계에 
신라에서 창출된 입주부운주 혹은 무각소반구형운주와 편원어미형행엽으로 구성된 격자
식 후걸이와는 다른 김해지역의 격자식 후걸이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대성동8호에서도 

표 1. 전기가야의 운주와 행엽 수량 및 후걸이 유형

운주 

행엽

후걸이

형식

수량

형식

수량

김해 

대성동91호
대성동91호

일체반구

4각1

1

-

일체반구

5각1/4각2

3

-

복조식

대성동3호

-

심엽

1

대성동1호

환형

(5각1/4각4)

5

심엽

2

격자식

대성동8호

심엽

3

(단조식)

부산 

복천동60호

환형

각×

1

-

단조식

복천동35 호

환형

환2 각7

2

심엽

1

단조식

복천동21 호

환형

환1 각6

1

-

단조식

복천동10 호

환형

환1 각6

1

심엽

2

단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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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이현우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

3점의 심엽형행엽이 출토되었으나 운주의 출토 여부는 알 수 없다. 단조식 후걸이로 복원
될 가능성이 높다.  

부산 복천동고분군에서는 이전 단계의 1점의 환형운주가 사용되는 단조식 후걸이의 전

통이 복천동21·22호, 10·11호까지 지속되는데, 6각 환형운주가 사용되고, 10·11호에는 2
점의 행엽이 매달린다. 35·56호분에서는 횡으로 병렬하는 2점의 환형운주에 2점의 행엽
을 매다는 단조식 후걸이가 출현한다. 

4세기 중엽경 삼연마구의 유입과 함께 낙동강 하류역의 김해지역에서는 4각· 5각 일체

식 반구형운주로 구성되는 복조식 후걸이와 심엽형행엽이 출현한다. 삼연에서는 격자식 
후걸이가 주를 이루는데, 4각· 5각의 운주 조합은 라마동 ⅡM16호와 21호에 나타난다. 
이들 운주는 용문의 반구형운주 위에 입주와 보요를 세워 장식하는데 반해 대성동91호 반
구형운주는 입주 없이 용문 만 주조되어 있다. 동쪽의 부산지역에서는 1점의 환형운주를 
중심으로 한 간단한 단조식 후걸이가 사용된다. 5세기대에 들어 김해지역에서는 다수의 
환형운주와 2점의 심엽형행엽이 조합되는 격자식 후걸이를 채용하는 동시에 3점의 심엽
형행엽이 수하되는 후걸이가 사용된다. 반면 부산지역은 기존의 환형운주를 중심으로 한 
단조식 후걸이를 계속 사용하며 2점의 심엽형행엽을 매단다. 

   

그림 1 . 전기가야 마장의 후걸이 모식도 (복조식/단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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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2. 후기가야 마장의 후걸이

(1) 환형운주와 심엽형행엽으로 구성되는 후걸이 

후기가야의 여러 지역에서 환형운주와 심엽형행엽을 중심으로 한 후걸이가 계속 유행

한다. 행엽의 형태와 문양은 변하지만 낙동강 하류역 마장의 후걸이 전통은 지속된다. 

부산지역에서 유행하던 1점의 환형운주를 사용하는 후걸이는 5세기 중엽 이후~6세기 

전반의 합천 옥전5,24,67-A,B,70,M7호에서 확인되며, 행엽은 수하되지 않는다. 옥전23
호에서는 2점의 환형운주와 3점의 금동제 심엽형행엽이 출토되었는데, 3점의 심엽형행엽
을 매다는 것은 대성동8호에서 처음 나타나는 후걸이다. 행엽이 3점인 점과 옥전28,68호
의 환형운주가 모두 3점인 점을 고려하면 소형 환형운주가 1점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4각식 환형운주를 중심으로 한 단조식 후걸이로 복원할 수 있다. 고령 지산동73호에서는 
3점의 환형운주와 2점의 심엽형행엽이 조합되는데, 중앙의 환형운주는 5각·6각 이상으로 
추정되어 복조식 후걸이로 복원된다. 

창녕 동리5호분에서는 1점의 대형 7각식 환형운주에 5점의 심엽형행엽을 매다는 후걸

이가 출현한다. 1점의 환형운주에 5점의 행엽을 매달아 단조식 후걸이에서 장식성을 극대
화하였다.

(2) 무각소반구형운주와 편원어미형행엽으로 구성되는 후걸이

환형운주와 심엽형행엽이 가야의 전통적인 후걸이를 구성한다면 무각소반구형운주와 

그림 2 . 환형운주와 심엽형행엽으로 구성되는 후걸이 모식도(단조식/복조식/단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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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이현우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

편원어미형행엽은 황남대총남분단계에 경주에서 정형화된 신라식 후걸이라 할 수 있다. 
가죽끈이 종횡으로 교차하는 곳마다 무각소반구형운주를 고정시켜 격자식 후걸이를 구성
한다. 무각소반구형운주와 편원어미형행엽으로 구성된 격자식 후걸이는 5세기 후반대 부
산, 창녕, 함안, 합천, 고령 등 여러 가야집단의 중심고분군에도 나타나 가야 전통의 단조
식·복조식후걸이와 함께 사용된다.

고령 지산동73호분에서는 환형운주와 심엽형행엽으로 구성된 복조식 후걸이와 함께 6

조의 횡대와 5조의 종대로 구성되고 9점의 편원어미형행엽이 수하된 격자식 후걸이가 확

그림 3. 격자식 후걸이와 단순격자식 후걸이 모식도 

지역

유구

운주

행엽

종횡대 수

후걸이

형식

수량

형식

수량

고령

지산동73호

무각소반구형

28

편원어미형

9

5×6

격자식

합천

옥전M1

무각소반구형

30

편원어미형

10

6×5

격자식

무각소반구형

6

편원어미형

6

2×3

단순격자식

옥전12호

무각소반구형

4

편원어미형

5

3×2

단순격자식

옥전35호

무각소반구형

5

편원어미형

4

(3×2)

단순격자식

함안

도항리8호

무각소반구형

49

편원어미형

13

7×7

격자식

도항리1 5호

무각소반구형

(4)

편원어미형

7

3조 이상

격자식

도항리22호

무각소반구형

9

편원어미형

3

(3×3)

단순격자식

창녕

계남리1호

무각소반구형

(1)

편원어미형

12

6조 이상

격자식

계남리4호

무각소반구형

(3)

편원어미형

13

6조 이상

격자식

교동89호분

입주부

(6)

편원어미형

13

6조 이상

격자식

송현동15호

입주부

2

편원어미형

6

(3×3)

단순격자식

표 2. 격자식 후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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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인된다. 옥전M1호에는 2세트의 후걸이가 부장되는데, 후걸이는 5조의 횡대와 6조의 종
대로 구성되며 10점의 행엽을 수하한 후걸이(A)와 3조의 횡대와 2조의 종대로 구성되며 
6점의 행엽을 수하한 후걸이(B)다. 옥전12,35호에서는 2조의 종횡대로 구성되며 4~5점
의 행엽을 수하한 후걸이가 확인된다. 옥전M1호(B)와 12,35호 후걸이는 말 꼬리 밑으로 
돌아가는 끈의 숫자가 하나인 단순격자식 후걸이이다. 

함안 도항리고분군 8호에서도 3점의 심엽형행엽으로 구성되는 후걸이 외에 7조의 종횡

대와 13점의 편원어미형행엽으로 구성된 격자식 후걸이가 확인되었다. 15호는 운주 4점
에 행엽 7점이 출토되었고, 22호분은 9점의 운주와 3점의 행엽에서 3조의 종횡대로 구성
되지만 말 꼬리 밑으로 돌아가는 끈의 숫자가 하나인 단순격자식 후걸이로 복원할 수 있다. 

창녕 계남리1호에서도 편원어미형행엽 12점, 4호에서 13점이 출토되어 6조 이상의 종

횡대로 구성되는 격자식 후걸이로 복원된다. 교동3호에서는 행엽은 2점 출토되었지만 운
주가 17점 출토되어 4조 이상의 종횡대로 구성되는 격자식 후걸이로 복원되며, 1호는 5점
의 편원어미형행엽이 출토되어 단순격자식 후걸이로 복원된다. 5세 기 4/4분기의 교동89
호에는 입주부운주가 등장하여 편원어미형행엽과 조합되는데, 6세기대까지 이러한 조합
이 사용된다.   

(3) 검릉형행엽이 수하되는 후걸이 

입주부·무각소반구형운주와 편원어미형행엽으로 구성된 격자식 후걸이는 황남대총 남

분 단계에 형성된 신라의 마장이다. 5세기 4/4분기 후기가야에서는 검릉형행엽이라는 독
특한 행엽이 출현하는데, 함안 말산리54호, 부산 연산동M3호, 합천 옥전M3호 검릉형행
엽이 가장 고식이다. 검릉행행엽 3점이 주를 이루며 대부분 환형운주와 조합되다. 환형운

지역

유구

검릉형행엽

수량

운주

후걸이

형식

수량

부산

연산동M3

2

환형

1

단조식

합천

옥전M3

3

6각1/4각2 환형

3

단조식

3

환형

3

단조식

고령

지산동44호

6

일체식 반구형

7

단순격자식

함안

말산리54호

3

7각 환형

1

단조식

말이산25호

3

환형

1

단조식

말이산26호

3

환형

1

단조식

말산리451-1번지

3

환형

1

단조식

창원

다호리B1제사유구

3

4각 환형

4각 조합식 반구형

1
3

단조식

고성

송학동1A-1

1

일체식 반구형

(2)

(단조식)

송학동1A-6

2

-

산청

생초M13

3

(4각) 환형

1

단조식

표 3. 검릉형행엽이 수하되는 후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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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이현우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

주에 조합식 반구형운주가 추가되기도 하며, 고령 지산동고분군에서는 일체식 반구형운
주와 조합되는 예도 있다. 

