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F문서2020년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자료집.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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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성 호

삼국시대 마갑의 구조와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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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주거와 취락 연구의 일 방향

이성주 (경북대학교)

05

가야 집모양토기의 제작과 출토 사례

민경선(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토론문

이해수(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한 욱(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토론문

김상태(한국전통문화대학교)

25

37

41

67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

차순철 (서라벌문화재연구원)

71

토론문

장용석(동국문화재연구원)

97

가야의 주거

공봉석(부경문물연구원)

117

토론문

정효은(국립경주박물관)

139

가야 건물지 구들의 분포와 성격

고영민(국립김해박물관)

101

토론문

김나영(울산대학교 박물관)

113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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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주거와 취락 연구의 일 방향

이성주 (경북대학교)

05

가야 집모양토기의 제작과 출토 사례

민경선(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토론문

이해수(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한 욱(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토론문

김상태(한국전통문화대학교)

25

37

41

67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

차순철 (서라벌문화재연구원)

71

토론문

장용석(동국문화재연구원)

97

가야의 주거

공봉석(부경문물연구원)

117

토론문

정효은(국립경주박물관)

139

가야 건물지 구들의 분포와 성격

고영민(국립김해박물관)

101

토론문

김나영(울산대학교 박물관)

113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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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조강연

삼국시대 주거와

취락 연구의 일 방향

이 성 주 (경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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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성주  

삼국시대 주거와 취락 연구의 일 방향

Ⅰ. 머리말

역사적 공간으로서 가야는 문화적 영역이기보다는 정치적 영역이다. 보다 문화적, 혹은 

종족적이었던 변한이라는 역사 공간이 가야로 이어졌지만 그대로 계승된 것은 아니다. 초
기국가로 등장한 삼국, 그중에도 특히 백제와 신라가 통합의 범위를 확장하고 각축을 벌
이면서 가야는 정치적 공간으로 되어갔다. 가야의 (자체) 발전적 역사상이 추구되고(김태
식 1993: 8-12) 사국시대의 개념이 소환되면서(김태식 2014), 더욱 정치적 공간이란 인
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주거와 취락의 모습, 특히 주거의 형태는 생활문화에 근거 두고 있
는 것이어서 정치적 영역 안에서 일관성을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일수 있다. 사실 가
야의 주거와 취락이 과연 어떤 특징을 갖는가를 요약하여 말하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정
치세력화의 과정에서 인구의 배치에 변화가 주어지고, 생업과 경제적 통제와 이념적 조정
이 시도되었을 것이며, 그래서 주거 및 취락의 규모와 형태, 그리고 구조적 특징도 변해갔
을 것으로 여겨진다. 가야의 주거와 취락에 관한 역사고고학적 접근에서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첫째, 가야 권역에 속하는 주거지의 형태와 그 변화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Ⅰ. 머리말
Ⅱ. 주거건축으로 본 가야
Ⅲ. 건축된 환경: 주거ㆍ시설ㆍ소유물

Ⅳ. 가야 연맹과 국읍의 경관
Ⅴ. 맺음말

목 차

삼국시대 주거와

취락 연구의 일 방향

이 성 주

경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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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먼저 검토해 보고자 한다. 가야 주거지의 규모, 형태, 그리고 시공간적 변이의 양상을 파악
하여 생활방식의 지속성과 변화의 계기에 관해 이해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살림집과 그 
밖의 시설과 가재도구를 구축된 환경(built environment)으로 이해하고(Rapoport 1982), 
그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통해 가야인의 생활방식에 접근해 볼 하나의 방법에 관해 논의를 
해보고자 한다. 둘째, 국읍의 경관이 형성되는 과정과 특성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흔
히 정치사회적 실체로서의 가야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연맹(체)을 이루고 있었다
고 말한다. 연맹이란 무엇인가 정의하기 쉽지 않으나 ‘

國’의 관계망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

할 것 같다(권오영 1996; 이희준 2003, 2017 195; 이성주 2020b). 만일 연맹체가 형성되
었다면 이 관계망을 따라 확산되는 어떤 정치적 요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든 인구가 재
배치되고, 교역이나 생산등과 관련된 취락들이 생겨나고, 집주가 이루어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변화의 연장선에서 여러 국의 중심지, 즉 국읍이 물질적 양상들이 이전
과 달라질 것이며 특히 그중에 맹주국의 경관은 큰 변화를 보여줄 것이다. 그와 같은 변화
들은 고고학 자료를 통해 어떻게 논의될 수 있는지 검토해 보고자 한다.

주거와 취락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에서 흔히 연구자들은 주거지의 형태나 취락의 특성

이 시대적으로 어떻게 변해 가는가, 혹은 주거의 형식들이 계통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추어 온 듯하다. 가야의 주거와 취락에 관한 연구
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그러는 가운데 실제 한 가옥에 살던 한 가구는 어떤 관계로 구성
되며, 그들은 어떻게 생활했는가에 관한 논의는 별로 시도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말하자면 주거와 그 안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통해 가구 고고학적 접근의(김범철 2018; 한
국고고학회 2013) 시도가 아주 적었다는 것이다. 취락 내부의 가구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공동체의 생성에 관한 연구도 가야취락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일정 지역의 
취락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공간 분석, 이를테면 공간 입지(Spatial Location)나 공간 분배
(Spatial Allocation)의 모델에 기초한 접근이나 네트워크 분석도 자주 볼 수 있는 연구는 
아니다.  

사실 지금까지 가야의 주거와 취락에 관한 연구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각종 개발사업으로 인해 가야의 취락 유적이 대규
모로 발굴되는 사례가 급증했고 엄청나게 많은 양의 자료가 축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
거와 취락의 연구자는 상대적으로 희소한 편이다. 그리고 모든 가야취락의 조사가 학술발
굴의 형태로 진행되지 못하고 구제발굴조사의 형식이었기 때문에 사전 조사기획에 토양
미세형태학 분석과 같은 지질고고학 작업을(이희진 2015, 2019; R. Lee 외 2013) 포함시
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굳이 토양분석과 같은 작업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실험적 
조사를 시도해 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조사는 구제발굴의 주어진 매뉴얼에 따른 조사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리고 여전히 가야와 관련된 고고학 연구는 고분과 그 출토품이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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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주  

삼국시대 주거와 취락 연구의 일 방향

지하는 몫이 절대적이다. 많은 가야 고고학자들이 일반 주거 및 취락과 그 출토유물을 통
해서는 가야의 역사상에 접근하기 쉽지 않다는 판단을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연유로 가
야 주거와 취락의 연구는 답보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최근 주목받
는 가야 궁성에 관한 발굴성과를 넘어 일반주거유적에 관한 연구로 관심을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Ⅱ. 주거건축으로 본 가야

가야 주거지로 가장 많이 보고된 형식, 가야 주거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식은 타

원형ㆍ원형계 수혈주거지가 아닌가 한다. 타원형 혹은 원형의 상대적으로 깊은 수혈 내부
에 주거지 둘레의 1/3 정도를 돌아가는 점토 고래와 그 한쪽에 설치된 부뚜막을 가진 수
혈주거지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주거지는 초기철기시대 늦은 시기, 즉 삼각형점토대토기 
단계에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데(김 현 2006) 4세기 후반 무렵까지 장기 존속했다(공봉석 
2008, 2016; 강숙이 2011, 하승철 2013). 이 주거 형식이 늦은 시기까지 유지되었던 권역
은 남강, 경호강, 황강 유역이다(공봉석 2008). 진주 평거동 3-1지구와 3-2지구의 조사 
성과를 통해 확인되지만 이 원형계의 쪽구들 주거지는 4세기 후반 어느 시점에 장방형의 
부뚜막 주거지로 교체되어 사라진다(강숙이 2011, 하승철 2013).

전남 서부로부터 경남 동부까지 남해안에 걸쳐진 지역의 주거 형태와 그 변화를 검토한 

연구에서는 전남 서부와 동부, 그리고 경남 서부와 동부, 이렇게 4 권역에 따라 지역차를 
보인다고 한다(이동희 2013). 주거지의 형태에서 그와 같은 지역차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
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변화의 과정과 시기에서 지역차를 보인 것이다. 4세기 중엽을 
기준으로 보면 전남 동부와 경남 서부, 즉 남부 소백산맥 기슭 일원(한반도 중남부지역)에
서는 (타)원형계의 주거지가 존속하는 가운데 호남 서부와 영남 동부는 서로 다른 형식의 
방형계 주거가 이용되었다. 그러나 4세기말 5세기 초기 되면 전 지역이 방형 및 장방형계 
주거지로 바뀐다. 이와 같은 주거지의 교체 시점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각 지역에서 실생
활용 경질무문토기 평저발과 평저옹이 타날문 발과 타날문 원저옹으로 바뀌어 간다. 물론 
주거 형태와 토기 생산기술의 변화는 지역에 따라 시차가 약간 있기는 하지만 각 지역에
서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변해간다.

쪽구들 주거지는 초기철기시대부터 전국적 분포를 보이는 것으로 파악된다(박강민 

2007). 원삼국시대에는 호남과 영남 일원에 비슷한 형태와 구조의 (타)원형계 쪽구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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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거지가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타)원형계 주거지는 삼각형점토대토기 단계에 등
장하여 호남과 영남의 생활문화로 정착한 이후 원삼국시대 거의 전 기간 동안 그 전통이 
유지되었다. 주거건축만이 아니라 역시 생활문화로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기본 가재
도구로서의 토기 기종구성, 옹, 발, 시루, 파수부호, 단경호, 대호 등이 채용된 시기도 삼
각형점토대토기 단계이다. 이 실용토기의 기본 기종은 일정 시기에 물레질-타날법이 도
입됨으로써 제작의 기술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지만 그릇의 기종은 변함없이 6세기까지 
그 전통이 유지되었다. 이에 비해 주거 건축은 3세기 후반 어느 시점에 영남 동부지역에서 
(타)원형계에서 (장)방형계로의 변화가 시작되었다(이성주 2020a). 이와 같은 방형계로
의 변화는 영산강유역에서도 확인되는데 영남 동부 보다 약간 늦은 4세기 전반대로 보인
다(전세원 2017). 그래서 4세기 후반에 주거건축의 변화가 시작되는 중남부지역 섬진강과 
남강유역은 가장 늦은 셈이다.

주거지의 형태가 (타)원형계에서 (장)방형계로 변하면서 수혈의 깊이가 현저히 얕아진

다. 이는 건축의 기본 구조에서 큰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원형계 수혈주
거지는 기둥이 배치되는 양상으로 보아 수혈을 따라서 축조된 내력벽이 수혈 위로 일정한 
높이로 올라가기는 하지만(이나영 2010) 역시 반지하식 움집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지붕 
구조물이 완전히 들어 올려 지도록 축조되기 어려운 구조가 아닐까 한다. 이에 비해 방형
계 주거지는 아주 얕은 방형의 수혈 혹은 지면에 축조된 지상식 건축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가형토기를 참고한 살림집의 연구에서는 이 방형계 주거지를 맞배지붕에 방형의 내
력벽으로 둘러쳐진 가옥이라고 그 외형과 구조를 복원한 바 있다(함순섭 2008). 

가옥의 외형은 크게 달라졌지만 집의 바닥에 설치된 취사 난방시설인 점토 쪽구들은 벽

면으로부터 약간 집 안쪽으로 들여서 설치된 것 말고는 그대로 축조된다. 가내에서의 음
식물 준비나 조리와 식사와 같은 활동의 방식이 변함없이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가
내에서 발견되는 실용토기의 기종구성에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실용토기의 제작기술과 
생산방식에는 지역마다 시차는 있지만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이는 전통적 무문토기 성
형공정에 의해 제작되던 평저옹과 발, 대호, 시루 등에 물레질-타날법이 적용되는 변화를 
말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그릇의 바닥은 원저의 기형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
는 경주일원에서 맨 처음 시작되었는데 그 시기는 늦어도 AD 2세기 초쯤이다. 영산강유
역에서는 실용토기 제작기술의 변화가 4세기 전반의 어느 시점으로 추정되고 있으며(전
세원 2017) 중남부지역은 4세기 후반 어느 시점이다(하승철 2013). 요컨대 원삼국시대 초
기에는 영남과 호남이 (타)원형계 쪽구들 주거지와 무문토기 제작전통의 평저 실용토기
를 생활문화로서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삼국 시대 후기로 가면서 일부지역에서 물레
질-타날법에 의해 표준화된 실용토기 기종의 생산이 시작되어 퍼지고 호남서부와 영남동
부에서는 각자 방형계 건축물로 발전했다. 그러면서 중남부지역에서도 주거의 건축과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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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주  

삼국시대 주거와 취락 연구의 일 방향

용토기의 생산과 사용에 변화를 겪게 된다. 

지금까지 중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주거건축과 실용토기와 같은 생활문화의 특징을 살

펴보고 지역-간 비교를 시도해 보았다. 원삼국 초기에는 실용토기유물군과 주거건축이 
세부적 차이는 있지만 광범위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원삼국 후기부터 
지역차이가 나타나게 되어 지역차는 확인되지만 처음부터 지역군으로 구분되지는 않았
다. 이후 4세기가 되면 대략 전남 서부, 중남부, 영남 동부 등 세 개의 지역군이 나뉘는 듯
하다(이창희 2005). 5세기부터는 지역차가 유지되는 가운데 중남부지역으로는 호남 서부
의 4주식 주거지가 유입되기도 하고 영남 동부의 방형주거지가 나타나기도 한다(공봉석 
2015). 남부지역이 생활문화에서 세 개의 지역권으로 구분되지만 그것은 마한, 변한, 진한
의 구분에 그대로 대입되지는 않는다. 

과연 가야의 권역 안에서 주거건축과 생활용기는 가야의 특성이라 할 만한 공통성이 확

인되는가? 이 문제는 무엇보다 가야 주요국의 양상을 비교하여 그 공통성이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1~5세기 동안 금관가야를 제외하고 가야 주요국의 중심지에서는 주
거건축과 실용토기의 양상과 그 변화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영남 일원의 주
거문화는 크게 부산, 김해, 그리고 창원 등을 포함하는 영남 동부지역과 황강, 남강유역권
에 해당하는 영남 서부지역으로  구분된다고 한다(공봉석 2013, 2015). 우리가 알고 있는 
가야의 권역의 형성은 생활문화의 공통성 혹은 종족적인 공통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Ⅲ. 건축된 환경: 주거ㆍ시설ㆍ소유물

머리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주거와 취락의 연구는 당연히 가옥 안에서 혹은 취락에서 

어떤 활동이 이루어졌는지, 원근의 가구들과 취락들은 어떤 관계이며 그들 사이의 어떤 
상호작용이 있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인간 집단과 개인은 사물로 둘
러싸여 살아간다. 오랜 정주의 역사와 집약적 농경을 기반으로 한 가야 사회의 공동체, 가
족, 혹은 개인은 일정 공간을 점유하여 가옥(살림집)과 시설을 구축하고 여러 가재도구를 
배치하여 살아갔음은 물론이다. 취락과 가옥, 그리고 창고와 폐기장, 통로와 출입구, 의례
장소, 집회소 가 구축되어 있고 크고 작은 그릇과 가구 등이 배치되어 있는 그 안에 살아
간다. 물론 이러한 건축물과 시설, 그리고 가구와 가재도구는 사람의 필요와 의도에 의해 
디자인되고 제작되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으로 보고 그 디자인과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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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은 사람들을 둘러싼 사물들이 사고와 행동을 이끌고 사람들에
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 최근 신유물론 고고학의 관점은 사물과 인간을 관계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보며 그들의 사이의 관계망과 상호작용을 설명하려고 한다.      

장소, 건축물, 시설, 가구와 가재도구 등과 같이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과 우리는 오랫동

안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해왔다. 특히 정주생활이 시작되면서, 혹은 신석기시대로 접어든 
이후 기거함(dwelling)에서 건축함(building)으로 전이하면서(Ingold 2000) 사람들은 자
기를 둘러싼 물질적 환경을 정성껏 구축하였고 인간 활동과 사회관계의 여러 측면들이 변
화해 갔다. 그러므로 건축물, 시설, 가구와 가재도구를 우리는 건축된 환경으로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구축한 구조물과 물건들을 건축된 환경으로 봄으로써 주거와 취락의 연구
는 사람들의 아이디어로 그것을 고안해 냈고 의도대로 만들어 낸 것으로 보고 생각과 의
도를 파악해 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물질적 배경과 어떻게 상
호작용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그 과정을 설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건축된 경
관과 공동체 및 개인의 상호작용의 과정은 제도화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할 필요도 있다. 
인간집단, 가족 혹은 개인의 재산 혹은 소유물로서 경작지와 장소, 건축물과 시설이 배치
된 환경 안에서의 인간 활동은 제도적으로 안내될 것이라는 점이다. 건축된 환경과의 오
랜 상호작용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은 사회적으로 요구되고 문화적으로 안내되는 방식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상호작용의 역사를 통해 집단과 개인으로서 그것을 소
유물로서 배치하고 이용하는 것은 매우 세부적인 수준까지 제도화되어 있었을 것이며 사
람들은 그에 따라 실천했을 것이다(Earle 2000, Renfrew 2001). 하지만 그러한 제도화는 
잠정적인 것이 아니며 지속적으로 변해갔을 것이다.

취락 안에서 이루어진 인간 활동에 따라 주거 시설물의 규모와 구조, 그리고 배치 등이 

달라질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가령 저장, 조리, 식사, 의례의 활동을 
주거 공간 안에 모두 배치할 수도 있고 그중 어떤 것은 떼어내어 취락 내 다른 시설을 마
련하고 그 안에서 공동으로 행할 수 있다. 흔히 주거의 면적을 거주 인원수로 환산해 보기
도 하지만 주거 안에서 어떤 종류의 활동들이 이루어지는가에 따라서도 주거의 규모는 달
라질 수 있다. 특히 저장과 같은 기능을 주거 안으로 끌어들인다면 주거의 규모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반면, 취락 내 일정한 곳에 고상창고나 옥외의 수혈유구를 마련하여 따로 저
장하게 되면 주거는 큰 면적이 필요 없게 된다(공봉석 2013, 이성주 2014). 

토기의 종류와 배치도 취락 및 주거의 구조, 인간 활동과 상호 밀접한 관계를 지니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주거와 취락을 ‘건축된 환경’이라고 전제하고, 주거 및 취락
시설과 크고 작은 물건들을 고정요소, 반고정요소, 그리고 비고정요소들로 분류할 수 있
다는 아모스 라포포트의 관점을(Rapoport 1982)을 수용한 주거지 연구가 있다. 이 연구
에서는 그와 같은 세 가지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시설이 구축되고, 유물이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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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주  

삼국시대 주거와 취락 연구의 일 방향

되며, 인간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전제했다. 중부지방의 주거 내에 각종 토기의 배
치에 관한 연구인데 여기서 그는 저장용 토기를 가구와 같은 반고정요소로 보고 주거구조
(고정요소) 및 인간 활동(비고정요소)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살폈다(정지왕 2017). 
좀 더 미시적이지만 시루의 형태와 취사난방시설과의 관계를 살핀 연구도(송만영 2016) 
주거의 구조와 인간 활동, 그리고 토기 양상이 서로 긴밀히 상호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이처럼 주거 내 토기의 사용은 인간 활동과 관련되며 그것은 주거의 구조와 규모
를 좌우한다. 

원삼국ㆍ삼국시대, 토기의 기종구성은 남한 제 지역의 모든 취락유적에서 서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이는 제 지역 취락 내 그릇과 관련된 인간활동이 서로 유사했다는 것을 의
미한다. 제작기법이 서로 달라 기형도 약간 다르지만, 

鉢과 甕은 삼국시대 어느 지역의 취

락에서도 일정 비율로 출토되는 공통기종이다(이성주 2012). 단경호 역시 일정 비율을 차
지하는 기종인데 서로 유사한 성형공정, 즉 물레질-타날법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남한 전 
지역 취락유적의 공통기종으로서 역시 정해진 비율로 발견된다. 그러나 용량이 큰 대형호
는 지역에 따라 기형도 다르고 출토비율도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인다. 가령 중부지방과 영
남지방의 취락에서는 대형호와 대옹 두 기종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며 제작기술도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호남지방의 취락과 그 인접 토기요지에서는 적색연질의 대옹을 흔히 
볼 수 있지만 대형호는 보기 어렵다. 호남지역의 대옹을 타 지역의 것과 비교해보면 제작
기법과 기형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부지방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은 다양한 대형 단경호가 제작되어 취락유적에서 사용되었다.

영남서부와 영남 동부의 4세기를 중심으로 한 취락에서 출토된 토기군의 기종구성을 

비교해 보면 각각 유적에는 공통기종이 있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각각의 유적에서 출
토된 토기뮤물군 중 같은 기종이면서 기형이 유사하고 크기도 서로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점유비율도 유사한 기종은 발, 옹, 시루, 중소형의 단경호이다. 옹과 시루는 취사용으로, 
발은 운반용이나 임시저장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리고 단경호는 액체
저장용 혹은 운반용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4가지 기종은 크기, 제작수법, 
기형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가진다. 지역차가 분명한 기종은 대용량 저장을 위한 대옹ㆍ대
형단경호와 식기, 혹은 의례기로 사용되었을 완ㆍ고배ㆍ기대류이다. 대옹과 대형단경호
는 주거의 면적이 넓고, 옥외 수혈 저장유구, 대형주거지가 여러 동 포함되면 그 수가 늘
어나며 그릇의 크기도 커진다. 진주 평거동 유적은 점유비율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그래
도 영남 동부의 포항 호동유적의 취락에 비하면 높은 점유율을 보이며 대옹도 출토된다. 
평거동유적은 주거지의 면적이 넓은 것이 포함되어 있어서 저장의 기능을 가옥 내로 일부 
끌어들인 것을 알 수 있고 저장유구는 굴립주건물이라서 이곳 저장 관련 토기는 사용되었
더라도 남아있을 수 없다. 이에 비해 호동유적은 주거지의 면적이 크지 않아 저장의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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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을 수혈주거지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데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전적으로 반고정요소라 할 수 있는 식기와 의례기는 대형주거지에서 많이 출

토된 편이다. 이에 해당되는 완, 고배, 기대, 컵과 같은 기종은 영남, 그중에서도 동부지역
에서 빈도가 높고 서부지역의 평거동유적에서는 빈도가 적다. 다만 왕성이나 거점취락에
서는 식기와 의례기의 출토양이 많은 편이고 일반 취락에서는 출토예가 희소하다. 그러나 
5세기 영남 동부의 일부 생활유적, 이를테면 부산 두구동 취락의 경우 유구의 밀집도가 높
다는 점 말고는 특별한 취락으로 보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된 식
기와 의례기의 양은 상당하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 취락에는 일반 
주거지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초대형 주거지를 포함한 대형 가옥, 꽤 여럿이 포함되어 있
다는 점이다. 다른 주거유적에서 볼 수 없는 비율로 저장용 대형호가 출토되고 식기와 의
례기의 빈도가 높은 것은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조리와 식사 및 의례 활동에 사용되는 소형의 조리기, 식기, 그리고 의례기의 종류와 수

는 당연히 비고정요소로서 활동의 공간적 제약을 직접적으로 초래하지는 않겠지만 관련
된 인간활동의 방식에 큰 영향을 준다. 그것이 각각의 주거에 끌어들여지면 가옥 내 인간 
활동의 복잡성을 증대시킨다. 대형호나 대옹과 같은 저장용기는 반고정요소로 볼 수 있겠
지만 저장물을 가득 담아 놓으면 거의 고정요소가 된다. 만일 저장용 대형호나 대옹을 주
거지 안에 끌어들이면 상당한 면적이 이용할 수 없는 공간이 된다. 그러므로 주거의 규모
는 저장의 방식과 연동할 수밖에 없다. 주거의 규모는 취락 내 고상창고나 수혈저장시설
과 같은 시설의 축조와 활용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주거 안으로 저장이 끌어들여지는가
의 여부, 대형 저장용기의 사용, 창고의 배치, 그리고 공동체, 가족 그리고 개인 사이의 저
장물의 소유와 이용의 제도화는 긴밀히 맞물려 있으리라고 추측된다.

Ⅳ. 가야 연맹과 국읍의 경관

 1. 국과 연맹체

가야는 흔히 연맹체를 형성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 고대사에서 연맹은 가야 정치

체, 혹은 그들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처음 가야를 연맹체로 
파악한 것은“

六加耶聯盟體”論이었으며(이병도 1959: 376-389) 가야의 여러 國들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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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주  

삼국시대 주거와 취락 연구의 일 방향

나의 연맹을 형성했던 것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가야의 자체 발전적 역
사를 재구축하려는 노력으로(김태식 1993) 이어졌지만 지금은 구분되는 몇 개의 연맹체
를 형성했다고 보는 쪽으로 학계의 의견이 기울고 있다. 사실 가야 정치체, 혹은 그들 사이
의 관계망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크게 보면 가야 사회를 하나의 연맹체로 보거
나 혹은 몇 개의 지역연맹체로 구분해 보는 관점이 있고(백승충 1995) 그 중 대가야만큼
은 국가로 보는 의견이 있다(박천수 1996, 김세기 2003, 2017, 이희준 2003, 2017, 이형
기 2009, 백승옥 2014). 대가야 고대국가론에 따르면 독립된 

國들이 연결된 것은 연맹, 국

이 이름을 잃고 지역정치체로서 중심정치체에 상하관계로 들어간 것은 국가라고 정의한
다(

李熙濬 2017: 195).

정치적 실체로서 가야 사회를 보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

國’의 관계망 즉 몇몇 연맹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면 옳을 듯하다. 관계망의 성격이 다양하고, 관계망에 참여하는 국의 
규모와 조직, 그 수에서 차이가 있었으며, 맹주라고 할 수 있는 구심적 정치체의 성격과 역
할이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國들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 배경과 지리적 조건, 그들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도 서로 달랐으리라 여겨진다. 요컨대 가야 연맹체는 여러 

國, 혹은 구

에 버금가는 정치체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망, 관계망이 형성될 수 있는 정치지리적 요건, 
그리고 관계망 안에서 구심적 역할을 하는 정치체 즉 맹주국의 존재를 전제로 해야 한다
(이성주 2020b).

 

 2. 국읍의 경관과 역사성

연맹체란 

國의 관계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야 연맹체라는 정치사회적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

國’이란 것의 존재를 먼저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다 아는 것처럼 ‘國’

이란 삼한ㆍ삼국시대에 특히 ‘

韓’의 지역에 존속했던 정치체이다. 그 어떤 정치체든 그 성

격을 파악하려면 그 규모와 조직으로 정의하게 된다(Renfrew and Bahn 2016: 180). 정치
체의 규모를 파악할 때 흔히‘정치권력의 중심지로부터 그 권력이 미치는 범위’라는 정의
를 따라 그 규모를 예측하게 된다(Renfrew and Level 1979). 그 조직을 고고학적으로 이
해하자면 그 중심지, 즉 중심취락으로부터 해당 정치체의 범위 안에 분포하는 하위취락들 
간의 위계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문헌기록에서 국의 존재양태에 관한 근거를 찾는다
면『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존하여 설명할 수밖에 없다. 『삼국지』에는 중심취락인 
國邑과 그 아래의 邑落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國邑雖有主帥, 邑落
雜居, 不能善相制御.”이 기록에 대해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국읍과 읍락 사이의 위계가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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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확히 구분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즉 이는 국읍이 여타 읍락을 압도할만한 위상을 
확립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國邑 주수의 거처가 일반 읍락민의 거주지와 명확히 구별되는 

경관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여호규 2018: 116).

고고학에서 널리 참고하는 삼한 국의 내부 조직에 관한 모형이 있다(이희준 2000). 이 

모델은 삼한 

國의 내부조직이 고고학 자료에서는 자연취락 -> 읍락 -> 국읍으로 조직된 

3단계로 위계화된 취락유형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한다. 사실 이 3단계의 위계가 실제 
취락고고학 자료에서는 잘 입증된다고 말하기 어려운 편이다. 5~6세기 전반 고분군의 분
포로는 3단계의 위계가 파악될 수도 있지만 2~3세기 주거유적을 통해 접근한다면 그와 
같은 취락의 위계적 분포 정형이 확인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삼국지』
의 국읍과 읍락에 대한 기록은 3세기 영남지역 고고학 자료에 나타난 취락의 분포정형과 
잘 맞아떨어진다.

만일 3세기 읍락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주거유적을 고고학 자료에서 찾아본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고고학적으로 흔치 않은 사례지만 어쩌면 3세기 읍락의 모습을 이상적으
로 보여주는 취락은 양산 평산리유적이 아닐까 한다(심봉근 1998). 유적이 입지한 구릉이 
3/4 가량이 절토되고 난 뒤 남은 구릉을 발굴했는데 출입구에 망루가 있는 목책으로 둘러
싸인 상당한 규모의 취락인데 발굴을 통해 마을이 일 순간 화재로 전소된 상태를 보여준
다. 영남지방의 주거유적 가운데 2~3세기 국읍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유
적은 경산 임당유적이다. 임당유적에서만큼은 『삼국지』의 기록과 달리 당시 지배집단
의 주거지는 한군데 모여 있어 엘리트의 주거구역임을 알 수 있게 해주며 그곳 가옥의 규
모는 일반 주거보다 2~3배 크기에 해당된다. 

사실 취락고고학 자료에서는 확인이 어렵지만 AD 3세기 집단과 개인이 상당한 수준으

로 서열화 되었다는 사실이 분묘자료에서는 훨씬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대형목곽묘
들이 분지 중심에 탁월한 입지를 보이면서 축조되어간 지배집단의 고분군이 국읍의 존재
를 말해주는 고고학 증거로서 더 설득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중심고분군이라
는 개념이 나오게 된 것이다(이성주 1993). 

지난 20년여의 기간 동안 경산 임당취락을 필두로 중심고분군 가까이에서 

國의 중심취

락, 즉 지배자집단이 거주한 취락의 조사 성과들이 보고되었다. 시기는 다르지만 가야지
역 중심고분군 주변 지배집단의 주거유적으로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주변 봉황동 일원, 말
이산, 신음리고분군 인근의 가야리유적, 그리고 합천 옥전고분군 인근의 성산리유적 등이 
발굴 조사되면서 국읍의 형성과 그 실체에 접근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잠정적 결론이
나마 국읍의 형성을 고고학 자료를 통해 말할 수 있게 된 듯하고 그 경관을 지배엘리트의 
거처와 왕릉군의 조합으로 파악될 수 있다고 보게 되었다(민경선ㆍ김다빈 2018, 강동석 
2019, 이춘선 2019, 최경규 2019, 김다빈 2020, 이성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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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주  

삼국시대 주거와 취락 연구의 일 방향

엘리트의 거처와 지배집단의 고분군이 국읍 구성의 경관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파

악되지만 덧붙여 국읍은 첫째, 집주에 의한 인구증가, 둘째 이념적 중심지로서의 장소성
도 중요한 요건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 국읍 형성의 전제로서 집주의 문제이다. 신석
기시대의 집주의 현상은 아직 분명치 않지만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 인구분포의 변동은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진행된다. 집약농경에 의존한 사회의 전개과정에서 집주에 의한 인
구의 증가와 해체에 의한 분산이 반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이성주 2012). 가령 송국리문
화 단계의 부여 송국리유적과 진주 대평리유적이 집주현상이 대표적이다. 집주현상이 발
생한 취락에는 대형건물지, 유력개인묘, 방어시설, 그밖에 의례장소 등이 배치된다. 그러
나 상당한 규모로 발전하여 유지되었지만 송국리 집주의 시스템은 무언가 자체적인 요인
에 의해 한계점을 넘어 더 발전하지 못하고 해체된 듯하다.

초기철기시대의 집주현상은 그리 분명하지 않다. 초기철기시대 유적이 다른 곳보다 집

중되었던 장소가 원삼국시대 이후 분묘축조나 집단의 점유가 점점 희박해지는 지역도 있
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국읍으로 파악된 지역에는 거의 필수적으로 초기철기시대의 유적
이 다른 곳보다 집중되고 이념적으로 중요한 장소가 생겨났다(이수홍 2020a,b). 경산 임
당유적의 초기철기시대 이중환호가 의례의 장소로서 파악되거니와(김민철 2011), 고김해
만 분지 안에 지석묘 배치는 이 지역에 인구의 집중과 함께 이념적 장소가 만들어지는 모
습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즉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봉황대의 묘역식 지석묘, 애꾸지 구
릉의 지석묘, 그리고 구산동 묘역식거석묘는 역사적 기억을 소환하는 이념적 장소로서 이 
후 일원이 국읍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듯하다(강동석 2019, 이동
희 2019, 이성주 2017).  

  

 3. 왕성의 축조와 가야연맹

최근 김해, 함안, 합천 등지에서 지배엘리트의 거처들이 발굴된 바 있고 이를 두고 국의 

중심지로서 국읍의 존재를 말해주는 고고학적 증거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봉황동토
성과 엘리트 주거지, 함안 가야리토성, 그리고 합천 성산리토성 등이 그것인데 발굴조사
자들은 이를 가야의 

王城으로1) 보고하고 있다. 이 세 왕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시차는 있겠지만 5세기 후반 즈음이라고 한다. 앞서 국읍의 역사 과정에 대해 간략히 언급

1) 宮城이란 용어가 더 적절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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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하였지만 일차적으로 국읍의 형성의 전제는 집주와 이념적 장소의 입지라고 말하였다. 그
리고 여기에 중심고분군이 형성되면서 국의 중심권역으로서의 국읍이 부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국읍의 부상은 그 중심권역에 권력이 집중되는 양상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주변 집단들의 형성과 통합(강동석 2019, 김다빈 2020), 즉 국읍을 중심으로 주변에 
분포하는 기능적, 지역적 집단들의 통합이(김민범 2016) 이루어진다. 