합천 옥전M3호에서는 대형의 검릉형행엽 3점과 동제 환형운주 3점이 조합된 후걸이

와 소형의 검릉형행엽 3점과 철제 환형운주 3점이 조합된 후걸이가 확인된다. 전자의 중
앙 환형운주에는 수면문을 타출한 6점의 각이 공반되고, 좌우 환형운주에는 각각 4개의 
각이 공반되는 후걸이로 복원할 수 있다. 횡으로 병렬하는 3개의 환형운주를 배치한 것은 
이전 시기 옥전고분군의 단조식 후걸이의 전통으로, 심엽형행엽을 대체하여 검릉형행엽
을 매달았다. 

함안 말산리54호는 7각의 환형운주 1점에 검릉형행엽 3점이 수하된다. 환형운주 1점에 

여러 점의 행엽을 매다는 단조식 후걸이는 이전 시기 부산, 김해, 창녕지역 등에서 유행하
던 가야 후걸이의 전통이다. 환형운주 1점에 검릉행엽 3점을 매다는 단조식 후걸이는 말
산리54호에서 확립되어 6세기 전반대의 26호, 25호, 451-1번지 무덤까지 지속된다. 

1점의 환형운주에 2~3점의 검릉형행엽을 매다는 단조식 후걸이는 부산 연산동M3호

와 산청 생초M13호에도 확인되어, 5세기 4/4분기~6세기 1/4분기 넓은 지역의 후기가야 
수장층의 마장으로 채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령 지산동44호에서는 환형운주 대신 일체식 반구형운주 7점을 배치하고 6점의 검릉

형행엽을 수하하는 후걸이가 등장한다. 단순격자식 후걸이로 복원되는데, 이는 이전 시기
의 무각소반구형운주와 편원어미형행엽으로 구성된 단순격자식 후걸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림 4. 검릉형행엽이 수하되는 후걸이 모식도 (지산동44호 단순격자식 / 기타 단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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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일체식 반구형운주와 검릉형행엽을 배치한 것이다. 반구형운주의 발부에는 감색 유리를 
상감하고, 행엽에는 방울을 달고, 계는 끈목을 사용하여 장식성을 극대화하였다. 고성 송
학동1A-1호에서도 일체식 반구형운주 2점과 검릉형행엽 1점이 출토되었는데, 후걸이 중 
일부만 부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창원 다호리B1제사유구에서는 대형의 환형운주 1점, 4각의 조합식 반구형운주 3점과 

검릉형행엽 3점이 출토되었다. 다른 행엽이 공반되지 않으므로 환형운주와 조합식 반구형
운주가 하나의 후걸이를 이룰 가능성이 크다. 중앙에 환형운주가 있고 그 좌우와 꼬리 쪽
에 반구형 운주를 하나씩 배치한 단조식 후걸이로 복원할 수 있다. 이러한 후걸이는 6세기
대 반구형 운주가 본격적으로 후걸이에 채용되기 시작한 이후 기존의 환형운주가 중심이 
되는 단조식 후걸이를 개량한 것을 볼 수 있다.

(4) 반구형운주와 심엽형·종형행엽으로 구성되는 후걸이

경주에서 5세기 4/4분기 천마총, 은령총, 금령총에서 입주부운주와 반구형운주가 공반

되고 6세기 1/4분기의 호우총에는 반구형운주 만이 출토되어 신라 마장의 주류를 점하게 
되며, 자엽형행엽이나 종형행엽 등이 만들어진다(김두철 1992).

6세기대 후기가야의 제 집단에서도 반구형운주를 중심으로 한 후걸이를 사용한다. 일

지역

유구

운주

행엽

후걸이

형식

수량

형식

수량

고령

지산동45-1호

4각 일체식 반구형

대1 소2

심엽형

3

단조식 혹은 단순

격자식

3각 일체식 반구형

2

합천

옥전M4

4각 일체식 반구형

대2 소3

심엽형

(1/1)

(단순격자식)

5각 이상 조합식 반구형

1

단조식 혹은 복조

4각 조합식 반구형

2

옥전M6

4각(분리) 일체식 반구형

대1 소2

심엽형

5/3

(단조식)

8각 조합식 반구형

3

창녕

송현동6호

4각 조합식 반구형

대2 소4

심엽형

2/3

단순격자식

4각 일체식 반구형

1

송현동7호

5각 조합식 반구형

1

심엽형

5

단순격자식

4각 조합식 반구형

7

송현동15호

4각 조합식 반구형

4

심엽형

2

단순격자식

계성Ⅲ-1호

4각 일체식 반구형

대1 소9

종형

4

복조식 혹은 단순

격자식

함안

암각화고분

5각 이상 조합식 반구형

1

(종형)

(1)

단조식

4각 조합식 반구형

3

함양

중생원촌1호

5각 일체식 반구형

1

심엽형

3

단조식

고성

송학동1C호

4각 일체식 반구형

3

종형

3

단조식 혹은 단순

격자식

3각 일체식 반구형

2

표 4. 반구형운주를 중심으로 한 후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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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이현우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

체식 반구형운주와 중앙에 이모가이 등을 끼워 넣는 조합식 반구형운주를 사용하며, 일체
식 반구형운주의 형태지만 각부가 분리되는 것도 있다. 공반되는 행엽은 대부분 인문당초
문, 자엽문이나 투조문으로 장식한 횡장한 심엽형행엽이며, 창녕이나 고성지역에서는 종
형행엽이 조합되기도 한다. 

고령 지산동45호분1호와 고성 송학동1C호에서는 4각 일체식 반구형운주 3점과 3각 일

체식 반구형운주 2점으로 구성된 후걸이가 사용된다. 전자는 후걸이에 2조로 된 끈목이 
사용되고 중앙에 대형의 반구형운주가 배치되며 심엽형행엽이 매달린다. 후자는 종형행
엽이 수하된다. 상단에 3개의 4각 일체식 반구형운주가 배치되고 양쪽 하단에 3각 일체식 
반구형운주가 배치되어 단조식 후걸이의 중앙에 1조의 횡대가 지나가는 형태로 복원할 
수 있다. 후걸이의 형태는 단순격자식에 가깝다.

합천지역에서는 옥전M4호와 M6호에서 반구형운주와 심엽형행엽이 출토되었다. 4각 

반구형운주가 3, 5점 조합되는 후걸이, 5각 이상의 반구형운주와 4각의 반구형 운주가 조
합되는 후걸이, 8각 반구형운주가 중심이 되는 구성된 후걸이가 확인된다. M4호에서 출
토된 4각 일체식 반구형운주 5점은 단순격자식 후걸이로 복원되며 5각 이상의 조합식 반
구형운주와 4각 조합식 반구형운주 2점은 단조식 혹은 복조식으로 복원될 가능성이 있다. 
M6호에서 4각이 분리된 일체식 반구형운주 3점은 단조식 후걸이로 복원할 수 있다. 3점
의 운주를 횡으로 배치하여 단조식 후걸이를 구성하는 것은 이전 시기부터의 옥전고분군 
후걸이의 전통이다. 반면, 3점 출토된 8각 반구형운주느 하나의 후걸이를 형성하는지 혹
은 복수의 후걸이를 형성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림 5. 반구형운주를 중심으로 한 후걸이(중생원촌1호 단조식, 기타 단순격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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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창녕지역은 4각 반구형운주 만으로 구성된 후걸이와 5각 반구형운주와 4각 반구형운주

가 조합된 후걸이가 사용된다. 대부분 단순격자식 후걸이로 복원할 수 있다. 4각 반구형운
주는 한 후걸이 내에 4, 6, 10점이 사용된다. 5각 반구형운주가 중심이 되는 경우 7점의 반
구형운주와 조합된다. 

함안지역의 암각화고분에서도 5각 이상의 조합식 반구형운주 1점과 3점의 4각 조합식 

반구형운주, 종형행엽으로 추정되는 행엽이 조합되는 후걸이가 확인된다. 상단에 3점의 4
각 반구형운주를 배치하고 하단에 하나의 5각 이상의 반구형운주를 배치하거나 상단에 4
각 반구형운주 2점과 5각 반구형운주 1점을 배치하고 하단에 대각선 방향으로 4각 반구
형운주를 배치하는 단조식 후걸이로 복원할 수 있다.  

함양지역에서는 5각 반구형운주 1점과 심엽행행엽 3점이 출토되었다. 반구형운주의 3

각을 지나는 끈은 3점의 행엽과 연결된다. 안장에서 연결된 2조의 끝은 운주 아래에서 교
차하여 꼬리 밑으로 돌아가는데 8자형을 이루어 단조식 후걸이로 복원된다. 5각 중 나머
지 2각은 안장에 연결된 2조의 끈이나 꼬리 밑으로 들어가는 2조의 끈에 부착된다. 각이 5
개만 부착되어 있을 뿐 7각 운주의 역할을 한다.    

이외에 행엽이 공반되지 않는 예도 많다. 함안 도항리47호에서 4점의 조합식 반구형운

주가 출토되어 단순격자식 후걸이로 복원할 수 있다. 옥전M11호에서는 6각의 조합식 반
구형운주가 1점 출토되었는데, 단조식 후걸이를 구성한다. 산청 중촌리3호의 2점 이상의 
5각 조합식 반구형운주를 사용하는 후걸이는 단조식 후걸이로 복원할 수 있다. 의령 경산
리2호는 8각 일체식 반구형운주 1점과 4각 일체식 반구형운주 2점이 출토되었다. 중앙의 
대형 8각 운주는 발부가 높고 상면에 2단의 화형 장식을 부착하고 보주형 꼭지를 끼워 넣
었다. 장식성이 극대화된 반구형운주이다. 4각 운주와 중앙 8각 운주의 두 각에서 끈이 연
결되어 말 꼬리 밑으로 돌아가는 복조식 후걸이로 복원할 수 있다.

반구형운주를 중심으로 한 후걸이는 단조식, 복조식, 단순격자식 후걸이를 구성한다. 