국읍 중심권역에 들어서는 왕성은 그 축조가 각각 5세기 후반 전후로 추정되므로 상대

적으로 늦은 시기에 이루어진다. 권력이 집중된 국읍 중심권역의 형성과 외연의 확장이 
거의 완성되는 단계에 왕성이 축조되는 셈이다. 고구려와 한성백제, 신라 도성의 핵심요
소로서의 왕성과는 축조시기도 늦고 규모도 비교될 수 없지만 가야 제국의 왕성 축조는 
실제 정치권력의 작동이란 측면에서도 중요했지만 상징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사
건이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왕성의 축조가 정치적 전략상으로나 시기적으로 가야연맹
체 형성과 유관하지 않을까 한다. 가야 연맹체 형성은 해륙의 관계망을 따라 

國과 그에 버

금가는 소규모 정치체들이 연결되어 형성되었다고 본다(이성주 2020b). 이와 같이 형성
된 국의 관계망에서 맹주국이 보여주는 권력의 과시는 효과적 정치 전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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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주  

삼국시대 주거와 취락 연구의 일 방향

Ⅴ. 맺음말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기본 생활문화로서 주거 건축의 특징과 그 변화를 살펴보면 가야 권역은 그와 같

은 생활문화를 통해  그 특징을 말할 수 없다. 이는 정치적 공간으로서 가야의 권역은 생활
문화나 종족적 공통성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 같지 않고 가야의 권역이 이미 있던 시기는 
생각보다 늦은 듯하다. 

  둘째, 가야 주거와 취락의 물질적 양상을 구축된 환경으로 전제하고 그 안에서 주민들

이 그것과 어떻게 상호작용 했는가를 분석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가야인의 생활방식
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중 하나의 논의로 영남서부와 동부의 저
장방식을 비교했다. 동부에 비해 서부에서 가내 저장의 비중이 높은 사실이 확인되는데 
이는 주거지 규모의 차이 및 수혈 및 고상창고 이용방식과 관계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셋째, 가야는 해륙의 관계망을 따라 국들이 연결된 연맹체를 구성했다. 여기서 국은 

그 중심지인 국읍의 존재로 파악될 수 있는데 국읍의 고고학적 근거는 지배엘리트의 주거
와 중심고분군의 조합이었다. 국읍은 초기철시대 주민의 집주로 인해 중심지로서 출발하
게 되고 이념적 상징적 공간으로서 중심고분군이 조성되면서 주변집단의 분화와 통합과 
함께 왕성의 축조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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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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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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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가야 집모양토기의 

제작과 출토 사례

민 경 선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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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민경선  

가야 집모양토기의 제작과 출토 사례

Ⅰ. 머리말 

‘집’은 인간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당시 인간의 생활상을 비롯하여 환경, 사

회상 등 많은 부분을 내포하는 인류 문명의 산물 중 하나이다. 따라서 인류의 문명이 발달
하면서 당시 사용한 집 또한 발전된 형태로 변화하여 왔다. 그러나 그 모습을 온전하게 알 
수는 없다. 특히 고대 이전 집의 모양은 문헌과 일부 고고자료에서만 파악되고 있다. 고
대 집의 모양을 참고할 수 있는 고고자료로는 고구려의 고분 벽화와 각종 건물지 유구 등
과 함께 지금까지 20여 점이 출토된 집모양토기(가형 토기)1)를 들 수 있다. 특히 집모양
토기는 최근 들어 가야 지역에서 여러 점이 추가로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집모양토기들
은 수량도 적고 출토지가 불분명한 것들이 많아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진 않

1) 집모양토기의 형태는 가옥과 창고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엄밀히 명명하자면 ‘건

물모양토기’가 맞겠으나, 집이 상징적으로 건물을 통칭한다고 보고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집모양토기(가형 토기)’를 따르고자 한다.

Ⅰ. 머리말
Ⅱ. 집모양토기의 출토 사례
Ⅲ. 가야 집모양토기의 특징
   1. 기록에서 본 가야의 집
   2. 가야 집모양토기의 조형적 특징

     가. 구조ㆍ형태상 특징
     나. 용도ㆍ기능상 특징
     다. 제작ㆍ표현상 특징
Ⅳ. 맺음말

목 차

가야 집모양토기의 

제작과 출토 사례

민 경 선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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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았다. 집모양토기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다루어지긴 하였으나(김원룡 1969) 이후 신라 지
역 중심이거나 토우, 이형 토기, 상형 토기의 일부로 다루어지는 경우(이능세 1984, 이난
영 1993; 2000, 홍보식 2015)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외형적인 특징을 중심으로 하여 토기
의 기능성에 대한 연구(신인주 2001)로 이루어졌고, 일부 건축학적 연구(함순섭 2008, 김
상태 2015)가 있기도 하였다.

본 발표로써 기존의 연구 성과를 넘어서기는 어려우나, 지금까지 확보된 집모양토기에 

대하여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최근 출토 사례를 추가 소개하며 그 특징을 다시 한번 정리
해 보고자 한다. 단 건축 구조적인 측면은 다른 발표에서 다루어질 것이라 생략하겠다.

Ⅱ. 집모양토기의 출토 사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집모양토기는 23점이다. 그중 9점만 출토지가 

확인되었다. 출토지와 추정되는 출토 지역별로 보자면, 고구려 지역에서 1점, 백제 지역
(추정)에서 2점, 신라·가야 지역에서 20점이 있다. 그 시기는 4세기 대부터 확인되며, 대부
분 5~6세기 대의 것이다. 출토지가 분명한 토기들은 김해 봉황동유적과 함안 소포리유적 
2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집의 하부 구조에 따라 고상식, 지상식으로 
구분되고, 상부의 기둥, 지붕, 벽체 등에 따라 그 형식도 달라지고 용도를 달리한다.

집모양토기

출토지

시기

크기(높이)

구조/지붕

소장처

1

경주 사라리 

5호 목곽묘

4C

20.3cm

고상식

/ 초가지붕

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

2

진해 석동 

415호 목곽

4C

17.8cm

고상식

/ 초가지붕

국립김해박물관

소장품

3

함안 말이산 

45호분

5C

19.4cm

고상식

/ 초가지붕

함안박물관 

소장품

<표 1> 삼국시대 집모양토기 출토 현황  ※ 시기순(보고서 기준), 축척 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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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민경선  

가야 집모양토기의 제작과 출토 사례

집모양토기

출토지

시기

크기(높이)

구조/지붕

소장처

4

함안 말이산 

45호분

5C

-

cm

고상식

/ 초가지붕

함안박물관 

소장품

5

미상

5C

11.5cm

고상식

/ 초가지붕

경북대학교박물관 

소장품

6

미상

5C

13.5cm

고상식

/ 초가지붕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품

7

傳 경남

5C

17.4cm

고상식

/ 초가지붕

일본 동경국립
박물관 소장품

※ 小倉武之助 

수집품

8

傳 창녕

5C

16.0cm

고상식

/ 초가지붕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품

9

傳 진주

5C

20.3cm

고상식

/ 초가지붕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

10

미상

5C

14.1cm

고상식

/ 초가지붕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소장품

11

미상

5C

15.5cm

고상식

/ 초가지붕

호림미술관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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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집모양토기

출토지

시기

크기(높이)

구조/지붕

소장처

12

김해 

봉황동유적 

건물지 주변

5C

5.8cm

지상식

(복층)

/ 초가지붕

국립가야문화재

연구소 소장품

13

傳 현풍

5C

12.5cm

지상식

(복층)

/ 초가지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14

미상

5C

11.9cm

지상식

(복층)

/ 초가지붕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

15

미상

5C

16.8cm

지상식

(복층)

/ 초가지붕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

16

傳 평양

※ 고구려

5C

8.3cm

단층식

/ 기와지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17

창원 다호리 

B1호분 

서쪽 주구부

6C

(복원 높이)

28.0cm

※ 지붕‧벽체‧기둥 

일부 잔존

고상식

/ 초가지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 복원품

18

창원 다호리 

B1호분 

서쪽 주구부

6C

(잔존 높이)

9.0cm

※ 지붕 일부 

잔존

고상식

/ 초가지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 복원품

19

기장 가동 

Ⅰ-2호 석곽

하부 목곽묘

6C?

19.3cm

지상식

(복층)

/ 초가지붕

정관박물관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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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민경선  

가야 집모양토기의 제작과 출토 사례

Ⅲ. 가야 집모양토기의 특징

1. 기록에서 본 가야의 집

고구려는 중국의 문헌이나 고분 벽화를 통해서 ‘부경(

桴京)’이라는 창고를 두었다는 것

을 알 수 있고, 백제는 기록은 적으나 대형 목조 우물이나 창고가 있고, 신라는 『

三國史

記』 屋舍條에서 신분별로 주택의 크기를 규정하고 건축재나 실내장식 등을 제한하는 등
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는 벽화, 토기, 전돌 등에
서 기와 건물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실제로 발굴조사 유적에서도 각종 기
와류가 다수 출토되고 있다. 물론 시기적인 차이는 있다.

 이에 비해 가야의 집, 건물에 대한 기록은 드물다. 우리나라보다 중국 고문헌에서 변진

집모양토기

출토지

시기

크기(높이)

구조/지붕

소장처

20

미상

6C

35.0cm

단층식

/ 기와지붕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

21

함안 

소포리유적 

71호 주혈

6

~7C

7.3cm

단층식

/ 기와지붕

함안박물관 

출토품

22

미상

※ 백제 추정

6C 

이후

(길이)

57.0cm

단층식

/ 기와지붕

호암미술관 

소장품

23

미상

※ 백제 추정

6C 

이후

15.2cm

단층식

/ 기와지붕

다보성 고미술
전시관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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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과 진한을 설명하며 일부 기록을 전하고 있다. 『

三國志』魏志 弁辰條에서는 변진이 진

한과 섞여 살고, 성곽이 있고, 부뚜막은 서쪽에 둔다고 전한다. 또한 거처는 초옥토실(

屋土室)을 만들어 모양이 마치 무덤과 같고, 출입구는 위쪽에 있으며 남녀노소 구별 없이 
한 가족이 그 안에 산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원삼국(삼한) 시대의 내용이지만, 가야와 괴리가 있지 않고 자연스럽

게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신라·가야권의 영남지역에서 확인된 여러 집모양토기
들에서도 공통적인 요소가 보이며 문헌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 형태와도 맞닿는 부분이 있
어 이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2. 가야 집모양토기의 조형적 특징

가. 구조ㆍ형태상 특징

우리나라에서 집모양토기는 가야와 신라권인 영남지역에서 많이 확인되고 있다. 출토

지가 미상인 것들도 대부분 경남 일대에서 출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집모양토기에 있어서 지역적인 특징은 찾기는 어렵다. 그보다 지리적인 여건과 정치·사회
적인 필요성에 따라 구조를 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조적인 특징으로 보면 고상식, 지
상식으로 구분되는데, 고상식(

高床式)은 말 그대로 바닥이 높게 있다는 뜻으로 생활면이 

지표면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지상식(

地床式)은 생활면을 지표면에 둔 것이

라 할 수 있다(배덕환 2020; 2007). 지상식은 또 내부 구조에 따라 중층식, 단층식으로 구
분하기도 하는데(김주호 2014, 신인주 2001), 중층식은 복층식이라 할 수 있겠다.

1) 고상식

지금까지 확보된 집모양토기는 고상식이 많다. 고상식 건물은 구조적으로 지면에서의 

습기 방지, 침수 예방, 짐승이나 해충으로부터 피해 방지하는 등의 장점을 가진다. 따라서 
곳간, 창고의 형태로 보고 있다. <표 1>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경주 사라리, 창원 석동, 함
안 말이산, 창원 다호리 등 13점이 있으며, 모두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이들은 창원 다호
리 고분 출토품을 제외하고 4~5세기 대의 것으로 비교적 앞선 시기에 해당한다.

경주 사라리 출토품은 기둥이 원통형으로 표현되었고, 경북대학교박물관·이화여자대

학교박물관·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품들은 4주, 창원 다호리 출토품은 8주, 그 
외는 9주의 나무 기둥을 세웠다. 모두 평면 방형의 건물 본체를 만들고 지붕은 맞배형 초
가 지붕을 올렸다. 지붕에는 지붕의 중앙 또는 한쪽에는 굴뚝 모양의 큰 주구를 마련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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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선  

가야 집모양토기의 제작과 출토 사례

다. 대부분 주입구, 주출구를 비롯하여 2개 이상의 구멍이 나 있는데, 경주 사라리 출토품, 
경북대학교박물관과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품은 한 곳만 뚫려 있다.

2) 지상식

지상식으로는 고구려, 백제 지역 출토품을 제외하고 7점이다. 그중 김해 봉황동유적, 

傳 현풍, 리움 소장품 등 초가집 모양의 토기 5점은 중층식(복층식)일 것으로 보인다. 중
국 고문헌에 나오는 출입구를 위쪽에 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바닥보다 높게 문이 있다. 
출입구의 위치상 고상식일 가능성도 있으나, 외관의 벽체가 지표면까지 만들어진 것은 바
닥면을 사용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들 중 기장 가동 Ⅰ-2호 석곽 하부 목곽에서 
출토된 토기는 신전으로 추정되며 다른 것들과 지붕의 형태나 시기 차이가 있다. 그 외는 
모두 5세기 대의 것이고, 지붕의 형태가 박공을 가진 맞배와 모임지붕의 복합적인 형태를 
보인다. 특히 김해 봉황동 유적 출토품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의 경우는 뒷부분이 둥글
게 떨어진다. 이는 문헌에서 확인되는 무덤과 같은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리움 소장품의 지붕 위에는 이엉 위 새끼줄을 올려놓은 듯한 장식 효과
가 있고, 봉황동 유적 출토품을 제외하고는 4점 모두 한쪽 측벽에서 지붕 쪽으로 굴뚝 모
양의 큰 주구가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리움 소장품 2점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의 벽체 
외곽으로 기둥 형태가 보인다. 이는 기장 가동 출토품과 유사하게 벽체를 따라 외곽으로 
둥글게 돌아가는 모습이다. 이들은 주구 외에 합각부도 뚫려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품은 지붕 등 외관에 고양이, 쥐와 같은 동물 형상의 토우가 부착되어 있다. 한편 김해 봉
황동 유적 출토품은 단순한 형태로 다른 토기의 사다리와 같이 출입구 아래 단을 놓았고, 
문은 개방되어 있다. 오른쪽 벽면에는 원형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함안 소포리 유적 출토품과 리움 소장품 중 기와집이 단층식에 해당되는데, 이들은 6

세기 대 또는 이후의 것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었고, 건물 벽면에 창문 또는 나
무 모양을 음각하여 표현하였다. 리움 소장품은 지붕 중앙에 굴뚝과 같이 낮은 주구가 마
련되었고, 소포리유적 출토품은 넓은 벽면 중앙에 원형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나. 용도ㆍ기능상 특징

 집모양토기는 형태적 특징상 주기로 볼 수 있는데, 대부분 고분에서 출토된 점으로 보

아 여타 상형토기와 함께 용도·기능적으로 의기류로 분류된다. 주구를 2개씩 만들다가 점
차 1개 또는 다른 형태의 구멍을 마련하게 된다. 이는 제의과정에서 주기의 기능을 하다가 
점차 기능적인 것보다는 상징성을 더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서와 같이 삼국시대
나 그 이전부터 창고의 역할이 중요했고 어떤 형태로든 이를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
야의 주요 유적에서도 해안가나 교통 요충지 등에 대규모 창고시설이 확인되고 있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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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상식의 집모양토기가 의기로 고분에 부장되면서 저장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
이라 보인다. 창고형을 띠지만 실제 저장용기로 사용하기는 주구 등 구멍의 배치나 토기
의 크기 등으로 보아 저장 기능을 하기에는 적합해 보이진 않는다. 6세기 대까지는 주로 
명기로 사용되다가 이후에는 장골용기로 만들어져 크기도 커지고, 주구는 만들지 않는다.

 고분이 아닌 생활유적에서 출토된 김해 봉황동유적과 함안 소포리유적의 출토품은 

10cm 미만으로 크기가 작다. 취락 내부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공동체의 번영 및 결속 
등을 기원하기 위한 목적으로(김주호 2014) 토기로서의 역할을 했다기보다 토우의 기능
을 했던 의례용품으로 보인다(민경선·김다빈 2018).

다. 제작ㆍ표현상 특징

이들 집모양토기는 대부분 경질 소성으로 제작되었다. 색조는 회청색을 많이 띠나 회흑

색, 회갈색, 회백색 등을 띠며, 일부 토기는 자연유가 많이 덮여 있다. 모두 점토대, 점토띠
를 붙여 성형하였고, 세부 구조 역시 점토띠를 붙이거나 문양을 넣어 표현하였다. 주구의 
경우는 과장된 형태로 지붕 위나 벽면 옆에 부착하였으며, 일부 작은 구멍들은 원형의 도
구를 사용하여 밖에서 안쪽으로 뚫었다.

집모양토기의 대부분은 건물 본체나 지붕에 여러 문양을 새겼다. 소문의 경우도 6점이 

있다. 침선과 사격자문이 가장 많으며, 집선문, 송엽문, 점열문 등이 표현되어 있다. 이 문
양들은 고분 부장품의 다른 토기들에서도 일반적으로 보이는 문양이라 할 수 있으나 삼각
집선문 등 중요 유물에만 표현되는 문양도 많이 확인된다. 단순히 장식 효과로 시문한 것
만이 아니라 문양으로써 일부 창, 문, 틀 등의 구조를 표현하기도 하였고, 초가나 나무의 
재질을 표현하는데 사용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Ⅳ. 맺음말

삼국시대 집모양토기 중 영남지역에서 출토된(또는 출토 추정) 사례를 대략적으로 살

펴보았다. 출토지가 불분명한 것들이 많아 정확하게 분석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으나 형태
적인 유사성 등을 고려하여 검토하였다. 시기, 출토지, 구조나 형태적 특징을 비롯하여 용
도, 제작 표현 등을 통해 각 집모양토기들의 개별적 특징들과 함께 공통적인 요소들이 많
이 보였다.

우선 출토지를 보면 대부분 고분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이 있다. 그러나 생활유적에서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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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선  

가야 집모양토기의 제작과 출토 사례

토된 봉황동 유적 유물 등 2점도 그 성격, 용도상으로는 의례용품으로 볼 수 있었다. 구조
와 형태상으로는 지역적 차이는 찾기 어렵지만 시기적으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크게
는 고상식에서 지상식으로 변화하고, 굴뚝과 같은 모양의 주구부의 변화는 주기의 기능이 
퇴화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지붕은 초가에서 와가로 바뀌는데, 형태는 맞배지붕이 
사용되다가 지상식에서는 복합적인 형태를 가지며, 기와지붕에서는 다시 맞배지붕을 채
택하고 있다.

구조적인 부분은 집모양토기가 의례용품인 점을 감안하면 제의 성격에 맞거나 필요한 

구조를 표현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당시 가옥이나 주요 건물의 형태를 본따 만
든 것은 분명할 것이다. 다만 이를 표현한 정도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 구조물을 상
징적으로 형상화하기만 하였는지, 일부만 과장 또는 생략하였는지, 상상이 가미되었는지
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현재로서는 발굴조사에서 건물지 등 각종 시설물을 찾아가는 과정
에서 중요한 자료로 참고할 수밖에 없다. 또한 조사된 유구 분석을 통해 거꾸로 집모양토
기의 조형적인 특징이나 상징성, 현실성 등을 더 명확히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집모양토기들에 표현된 건축물의 성격에 대해서도 고고학·건축학적으로 여러 

연구가 있다. 고상식 건물은 일반적으로 창고로 보고(김원룡 1969; 신인주 2001; 박재
평 2002; 김태중 1998), 그 자체가 상당한 권위와 상징성을 가지는 건축물로 본다(김흥섭 
2003; 김창석 2001; 김주호 2014). 지상식 건물은 어느 정도 권위성을 가지는 가옥으로 
보고 있다(박언곤 1985, 함순섭 2008). 일부는 이를 신전이나 신궁으로 보기도 한다(김순
득 1991). 최근까지 가야의 생활유적, 취락에 대한 조사도 상당히 이루어져 주거, 건물, 취
락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지고 있다(배덕환 2005; 이성주 2009; 공봉석 2016; 2009; 유병
록 2009; 이나영 2010; 권귀향 2012).

최근 김해 봉황동 유적, 함안 말이산 고분군 등에서 집모양토기의 신자료가 확보됨으로

써 가야의 집, 건축에 대한 논의에 다시 활기를 불어주고 있으며, 이는 가야의 취락 조사와 
주거 문화에 대한 심화 연구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집모양토기 자체만으로도 
가치를 가지지만 이에 내포된 사회·문화적 요소들은 아직 구명되지 않은 것이 많다. 앞으
로 다각적인 학제간 연구를 통해 함께 논의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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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참고문헌

[논문 등]
공봉석, 2016, 「가야의 주거와 취락」, 『가야고고학개론』, (재)중앙문화재연구원‧진인진.
김다빈‧민경선, 2019, 「土偶를 통해 본 金官加耶 社會의 一面」, 『嶺南考古學』84, 嶺南

考古學會.

김상태, 2015, 「가형토기를 통한 신라주거건축에 관한 연구」, 『동북아문화연구』제45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김주호, 2014, 「家形土器로 본 古代 地域社會의 一面」, 『機張 佳洞 古墳群 -下』, 부경

문물연구원.

배덕환, 2020, 「가야 건물로 본 토목 기술」,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개소 3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가야인의 技術』,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愼仁珠, 2001, 「三國時代 家形土器에 관한 硏究」, 『文物硏究』제5호, 동아시아문물연구소.
이은석, 2016, 「7세기대 신라 가옥구조에 대한 고찰」, 『新羅史學報』37, 新羅史學會.
이해수, 2017, 「창원 석동 복합유적 출토 가형토기에 대하여」, 『昌原 石洞 複合遺蹟Ⅵ

-종합고찰‧부록 외-』,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咸舜燮, 2008, 「嶺南地方 三韓‧三國時代 살림집의 復原硏究」, 『東垣學術論文集』제9집,

國立中央博物館‧韓國考古美術硏究所.

홍보식, 2015, 「신라‧가야지역 象形土器의 변화와 의미」, 『韓國上古史學報』第90號, 韓

國上古史學會.

[단행본] 
정관박물관, 2019, 『영혼의 안식처 집모양토기』.
*발굴조사보고서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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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 집모양토기의 제작과 출토 사례」에 대한 토론문_이해수

가야 집모양토기의 

 제작과 출토 사례

」에 

 대한 토론문

이 해 수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집모양 토기’는 출토지가 명확한 유물이 9점 밖에 되지 않

아 정확한 시기와 변화양상을 검토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다수의 발굴
조사를 통해 출토지와 출토유구 및 공반유물이 확인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어 이번 기회
와 같이 새롭게 검토할 수 있는 계기가 지속적으로 마련되리라 기대합니다.

 1. 가야 집모양 토기의 구조와 형태는 발표자가 설명한 바와 같이 시간적으로 고상식

에서 지상식으로 변화 양상을 보입니다. 그런데 발표자께서는 다양한 지역에서 출토되거
나,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집모양 토기의 지역적인 차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하
셨습니다. 하지만, <표1>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시간적인 변화와 지역적인 차이에 따라 
집모양 토기의 형태와 질적인 부분에 분명한 차이가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집
모양 토기의 지역성에 대해서 발표자가 생각하는 바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2. 집모양 토기의 주된 원형인 고상건물은 기둥 구조에 따라 평주식과 통주식으로 구

분되며 형태에서도 차이가 일부 관찰됩니다. 발표자는 통주식의 고상건물 구조를 지상식
의 복층 또는 중층 구조로 판단하였는데, 그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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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3. 집모양 토기의 제작 목적에 대해서는 ‘의례용’이라는 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

습니다. 집모양 토기의 형태를 분류할 때, 각각을 통한 의례의 종류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 않았나하는 의문이 발생합니다. 또한, 출토유구의 차이를 고려했을 때도 해당 
의례의 목적과 성격이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에 대한 발표자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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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 집모양토기의 제작과 출토 사례」에 대한 토론문_이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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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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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한 욱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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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욱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Ⅰ. 시작하며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

떤 그릇에 삶을 담았을까? 이 질문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는 답을 찾기 매우 어려운 질문
임을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건축물이 남아있지 않아 그 모습을 추정하는 것에 한
계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남아 있는 건축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봉정사 극
락전으로 대략 13세기의 건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직접적인 자료가 아닌 간접적인 자
료를 통해 추정해야하지만 이 역시 자료가 매우 한정적이다. 그 가운데 역사시대 이후의 
궁궐, 사찰 등과 같은 권위건축물 혹은 종교건축물의 경우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자료가 
남아있으나 일반인의 삶을 담았을 주거건축물은 거의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자료의 대
부분은 역사기록, 건축물을 모티브로 하는 토기 등의 유물 혹은 고분벽화와 같은 회화자

Ⅰ. 시작하며
Ⅱ. 선행연구 고찰
   1. 문헌을 통한 연구
   2. 발굴결과에 의한 연구
   3. 유물을 통한 연구
   4. 그 밖의 연구
Ⅲ. 집모양토기의 건축적 고찰
   1. 생활면의 위치
   2. 출입구의 위치
   3. 지붕의 형태

Ⅳ. 가야건축과 집모양토기의 관련성
   1. 존재가능성
   2. 건물의 용도
   3. 건축유형의 분류
Ⅴ. 마치며

목 차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한  욱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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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료, 그리고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건물지의 흔적이 있다. 이 가운데 역사기록은 도상이 
함께 그려지지 않은 이상 건축물의 모습을 명확하게 알기 어렵고, 발굴조사의 결과로는 
건축물의 평면형태와 기단의 구성만을 알 수 있을 뿐으로 그 상부의 실제적인 모습은 오
로지 추정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다 도움이 되는 자료는 유물과 회화자료이
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가야건축과 관련하여서는 그 어떤 지역보다도 건축적 증거
는 미미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야건축에 있어서는 가형토기라 불리는 집모양토기가 특
히 도움이 된다. 집모양토기는 사용목적이 건축적이지는 않지만 그 모습이 건축물을 모방
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건축적 모습을 보다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하지만 건축물
을 모방하였다고는 하나 본래 건축과는 상관없는 특별한 기능을 갖는 기물이므로 건축물
에 대한 정확한 묘사보다는 기능에 맞는 형태로 변형된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그 형태
를 살펴 건축적인 부분과 아닌 부분을 구분해 내고 건축적인 부분을 통해 건축물의 모습
을 규명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 글은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존하는 집모양토기의 
건축적 고찰을 통하여 가야의 건축적 특성을 추정하는 것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집모양토기와 관련하여 출토지가 명확하게 가야지역인 것으로 확인된 것은 10개 정

도이며, 그 외 출토지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 
대략 8개가량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들 18개의 집모양토기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이는 
정관박물관(2019)에서 발간한 보고서를 참고로 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국내에 알려진 20
개의 집모양토기를 총망라하고 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고구려 및 통일신라시기의 
것도 포함되어 있어 이들은 제외하였다. 연구대상 집모양토기는 <표 1>과 같다.

  연구의 방법으로는 먼저 기존 가야건축과 관련한 선행연구들을 검토하였으며 가야건

축과 관련하여 언급된 역사기록과 함께 특히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고고학적 결과
를 기초자료로 활용하였다. 이와 함께 발굴 시 출토된 집모양토기의 건축적 구조와 의장 
및 용도를 고찰하였다. 이어서 집모양토기가 실제 건축물로서 존재 가능성을  고찰하기 
위하여 발굴조사 사례들을 검토하였다. 검토대상은 가야의 영역에 대한 논란이 있기는 하
지만 일반적으로 가야의 영역으로 인정되는 영남지방의 사례를 중심으로 하였다.

유물명

출토지

유형

비고

1 창원 석동 복합유적 출토 토기 경남 창원

고상

가야지역

<표 1> 연구대상 집모양토기 목록(출처: 김상태(2019) p.102 편집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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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한욱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유물명

출토지

유형

비고

2 함안 말이산 고분군 출토 토기 경남 함안

고상

가야지역

3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토기 A 경남 진주

고상

가야지역

4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토기

경남

고상

가야지역

5 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 토기 경남 창녕 고상*

가야지역

6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토기 경남 창원

고상

가야지역

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토기 A 대구 달성

지상

가야지역

8 김해 봉황동 유적 출토 토기 경남 김해

지상

가야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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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유물명

출토지

유형

비고

9 부산 가동 고분군 출토 토기 부산 가동

지상

가야지역

10 함안 소포리 유적 출토 토기 경남 함안

지상_기

와집*

가야지역

11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토

미상

고상

미상

12

호림박물관 소장 토기

미상

고상

미상

13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토기

미상

고상

미상

14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토기

미상

고상

미상

15 경주 사라리 유적 출토 토기 경북 경주

고상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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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한욱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Ⅱ. 선행연구 고찰

가야건축과 관련하여 신라의 ‘황룡사’, 백제의 ‘미륵사’처럼 그 존재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비교적 규모가 있는 건축물 혹은 유적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이에 따라 가야건축
관련 연구는 신라와 백제와는 달리 연구의 방법 및 대상이 매우 한정적이다. 

1. 문헌을 통한 연구

기록으로서 중국의 여러 문헌에 우리나라와 관련된 건축적 언급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많은 연구자들이 인용하며 고대건축 특히 주거건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가운데에는 주남철(1976), 김정기(1977) 등 한국건축사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고고학 연
구자들도 포함된다. 이글의 주제인 가야건축과 관련하여 인용되는 문헌과 내용을 정리하
면 다음과 같다.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내용을 따랐다.

유물명

출토지

유형

비고

16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토기 B

미상

지상

미상

17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토기 C

미상

지상

미상

18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토기 D

미상

기와집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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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晉書 東夷列傳 馬韓 :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들어 거처하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같으

며 출입문은 위쪽으로 나있다(...

居處作土室 形如冢 其戶向上...)

後漢書 東夷列傳 韓 :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드니 그 모양이 마치 무덤같으며, 출입하는 

문은 윗  부분에 있다(...

居處作土室 形如塚 開戶在上...)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 : 거처는 초가에 토실을 만들어 사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과 

같았으며 그 문은 윗부분에 있다(...

居處作草屋土室 形如塚 其戶在上...)

三國志 魏書 東夷傳 弁辰 : 그 나라는 집을 지을 때에 나무를 가로로 쌓아서 만들기 때

문에 감옥과 흡사하다(...

其國作屋 橫累木為之 有似牢獄也...)

  
이들 번역내용을 종합하면 대부분 수혈식 주거인 움집에서 생활하였으며 일부에서는 

고상식 건물에서도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형
태의 수혈식 주거와 고상식 건물의 유구가 발굴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기록에서 건축물을 가리키며 사용한 한자인 ‘

草屋土室’과 ‘土室’과 관련하여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먼저는 ‘초옥토실’ 혹은 ‘토실’이 수혈주거인가 하는 것이다. 고고
학적 견해로는 대체로 수혈주거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장덕원, 2012), ‘

穴居’

와도 같은 맥락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이훈 외, 2001) 그러나 건축학적 견해로는 
‘초옥토실’ 혹은 ‘토실’은 혈거와는 다른 건축형태로서 완전한 수혈주거가 아닌 지상건축
의 모습을 한 반수혈주거(김정기, 1977)이거나 혹은 지상건축(주남철, 1976)으로 보는 견
해가 있으며, 이후 건축학계에서는 지상건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다른 하나는 ‘

草屋’과 ‘土室’이 서로 다른 형태의 건축물을 가리키는 것인지 혹은 하

나의 건축물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이들을 서로 다른 
건축물의 형태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다. 즉, 초옥은 지붕의 재료를 나타내며 토실에 부가
적으로 붙여져 초옥토실이 되는 것으로 동일한 형태의 건축으로 보는 견해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서로 다른 건물형태로 보기도 한다. 김정기(1977)는 ‘옥’과 ‘실’이라고 불리는 
건물에 서로 차이가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초옥토실에서는 초옥과 토실을 별도의 건물형
태로 보지 않고 동일한 건물형태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장덕원(2012)도 마찬
가지이다. 그는 문헌상에 나타나는 ‘

穴’, ‘室’, ‘屋’, ‘宅’, ‘宇’ 등이 각각 서로 다른 건축물

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설명하면서도 

草屋土室은 草屋과 土室의 별개의 건축적 형태

가 아닌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역시 토실은 초옥이 생략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한편, 주남철(1976)은 초옥토실을 동일한 의미에서 설명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건축
형태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앞의 기록들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기록들이다. 가야건축에 대해 보다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은 삼국유사에서이다. 이준희(1999)는 삼국유사 내에서 가야건축에 관한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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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한욱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가지 사료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건축적 규모와 기능을 살펴 볼 수 있는 기록은 다
음과 같다.

三國遺事 卷第二 紀異第二 駕洛國記 : 그래서 1500보 둘레의 외성과 궁궐, 전당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 창고, 곡식 창고 지을 곳을 두루 정하고 궁궐로 돌아왔다..궁궐
과 옥사는 농한기를 기다려 그해 10월 안에 짓기 시작하여 갑진년 2월에 이르러 완성했다
(...

築置一千五百步周廻羅城 宮禁殿宇 及諸有司屋宇 武庫倉禀之地 事訖還宮..其宮闕

屋舍 侯農隙而作之 經始于厥年十月 逮甲辰二月而成...)