반구형운주는 인동당초문, 자엽문, 투조문으로 장식된 횡장한 심엽형행엽 및 종형행엽과 
조합되는데 경주에서 형성된 후걸이이다. 가야지역에서는 4각, 5각, 6각, 8각 등 다양한 
반구형 운주가 사용되고 조합되는 운주와 행엽의 수 역시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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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

Ⅲ. 가야 후걸이의 전개 과정

4세기 중엽 삼연마구의 유입으로 입문용금구를 가진 표비, 등자, 경식안을 비롯하여 행

그림 6. 가야 후걸이의 전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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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엽과 운주가 낙동강 하류역에 등장한다. 이때 5각과 4각의 일체식 반구형 운주로 구성된 
복조식 후걸이와 환형운주와 심엽형행엽이 조합된 단조식 후걸이가 출현한다. 5세기대 가
야지역의 수장묘에는 여러 점의 환형운주와 심엽형행엽을 조합하여 만든 단조식과 복조
식 후걸이가 부장된다. 특히 합천 옥전고분군에서는 3점의 환형운주를 횡으로 병렬하여 
후걸이를 구성하는 전통이 확립된다. 

5세기 3/4분기 황남대총남분에서 다수의 무각소반구형운주·입주부운주와 편원어미형

행엽으로 구성된 격자식 후걸이가 출현한다. 고령, 합천, 창녕, 함안 등 후기가야 제 집단
은 기존의 환형운주와 심엽형행엽으로 구성한 단·복조식 후걸이를 사용하는 동시에 경주
에서 형성된 새로운 후걸이를 적극 채용한다. 특히 무각소반구형운주와 편원어미형행엽
의 조합을 받아들이는데, 5~7조의 종횡대를 가진 복잡한 격자식 후걸이를 구성한다. 동시
에 격자식 후걸이를 간략화하여 단순격자식 후걸이를 만든다. 

5세기 4/4분기 격자식·단순격자식 후걸이를 사용하는 동시에 합천, 함안, 부산 등지에

서 검릉행행엽이 출현하여 환형운주와 조합되어 단조식 후걸이를 구성한다. 신라의 후걸
이와 구별되는 가야식 후걸이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함안에서는 1점의 환형운주에 3점
의 검릉형행엽을 매다는 단조식 후걸이 전통이 성립하고, 합천에서는 기존의 전통대로 3
점의 환형운주 3점의 검릉형행엽을 수하한다. 

6세기 전반대에 경주에서 새롭게 등장한 반구형운주와 횡장한 심엽형행엽, 종형행엽 

등으로 구성된 마장이 가야지역에 유입된다. 고령에서는 검릉행행엽에 반구형운주를 조
합하여 단순격자식 후걸이를 구성한다. 단순격자식이지만 끈목을 사용하고 운주에 유리
를 감입하고 행엽에 방울을 다는 등 화려하게 장식한다. 또한 4각, 5각, 6각, 8각 등 다양
한 반구형 운주를 조합하여후걸이를 구성하는데, 조합식 반구형운주는 이모가이 등의 패
각으로 장식하였고, 높은 발부에 화형장식과 보주형꼭지를 가진 장식성이 극대화된 일체
식 반구형운주도 제작된다. 다수의 무각소반구형운주와 입주부운주로 구성하는 격자식후
걸이는 쇠퇴한다. 반구형운주는 인동당초문, 자엽문, 투조문 등으로 장식된 횡장한 심엽형
행엽 및 종형행엽과 조합되어 단조식 혹은 단순격자식의 화려한 후걸이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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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

Ⅳ. 맺음말

동북아시아에서 기승용 말에 단조식과 복조식, 격자식 후걸이가 모두 사용되기 시작하

는 것은 서진(

西晉)시기부터이며, 서진의 후걸이는 모용선비의 삼연마구에도 영향을 미친

다(이현우 2021). 가야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운주와 행엽으로 구성된 후걸이가 출현하는 
시점은 4세기 중엽경으로, 삼연마구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동시에 빠르게 토착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출현한 단조식·복조식 후걸이는 6세기 전반까지 가야지역에서 유행
하는데, 가야의 제 집단은 자신들만의 운주와 행엽을 제작하여 후걸이에 사용한다. 동시
에 신라에서 형성된 새로운 마장이 유입되는데, 가야 제 집단은 기존의 후걸이 전통을 유
지하면서 신라의 식마문화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자신들만의 마장을 창출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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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참고문헌

[보고서 제외]
姜昇姬, 2011, 「加耶·新羅의 후걸이(尻繫) 硏究」, 釜山大學校 大學院 考古學科 文學碩

士 學位論文.

金斗喆, 1992, 「신라와 가야의 馬具 -馬裝을 중심으로-」, 『韓國古代史論叢』3.
박윤미, 2015, 「고대 끈목의 특성과 제직 기법에 관한 연구」, 『아시아민족조형학보』15.
李炫姃, 2008, 「嶺南地方 三國時代 三繫裝飾具 硏究」, 慶北大學校 大學院 考古人類學

科 文學碩士 學位論文.

이현우, 2021, 「魏晉馬具考」, 『百濟文化』64,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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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에 대한 토론문_이현정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에 
 대한 토론문

이 현 정

울산시청

한국 마문화의 연구 분야는 다양하다. 그중 삼국시대 마문화 연구는 말을 부릴 때 사용

하는 ‘마구’에 주목하여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 마구라는 물품을 말에 장착하기 위
해서는 유기물질인 끈을 이용하게 되는데, 말의 머리에는 굴레, 가슴 쪽에는 가슴걸이, 엉
덩이 쪽에는 후걸이가 돌아가고 이를 ‘삼계’라 부르기도 한다. 삼계의 복원이자 재갈, 안
장, 등자, 운주와 행엽 등의 여러 마구들이 말에 장착된 모습. 즉 마장(

馬裝)의 복원은 삼

국시대 마문화 연구에서 활발하게 연구된 분야는 아니었다. 이는 부식이 쉬워 지금까지 
남아있기 어려운 유기물질로 이루어진 삼계의 특징에서도 기인할 것이고, 출토된 여러 종
류의 마구들이 어떻게 조합ㆍ구성되어 연결되었는지는 그 판단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현우선생님의 발표문은 마장 중 특히 후걸이의 복원에 주목하였고 그 대상을 가야지

역에 두었다. 먼저 가야를 시기별로 크게 전기가야, 후기가야로 구분하고 후걸이 복원안
을 단조식, 복조식, 격자식 구조로 분류하여 제시한 뒤, 가야 후걸이가 시기별로 어떻게 전
개되어 갔는지를 검토하였다. 필자는 토론자로서 발표문을 검토한 결과, 약 200년 이상 
역동적이고 화려하게 전개된 가야의 마문화를 텍스트만이 아닌 도면 등의 시각적인 자료
로 제시하여 그 양상을 생생하게 전달해준 것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본 토론문은 발표문
을 읽으면서 든 몇 가지 궁금증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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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1. 마장 복원의 방법론과 기준은 무엇인가?

마장 복원은 여러 종류의 마구들이 어디에, 어떻게 조합ㆍ구성되어 연결되는지가 관건

이다. 그렇다면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기준을 선정하고, 설득력 
있는 방법론에 근거하여 마장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발표문에서 선택한 마장 복원의 기준은 기본적으로 후걸이를 구성하는 운주와 각(

脚), 

행엽의 ‘수량’에 근거하여 복원안이 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대성동 91호에서 패각부 철제
반구형 운주 5각 1점, 4각 2점이 조합되어 복조식 후걸이를 구성한다’, ‘옥전 M11호에서
는 6각 조합식 반구형운주가 1점 출토되었는데 단조식 후걸이를 구성한다’라는 서술방식
이다. 운주, 행엽 등의 수량에 근거하여 단조식, 복조식, 격자식 구조로 복원되었는데, ‘수
량’을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기준으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인지, 수량 외에도 마장 복원을 
위해 검토해야 할 기준은 무엇인지, 발표문에서 제시한 다양한 마장 복원안은 어떠한 방
법론에 근거하여 진행되었는지 문의드린다.

2. 삼계 중에서 굴레용, 후걸이용으로 구분할 수 있는 근거는?

토론자는 의성 대리리 3호분 출토 마구의 출토정황과 수량 등을 근거로 굴레, 가슴걸

이, 후걸이의 마장 복원안을 시도한 바 있다(이현정 2006). 당시 복원을 진행하면서 느꼈
던 점은 출토마구의 형태와 수량이 마장 복원에 중요한 부분이지만, 개별 마구의 출토정
황을 면밀하게 파악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발표문의 대상은 마장 중 후걸이에 집중되었지만, 출토마구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운주의 크기, 형태 등에 따라 굴레용과 후걸이용으로 구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김해 대성
동 9호분에서 ‘패제운주는 굴레에, 영부운주는 가슴걸이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와 대
성동 1호분의 출토사례를 설명하고 ‘대형 청동환 2점+대형 각11점’은 굴레용, ‘소형 청동
환 5점+소형 각 21점’은 후걸이용으로 구분하는 등 형태와 수량으로 용도를 추정하고 있
다. 이러한 용도 추정은 발표자가 제시한 대로 운주의 형태와 수량만으로도 가능한 것인
지, 가능하다면 어떠한 기준에 근거하여 그 용도를 구분할 수 있는지 문의드린다. 

더불어 환형운주와 환형운주에 공반되는 ‘각’에 대한 검토 시, 어떠한 기준으로 ‘각’이

라 판단할 수 있는지도 궁금하다. 반구형 운주ㆍ십금구는 각이 일체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각의 수를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환형운주는 같이 출토된 ‘각(

脚)’이 있는 경우도 있고, 

각 없이 환형운주만 출토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 환형운주에 남아있는 끈의 흔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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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에 대한 토론문_이현정

을 근거로 각 수를 추정할 수도 있다.1) 같이 출토된 ‘각(

脚)’이라 추정되는 유물도 그 형태

가 일반적으로 상원하방형 또는 방형의 금구(

金具)인데, 환형운주와 아주 가깝게 출토되

었거나 부착된 경우에는 환형운주의 ‘각’일 가능성이 높지만, 멀리 떨어져 출토된 경우에
는 어떻게 ‘각’이라 판단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이러한 형태의 금구는 환형운주의 각으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재갈, 행엽의 구금구로 사용되기도 하고, 판형운주의 각으로 사용되
기도 하기 때문이다. 

3. ‘가야 마장’만의 특징은 무엇이고, ‘가야 마장’의 양상과 변화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발표문의 주제는 가야 마장이다. 논문의 맺음말에는 ‘가야 제 집단은 자신들만의 운주

와 행엽을 제작하여 후걸이에 사용한다’, ‘가야 제 집단은 기존 후걸이 전통을 유지하면서 
신라의 식마문화를 수용, 발전시켜 자신들만의 마장을 창출해낸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가야 마장만의 운주와 행엽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자신들만의 마장을 

창출한 ‘가야 마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같은 시기 주변에 존재하였던 신
라, 백제와는 다른 ‘가야 마장’만의 모습은 무엇인가? 그러한 차별성은 마구의 조합구성에
서 보이는 것인지, 삼계의 구조에서 보이는 것인지 문의드린다. 

또한 가야는 아시다시피 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등 여러 가야 정치체가 있

는데, ‘가야 마장’이라 특정한 마장이 여러 가야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가? 아니면 특정 
가야에서만 보이는가? 공통적인 요소라면, 마장의 기본 모델(model)이 있고 그 모델에서 
변형, 발전되어 나간 것인지? 아니면 각 집단, 정치체마다 모두 다른 형태의 마장을 구성
하였는지 발표자의 의견을 듣고싶다.

마지막으로 발표문에서는 전기가야, 후기가야의 여러 마장 복원안들이 제시되었고, 운

주와 행엽의 조합구성뿐만 아니라 마장 구조에서도 다양한 양상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여러 가야권역에서 확인되는 마장의 다양한 양상과 그 변화과정은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
고 있는가? 정치적 현상인가, 문화적 유행인가? 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가야 마문화의 

1) 고령 지산동 44호분에서는 발부 중앙에 감색유리가 끼워진 반구형운주 외에도 환형운주, 십금

구가 출토되었다. 환형운주로 추정되는 철제 환의 표면에는 연결된 끈의 흔적으로 생각되는 유

기질이 2.2~2.4㎝의 일정한 폭을 이루며 부착되어 있다. 이러한 흔적은 가죽끈이 부식되고 끈

의 가장자리만이 녹으로 변하여 남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 연결되었던 가죽끈의 폭을 추정

하는 데 유용하다. 즉 대형 철제환은 2.2~2.4㎝ 폭을 가지는 가죽끈이 총 6줄 연결된 6각 환형

운주로 추정된다(諫早直人ㆍ李炫姃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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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모습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또한 같은 시기에 단조식, 복조식, 격자식 마장이 공존하고 있
고, 하나의 유구 내에서도 다른 양식의 마장이 확인되고 있는데,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
는지도 문의드린다. 

참고문헌

諫早直人ㆍ李炫姃, 2008, 「고령 지산동 44호분 출토 마구의 재검토」, 『경북대학교박물

관 年報 2007』제5호, 慶北大學校博物館..

이현정, 2006, 「부록1. 義城 大里里 3號墳 第2槨 出土 馬裝의 復原」, 『義城 大里里 3號

墳』, 慶北大學校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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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 마장의 후걸이 복원」에 대한 토론문_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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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 습속을 중심으로-

장 윤 정(경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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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윤 정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습속을 중심으로- 

Ⅰ. 머리말

  가야는 삼국시대 낙동강 서쪽의 영남지방에 자리하고 있는 여러 정치체의 통칭이다. 그 
가운데 김해의 금관가야(구야국, 가락국), 함안의 아라가야(안야국, 안락국), 고성의 소
가야(고자국), 고령의 대가야(가라국) 등이 대표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다(한국고고학회 
2010). 여기서는 각 지역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여러 문화요소 중에 하나인 마구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마구에 관한 기존의 연구 성과는 편년, 제작방법, 계통 그리고 주변지역 
즉, 중국 동북지역과의 교류 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문헌에 기술된 내용과 
고구려 고분벽화에 표현된 기마 혹은 기병에 근거하여 마장의 유형을 분류하고 이것을 실
제 고분에서 출토된 마구 혹은 무기에 접목시켜 삼국시대의 무장, 기병, 전쟁 등을 복원하
기도 한다. 이번 논고에서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마구가 가지고 있는 기능적 역할
을 강조하기보다는 무덤의 부장품 즉, 장례과정 중에 사용되는 하나의 물품으로 생각하여 
마구가 무덤에 부장되어 있는 양상에 주목하고자 한다. 무덤에서 출토된 마구의 종류 및 
조합관계 등에 보이는 변화를 통해 당시 각 지역에서 행해졌던 매장의례를 복원하고자 한
다. 시간적 범위는 4~6세기를 중심으로 하며 매장주체부의 변화, 즉 목곽묘, 석곽묘 등에
서 출토된 

馬裝이 시간적, 공간적 변화에 따라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살펴봄으로서 가야 

Ⅰ. 머리말
Ⅱ. 각 지역별 출토 마구의 현황과 특징

Ⅲ. 마구의 부장 습속으로 본 의례적 성격
Ⅳ. 맺음말

목 차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 습속을 중심으로-

장 윤 정

경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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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내의 장례습속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때 유적에 관한 시간적 위치는 보고자의 의
견을 최대한 존중하여 각 유구 혹은 유적간의 선후관계는 상대적 순서 혹은 연대를 서술
하고자 한다1). 공간적으로는 가야라고 규정된 지역 가운데 김해, 함안, 합천, 고령 등 마구 
부장이 활발한 지역을 대상으로 한다. 

Ⅱ. 각 지역별 출토 마구의 현황과 특징

  여기서는 김해, 함안, 합천, 고령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각 지역의 대표적인 고분군을 대
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유적 내에서 목곽묘와 석곽묘로 구분한 후 각각의 매장주체부에
서 출토된 마구의 현황을 파악하고 시간적 흐름에 따른 그 특징을 설명하고자 한다. 

    1. 김해지역

  김해 대성동고분군 내의 목곽묘 출토 마구 현황은 표1과 같다. 먼저 대성동 91호 단계부
터 마구 부장이 확인되고 있다. 마구는 동쪽 유물군, 곽내 순장자 발치, 주피장자 부근 등
에서 수습되었다. 이 가운데 운주 및 방울은 금동ㆍ청동ㆍ철제 등 다양한 재질과 함께 형
태도 기존에 알려진 한반도 유례보다 중국 조양 원대자벽화묘와 안양 효민둔 154호묘 출
토품과 비교될 정도이다(대성동박물관 2015). 이러한 자료의 특성에 근거하면 마구의 형
태와 재질에서 외래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91호에서는 4점의 
재갈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표비에 해당된다. 

鑣의 재질에 따라 녹각제, 철제 등으로 구분

된다.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등이 갖추어진 전체적인 마장의 모습이기보다는 재갈
을 중심으로 한

 複數 부장이 확인되고 있다. 4세기대로 추정되는 대성동 2호분에서는 3점

의 재갈이 출토되었다. 청동제 

圓形(X자형), 표(철제 1, 철제+목제 1) 등으로 재갈의 종류

가 다르며 

鑣의 재질 또한 다르다. 또한 대성동 57호분의 경우, 2점의 재갈이 알려져 있는

데 재갈멈추개의 형태가 심엽형, 말각방형을 띠며 재질은 모두 철제이다. 한편, 대성동 70

1) 김두철, 우지남, 류창환, 심재용, 諫早直人 등의 연구 성과와 각 유적의 보고자 연대를 참고

하여 상대적인 선후관계를 설정하였다(이난영·김두철 1999, 우지남 2000, 류창환 2007, 심재

용 2019, 諫早直人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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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장 윤 정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습속을 중심으로- 

호분, 47호분, 3호분, 39호분 등은 주부곽식 목곽묘에 해당되며 이 가운데 마구가 출토된 
위치가 대부분 주곽이고 39호분만 부곽이다. 또한 3호에서는 주곽 상부에서 심엽형행엽
이 수습되었으며 행엽은 철판 1매로 만들어진 형태이다. 이 단계까지는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등 전체적으로 하나의 세트가 확인된 유구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마구 가운데 재갈이 가지고 있는 기능은 말의 입에 장착하여 기승자의 의지를 전달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보통 하나의 마구 세트, 즉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등의 종류를 고루 갖춘 마장에서 재갈은 1점 동반되는 것이 기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
면 이 시기 대성동고분군을 조성한 집단은 재갈을 2점 이상 

多數 부장하는 습속을 보이고 

있다. 또한 말과 연관되는 것을 재갈로 대변하고 있다. 
  5세기대로 추정되는 대성동 1호분에서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등 하나의 세트가 갖
추어진 마장이 확인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안장의 내연금구는 금동제이고 철
제 못을 사용한 형태이다. 재갈은 인수호로 그 존재를 추정할 수 있으며 목심철판피윤등
은 2점 출토되었다. 행엽은 심엽형이며 철판 위에 금으로 된 원형판을 얹고 주연부에만 상
판을 덮은 후 철지은장 못으로 결합한 형태이다. 대성동 57호분, 1호분, 93호분 등에서는 
馬冑가 확인되고 있다.