여기에서는 건축물과 관련된 용어로 ‘

宮’, ‘殿宇’, ‘屋宇’, ‘庫倉’ 등이 보인다. 이를 살펴

보면 궁은 왕이 거처하는 곳으로 판단되며 각 건물의 기능에 따라 왕이 사용하는 전우, 관
료들이 사용하는 옥우, 그리고 물품을 보관하는 고창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내용을 보면 
건축적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앞의 중국 기록에서 언급되었던 것과는 달리 비교적 규모 및 
용도에 따른 다양한 건축물이 가야에서도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2. 발굴결과에 의한 연구

발굴결과에 의한 가야건축에 대한 연구는 위양근(2016)에 의하면 1990년 후반 대규모 

주거유적조사로부터 시작하여 2000년 이후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통시적 관점에
서의 유적의 선후관계를 밝히는 연구, 평면유형과 건축구조 등 주거지 자체에 대한 연구, 
주거지들이 모여 있는 취락의 구조에 대한 연구 등 3가지 방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요 
연구로는 다음의 것이 있다. 

위양근(2016)은 그의 석사학위논문에서 경남지역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3~6세

기에 해당하는 가야시대 취락유적 51개소를 대상으로 수혈주거지 및 굴립주 건물지를 함
께 살펴보았다. 이에 입지 및 배치와 함께 수혈주거지에서는 벽체시설과 난방시설에 의한 
유형을 나누고, 굴립주 건물지에서는 기둥배치 및 면적으로 유형을 구분하였다. 이어 유
물에 의한 주거지의 편년을 나누었다. 이어 이들의 변천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민수(2019)는 그의 석사학위 논문에서 경남지역의 발굴을 통해 드러난 4~5세기 경

남지역 15개 유적 296동의 고상건물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먼저 입지를 분석하
고, 주열배치에 의한 평면을 검토한 후 집모양토기 및 고분벽화의 그림을 토대로 그 구조 
및 입면을 유추하고 있다. 여기서 고상건물의 용도는 대체로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추
정하고 일부는 임시주거용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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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3. 유물을 통한 연구

가야건축과 관련된 유물은 집모양토기가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신인주(2001)은 당시까지 알려진 17개의 집모양토기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먼저 집모양토기의 형태를 통하여 일반용기와 주구부용기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건축적 
관점에서 고상식과 지상식으로 나누었다. 고상식은 다시 단주형, 다주형, 중층형으로 나누
고 또한 지붕의 모양, 재질, 문위치 등을 기준으로 세분하였다. 이어서 이들을 시기별로 분
류하여 변천과정을 고찰하였다. 건축물의 용도로는 곡식창고로 상정하였다.

김상태(2015, 2019)는 지금까지 알려진 집모양토기를 대상으로 건축적 요소의 분석

을 통한 유형분류를 시도하고 기본적인 주거 형태로 박공면을 주출입구로 하는 맞배지붕
의 고상식 건축을 제시하였다. 또한 집모양토기에 대해서는 주구형과 건축형으로 분류하
고 건축형에 부장품으로서의 성격을 부여하였다. 특히 ‘부산 가동 고분군 출토 토기’에 대
해서는 건축물의 내부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보고 건물내부의 한켠에 온돌을 설치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위양근(2016)은 그의 석사학위논문에서 집모양토기에 대해 “...피장자의 부를 상징하는 

창고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하고 굴립주 건물지는 창고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판단
하였다. 역시 주거는 수혈주거가 일반적이고 굴립주 건물은 특수한 용도의 것으로 파악하
였다. 

김민수(2019)는 그의 석사학위논문에서 진해 석동 복합유적 출토 집모양토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출토된 가형토기는 출입문 방식이 건물 내에서 개폐하는 것이 아니라 밖
에서 잠그는 방식으로 고상건물 내에 다양한 물품을 수시 수납하였음을 상징적으로 표현
한다...”라고 설명하여 고상식의 집모양토기는 창고를 모방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관점으로는 대부분의 주거형식은 수혈주거임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4. 그 밖의 연구

가야건축과 관련하여서는 앞에서 살펴본 주제들을 단독으로 연구하기도 하지만 서로 

상호관련지어 진행한 연구들이 있다. 

김태중(1998)은 그의 논문에서 고상건축유적과 집모양토기를 서로 비교하면 연구를 진

행하였다. 이에 의하면 집모양토기는 발굴된 유적과 일치하며 이것은 철제공구의 발전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그 기능은 저장시설로 추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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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한욱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또한 가야건축에 대해 종합적인 연구를 한 연구자로는 이준희(1999)가 있다. 그는 석사

학위논문에서 발굴을 통한 철기시대의 주거지 유적의 92개 건물지와 건축물의 모습을 형
상화한 집모양토기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때 주거지 유적은 수혈주거지를 대
상으로 평면형태, 노지설치, 출입시설, 저장시설을 중심으로 분석하면서 철기에 의한 치목
의 발달로 목구조결구가 가능하다고 보고 건축적으로 보다 발전한 형식으로 고상건축을 
상정하고 있다. 이어 집모양토기의 역할을 ‘영의 집’이라는 개념으로 사후의 안식처라는 
관점에서 정밀한 사실묘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와 함께 집모양토기의 상
당수가 고상식의 창고형태를 하고 있는 것으로 사후에도 풍요를 비는 제례용이라는 견해
도 나타내고 있으나 어느 경우라도 그 모습은 당시의 주거의 모습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집모양토기의 형태를 평지형과 고상식과 중층식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주거형, 축사
형, 창고형으로 구분하였다. 

  이외의 독특한 연구로는 함순섭(2008)의 연구가 있다. 그는 중층식으로 분리되기도 

하는 집모양토기를 바탕으로 가야 주거건축에 대한 복원을 시도하였다. 그는 지붕은 정
면으로는 맞배지붕, 반대편은 우진각지붕의 형태이며, 목조로 가구를 구성하고 벽은 흙벽
으로 복원하였다. 또한 층을 상하로 나누어 상층으로 사다리를 이용하여 진입한 후 하층
으로 출입하는 방식의 주거를 제시하였다. 이는 문헌에서 보이는 ‘초옥토실(

草屋土室)’과 

‘기호재상(

其戶在上)’을 모두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선행연구의 고찰결과 가야건축과 관련한 내용은 주로 주거와 창고건축에 

한정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야관련 연구가 대부분 정치 및 사회에 관련된 연구에 치우친 
경향이 있기도 하겠지만 상대적으로 건축적 자료가 적은 이유가 클 것이다. 

<표 2> 연구대상 집모양토기 건축요소 검토(출처: 김상태(2019) pp.104-105 편집보완)

유물명

바닥위치

출입구

지붕형태

비고

고상 지상 박공면 처마면 맞배 우진각 맞배+우진각 팔작

창원 석동 복합유적 출토 토기

A-1

함안 말이산 고분군 출토 토기

A-1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토기 A

A-1

4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토기

A-1

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 토기

A-0

6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토기

A-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토기 A

B-1

8

김해 봉황동 유적 출토 토기

B-1

9

부산 가동 고분군 출토 토기

B-2

10

함안 소포리 유적 출토

C-1

11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토기

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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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유물명

바닥위치

출입구

지붕형태

비고

고상 지상 박공면 처마면 맞배 우진각 맞배+우진각 팔작

12

호림박물관 소장 토기

A-0

13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토기

A-0

14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토기 ○

A-2

15 경주 사라리 유적 출토 토기

A-1

16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토기 B

B-1

17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토기 C

B-1

18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토기 D

C-2

Ⅲ. 집모양토기의 건축적 고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많은 연구자들이 집모양토기의 세부적인 형태를 대상으로 진행

한 연구를 통하여 집모양토기의 건축적 형태에 대해서는 많은 사항을 이미 알고 있다. 따
라서 본 장에서는 건축적인 형태보다는 구조와 의장적 관점에서 보다 집중적으로 살펴보
고자 한다.

1. 건축구조적 고찰; 생활면의 위치

선행연구들을 통하여 지금까지 발견된 가야지역 집모양토기의 건축적 유형을 정리하면 

크게 생활면의 위치에 따라 2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고상창고형(A)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상건축형이다. 이것은 연구자들 대부분의 공통적인 분류로 생각된다. 또한 
지상건축형은 지붕의 형태와 재료에 따라 초가집형(B)과 기와집형(C)으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이 가운데 초가집형은 정관박물관(2019)에서 분류한 명칭으로 연구자들에 따라 중
층형 혹은 축사형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표 2>에서보면 지상건축형 가운데 흰동그라미
가 초가집형이고 검은 동그라미가 기와집형이다. 초가집형은 기둥에 의해 생활면이 들어
올려지고 사다리를 통해 출입하는 점에 있어서는 고상창고형과 유사하다. 이에 따라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초가집형 역시 고상창고형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기도 한다.(김태중, 
1998) 하지만 지붕의 형태를 비롯한 전체적인 형태에서 차이를 보이고 지상면도 생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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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한욱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으로 사용된다는 가정에 따라 별도로 분류된다. 한편 기와집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형적인 주택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건물의 생활면이 지상에 있다는 점에서 중층형과 
유사하지만 그 형태가 다르고 단층인 점으로 인해 초가집형과 구분된다. 하지만 이와같은 
분류는 그 기준이 생활면의 위치이거나 지붕의 재료이거나 상황에 따라 바뀌면선 일관되
지 못한 단점이 있다. 

1) 고상창고형(A)

대부분의 집모양토기가 이 유형에 속한다. 가야지역 출토 집모양토기 10개 중 6개, 고

찰대상 집모양토기 18개 중 11개가 이 유형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집모양토기들은 대체
적으로 그 형태에 있어서 유사함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4개~9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건물을 앉히고 있다. 이 가운데 ‘경주 사라리 유적 출토 토기’의 경우에는 기둥이 1
개인 것으로 판단하기도 하지만(신인주, 2001), 이는 건축적 구분이 아닌 기물로서 기둥
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굽다리로 보는 것이 옳다. 기둥하부에는 별다른 시설이 보이지 않
으므로 초석은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굴립주를 사용한 것으로 추측이 가능
하다. 기둥의 상부에는 ‘창원 석동 복합유적 출토 토기’와 ‘함안 말이산 고분군 토기’에서 
보이듯이 도리방향으로 원형의 횡부재를 걸고 그 위에 건물의 바닥면을 설치하고 있는 것
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시각적으로 박공면쪽으로 기둥에 의한 공간이 높아보이게 되는
데 이러한 경향은 기둥 위 횡부재가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다른 토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건물의 바닥면의 설치방법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창원 석동 복합유적 
출토 토기’에서 보면 기둥 위 횡재 위에 방형의 가로재를 걸친 후 설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구조방법은 ‘일본 요시노가리 유적’에서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하부 굴
립주 상부의 건물은 기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일부 집모양토기에서 보와 대공, 
도리가 표현되어 있어 가구식 구조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하부 기둥열과 상부기둥열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므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구조적으로 분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 1> 창원 석동 복합유적 출토 토기 기둥상부
                구조 상세(정관박물관, 2019)

<그림 2> 일본 요시노가리 유적 고상건물 기둥 
                상부구조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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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하부구조에 상부구조가 얹혀있는 모양새가 된다. 이러한 구조는 층단형 혹은 적층형으로, 
익히 알려진 대로 고구려의 부경과 매우 유사하며, 일반적으로, ‘루(

樓)’형식의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상부구조를 보다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은 ‘함안 말이산 고분군 출토 토기’
에서 이다. 종도리를 제외하고 직접적으로 건축부재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표면에 그려 넣
어진 무늬를 통하여 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보면 정면과 배면으로는 기둥이 그
려져 있지 않은 반면 측면으로는 가운데에 기둥이 그려져 있다. 또한 이 기둥은 하부의 인
방위에 놓여 있으며 기둥 위로 그려진 도리와 보를 받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하부는 기둥열에 따르면 2×2의 규모이지만 상부에서는 1×2의 규모를 갖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벽체에 대해서는 명확히 기둥이 사용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기
둥이 세워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부 집모양토기에서는 보와 대공 등을 표현하고 있으면
서도 기둥이 따로 표현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생략한 것일 수도 있으나 벽체
의 재료에 따라 기둥없이 벽체만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문헌에서 보이는 
“...

其國作屋 橫累木為之 有似牢獄也...”의 내용과 같다고 할 수 있다.

2) 초가집형(B)

이 유형의 집모양토기는 고찰대상 18개중 9개이고, 가야지역 출토 10개중에는 4개가 

해당한다. 이 유형의 집모양토기는 전면에서 보았을 때 기둥을 세우고 보와 대공, 도리를 
걸고 서까래를 설치한 일반적인 목조 가구구조를 가지고 있다. 반면 배면에서는 기둥과 
벽만이 보일 뿐 상부의 가구가 표현되어 있지 않아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를 흙 등으로 채
운 벽식 구조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생활면은 기둥의 중간
쯤에 만들어져 사다리를 이용하여 진입하도록 되어 있다. 상층의 내부로는 이유형의 일부 
집모양토기에서 출입구로 보이는 부분이 있어 함순섭(2008)은 그의 연구에서 이를 내부
로 출입하는 출입구로 보았으며 후한서에 언급된 “...

居處作土室 形如塚 開戶在上...”의 

<그림 3> 야요이시대 고상구조 모식도(

宮本長二郞,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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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욱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기사에 대한 실례로 언급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하층은 토벽이 둘러진 토실로 보았으며 상층
바닥에 비스듬히 열리는 문을 두고 사다리를 
통해 출입하는 복원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중간에 층을 만드는 방법
이다. 이 유형에서 사용된 방법은 고상창고형
에서와는 달리 기둥의 중간에 어떤 수단을 사
용하여 인방 등 가로재를 설치하고 바닥을 구
성하고 있다. 이것은 통층형이라고도 불리는 
구조로 하층과 상층이 하나의 구조체 안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3) 기와집형(C)

이 유형은 고찰대상 중 2개가 해당한다. 대체로 이 유형은 가야지역이 아니거나 시기가 

비교적 늦은 경우에 찾아 볼 수 있다. ‘함안 소포리 유적 출토 토기’는 그 형태가 비록 단순
하기는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유형들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생활면은 확
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고상식과 같이 생활면이 기둥에 의해 들어올려지지 않고 그렇다고 
중층형과 같이 내부에서 층이 구분되지 않는다. 하지만 외형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건축물의 형태를 갖고 있으므로 생활면은 지상으로 판단된다. 또한 ‘함안 소포리 유적 출
토 토기’에서는 모서리 기둥을 선을 그어 표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정관박물관, 2019), 
이와함께 측벽 내부쪽으로도 기둥으로 보이는 선이 있어 고주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엿
볼 수 있다. 한편, 유형의 명칭에서 보이듯이 이 유형의 토기들에는 지붕에 기왓골과 용마
루 등이 표현되고 있어 지붕재료로서 기와를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2. 건축의장적 고찰(1); 정면성

건물에 있어 출입구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서양건축과 대비되는 우리나라를 포

함한 동아시아 건축에 있어서의 가장 큰 특징이 출입구의 위치이다. 출입구의 위치가 중
요한 이유는 건물의 정면이 어디인가와 관련이 있다. 주 출입이 이루어지는 곳이 건물의 
정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서양건축에서는 박공면이, 동아시아 건축에서는 
처마면이 정면이다. 이번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집모양토기 가운데에는 이 두가지 
경우가 모두 보인다. 먼저 고상창고형의 토기를 살펴보면 ‘창원 석동 복합유적 출토 토기’

<그림 4> 가야 주거건축 복원모형
                 (함순섭,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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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에서처럼 박공면에 가로로 인방을 설치하여 출입시설을 만들고 이를 통해 출입이 가능하
도록 하고 있다. 반면,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토기’에서 보면 출토된 일부분을 통해 복원
된 것이기는 하지만 출입구는 박공면이 아닌 처마면에 출입구의 문이 열린 모습으로 만들
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초가집형에서는 ‘부산 가동 고분군 출토 토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박공면으로 출입을 위한 시설이 있다. 하지만 출입시설로 사다리를 두는 것 외에 
정면으로 벽체가 열려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부 상층 내부에 출입시설인 여닫이문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이것이 실제로 출입문인지는 확실히 알 기 어렵다. 한편, ‘부산 가동 고
분군 출토 토기’는 출입시설의 방향이 처마면일 뿐만 아니라 다른 토기들과 그 형태가 구
별되는데 이에 대해서 김상태(2019)는 건물의 실내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기와집형으로는 두 개의 사례가 있는데 ‘함안 소포리 유적 출토 토기’의 경우에는 박공면
으로 선을 그어 문을 표현하고 있으며 처마면으로는 나무를 그려 넣고 있어 박공면이 정
면임을 알 수 있다. 연구대상 집모양토기 가운데 이처럼 출입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18개 가운데 14건이며, 이 가운데 박공면에 있는 경우가 10건, 처마면에 있는 경
우가 4건이다. 또한 고상형의 경우에는 출입구를 확인할 수 있는 7건 가운데 5건이, 중층
형의 경우에는 5건 가운데 4건이 기와집형에서는 2건 중 1건이 박공면으로 출입구를 두
고 있다. 따라서 이시기 가야지역에서는 박공면으로 주출입구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박공면이 정면으로서의 상징성을 갖는 다는 것은 서양건축에서
나 동양건축에서나 여러 사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진입축을 강
조하거나 의례공간에서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면은 이후 시기의 건축
물에서처럼 처마면으로 옮겨지면서(신인주, 2001) 정면성을 상징하는 박공면은 그 기능
을 잃고, 처마면의 크기, 장식된 치미, 지붕마루 등을 통하여 정면성을 부각시키는 방향으
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건축의장적 고찰(2); 지붕의 형태 