표1. 김해 대성동유적 목곽묘 출토 마구 현황

시기

유구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방울

마주

마갑

4세기 2/4

91호분

4세기 3/4

70호분(

主)

2호분

68호분

47호분(

主)

 

4세기 4/4

3호분(

主)

39호분(

副)

57호분

●2)

5세기 1/4

1호분(

主)

8호분

5세기 2/4

93호분(

主)

  다음은 김해 대성동고분군 내 수혈식석곽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표2). 마구는 4세기 
후반부터 알려지고 있다. 그 사례는 1예이지만 4세기대의 목곽묘에서 보이는 재갈의 복수 

2) 諫早直人, 심재용, 류창환, 우지남 등의 연구 성과와 각 유적의 보고자 연대를 참고하여 상대

적인 선후관계를 설정하였다(諫早直人 2012, 심재용 2019, 류창환 2007, 우지남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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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부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대성동 85호분에서는 녹각제 안교손잡이, 녹각제 표비, 철환 
등과 함께 주연부에만 철지은장을 한 심엽형행엽 3점이 출토되었다. 또한 6세기 전반의 
대성동 87호분에서는 녹각제 안교손잡이, 대성동 89호분에서 녹각제 표비가 확인되고 있
어 5세기 후반부터 6세지 전반까지의 마구에 녹각제의 사용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마구가 출토된 유구가 희소하여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목곽묘에 비해 
마구 부장이 활발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단편적이지만 마구의 재질에 녹각제가 
애용되고 있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표2. 김해 대성동유적 석곽묘 출토 마구 현황

시기

유구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방울

마주

마갑

4세기 4/4

42호분

●3)

5세기 4/4

85호분

90호분

6세기 1/4

87호분

89호분

  2. 함안지역

  함안지역에서는 도항리ㆍ말산리유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표3은 목곽묘 출토 
마구의 현황이다. 목곽묘에서 마구가 확인되는 것은 5세기 전반경이다. 마구의 구성요소
는 재갈 1점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환상형, 사다리꼴, 원형 등 다양한 형태의 재갈멈추개

3) 조사유구 명세표에서 42호분은 수혈식석곽묘이고 재갈 1점이 표기되어 있다(경성대학교박물

관 2000). 재갈은 경판비이다. 철제 타원형 안에 X자형의 철봉을 부착시킨 형태이며 입문이 

교구형을 띠고 있다. 이 때 타원형의 함유금구와 입문은 철제 못으로 고정되어 있다(신경철 

1994).

표3. 함안 도항리ㆍ말산리유적 목곽묘 출토 마구 현황

시기

유구(도항리)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방울

마주

마갑

5세기 전반대

문36호분

문3호분

문10호분

문43호분

문48호분

경고13호분

마갑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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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윤 정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습속을 중심으로- 

를 공반하며 재질은 철제가 우세하다. 이 가운데 예외적으로 도항리 문48호 출토품은 원
형 철판에 금판을 씌우고 그 위에 다시 원형을 둘러 바깥테두리를 큰 원으로 감싸고 안에 
작은 원이 있는 형태를 원두정으로 고정하였다. 마갑총에서 마주와 마갑이 함께 출토되었다.
  함안지역의 수혈식석곽묘에서 출토된 마구 현황은 표4와 같다. 석곽묘에서 마구가 출토
하는 것은 5세기 중후반경이다. 구체적인 유례를 살펴보면 먼저 마갑총 1호에서 표비, 목
심철판피윤등, 철환 등의 요소가 알려져 있다. 또한 도항리 경상18호분에서 철제 안장, 표
비, 철제윤등, 철환 등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철제윤등은 목심철판피윤등을 
제작하는 방법과 같이 단면 세장방형의 철봉을 구부려 타원형 윤부를 형성하고 철봉 양 
끝을 모아 단접하여 병부를 만들었다(경상문화재연구원 2011). 이 시기 함안지역에서는 
일정한 폭으로 가공한 나무로 등자의 형태를 만들고 철판으로 고정한 목심철판피윤등과 
철로 만든 철제윤등이 하나의 예이지만 같은 제작방법으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표4. 함안 도항리ㆍ말산리유적 석곽묘 출토 마구 현황

 

시기

유구(도항리)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방울

마주

마갑

5세기 중후반대

마갑총1호

문14호분

문39호분

문38호분

경상18호분

(

東)6호분

(

東)6-1호분

문54호분

(

現)15호분

(

現)8호분

(

現)5호분

末451-1번지

6세기 전반대

(

現)22호분

6세기 전반대

암각화고분

●4)

경상10호분

경고3호묘

● 

  
한편, 도항리 (

東)6호분에서는 안장과 관련된 금동제 혹은 철지금장의 내연금구, 좌목선

4) 보고서에서는 불명철기로 설명하고 있으나 1996년 이후 발간된 함안 도항리유적에서 철제 안

교손잡이로 명명한 유물과 형태상, 또한 목질과 같은 유기질이 표면에 수착되어 있는 점 등에

서 유사하여 안교에 표기하였다. 철제 안교손잡이에 대한 검토는 면밀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우선 보고자의 의견을 존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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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교구의 좌금구 등이 확인되어 기존에 알려진 철제 안교의 유례와 비교된다. 재갈의 경우, 
5세기 후반의 이른 단계까지는 표비, 환상형 경판 등이 주류를 이루고 5세기 후반의 늦은 
단계 혹은 6세기 전반에 걸쳐 타원형 경판, 원환비 등이 알려지면서 종류가 다양해진다. 
  마구 구성요소 중 행엽은 도항리 (

東)6-1호분에서 심엽형행엽(십자문, 철지은장), 도항

리 문54호분에서 검릉형행엽(철지은장), 도항리 (

現)15호분에서 편원어미형행엽(철지

금동장), 도항리 (

現)8호분에서 심엽형행엽(삼엽문, 철지은장)과 편원어미형행엽(철지은

장), 말산리 451-1번지 유적에서 검릉형행엽(철지금동장) 등이 출토되어 짧은 기간 내에 
집중적으로 다양한 형태에 문양, 재질 등을 가진 행엽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행엽과 공
반하는 유물 중 방울에 주목하면 검릉형행엽이 출토된 도항리 문54호에서는 삼환령(청동
제) 1점, 말산리 451-1번지 유적에서는 청동령 1점이 동반하고 있다. 또한 도항리 (

現)8

호분에서는 피장자의 머리쪽에서 환두대도와 함께 청동령이, 동장벽과 서장벽에서 각각 
편원어미형행엽이 수습되었다. 마지막으로 행엽과 운주의 조합관계를 살펴보면, 먼저 편
원어미형행엽과 무각식반구형운주의 조합관계에서 편원어미형행엽이 철지금동장, 철지
은장 등 재질적으로 다양하고 도항리 (현)15호, 도항리 (현)8호, 도항리 (현)22호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2예가 알려져 있지만 마주와 마갑은 함께 출토되고 있다.

 

 3. 합천ㆍ고령지역

  합천지역에서는 옥전고분군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먼저 목곽묘 출토 마구의 현
황은 표5와 같다. 목곽묘의 경우, 5세기 초 혹은 전반으로 추정되는 옥전 23호에서 마구는 
곽과 

棺사이 공간의 부장품으로서 피장자 머리쪽인 서단벽 부근에서 등자 2점, 안장(복

륜-철제. 좌목선교구-좌금구(철지금동장)), 재갈(환상형) 1점, 심엽형행엽(철지금동장) 3
점, 환형운주(철제) 2점이 확인되었다. 마주는 도굴구덩이에서 수습되었다(경상대학교박
물관 1997). 이러한 마구의 부장양상과 내용에 주목하면 먼저 행엽과 마주는 옥전 고분군 
내의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다른 무덤에서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마구의 출토
위치가 피장자의 머리쪽인 관과 곽 사이의 공간에서 수습되고 있는 것 역시 다른 유례들
이 피장자의 발치 쪽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과도 차이를 보인다. 마지막으로 옥전 23호 출
토 안장의 부속구인 좌목선교구의 좌금구가 철지금동장으로 다른 철제 안장과도 구분된
다. 이러한 요소들은 김해 대성동 91호분에서 파악된 것과 같이 마구 혹은 마장이라는 새
로운 요소가 재지적인 발생보다 외래적인 경향이 강할 때 보이는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의 재갈은 환상형 경판, 등자는 목심철판피윤등으로 다른 무덤 출토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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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윤 정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습속을 중심으로- 

례들과 유사한 맥락을 이룬다.
  5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옥전고분군의 목곽묘에서 안장의 경우, 전단계와 마찬가지
로 철제가 주류를 이루지만 옥전 35호분에서는 철지금동장의 내연금구, 철지은장의 못 등
을 사용하고 있다. 재갈 역시 전단계의 환상형 경판, 표비 등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타원
형 경판이 더해진다. 등자는 목심철판피윤등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행엽의 출토 예는 그다
지 많지 않으나 편원어미형행엽(철지은장)과 무각식반구형운주(철지은장)의 조합관계가 
확인된다. 5세기 후반의 옥전 82호 목곽묘는 옥전 M1호 봉분 가장자리에 잇대어서 축조
하고 옥전 72호 목곽묘는 옥전 M2호의 봉토 끝을 파괴하면서 조성되었다. 옥전 82호분에
서는 철제 타원형 경판의 재갈과 목심철판피윤등이 확인되었고 옥전 72호 주곽에서는 철
지금동장 타원형 경판이 출토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목곽묘에서 마구는 주곽 혹은 부곽에서 각각 출토되고 있어 규칙성을 부
여하기 어렵다. 마주와 마갑의 경우, 옥전 28호분은 피장자의 발치 쪽에서(마주와 마갑), 
옥전 35호분은 발치 쪽에서(마주), 옥전 91호분은 발치 쪽에서(마갑) 수습되었다. 이에 반
해 옥전 20호분 역시 피장자의 발치 쪽(마갑)에서 확인되었는데 조사자는 발치 쪽의 마구
류에 대해 관 또는 곽 상부에 매납했던 것이 관 또는 곽이 붕괴되면서 흩어진 채 출토되었
다고 판단하고 있다.