집모양토기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지붕의 형태는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이다. 하지

만 이번의 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의 집모양토기에서는 맞배지붕이 18건의 대상 
중 14건으로 가장 많으며, 특이하게 한쪽은 맞배지붕, 다른 쪽은 우진각지붕이 함께 있는 
형태가 4건이다. 한편, 고구려나 백제지역의 집모양토기에서 보이는 우진각지붕이 보이
지 않는다. 또한 국립박물관 소장의 전 경주 보문동 출토 집모양토기에서와 같은 팔작지
붕 역시 이 토기의 제작연대가 통일신라시기인 8세기경으로 시기가 늦은 것을 감안하면, 
가야지역 건축물의 지붕형태는 맞배지붕이 일반적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한편 맞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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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욱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지붕과 우진각지붕이 혼합된 지붕형태는 중층형 토기에서 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함순
섭(2008)은 모임지붕을 갖는 수혈수거에서 정면에 출입구를 달아낸 것에서 발전한 것으
로 보았다. 한편, 정면 출입구 쪽으로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어 앞에서 살펴본 박공면
을 활용한 건물정면의 상징성이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건축물에 있어
서 일반적이지 않은 형태이기는 하지만 후대의 부석사 범종각이나 조선왕릉의 정자각 등
에도 나타나는 형태로 주로 방향성이 강하게 필요한 건물에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집모양토기에서 나타나는 지붕의 형태를 통해서 지붕의 재료를 추정하면 기와집형이외

에는 초가였을 것으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추측하고 있다. 특히 ‘함안 말이산 고분군 출
토 토기’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토기 A'의 지붕에서 보이는 격자형으로 돌출되어 표현된 
것은 초가의 고사새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를 보이는 지붕은 초가가 아
니더라고 굴피나 너와지붕의 누름목으로도 볼 수 있으며, 함순섭(2008)이 언급한 바와 같
이 일본 초가에서 보이는 우마노리(うまのり)와 유키와리(ゆきわり)로도 볼 수 있다. 한편 
기와집형으로 분류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토기 D‘의 경우는 지붕의 기와골과 내림마루

<그림 7> 부석사 범종각

(http://cfs6.blog.daum.net/original/21/blog/2007/08/11/09/22/46bd00f8

b5b2d&filename=%EB%B6%80%EC%84%9D%EC%82%AC04.jpg) 

<그림 5> 로마 판테온 신전
(https://media2.trover.com/T/5acaa5afed5bd1620901d6bc/fixedw.jpg) 

<그림 8> 선릉 정자각

 

<그림 6> 일본

 宗像大社 中津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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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가 명확하게 표현되어있어 기와지붕임을 확실히 알 수 있으나 ’함안 소포리 유적 출토 토
기‘의 경우에는 지붕면이 격자로만 그어져 있어 기와지붕임을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하
지만 용마루가 표현되어 있고 그 용마루 끝이 들려져 마치 치미를 설치한 것처럼 보이는 
점에서 기와지붕을 표현한 것이라는 정관박물관(2019)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다.

Ⅳ. 가야건축과 집모양토기의 관련성

1. 존재 가능성

집모양토기가 보다 건축적으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실제 그 형태의 건축물이 존재하

였는지 하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그럴 것이라는 전재가 깔려있는 것이지만 실체가 
없는 상황에서 이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
여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연구자들이 연구를 진행한 바가 있다. 대체로 고상창고
형 집모양토기의 경우에는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증명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의 연구에서는 고상창고형 집모양토기는 남방의 마루문화와 관련지어 고상주거 혹은 상
급주택일 것으로 상정되었으나 최근의 경향으로는 고구려의 부경과 관련지어 고상창고로 
보는 입장이 보다 커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하여 개별 유구가 아닌 다수의 고상식 건물
지가 발굴된 취락지 검토를 통해 일부 취락지에서 수혈주거 등 별도의 주거지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부터 단순 창고만이 아니라 일부 의식용 건물이거나 주거로도 활용되었을 가
능성에 대하여 이야기되고 있다.(위양근, 2016) 한편 기와집형의 집모양토기는 현재에도 

존재하는  익숙한  건물의  유형이기  때문에 
굳이 증명을 하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그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게 된다. 하지만 
초가집형의 경우는 비교적 낯선 형태의 건
물로 실제 그러한 건축물이 건립되었을 지
에 대해 의심이 생긴다. 이에 몇몇 연구자들
은 수혈주거의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그 존
재가능성을 설명하고 있으나 고상식에서와 
같이 명확하게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가야건축과 

<그림 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가집형 토기
                 기반 발굴유구 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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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욱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관련하여 발굴조사된 유적을 중심으로 그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 기본자료로서 영
남지방의 지역별로 총 63개소의 유적을 설명하고 있는 영남고고학회에서 발간한 “영남지
방 원삼국·삼국시대 주거와 취락(2009)”를 참고로 하였다. 또한 2009년 이후 발간된 “부
산 고촌리 생활유적” 등의 개별 발굴보고서도 일부 참고하였다.(경남발전연구원, 2013,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10, 2016, 삼강문화재연구원, 2009, 영남고고학회, 2009) 

함순섭(2008)이 초가집형 집모양토기를 통한 가야 주거건축의 복원연구를 진행하며 주

목한 것은 난방과 내력벽이다. 그는 이들을 통해 초가집형 토기는 하층에서는 난방시설이 
있는 주거공간으로 파악하고 벽은 구조체로서 내력벽을 사용하는 형태의 건물을 복원안
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거나 혹은 초가집형으로 분류되는 집모양토기의 형
태를 갖는 건물지의 유구로서 ‘김해 아랫덕정유적 10호건물지’, ‘ 울주 전읍리 292-3번지 
유적 1호건물지’, ‘창원 가음정동 유적 1호건물지’에서처럼 부분적으로 유사한 사례가 있
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예시로서 제시할 수 있는 건물지는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논리
적으로는 실존하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거건물로서 실제로 존재하였
을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그림 9>은 초가집형 집모양토기가 실제 발굴유구로서 드
러날 경우의 가상도를 그려본 것이다. 가상도
를 보면 정면부는 출입구와 박공면을 만들기 
위하여 대체로 1×2칸 규모의 방형평면을 가
지며, 이어서 배면부로는 방사형 혹은 둥그런 
평면을 가지면서 기둥이 여럿 배치되는 형태
임을 볼 수 있다. <그림 10>은 그에 따른 구조 
모식도이다. 3열 기둥열의 중앙에 하중이 집
중하는 모양새이다. 따라서 이곳에 기둥이 세
워지거나 구조적 보강이 필요할 수 있다.

2. 건물의 용도

건물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은 지역적, 시기적 차이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건

축적 형태가 오랜 시간동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일반적으로 용도 혹은 기
능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건물의 용도에 따라 건축물은 형태와 공간구성을 
다르게 한다. 

먼저 고상창고형의 경우에 있어서는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창고였을 가능성이  가

장 크다. 이에 더하여 일부 건물은 제사 혹은 의식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과 

<그림 1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가집형 
                   토기 기반 구조 모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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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함께 주거로서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언급되기도 하였다. 한편 개구부에는 잠금장치가 
표현되어 있는데 모두 외부에서 잠그고 열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는 사람이 거주하는 주
거용도의 건물이라기보다는 물건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창고용도의 건물로 보는 것이 보
다 타당함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러한 창고로서의 고상건물의 사례는 일본 요시노가리 
유적과 같은 야요이시대 유적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고상창고로서의 건물은 땅으
로부터의 습기를 방지하고 통풍이 잘되므로 부패하기 쉬운 무엇인가를 보관하기에 적합
한 곳이다. 따라서 이에는 저장품으로서 곡식이거나 귀중품을 보관하기에 적합하였을 것
이다. 실제사례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본의 정창원이 있다. 망자의 사후세계에서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곡식창고 형태의 토기를 만들어 부장품으로 같이 묻는 것은 이해
가 되는 부분이다. 

반면 초가집형은 일반적으로 수혈주거와 연관시켜 주거건축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하

지만 발굴된 건물지 혹은 취락유적에서 이러한 초가집형 주거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
다. 이에 함순섭(2009)이 초가집형 집모양토기를 통한 가야 주거건축의 복원연구를 진행
하며 주목한 것은 난방과 내력벽이다. 그는 이들을 통해 초가집형 토기는 상하층을 나누
어 하층에 온돌의 난방시설을 둔 주거공간으로, 벽은 구조체로서 내력벽을 사용하는 형

<그림 1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토기 주구상세
                  (정관박물관, 2019) 

<그림 11> 함안 말이산 고분군 출토 토기 상세
                   (정관박물관, 2019)  

<그림 14> 함안 말이산 고분군 출토 토기 주구상세
                  (정관박물관, 2019) 

<그림 12> 일본 요시노가리 유적의 고상창고형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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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욱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태의 건물을 복원안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초가집형 집모양토기에서 굴뚝으
로 보이는 주구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구가 굴뚝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같
은 형태가 고상창고형의 집모양토기에서도 보인다는 점에서 반드시 굴뚝이라고 단정하기
는 어렵다. 왜냐하면 고상식의 목조건축에서는 높여진 생활면에 굴뚝을 필요로 하는 온돌
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위치에 있어서도 벽체 중간 또는 지붕에서 굴뚝형
태의 주구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면 건물내부에서부터 굴뚝시설이 설
치되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와 함께 염두에 두고 살펴볼 것은 함순섭(2009)의 복원안에서처럼 하층에는 토실과 

온돌을 두어 겨울에 생활하고 상층에는 마루를 두어 여름에 생활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한
가이다. 초가집형의 집모양토기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상층의 바닥면으로 문으로 보이
는 개구부가 비스듬히 나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주거는 생활의 편의를 도모한다. 이런 관점
에서 이 출입문은 다음과 같이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위로 열어야만 하는 여닫이 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문은 특별한 용도가 아니

고서는 일반적으로 주거공간에서는 사용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 문을 
여닫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초가집형은 정면으로 상하층 모두 
벽이 없이 열려져 있는 구조인데 주거로서의 기능을 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주거의 
목적가운데에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첫 번째 인데 이 기능을 수행하기 어
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문이 비스듬히 설치되기 때문에 상층의 공간은 결국 비
스듬한 바닥면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상층을 생활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가
의 의문이 생기게 된다. 경사진 바닥면에서는 사람이 생활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동선의 합리성 문제가 있다. 출입을 함에 있어서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

가 위에서 다시 출입구를 통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며 출입하는 것이 생활편의면에서 어
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초가집형은 주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떤 용도를 가진 건물이었을까. 이준희(1999)는 이에 대하여 축사형으로 구

분한 바 있으며, 이러한 구분은 일견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의 집모양토기가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토기에는 사다리위에, 그리고 지붕 위 등에 
새를 비롯한 동물로 보이는 몇몇의 장식물이 첨가되어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해 본다면 이 
유형의 집모양토기는 주거를 형상화 한 것이 아니라 가축을 기르는 축사로서의 기능을 하
는 건물인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보관품의 특성상 장기간에 보관이 필요한 고상창고의 
경우에는 비교적 튼튼한 구조를 가지는 건축물이 필요하지만 상대적으로 그럴 필요성이 
적은 축사의 경우에는 보다 자유롭게 건물의 형태를 구성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에서 살펴본 상층바닥의 문은 이런 시각에서 보면 동물을 가두어 두고 도망가지 못하도
록 하되 사료를 준다던지 하는 필요시에 사용하던 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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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형 집모양토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내세에서의 안녕을 위해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곡식창고
와 함께 축사를 함께 묻는다는 면에서 일견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가야의 주거건축은 어떤 형태였을까? 이는 발견된 집모양토기의 또 

다른 유형인 기와집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의 집모양토기에서 주거를 
추정되는 건축물의 형태는 대체로 유사하다. 이 형태는 실제로 이후의 건축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이다. 이것은 무덤주인이 내세의 평안을 바라면서 풍요
를 상징하는 곡식창고와 가축을 기르는 축사와 함께 생활공간으로서의 주택을 함께 묻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가야에서는 고상창고, 중층의 측사와 함께 실제 사
람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주택이 존재하였으며 집모양토기는 이들을 형상화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최근  김해에서는  가야건축과  관련하여 

주목을 끄는 발굴이 있었다. 보도에서는 목
탑지라 보도되었지만 실제로 매우 일부만이 
발굴되어 건물의 전모를 알 수는 없었다. 하
지만  약보고서에서  언급하듯이  이  건물의 
존재시기가 삼국시대가 분명하다면 앞에서 
살펴보았던 고상창고형과 초가집형과 같은 
단순한 구조의 건축물이 아니라 신라와 백
제에서처럼 가야에서도 발전된 건축물이 존
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와집형으로 분류

되었던 집모양토기는 이러한 구조를 갖는 건축물을 형상화 한 것일 수 있다. 최근 그 가능
성을 확인할 수 있는 적심건물 유적이 김해 봉황동(42호 건물지)에서 발굴되기도 하였다.

3. 건축유형의 분류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집모양토기에 대한 기존의 용도와 건축재료 등 여러 

가지 분류기준이 혼재되어 일관성이 없었던 유형분류를 새롭게 체계적으로 하는 것이 가
능하다. 먼저는 기존의 고상창고형-초가집형-기와집형은 건물의 용도에 따라 창고형-축
사형-주택형으로 분류된다. 또한 구조적으로 적층형-통층형-단층형으로 분류할 수 있
다. 이렇듯 하나의 기준에 의한 유형을 분류하는 것은 향후 계속적으로 이루어질 가야건
축의 연구에서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림 15> 적심 건물지(한반도문화재연구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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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욱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Ⅴ. 마치며

지금까지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집모양토기를 중심으로 건축적 고찰을 통하여 가야의 

건축적 특성을 추정하는 것을 시도해 보았다. 여기에는 역사기록과 함께 특히 최근 발굴
조사를 통해 드러난 고고학적 결과를 기초자료로 활용하였다. 그 결과 집모양토기는 건축
물의 기능 및 용도에 따라 형태를 충실히 표현하여 만들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었으며 창
고형, 축사형, 주택형으로 나누어 구분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가야건축은 창고, 축사, 주
택 등 서로 다른 용도와 기능에 맞추어 서로 다른 형태의 건물이 건립되었으며, 또 각각의 
형태에 따라 목조 가구식 구조를 기본으로 적층형, 통층형, 단층형 등의 서로 다른 구조가 
사용되었다고 판단된다. 건축의장에 있어서 초기에는 건물의 박공면으로 정면을 삼고 대
체로 맞배지붕을 기본적인 지붕형태로 하였으나 시기가 지나면서 처마면을 정면으로 하
는 형태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주택에서는 기와를 사용한 건물도 건립되었음
을 알 수 있었다.

가야건축과 관련한 연구는 백제와 신라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시작되고 있다. 그동안 

연구의 대상으로 소외된 점도 없지는 않지만 최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향후 그 연구결과들이 축적되면서 보다 건축적 실체에 가까워 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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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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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2019, 『4-5세기 경남지역 고상건물 연구』, 동아대학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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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2019, 「집모양 토기를 통한 삼국시대 주거건축복원 기초연구」,『영혼의 안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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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 1977, 「문헌으로 본 한국주택사」, 『동양학』, pp.7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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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16, 『고속국도 제600호선 부산외곽순환 건설공사(10공구)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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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박물관, 2019, 『집모양토기』
주남철, 1976, 「고문헌에 나타난 “開戶在上”과 “草屋土室”에 대하여」, 『대한건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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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문화재연구원, 2019, 「김해 원도심 도시재생사업 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결과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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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本長二郞, 1996, 『日本原始古代の住居建築』, 中央公論美術出版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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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한욱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

『三國志』
『晉書』
『後漢書』

http://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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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에 대한 토론문_김상태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에 
 대한 토론문

김 상 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국립김해박물관의『가야의 주거문화』학술심포지엄은 가야지역 발굴을 통한 유적지

와 유구의 연구 성과를 통하여 고대 주거건축의 연구에 대한 관심이 도출될 수 있는 학술
의 장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가야의 고대 주거건축은 백제와 신라지역의 주거 발굴성과의 시기적 차이로 인하여 근

래에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고대 주거지의 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는 주로 
문헌적 고찰과 몇 기의 집모양토기(명기)에 의한 간접적 건축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근래의 한반도의 고대 주거지 발굴은 급속히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가야지역의 고대주거
지에 대한 발굴은 매우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대기의 한국건축사적 연구는 주로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삼국과 통일신

라기에 집중되어 다루어졌기에 가야의 고대건축에 대한 연구적 성과가 미진하였음은 의
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근래의 여러 발굴지에 대한 발굴과 그에 따른 자료의 제공은  고
대 가야건축의 규모와 형태, 그리고 구조적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특히 발굴지에서의 다양한 집모양토기의 발견은 가야건축의 재인식에 새로운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본 학술심포지엄의 3번째 발표 주제는 “건축학적으로 본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이

다. 발표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한욱박사(학예연구관)이다. 발표를 위한 원고 내용을 
살펴보면, 연구의 대상은 정관박물관에서 제시된 22기의 집모양토기 중에서 가야지역 18
기를  대상으로 선정하여 연구하였다. 추가적으로 검토대상인 집모양토기가 모두 가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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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역의 유물인가에 대한 언급이 있다.(가야지역에서 명확히 출토된 것은 10개)  

2장에서는 고대건축에 대한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로서의 문헌과 발굴조사결과, 그리고 

유물에 의한 선행연구에 집중하였는데, 문헌으로서는 중국의 고대 역사서에 언급된 ‘

草屋

土室’과 ‘土室’에 대한 연구자들의 연구결과와 가야건축관련 용어로 ‘宮’, ‘殿宇’, ‘屋宇’, 

庫倉’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였다. 발굴결과에 대한 연구는 가야지역인 경남지역의 분포

된 고대 유적지에 대한 연구로 수혈과 굴립주 건물에 대한 연구를 분석하였다. 발굴지의 
선행연구를 통하여 고상건물의 용도는 일반적으로 저장 창고로 추정하고, 일부는 임시주
거용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는 연구결과를 언급하였다. 유물을 통한 기존연
구 고찰은 ㆍ집모양토기에 대한 연구로 지상형과 고상형의 분류를 통한 건축물의 구조형
태에 대한 분석, ㆍ집모양토기에 표현된 건축적 요소의 분석을 통한 유형분류, ㆍ굴립주
형태 집모양토기의 기능을 창고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결과, ㆍ출토된 집모양토기의 개폐
문이 밖에서 조절된 점은 창고의 모방이라는 주장과 함께 대부분의 주거형식은 수혈주거
임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연구결과를 기술하였다. 그 밖의 연구로 ㆍ고상건축유
적과 집모양토기의 상호비교를 통하여 집모양토기는 발굴된 유적과 일치한다는 연구결
과, ㆍ집모양토기가 ‘영의 집’이라는 개념으로 사후의 안식처이며 집모양토기의 상당수가 
고상식의 창고형태를 하고 있는 것으로 사후에도 풍요를 비는 제례용이라는 연구결과와 
함께 집모양토기의 형태를 평지형과 고상식과 중층식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주거형, 축사
형, 창고형으로 구분하였음을 언급하였으며, 그리고 ㆍ중층식으로 분리되기도 하는 집모
양토기를 바탕으로 가야 주거건축에 대한 복원을 시도한 연구의 사례도 제시하였다. 

3장에서는 기존 연구자들의 연구가 집모양토기의 건축적 형태에 대해서는 많은 사항을 

다루었다는 점을 들고, 연구자는 건축적인 형태보다는 구조와 의장적 관점에서 보다 집중
적인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 점을 강조하였다. 첫 번째는 건축구조적 고찰: 생활면의 위치
에 따라, 고상창고형(A), 초가집형(B), 기와집형(C)으로 분류하였다. 두 번째로는 건축의
장적 고찰로 정면성으로서의 출입문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연구대상 집모양토기 가운데 
출입구 위치가 확인된 것은 18개 가운데 14건이며, 박공면은 10건, 처마면 4건이다. 고상
형은 출입구가 확인된 사례는 7건 가운데 5건, 중층형의 경우는 5건 가운데 4건, 기와집
형에서는 2건 중 1건이 박공면으로 출입구를 두고 있음을 밝혔다. 따라서 가야지역에서는 
박공면으로 주출입구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또 다른 건축의장 고
찰로 지붕을 대상으로 하였다. 가야지방의 지붕은 대부분 맞배지붕(14건)이며, 맞배와 우
진각 지붕의 혼합형은 4기로 다른 지역과 차별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맞배
지붕과 우진각 지붕이 혼합된 지붕형태는 중층형 토기에서 주로 보인다고 하면서, 정면 출
입구와 맞배지붕의 관계는 박공면을 활용한 건물정면의 상징성이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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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에 대한 토론문_김상태

였다. 그리고 초가의 재료는 굴피나 너와와 같은 다른 재료의 사용가능성도 언급하였다. 

4장은 가야건축과 집모양토기와의 관련성으로, 1절에서는 집모양토기가 실제로 집으

로 존재하였을까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고상형건축이 초기 연구에서
는 남방의 마루문화와 관련지어 고상주거 혹은 상급주택일 것으로 상정되었으나 최근의 
경향으로는 고구려의 부경과 관련지어 고상창고로 보는 입장이 보다 커진 것으로 이해하
였으며, 기존 연구와 발굴자료를 통하여 실제적인 건축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또한 기
존 초가집형 집모양토기의 복원안에 대하여 검증을 시도하였으며, 이에 대한 구조적 보강
필요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였다. 2절에서는 건물의 용도에 대하 연구를 진행하였다. 고
상창고형이 창고의 기능을 하였다는 것을 전제하에 초가집형에 대한 기존 복원안에 대한 
보다 상세한 문제제기와 이에 대한 결과로 초가집형은 주거보다는 축사의 기능임을 기존
연구를 통하여 조심스럽게 주장하고 있다. 연구자는 실제적인 가야주거의 형태는 기와형
을 통해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적심건물지가 그 해결열쇠로 보았다. 3절에서는 건축유형
의 분류를 통해 기존의 고상창고형-초가집형-기와집형은 건물의 용도에 따라 창고형-축
사형-주택형으로 분류된다. 또한 구조적으로 적층형-통층형-단층형으로 분류하였다. 

5장의 결론을 살펴보면, 집모양토기와 가야 건축의 연구는 “가야건축은 창고, 축사, 주

 등 서로 다른 용도와 기능에 맞추어 서로 다른 형태의 건물이 건립되었으며, 또 각각의 
형태에 따라 목조 가구식 구조를 기본으로 적층형, 통층형, 단층형 등의 서로 다른 구조가 
사용되었다고 판단된다. 건축의장에 있어서 초기에는 건물의 박공면으로 정면을 삼고 대
체로 맞배지붕을 기본적인 지붕형태로 하였으나 시기가 지나면서 처마면을 정면으로 하
는 형태
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주택에서는 기와를 사용한 건물도 건립되었음
을 알 수 있었다.”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이상의 연구내용과 결과를 살펴보면, 집모양토기의 기능과 용도, 형태를 기준으로 가야

지역의 집모양토기는 3가지의 유형분류로 나누어지며, 이 3가지 유형은 구조를 통해 3가
지의 유형으로 제시되었다. 즉 “창고-적층형, 축사-통층형, 주택-단층형”으로 구분되어
지며, 정면이 박공지붕면에서 처마지붕으로 바뀌어간다는 결과를 도출하였다. 이러한 연
구결과는 기존의 연구결과와 차별되는 결론이며, 가야주택, 더 나아가서는 초기 고대건축
의 기능과 형태, 구조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연구 성과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최근 백
제지역의 주거지 발굴에서 많이 언급되는 벽주식 건축물과 굴립주식 건축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연구결과라 할 수 있다. 본 토론자 또한 국내에서 발견된 22기의 집모양토기
를 기초로 하여 정관박물관에서 의뢰한 “집모양 토기를 통한 삼국시대 주거건축복원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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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연구”를 선행 연구한 사례가 있다. 이 연구는 집모양토기의 개방성과 폐쇄성을 중심으로 
그 기능을 나누어 세부적인 건축요소를 기준으로 유형분류를 제시하였다. 건축형과 주구
형으로 나누어 각각의 건축유형을 통하여 삼국시대의 주거건축을 이해하는 기초연구로서
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한욱박사의 상기연구는 본 토론자의 연구결과를 더해 실제
적인 사용과 구축을 중심으로 하는 건축유형분석을 제시하여 보다 세심한 연구결과의 건
축적 접근을 추구하였고 이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였다고 평가한다.

이상의 연구결과를 통해 본 심포지움의 토론자로서 몇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는  발표자의 연구 성과에 보다 완성도 있는 내용의 결과를 도출하고자 하는 의미입니다. 

1. 우선 집모양토기의 주구의 문제입니다. 집모양토기의 주구는 굴뚝과 구별됩니다. 지

붕상부와 지붕 측면에 나타난 주구는 어떠한 기능을 가졌으며, 부장품의 용도로서의 창고
로 표현 된다면 주구를 그렇게 상세히 묘사할 필요가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이
에 대한 발표자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2. 고상형이 아닌 지상형 초가 집모양토기에 계단의 설치는 축사로서의 의미를 살펴볼 

때 어떻게 내부가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토기의 모습을 보면 통층형에서 입구
인 박공면에 계단이 있어 마루 혹은 다락(?)에 오를 수 있도록 되었는데, 상하로 나누어진 
두 공간은 어떻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지에 대한 연구자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3. 마지막으로 구들에 대한 내용으로 현재의 온돌과 다르게 고대의 구들의 굴뚝 경우, 

벽을 통과하여 외부에 돌출되었을 가능성은 고구려 벽화고분의 안악3호분의 부엌도를 통
하여 알 수 있는데, 연구자가 제시한 창고형과 축사형에서 이러한 굴뚝모습이 수용될 가
능성이 있는지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상의 고대 집모양토기 관련 질문과 답변을 통해 가야지역의 주거관련 건축에 대한 궁

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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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차 순 철 (서라벌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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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순철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Ⅰ. 머리말

사람들이 가족들과 안전하게 생활하기 위해서는 취사와 난방을 통해 체온과 건강을 유

지하면서 충분한 휴식을 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간은 외부 침입으
로부터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고 실내는 생활공간과 취사공간, 작업공간 등이 각각 구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사시대 동굴이나 수혈주거지를 살펴보면 출입문이 높게 만들
어져 있거나 사다리를 이용하여 천정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만든 모습이 확인된
다. 이후 가옥을 출입시설의 위치가 낮아지고 외부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도록 출입문의 
구조와 내구성이 커지면서 지면 위에 만들어진 문을 통해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외부 형태가 고정된 모습이 되었다. 튼튼한 문과 이를 둘러싼 담장의 존재는 집이 생활을 
위한 거주, 쉼터 기능 외에도 외적이나 동물의 침입으로부터 사람들을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갖추게 했고, 이러한 방어를 위해 마을이 만들어지자 환호, 목책, 
토벽 등과 같은 시설이 추가되면서 집이라는 공간이 마을이라는 보다 큰 공간으로 확대되
어가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본 발표에서 다루게 될 삼국시대 마을과 가옥의 특
징이라는 주제 역시 가옥의 변화흐름과 당시 사회의 모습이 반영된 내용을 중심으로 해야 

Ⅰ. 머리말
Ⅱ. 지역과 구분
Ⅲ.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Ⅳ. 맺음말

목 차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차 순 철

서라벌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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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주거문화

될 것이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가옥은 여러 시기에 걸쳐서 변화를 했지만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공간과 주변 시설을 갖춘 모습이 확인되며, 단독으로 거주하기 보다는 여러 세대가 한 공
간 안에 어울려서 여러 채의 가옥이 하나의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청
동기시대 출현한 초대형 장방형 주거지의 경우에는 한 가옥 안에 여러 세대가 함께 거주
한 것으로 추정되며, 점차 주거지의 규모가 작아지는 것을 거주 세대의 변화로 보면서 마
을의 출현원인 중 하나로 본다면 한 세대가 거주하는 가옥에 나타난 공간구조와 특징이 
시기별로 고유한 특성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더라도 마을 
안에서 촌장 또는 지배자의 가옥이 별도로 구분되지 않은 채, 일반 가옥과 함께 확인되는 
모습은 왕성 안에 궁궐을 만들고 일반민과 구분을 짓는 모습과 대별된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사회의 발전과 계층의 분화 그리고 궁궐과 같은 권위건축물과 일반 가옥의 성격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결국 이러한 차이점은 중앙권력이 강화되고 지방에 대한 직
접 통제가 이루어지면서 지방에 대한 행정편제 및 관청의 건립과 관리의 파견이 이루어지
면서 마을의 규모가 커지고 성곽이 축조되면서 왕경(

王京)에 대응되는 소경(小京)이 설치

되면서 당시 사회구조가 공고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왕경과 주변을 연결하는 도
로를 따라서 마을이 형성되고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광산과 산림 그리고 항구 등을 잇
는 가도(

街道)가 마련되면서 산지에서 생산된 원료, 제품이 소비지인 왕경으로 옮겨지는 

모습이 일상화되면서 창고가 설치되고 생산지마다 이를 관리하는 감독과 공인들이 거주
하는 생산집단의 존재도 확인된다. 결국 삼국시대 취락의 존재 원인은 자연촌락이 발전한 
경우도 있지만 해당 지역 내부, 혹은 주변지대의 인구증가와 재배치에 의해 출현했을 가
능성이 크다.1) 

가야는 한반도 남부지역 특히 김해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구와 고령을 중심으로 한 

내륙지역을 근거로 각각 그 영역을 발전하였다. 시기별로 공간영역의 변화가 있었지만 영
남지역을 기반으로 한 모습은 변화가 없었다. 따라서 가야의 가옥은 기본적으로 영남지역
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지붕구조와 난방시설을 기본적으로 갖춘 모습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경우에는 가야와 달리 기후와 풍토가 다르기에 각각 그 지역에 알

맞은 모습으로 가옥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지역별로 다른 모습의 가옥이 존재
하는 것은 당시 사회 안에서 나타난 다양한 선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반 취락 내 공간은 가옥 외에도 종교활동과 관련된 사찰 등의 종교시설, 고상

창고나 수혈 등의 잉여생산물을 보관하는 저장시설, 각종 연장과 무기, 용기, 피복, 숯, 기

1) 이성주, 2012, 「마을(촌락)과 도시에 관한 고고학의 논의」, 『고고학』11권 2호, 중부고고학회,

 pp.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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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등을 만드는 공방시설, 생활용수와 농업용수와 관련된 우물, 집수시설(저수지) 등의 치
수시설, 농업생산을 위한 경작지, 도로, 교량 등의 사회기반시설, 주민들이 매장된 분묘인 
매장시설, 제단, 사당, 종묘 등의 의례를 위한 제의시설, 환호나 목책, 토성, 산성 등의 방
어시설 등이 존재하며 이들 개개 시설의 조합에 따라서 취락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본 발표에서 다루어질 공간범위는 가야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으로 시간적인 범위

는 삼국시대, 공간적인 범위는 삼국시대 가야를 제외해도 중국 동북지방인 요녕성 환인 
만족 자치현(

桓仁滿族自治縣)과 길림성(吉林省)을 포함하며 한반도에서 낙동강 유역을 

제외한 지역으로 한반도와 부속 도서 그리고 중국 동북지역을 아우른다. 결국 한반도 남
부지방에 위치한 가야와 여타 지역의 마을과 주거가 어떤 차이와 변화를 보여주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다른 지역과의 비교 및 차이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따라서 
본 발표에서는 삼국시대 가야지역에서 조사된 마을과 가옥들과 대비되는 이외 지역을 중
심으로 하나의 마을을 구성하는 가옥들과 생업경제 그리고 출토유물을 통한 추정을 통해
서 당시 사회문화의 일단을 밝혀보고자 한다. 

Ⅱ. 지역과 구분

한반도의 기후는 대륙의 영향을 크게 받는 대륙성 기후이다. 대륙성 기후의 특징은 여

름에 몹시 덥고 겨울에 추운 데 있다. 여름
(8월)의 평균기온이 25℃ 내외이고 일최고
기온이 30℃ 이상으로 열대 못지않게 더운 
날이 계속된다. 그리고 겨울(1월)의 평균기
온은 -20℃∼0℃로 한대와 같이 몹시 추
운 날이 계속된다. 이러한 온도변화는 한반
도와 같은 위도대에 위치한 다른 나라와 비
교하면 여름이 덥고 겨울이 추운 것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지역별 기후구를 살펴보면 쾨

펜(K

öppen) 기후구2)는 온난습윤 기후구

2) Köppen은 1918년 식생분포에 주목하여 기후구분을 하였다. 이후 루돌프 가아거가 1954년과

도면 1.  한국의 소기후 구분도(공군 제73기상전대, 
         1994, 『기상총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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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와 한랭동계 소우기후구(Dw) 2지역으로 구분되며, 이를 다시 세분하면 13개로 나눌 
수 있다.3) 이러한 지역별 기후와 풍토에 맞는 가옥의 존재는 내부 공간과 .출입문과 창문
의 방향, 난방시설과 지붕, 벽체의 구조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극단적으로 심한 기후조건 
아래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건축구조가 만들어지는데, 울릉도나 강원도 지역의 폭설
을 이기기 위한 벽체 및 지붕구조는 이러한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공간으로 볼 때, 삼국시대의 한반도는 중국 동북지방과 북반부를 차지한 고구려

와 한강 이남지역을 동, 서로 나눈 신라와 백제 그리고 경상남도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
가야와 이후 경상북도 고령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로 구분되며, 한강 이동지방에 해당하는 
동해안 영동, 영서지역의 예(

濊)로 지역을 나눌 수 있다. 