표5. 합천 옥전고분군 목곽묘 출토 마구 현황

시기

유구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방울

마주

마갑

5세기 전반

23호분

67-A호분

67-B호분

68호분

8호분

42호분

5세기 3/4

5호분

 

28호분

35호분

95호분

 

12호분

20호분(

主)

5세기 4/4

24호분(

副)

7호분(

副)

82호분

91호분

70호분(

主)

72호분(

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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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시야를 고령지역으로 돌려 지산동고분군에서 살펴보면 5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73
호묘 1예가 알려져 있다. 지산동 73호묘는 주곽, 부장곽, 순장곽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
구는 주곽의 남서쪽에서 등자 2점, 재갈(환상형) 1점, 안장(철제), 심엽형행엽(금동제) 2
점, 철환 2점, 무각식반구형운주(철지은장) 16점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주곽 상부 도굴갱
에서 재갈(표-철제) 1점, 편원어미형행엽(철지은장) 9점, 무각식반구형운주(철지은장) 12
점 등이 수습되었다(대동문화재연구원 2012). 2세트분 즉, 마구의 복수 세트가 부장되었
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음은 수혈식석곽묘이다. 석곽묘의 경우, 먼저 시기적인 부분을 언급하면 합천 옥전고
분군의 M3호분은 고령 지산동 44호분과 같은 단계로 추정되고 있으며 옥전 M3호분의 
이전 단계에는 옥전 M1호분과 옥전 M2호분을 위치지울 수 있다(표6). 먼저 M1호분에서
는 3세트분의 마구를 추정하고 있다. 주곽 피장자의 발치쪽 가까이에서 마갑, 안장(A-금
동제), 등자 6점(A-답수부 

廣幅, B, C), 재갈(AㆍBㆍC 환상형) 1점, 편원어미형행엽(A-

철지금동장) 10점, 환형운주(6각, 못-철지은장), 무각식반구형운주(A-금동제) 30점 등
과 함께 격벽 가까이에서 마주, 편원어미형행엽(B-철지은장) 6점, 무각식반구형운주(B-
철지은장) 6점이 출토되었다. 이에 반해 M2호분에서는 주곽의 피장자 발치쪽에서 마구
가 확인되었는데 안장(

黑漆), 등자 2점, 재갈(철지금동장 타원형), 편원어미형행엽(철지은

장) 10점 등 1세트분이 추정된다(경상대학교박물관 1992). 마지막으로 M3호분에서는 3
세트분의 마구가 알려져 있다. 주곽 피장자의 머리쪽에서 마주(B), 안장(금동제), 재갈(B-
철지금동장 타원형) 1점, 등자(B-철제윤등) 2점, 검릉형행엽(B-철지금동장) 3점과 함께 
피장자의 발치쪽에서 마주(A), 안장(좌목선교구-좌금구ㆍ못(철지은장)), 재갈(A-철지은
장 타원형, C-철지금동장 f자형) 2점, 등자(A-목심윤등, C-철제 병상단부 광폭) 4점, 검
릉형행엽(A-철지은장) 3점, 운주 5점(청동제, 철제), 방울(금동제-2점, 청동제-5점), 사
행상철기 2점 등이 확인되었다(경상대학교박물관 1990). 그리고 6세기 전반경에 있어서 

표6. 합천 옥전고분군 내 석곽묘 출토 마구의 현황

시기

유구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방울

마주

마갑

5세기 3/4

M1호분(

主)

M2호분(

主)

5세기 4/4

M3호분(

主)

6세기 1/4

M4호분

M7호분(

主)

76호분

75호분

85호분

6세기 2/4

M6호분

74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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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장 윤 정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습속을 중심으로- 

등자는 목심철판피윤등, 목심철판피호등이 공존하고 있으며 재갈 역시 타원형 경판, 복합
식 환판비, 원환비 등 다양한 종류가 확인된다. 또한 옥전 85호 석곽은 M7호분의 호석을 
피해 축조되어 평면적으로 찌그러진 장타원형의 띠고 있다. 전자에서는 Ω형의 좌목선교
구, 후자에서는 철지은장의 좌금구를 가진 좌목선교구가 각각 수습되었다.
  고령지역의 경우, 편년적 위치가 연구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석곽묘에서 마구가 확인
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합천지역의 옥전 23호, 67-AㆍB호 단계인 5세기 전반대로 추정
되고 있다. 고령지역에서는 지산동고분군을 중심으로 하며 수혈식석곽묘에서 출토된 마
구의 현황은 표7과 같다. 먼저 가장 이른 시기의 유례로 알려진 지산동 경북연10호분에
서는 환상형 경판의 재갈, 목심철판피윤등, 철환 등이 출토되었다(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0). 

  5세기 전-중반경으로 추정되는 지산동 75호묘는 주곽, 부장곽, 봉토 내 순장곽을 포함한 
순장곽이 8개 배치되어 있다. 마구는 주곽에서 안장, 목심철판피윤등 2점, 행엽(타원형, 
철지은장)과 함께 교란된 곳에서 재갈 1점, 행엽(금동제), 금동제 화형운주 등이 수습되었
다. 행엽의 형태와 재질 등에서 2세트분의 마구 부장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주곽에서 출
토된 마갑은 부장 당시 목곽 위에 놓여 있던 것으로, 부장곽의 목심철판피윤등 1점은 토
기 위에 올려 두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대동문화재연구원 2012). 이러한 지산동 75호 
석곽묘의 현상은 73호 목곽묘에서 확인되었던 마구의 복수세트 부장과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지산동 75호묘와 동일한 시기로 추정되는 30호묘에서는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등으로 구성된 하나의 세트가 출토되고 있어 당시 지산동고분군 내에는 마구의 부장 
패턴이 2가지 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한편, 합천 옥전 M3호분과 같은 단계로 비정되고 있는 44호분은 하나의 봉분으로 된 묘

표7. 고령 지산동고분군 내 석곽묘 출토 마구의 현황

시기

유구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방울

마주

마갑

5세기 전-중

慶北硏10호

啓大35호분

啓大33호분

啓大32호분

●靑

大東75호분(

主)

大東75호분(

副)

30호분(

主)

5세기 후-말

44호분(

主)

44-25호

6세기 전반

45-1호(

主) 

518호분(

主)

●靑

嶺大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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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역 내에 주석실과 2개의 부석실을 중앙에 두고 그 둘레에 32개의 순장곽을 가지고 있다
(고령군 1979). 마구는 주석실과 44-25호에서 출토되었다. 먼저 주곽에서는 안장(금동장, 
철지은장), 재갈(f자형, 타원형), 목심철판피윤등 3점 등이 알려져 있어 최소 2세트분의 마
구 부장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단품의 방울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안교금구 표면에 

搖나 鈴金具를 단 흔적이 확인되고 검릉형행엽에는 편원부 좌우에 2개, 검릉부 각 돌출부
분에 3개, 총 5개의 금동제 영금구를 부착하고 있다. 검릉형행엽과 방울을 접합한 형태라
고 할 수 있다. 그리고 44-25호 석곽에서는 안장, 재갈, 목심철판피윤등 2점, 철환 등 1세트
분의 마장이 확인되고 있다. 마구의 재질은 모두 철제이며 청동제 방울을 공반하고 있다. 
  44호분 주석실에서 확인된 마구의 복수 세트 부장은 6세기 전반대의 지산동 45-1호 석
곽, 지산동 518호분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먼저 지산동 45호분은 중앙에 1호와 2호 석
곽을 동북-서남방향으로 나란히 설치하고 그 외곽에 11개의 석곽을 원주상으로 배치한 
평면구조를 가지고 있다(고령군 1979). 마구는 45-1호 석곽에서만 출토되었다. 안장의 
복륜(철지금동장, 철지은장), 행엽(심엽형, 타원형) 등 안장의 재질과 행엽의 형태 등에서 
최소 2세트분의 마구 부장을 추정할 수 있다. 지산동 518호는 주부곽식 수혈식석곽이다. 
매장주체부 주변에는 주ㆍ부곽과 함께 조성된 5기의 순장곽, 고분 조성 이후 축조된 배장
묘 3기 확인되었다. 마구는 주곽에서 출토되었고 남동벽 교란토 및 퇴적토에서 마주, 재갈 
2점, 안장(복륜-금동제, 내연금구-철지은장) 1점, 안장(복륜, 내연금구-철제) 1점, 철제
윤등 2점, 사행상철기 1점, 행엽(철지금동장, 철지은장), 4각운주 2점, 철환 3점, 방울(청
동제) 1점이 수습되었는데 재갈, 안장 및 행엽의 재질 등에서 최소 2세트분의 마구 부장을 
추정할 수 있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6). 그 외에 지산동 영대1호에서는 목심철판피
호등 2점이 출토되어 이 시기 등자의 종류와 재질에 다양성을 지적할 수 있다(영남대학교
박물관 2004). 

Ⅲ. 마구의 부장 습속으로 본 의례적 성격

  이제까지 살펴본 각 유적별 출토 마구 현황과 그 특징을 바탕으로 각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마구의 부장습속을 파악하고자 한다. 마구는 말을 타거나 말 위에 앉아 있기 위해 필
요한 도구이고 이를 통해 말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도굴 등의 인해 매장 당시의 원상태
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은 있지만 마구 역시 무덤에 부장된 품목 중의 하나이다. 무덤에서 
출토된 마구의 종류, 조합관계 등에 보이는 변화를 통해 당시 각 지역에서 행해졌던 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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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윤 정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습속을 중심으로- 

의례를 복원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매장주체부인 목곽묘, 석곽묘를 중심으로 출토된 마구
의 구성요소 및 마장 등이 시간적, 공간적 변화에 따라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살펴봄으로
서 가야로 알려진 각 지역 내의 장례습속을 밝히고자 한다.

  1. 목곽묘 단계 

  먼저 김해지역에서 마구의 부장은 4세기 전반부터 확인되고 있다. 대성동 91호분에서 
출토된 마구 형태나 재질 등에서 동시기의 것과 이질적인 면이 많아 외래적인 요소가 강
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운주와 방울 등이 다양한 형태와 재질이 공존하고 있어 면계에 화
려함을 더하고 마장에 소리가 포함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마장의 전체적인 모습
보다는 마구 중에서 재갈을 2점 이상 부장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4세기 말 혹은 5세기 
초로 비정되고 있는 대성동 57호분까지 지속되고 있다. 말과 관련된 인식을 재갈이 대표
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대성동 1호분에서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등 하나의 세트
가 갖추어진 마장이 확인된다. 마구에 대한 인식이 재갈, 등자 등 개별적인 것에서 안장과 
행엽, 운주 등이 함께 갖추어진 전체적인 마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마주
가 확인되고 있어 사람이 말에 타거나 말 위에 올라앉아 있기 위해 필요한 마구에 대한 관
심과, 함께 하는 말에게도 주목하는 인식의 전환을 지적할 수 있다. 타고 있는 말의 얼굴에 
반짝거리는 철판으로 포인트를 주는 강렬한 인상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함안지역에서 마구가 확인되는 것은 5세기 전반경이다. 마구는 재갈이 1점씩 출토되어 
4세기대 김해지역에서 파악된 재갈의 복수 부장과는 차이를 보인다. 재갈멈추개의 종류는 
다양하고 재질은 철제가 우세하나 철지금동장도 있다. 또한 5세기를 전후한 시기 김해지
역에서는 하나의 세트로 구성된 마장이 확인되는 것에 비해 함안지역에서는 아직 하나의 
세트를 구성하고 있지 않은 듯 마구의 다른 구성요소의 출토 예가 드문 편이다. 
  그러나 마주와 마갑이 하나의 무덤에서 출토되어 마주만 알려진 김해지역과는 구별되고 
있다. 말의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철로 만든 것으로 장식하고 있다. 공반하는 마구가 
재갈이 중심인 것과 함께 생각하면 말 자체를 빛나게 해 줌으로서 말 위에 있는 사람을 돋
보이게 하는 효과라고 할 수 있다.  
  합천지역의 경우, 옥전고분군에서 5세기 초 혹은 전반으로 추정되는 23호분에서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등 하나의 세트를 갖춘 마장이 확인되고 있다. 그 이후에 확인되는 
5세기 전반의 다른 유구의 출토품과는 달리 좌목선교구의 좌금구, 심엽형행엽 등이 철지
금동장으로 철제 이외의 금속제를 사용하고 있다. 공통적으로 재갈은 환상형 경판, 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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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는 목심철판피윤등으로 구성된 조합이 주축을 이룬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하면 마구 혹은 
마장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재지적인 발생보다 외래적인 경향이 강할 때 보이는 현상이라
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마주를 공반하고 있는 점에서 김해지역과의 관련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5세기 중후반이 되면 김해지역과 함안지역은 마구 부장 유례가 적은 반면, 이 지역에서
는 다수가 확인되어 마구 부장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세트 마장이 
확인되는 가운데 재갈은 전단계의 환상형 경판과 함께 표비가 주류를 이루면서 타원형 경
판도 공존하고 있다. 등자는 목심철판피윤등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행엽의 출토 예는 그다
지 많지 않으나 편원어미형행엽(철지은장)과 무각식반구형운주(철지은장)이 공반하는 규
칙성도 보인다. 마주와 마갑이 공반하는 것은 옥전 28호분이고, 마주는 옥전 35호분, 마갑
은 옥전 20호분과 옥전 91호분 등에서 출토되었다. 수적으로 소수이지만 시간적인 흐름을 
적용시키면 마주에서 점차 마갑으로 변화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령지역에서는 지산동 73호묘 주곽에서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등으로 구성
된 하나의 세트가 마장을 이루는 가운데 재갈 2점, 심엽형(금동제)과 편원어미형(철지은
장) 등 2종류의 행엽이 출토되고 있어 2세트분의 마구 부장을 추정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편원어미형행엽(철지은장)과 무각식반구형운주(철지은장)의 조합도 구성할 
수 있어 합천지역 목곽묘의 마장과 연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고령지역은 하나의 세트 마
장을 갖춘 합천지역과 달리 마구의 복수 세트를 부장함으로서 마구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말에 올라타거나 말 위에 앉아 있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 하나의 세트
만 갖추면 된다는 인식에서 여러 개의 세트를 소장할 수 있고 똑같은 마장 아닌 재갈보다는 
행엽의 형태나 재질에 변화를 주는 

尻繫 장식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 석곽묘 단계

  김해지역에서는 4세기 후반경에 마구 부장이 알려져 있으며 목곽묘에서 주목한 재갈의 
복수 부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재갈의 비중은 높은 편이고 표비가 주류를 
이룬다. 또한 5세기 전반의 목곽묘에서는 마주가 출토되고 있는데 석곽묘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함안지역에서는 5세기 중후반에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등 하나의 마장이 확인되
고 있다. 그 가운데 재갈은 표비, 환상형ㆍ타원형 경판 등이 알려져 있고 5세기 후반 늦은 
단계 혹은 6세기 전반에 걸쳐 원환비, f자형 경판 등도 공반되고 있다. 
  또한 등자는 도항리 경상18호분에서 철제윤등이 출토되었는데 목심철판피윤등의 목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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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윤 정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습속을 중심으로- 

으로 등자 형태를 만드는 방법으로 제작되고 있어 당시 함안지역에서는 재료를 철과 나무 
두 가지를 사용하여 윤등을 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목심철판피윤등이 주류
를 이루고 있다. 
  한편, 행엽은 도항리 (

東)6-1호분을 전후한 시기에 출토양이 집중하는데 짧은 기간 내에 

다양한 형태, 문양, 재질이 공존하고 있다. 안장, 재갈, 등자, 행엽 등을 재질 혹은 형태에 
근거하여 하나의 마장을 구성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조합관계를 보이고 있어 다른 지
역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지역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편원어미형행엽과 무각식반구형운주가 함께 동반하는데 이 조합은 5세기 중후
반 합천 옥전고분군과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목곽묘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합천과 고령지
역에서는 목곽묘에 채용된 마장이 함안지역에서는 석곽묘에서 도입되고 있다. 
  공반하는 방울과 행엽의 형태로 규정할 수 있는 조합은 어렵지만 검릉형행엽이 출토된 
도항리 문54호와 말산리 451-1번지 유적에서 삼환령(청동제) 1점, 청동령 1점이 각각 공
반되고 있다. 이 외에 (

現)8호분에서는 청동령 1점과 편원어미형행엽이 출토되고 있어 행

엽의 형태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마장에 소리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마주와 마갑의 경우, 도항리 (

東)6호분은 석곽 내 목곽 상부, (現)8호분은 석

곽 내 부장공간에서 각각 확인되었다. 하나의 마구 세트를 구성하는 가운데 다양한 형태
와 재질의 행엽이 공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갈이 주류를 이루던 목곽묘와 마찬가지
로 마주와 마갑이 함께 출토되어 말의 얼굴과 몸을 부각시키는 것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높다고 할 수 있다. 
  고령지역의 유적 편년은 연구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합천지역의 옥전 23
호, 67-AㆍB호 단계로 추정되는 지산동 경북연10호 석곽묘에서 재갈, 등자, 철환 등이 확
인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5세기 전-중반의 지산동 35호, 33호 등에서는 안장, 재갈, 등
자, 행엽, 운주 등 마장을 갖추고 있다. 
  지산동 75호묘에서 마구는 주곽에서 수습되었고 행엽의 형태와 재질에서 2세트분의 마
구 부장을 추정할 수 있다. 목곽묘 73호에서 확인된 마구의 복수세트 부장과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시기로 추정되는 30호묘에서는 하나의 세트가 출토되고 있어 당시 
지산동고분군 내에서는 마구의 부장 패턴이 2가지 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 가
운데 마구의 복수세트 부장은 지산동 44호분 주곽, 6세기 전반대의 지산동 45-1호 석곽, 
지산동 518호분 등에서도 확인되어 이 지역의 특징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한편, 지산동 44호분에 포함된 32개 순장곽 중 44-25호 석곽에서 안장, 재갈, 목심철판
피윤등 2점, 철환 등 1세트분의 마장이 확인되며 재질은 모두 철제이다. 이에 비해 44호분 
주석실 출토품은 질적으로 금동ㆍ은 등 다양한 금속제를 사용하고 있으며 양적으로 최소 
2세트분 이상을 부장하고 있어 피장자의 계층 혹은 신분적 격차를 부장된 마구의 재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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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양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44호분 주석실 출토품 중 안교금구 표면에 

步搖나 鈴金具를 단 흔적, 검릉형행

엽과 방울의 접합된 형태 등이 확인되어 마장에 소리를 첨가하고 있다. 그리고 지산동 
44-25호에서는 실질적인 방울이 알려져 있어 피장자의 계층에 관계없이 마장에 소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외 방울이 출토된 지산동 518호분에서는 타원형행엽
이 공반되고 있어 검릉형행엽과 방울의 조합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합천지역의 경우, 옥전 M3호분은 고령 지산동 44호분과 같은 단계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이전 단계에 옥전 M1호분, M2호분 등의 위치한다. 옥전 M2호 주곽에서 하나의 마구 
세트가 확인되었으나 옥전 M1호 주곽에서는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등 3세트분의 
마장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바탕으로 하면 당시 옥전고분군 내에서 마구 부장에 2
가지 패턴이 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옥전고분군 내 마구의 복수세트 부장은 M1호분에서 처음 확인되고 다음 단계인 
M3호분에서도 파악되지만 그 이후에는 알려져 있지 않아 짧은 기간 내에 보이는 현상으
로 추정할 수 있다. 하나의 세트가 기본인 것을 알 수 있다. 
  옥전 M1호분과 옥전 M3호분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옥전 M1호분에서는 재갈 3점 모
두가 환상형 경판이고 등자 6점 모두는 목심철판피윤등으로 철판을 전체 덮고 있는 형태
이다. 목심철판피윤등 가운데 답수부 폭 만큼 넓어진 목심으로 제작한 것이 포함되어 있
어 목심철판피윤등 제작에 변화를 지적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옥전 M3호분의 경우, 재갈
은 철지금동장의 타원형ㆍf자형 경판, 철지은장의 타원형 경판 등 3점으로 재질과 형태가 
다양하여 재갈의 변화가 눈에 띤다. 등자는 목심철판피윤등과 함께 2가지 유형의 철제윤
등이 공반하고 있어 재질적 다양성을 지적할 수 있다. 
  행엽은 전단계의 옥전 M1호분와 옥전 M2호분에서 편원어미형행엽이 확인되고 전자에
서는 무각식반구형운주가 공반되어 목곽묘에서 알려진 조합이 지속되고 있는 반면 옥전 
M3호분에서는 철지금동장, 철지은장의 검릉형행엽이 출토되어 새로운 유형이 등장하고 
있다. 참고로 검릉형행엽은 옥전고분군 내에서 M3호분이 유일하며 방울(금동제 –2점, 
청동제 5점)이 공반되고 있어 함안지역의 석곽묘에서 파악되었던 검릉형행엽과 방울의 
조합관계가 여기에서도 지적할 수 있다. 옥전 M3호분에서는 마주만 2점 출토되었는데 당
시 목곽묘에서 마갑이 확인되고 있는 것과 구별된다. 6세기대의 옥전고분군에서는 방울, 
마주, 마갑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5)

5) 6세기의 옥전고분군에서는 아니지만 합천의 반계제 가A호분에서는 방울, 재갈 2점 등이 확인

되었다(국립진주박물관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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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윤 정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습속을 중심으로- 

Ⅳ. 맺음말

  마구는 말을 타거나 말 위에 앉아 있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지만 무덤에 부장되는 품목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번 논고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공간에 살아있는 자가 선택한 부
장품 중의 하나로서 마구에 접근하고 있다. 
  이제까지 김해, 함안, 합천ㆍ고령 등 각 지역의 대표 고분군에 주목하여 매장주체부인 목
곽묘와 석곽묘를 대상으로 마구의 출토 현황과 그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시기적인 
흐름에 따른 각 지역별 마구의 구성요소 및 조합관계를 통해 당시의 부장습속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 성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馬裝, 그리고 안장, 재갈, 

등자, 행엽, 운주 등의 개별적인 형식 변화, 주변 지역과의 교류, 공반하는 유물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를 포함한 검증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금후
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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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참고문헌

諫早直人, 2012, 『東北アジアにおける騎馬文化の考古學的硏究』, 雄山閣.
류창환, 2007, 『加耶馬具의 硏究』, 동의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신경철, 1994, 「加耶 初期馬具에 대하여」, 『釜大史學』18집, 부산대학교사학회.
심재용, 2019, 『金官加耶 古墳 硏究』, 부산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우지남, 2000, 「咸安地域 出土 陶質土器」, 『道項里 末山里 遺蹟(本文)』, 경남고고학연

구소·함안군.

이난영·김두철, 1999, 『韓國의 馬具』,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보고서
<김해지역>
  경성대학교박물관, 2000a, 『金海大成洞古墳群Ⅰ』
  경성대학교박물관, 2000b, 『金海大成洞古墳群Ⅱ』
  경성대학교박물관, 2003, 『金海大成洞古墳群Ⅲ』
  경성대학교박물관, 2011, 『金海大成洞古墳群Ⅳ』
  대성동고분박물관, 2011, 『金海大成洞古墳群 -68호분~72호분-』
  대성동고분박물관, 2015, 『金海大成洞古墳群 -85호분~91호분-』
  대성동고분박물관, 2015, 『金海大成洞古墳群 -70호분 主槨·95호분-』
  대성동고분박물관, 2016, 『金海大成洞古墳群 -92호분~94호분, 지석묘-』

<함안지역>
  경남고고학연구소ㆍ함안군, 2000, 『道項里 末山里 遺蹟(本文)』
  경남고고학연구소ㆍ함안군, 2000, 『道項里 末山里 遺蹟(圖面)』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04, 『함안 말산리 451-1번지 유적』
  경상문화재연구원, 2011, 『함안 도항리 고분군 –도항리 428-1번지 일원-』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1996, 『咸安岩刻畵古墳』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1997, 『咸安道項里古墳群Ⅰ』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1999, 『咸安道項里古墳群Ⅱ』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2000, 『咸安道項里古墳群Ⅲ』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2001, 『咸安道項里古墳群Ⅳ』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2004, 『咸安道項里古墳群Ⅴ』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ㆍ함안군, 2002, 『咸安 馬甲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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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윤 정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습속을 중심으로-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08, 『咸安 道項里 古墳群 -함안 도항리 6-1호분-』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08, 『咸安 道項里 六號墳』

<합천지역>
  경상대학교박물관ㆍ경상남도, 1988, 『陜川 玉田古墳群Ⅰ -木槨墓-』
  경상대학교박물관, 1990, 『陜川玉田古墳群Ⅱ -M3號墳-』
  경상대학교박물관, 1992, 『陜川玉田古墳群Ⅲ -M1ㆍM2號墳-』
  경상대학교박물관, 1993, 『陜川玉田古墳群Ⅳ -M4ㆍM6ㆍM7號墳-』
  경상대학교박물관, 1995, 『陜川玉田古墳群Ⅴ -M10ㆍM11ㆍM18號墳-』
  경상대학교박물관, 1997, 『陜川玉田古墳群Ⅵ -23ㆍ28號墳-』
  경상대학교박물관, 1998, 『陜川玉田古墳群Ⅶ -12ㆍ20ㆍ24號墳-』
  경상대학교박물관, 1999, 『陜川玉田古墳群Ⅷ -5ㆍ7ㆍ35號墳-』
  경상대학교박물관, 2000, 『陜川玉田古墳群Ⅸ -67-AㆍB, 73~76號墳-』
  경상대학교박물관, 2003, 『陜川玉田古墳群Ⅹ -88~102號墳-』
  국립진주박물관 외, 1987, 『陜川磻溪堤古墳群』

<고령지역>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ㆍ고령군, 2000, 『大伽耶 歷史館 新築敷地 내 高靈池山洞古墳

群 -本文 Ⅰ: 竪穴式石槨墓-』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ㆍ고령군, 2000, 『大伽耶 歷史館 新築敷地 내 高靈池山洞古墳

群 -寫眞-』

  경북대학교박물관 외, 2009, 『高靈 池山洞 44號墳 –大伽耶王陵-』
  계명대학교박물관, 1981, 『高靈池山洞古墳群 -32~35號墳ㆍ周邊石槨墓-』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6, 『고령지산동고분군 –518호분 발굴조사보고서-』
  고령군, 1979, 『大伽倻古墳發掘調査報告書』
  영남대학교박물관, 2004, 『고령 지산지구 국도 개량공사구간 내 高靈 池山洞 古墳群』
  영남문화재연구원, 2004, 『高靈 池山洞古墳群Ⅰ』
  영남문화재연구원ㆍ고령군, 1998, 『高靈池山洞30號墳』
  대동문화재연구소, 2012, 『高靈 池山洞 第73~75號墳 (本文)』
  대동문화재연구소, 2012, 『高靈 池山洞 第73~75號墳 (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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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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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습속을 중심으로-」에 대한 토론문_김현희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 습속을 중심으로-

」에 

 대한 토론문

김 현 희

국립광주박물관

  4~6세기에 해당하는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다양한 마구의 부장과 습속에 대한 세밀한 
검토에 대한 선생님의 글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마구에 대한 전문가적 지식이 부족하지만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본고에서 4-6세기 가야 고분 중 김해, 함안, 합천, 고령 지역의 목곽묘 단계와 석곽묘 단
계로 구분하고 다양한 마구가 출토된 유구를 중심으로 분석하셨습니다. 목곽묘 단계에는 
주로 재갈이나 등자, 운주 등 개별 부장, 또는 재갈의 복수 부장, 5세기 이후 재갈, 등자, 안
장, 운주, 행엽 등을 하나의 세트로 보아 전체적인 마장의 부장, 전체적인 마장의 세트도 
복수로 부장하는 전체적인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마구 부장의 흐
름을 통해 당시 가야 사람들이 말을 탔던 사람에 대한 정치 사회적 위치나 역할 뿐만 아니
라 말 자체도 주목했다는 인식의 변화를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 

  무덤 속의 의례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다양한 부장품을 기반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
덤 속 수많은 물건 속에 내포되어 있는 당시 사람들의 관념이나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정
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 틀에 대한 이야기를 풀 수 있는 좋은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흔적들은 권력이라는 매커니즘과 연결되고 그 사회를 관통하는 공유라는 시스템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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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말과 말갖춤

존재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또 매장의례는 단순히 피장자를 무덤 속에 넣는 행위에 그치
는 것이 아니라 피장자를 무덤에 넣는 매 순간마다 마구류를 비롯한 수많은 부장품을 넣
는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퍼포먼스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피장자의 상실이 남긴 부재의 
공간에 다시 채워넣어야할 다음 세대로의 전통성 유지와 과시를 공유하기 위함이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선생님이 밝혀주신 가야 고분의 마구류 부장에 대한 여러 의견은 매우 중
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몇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김해 지역의 5세기 후반대로 파악하고 있는 85호분이나 6세기 전반의 87호, 89호분에서 
녹각제 안교손잡이나 표비 등의 확인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비교 자료나 재질이 가지는 
의미가 있으면 추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먼저 5세기 중후반의 김해와 함안 지역의 마구 부장 사례가 적고 합천 지역에서는 마구 
부장이 활발하게 이루졌다고 하셨는데 표로 정리한 것을 보면 5세기 중후반에 김해지역
에의 마구 부장 사례가 적었고 함안이나 합천, 고령 지역까지도 활발했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파악하셨는지 다시 한번 여쭙고 싶습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5세기 전반대 함안 지역에서는 유독 안장이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합천ㆍ고령지역에서 마구의 출토 위치가 피장자의 머리쪽인 관과 곽 사이에서 수습된 
사례를 언급하면서 다른 유례들은 피장자의 발치에서 확인되는 것과 차이를 보인다고 하
셨는데 출토 위치의 차이에서 마구류의 종류나 구성 등의 차이나 시기적 차이 등을 가늠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요? 아마도 이러한 것들이 좀더 세밀하게 분석된다면 본고에
서 선생님이 말하고자 하는 매장의례에 대한 설명이 좀더 보충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질문과 관련해서 덧붙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각 지역에서 행해졌던 매장의례에 대한 
복원 부분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김해, 함안, 합천, 고령 지역의 마구 매장의례 과정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석곽묘 단계에서는 특히 청동령과 같은 마장의 소리 부장에 대한 것에 주목하셨는데 그 
의의가 어떤 것인지 추가 설명 부탁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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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 마구 의례 -마구의 부장습속을 중심으로-」에 대한 토론문_김현희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고분 내 동물 부장, 동물희생의례 쪽에 관심이 많은데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마구가 부장된 고분과 말뼈가 확인된 고분을 비교해 보았더니 김해 대성동 
1호분과 합천 반계제 가A호 정도가 확인된다. 마구의 부장과 말(또는 말머리)의 희생에 
대한 구분이 가능할지 등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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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김해박물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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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年  4月  6日 印刷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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