삼국시대에 고대국가로 존재한 고구려, 백제, 신라와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지만 강원도 

영동, 영서지역을 중심으로 문화권을 구분할 수 있지만 영역 내 환경조건에 따라서 각 국
가마다 지역별로 주거형태의 차이가 확인된다. 따라서 크게 나눈다면 가야를 제외한 4개
의 지역권이 존재하지만 실제로 지역별로 자연환경에 따라서 좀 더 세분이 가능한데, 전
라도지역의 경우에는 백제와 마한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고구려는 다른 삼국과 달리 비교적 일찍 국가를 건국하고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 기와

와 벽돌 등을 이용한 건축물을 만들었기에 다른 국가나 문화권과는 차이를 보여준다. 하
지만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자료가 한정적이어서 고분 벽화 등에 그려진 그림 등을 통해서 
여러 건물과 창고 등의 존재와 당시 생활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백제나 신라의 경
우에는 비교적 일찍부터 기와를 사용한 백제와 달리 늦게 사용한 신라의 경우에는 근본은 
같지만 다른 모습의 건축물이 존재했으며, 강원도지역의 경우에는 낙랑, 한성백제 그리고 
신라문화의 영향이 지속적으로 전해지면서 여러 문화가 혼재된 모습이 확인된다. 따라서 
본 발표에서는 발굴조사된 유적과 문헌기록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가야지역을 제외
한 나머지 지역인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강원도 지역의 마을유적을 중심으로 살펴보
고 그 차이를 논하고자 한다. 

고구려는 당시 마을이나 가옥과 관련된 발굴자료가 한정적이며, 도성이 국내성과 일부 

산성 안에서 조사된 주거지 등을 통해서 당시 생활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백제는 한성백제시기에 속한 한강유역 일대에서 많이 조사된 여(

呂)자, 철(凸)자형 주

1961년에 쾨펜의 기후 구분을 수정하였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쓰이는 쾨펜의 기후 구분은 가

이거가 수정한 것이다. 쾨펜-가이거 기후 구분이라고도 한다. 온도대, 강수량, 세부기온 등 모

두 3가지 기준을 가지고 구분한다. 이 구분안에서 온대와 냉대 기후의 경계를 구분하는 기준을 

최한월(最寒月)의 평균기온이 -3℃의 등온선으로 긋고 있다. 

윤일희 편역, 2004, 『현대기후학』, 시그마프레스, p.261.

크리스티안 디트리히 쇤비제 저, 김종규 역, 2006, 『기후학』, 시그마프레스, 2006, pp.312~314.

3) 金蓮玉, 1980, 「한국의 기후구」, 『韓國地誌』, 건설부·국립지리원, pp.23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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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중부지역과 경상북도 문경지역까지 확인되지만, 이러한 분포모습이 당시 한성백제
의 영역을 보여준다고 볼 수는 없다. 경기도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이들 주거지는 충청도, 
전라도지역에서 확인된 주거지와는 시기차이 뿐만 아니라 형태에서 차이를 보여주는 점
으로 볼 때, 당시 지역별로 마을 모습은 한성지역과 공주, 부여지역에서는 다르게 변화하
며, 한성백제기 주거유적들은 강원도 영동, 영서지방에서 조사된 마을들과 형태적으로 유
사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중부지역의 특징이 반영되면서 서로 많은 관련성을 가진다
고 생각된다. 웅진백제와 사비백제시기에 들어서면서 왕경 내 방리가 구획되고 왕궁과 주
변의 가옥이 구분된 모습이 확인되는데, 도로와 배수로를 중심으로 지역별로 가옥들이 분
포한 모습이 확인된다. 다만 기와가 사용된 왕궁과 그 주변지역과 달리 외곽에 위치한 일
반 가옥들의 모습은 차이를 보여주며, 도로변을 따라서 마을이 형성된 모습은 당시 택지
와 가옥들의 공간배치를 보여준다.

신라는 가야지역에서 조사된 주거지들과와 유사한 모습이지만 왕경이 만들어지고 기와

가 사용되면서부터 가옥의 모습은 크게 변모한다. 월성 주변 일대에서 확인된 수혈주거지
는 이후 지상식 건물로 변화하며, 왕경 내 방리가 만들어지고 택지가 조성된 이후에는 기
와를 사용한 가옥으로 바뀌며 이전 시기의 수혈주거지의 모습은 사라진다. 하지만 왕경 
이외 지역에서는 늦은 시기까지 외줄구들을 채용한 수혈주거지가 확인되는데, 이러한 점
은 신라가 왕경 등 중심지역과 주변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신분, 경제력 등에 따라서 
차이가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이상과 같이 간단히 살펴본 가옥들의 변화모습은 결국 마을이 위치한 지역의 기후조건

과 시간 및 공간구성의 변화가 함께 반영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당시 건축기술의 발전
과 생활조건 속에서 각 국의 가옥의 형태와 규모가 달라졌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점을 통해서 각각의 차이와 상호간의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Ⅲ.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취락은 문헌에서 등장하는 ‘촌(

村)-마을’로 대변되며 행정구역 상 가장 기초가 되는 

단위이다. 발굴조사된 취락유적의 규모를 살펴보면 대체로 5기 내외의 소규모 마을부터 
60~70동 이상의 주거지가 확인되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문서인 ‘신라촌락장적(

新羅

村落帳籍)’에 나타난 취락 규모를 살펴보면 문서에는 당현 사해절촌(沙害漸村, A촌), 살
하지촌(

薩下知村, B촌), 실명촌(失名村, C촌), 서원경(西原京) 실명촌(失名村, D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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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주거문화

충청북도 청주시 부근 4개 촌에 대해서 

①村名(이름), ②村域(범위), ③烟(戶-가구), ④口

(인구), ⑤

牛馬(소, 말), ⑥土地(토지), ⑦樹木(나무) 등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비록 통

일신라시대 <촌>에 대한 내용이지만, 당시 주사(

州司)에서 작성한 공문서라는 점에서 이

들 촌은 군현제하의 일반촌4)이므로, 삼국시대 취락의 규모와 형태에 대해서 추정해 볼 수 
있다.

먼저 신라촌락장적에 나타난 개개 취락의 촌역(

村域), 즉 촌의 규모를 살펴보면 A촌은 

5,725보(

步)-10.305㎞(면적 8.445㎢), B촌은 12,830보-23.094㎞(면적 24.099㎢), D촌은 

4,800보-8.640㎞(면적 5.945㎢)로 확인되며, 이 면적 안에는 가옥과 경작지 그리고 산과 
하천까지 모두 포함한 것이다.5) 이러한 취락을 구성하는 가옥은 5기 미만의 소규모부터 
60∼70여기의 대규모까지 확인되며, 가옥의 수를 가지고 구분한다면, 대형(25동 이상), 
중형(25동 미만), 소형(15동 미만) 정도로 나눌 수 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의 취락 역시 
이러한 기준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고구려

고구려 가옥에 대한 내용이 기록된 문헌자료는『후한서(

後漢書)』,『삼국지(三國志)』,

『양서(

梁書)』,『위서(魏書)』,『주서(周書)』,『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 『수서

(

隋書)』등에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있다.6)

이러한 중국측 문헌기록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고구려는 화려하게 꾸민 

궁궐을 짓고 본궁 외에도 여러 곳의 이궁을 두었으며, 궁궐, 관청, 사찰, 사당 등에만 기와
를 사용하였다. 일반 민가에 대해서는 주거는 반드시 산골짜기에 있으며 모두 모초(

茅草)

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고,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덥힌다는 내
용을 통해서 온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물과 같은 정주식 식수원을 사용하
였지만 대부분은 골짜기에 흐르는 물[

澗水]을 마셨다는 내용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 우물

을 이용하기 보다는 계곡물을 취수하여 식수로 사용한 모습을 알 수 있다. 한편 주거생활
과 관련하여 양잠의 존재를 알려주는 잠실(

蠶室)과 집에 달린 작은 창고인 부경(桴京) 그

리고 장례와 관련된 빈(

殯)의 존재는 고구려 주거의 특징이다. 

4) 이희관,1994, 「신라촌락장적에 보이는 촌의 성격」,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 일조

각, pp.382∼406.

5) 국사편찬위원회, 1998, 『신편 한국사9-통일신라』.
6) 중국 사서에 기록된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중국정사조선전』에 게재된

내용을 전재하였다.(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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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궁궐유적은 국내성, 산성자산성(환도성), 평양 안학궁 등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지만, 일

반 주민들의 거주지역과 구분된 모습이다. 

 고구려 평양성에서 확인된 석표(

石標)는 

당시 왕경 내 방리와 도로의 경계를 알리는 
표지석으로  추정되고  있다.7)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이 석표의 분포상황을 통해서 고구려 
당시 평양성 내 방리규모와 그 범위를 확인할 
수 있다. 석표는 대동강을 따라서 북쪽에 위
치한 평양시 남쪽 중앙부에 밀집된 모습을 보
여주면 일부 강변 일대에서도 확인된다.8) 최
근 남평양이 위치한 황해남도 신원군 아양리
와 월당리지역에서는 성벽과 함께 도로와 리
방구획이 확인되었으며, 그 규모는 약 10㎢라
고 한다.9)

고구려 취락이 대규모로 발견된 사례는 드

물지만 중국 통화시에 위치한 만발발자 유적
은 초기 고구려 마을로 당시 주거지의 모습을 
보여준다.10)

1) 만발발자 유적  

유적은 중국 길림성 통화시 금창진 동창구

에 위치한다. 1997~1999년까지 발굴조사한 
결과 기원후 3~5세기(제5기-고구려 전, 중
기)에 해당한 유구는 제Ⅰ구역~제Ⅳ구역, 제
Ⅵ구역에 분포한다. 주거지는 제Ⅰ구역에서 1

7) 朝鮮總督府, 1915, 『朝鮮古蹟圖譜』二, p.111 No.408.

朝鮮總督府,  1929,  『高句麗時代の遺蹟』圖版  上冊  古蹟調査特別報告  第五冊,  pp.8~9 

No.18~22.

8) 朝鮮總督府, 1929, 『高句麗時代の遺蹟』圖版 上冊 古蹟調査特別報告 第五冊, 地圖 第五.
9) 최승택, 2009, 「장수산일대의 남평양도시유적에서 새로 고구려시기의 유적유물 발굴」, 『조선

고고연구』제4호, 사회과학출판사, pp.44~45.

10)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通化市文物管理辦公室, 2019, 『通化万發撥子遺址考古發掘報告』,

 文物出版社.

이종수, 2020, 「고구려 문화 기원의 보고 -「通化 万發撥子遺址 考古發掘 報告」-」, 『야외고고

학』제37호, 한국문화유산협회, pp.129~168.

도 2. 평양성 내 석표(

朝鮮總督府 1915)

도 3. 평양성지 및 유존 석표도
         (

朝鮮總督府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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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기(97ⅠTWF2)와 제Ⅳ구역에서 2기(98ⅣTWF19, 98ⅣTWF20) 가 조사되었다. 이외에
도 수혈 16기, 구 2기, 환호 1기, 무덤 1기가 조사되었으며 전형적인 구들이 설치된 주거
지와 방단적석묘로 볼 때, 유적의 시기는 기원후 1~4세기로 추정된다.

제Ⅰ구역에서 조사된 97ⅠTWF2호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말각장방형으로 벽면은 할석

과 잡석을 섞어 쌓은 모습이며 북벽에 맞대어 장방형의 화덕이 설치되었는데 2개의 큰 자
갈돌을 세워서 지각으로 사용한 모습이다. 화덕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 벽면을 따라서 
단면 U자형의 외줄 구들이 만들었는데, 구들 위에는 할석과 판석을 덮은 모습이다. 

제Ⅳ구역에서 조사된 98ⅣTWF19호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말각장방형으로 서쪽과 북

쪽에 잡석으로 만든 두 줄의 ㄱ자형 구들이 만들어져 있다. 화덕은 주거지 북동쪽에 위치
하며 형태는 아궁이가 위치한 남쪽을 제외한 3면에 장방형으로 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98
ⅣTWF20호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말각장방형으로 주거지 서쪽 벽면을 따라서 ㄱ자형 구
들 2줄이 확인된다. 화덕은 주거지 북벽의 동쪽에 위치한다. 

출토유물 중 어망추, 방추차, 석촉 등의 비중이 높은 모습으로 당시 어로 및 사냥 그리

고 직조와 관련된 모습을 알려준다. 철기 중 주조철부, 말편자, 자물쇠 등과 함께 철슬래그
와 토제범이 확인된 점은 당시 말을 소유하고 타고 다닌 승마문화와 금속 주조작업이 이
루어졌음을 알려준다.

이 시기의 유적은 생활유적은 서쪽에, 무덤은 동쪽에 조성하고 있다. 주거지는 서쪽 구

릉 정상부 대지 위에 축조되었으며, 얕은 수혈식으로 할석으로 쌓아 벽체를 세우고 실내
에 2~3줄의 “∩”형 혹은 “ㄱ”자 형태의 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 시기 주거지의 또 다른 
특징은 구릉 정상부 주변으로 환호를 조성하여 환호취락을 형성하고 있는 점이다. 

2) 오녀산성

유적은 중국 요녕성 본계시 환인만족자치현의 환인 시가지 북동쪽 약 8.5㎞ 떨어진 오

도 4. 97ⅠTWF2호 주거지(

吉林省文物考古硏究

        所·通化市文物管理辦公室, 2019)

도 5. 98ⅣTWF19호 주거지(

吉林省文物考古硏 

        究所·通化市文物管理辦公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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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순철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녀산(해발 806m)에 위치한다. 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등이 1996~1999년 그리고 2003년
에 발굴조사를 했는데11) 고구려 문화층은 제3기층(고구려 초기), 제4기층(고구려 중기)이 
확인되며, 성안에 기와를 사용한 건물이 확인되지 않은 점은 특징적이다.12) 

3기 문화층에 해당되는 유적은 1호 건물지(J1)와 수혈(H5, H10, H11) 그리고 주거지

(F35, F36, F47, F57)이다. 1호 건물지는 정면 6칸에 측면은 확인할 수 없지만 주칸간격
으로 볼 때 3칸으로 추정되는 건물지로 막돌초석을 사용했다. 규모는 길이 13.8m, 너비 
67.2m로 건물 내부에 난방시설을 갖추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일반 거주용이기보다는 창고
의 가능성이 크다. 주거지에는 노지 또는 간단한 부뚜막 시설만 확인되며 쪽구들은 확인
되지 않는다.

 4기 문화층에 해당되는 유적은 2호 건물지와 3호 건물지 2동 외에는 대부분 주거지

로 내부에 쪽구들을 갖춘 모습이며, 구들의 형태는 

一자형, ㄱ자형, ㄷ자형 등이며 고래는 

2~3개이다. 2호 건물지(J2)는 길이 24.5m, 너비 16m이며, 3호 건물지에서는 3열의 초석
이 확인된다. 대형 건물지에 기와를 사용하지 않은 점은 건물의 성격이 권위건물이 아님
을 알려준다.

주거지는 병사들이 머물던 병영으로 추정되며 많은 철기가 들어있는 교장유구의 존재

를 통해 산성 안에서 철기 생산 및 관리작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13)

11) 遼寜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五女山城-1996~1999, 2003年桓仁五女山城調査發掘報告』,

 文物出版社.

12) 양시은, 2020, 「오녀산성의 성격과 활용 연대 연구」, 『한국고고학보』제115집, 한국고고학회,

 p.134. 

13) 차순철, 2004, 「오녀산성 출토 고구려 단야구에 대한 검토」, 『동북아역사논총』2, 동북아역사

재단, p.118.

도 6. 오녀산성 Ⅳ구 주거지 분포도(

遼寧省文物考

       古硏究所 2004)

도 7. 오녀산성 J2 건물지 평, 단면도(

遼寧省文物考

      古硏究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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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3) 민주유적

중국 길림성 집안시 경제개발구 태왕진 민주촌 삼대에 위치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석주를 정비하면서 2003년 8월부터 11월까지 3동의 건물지와 부속시설을 조사했다.14) 

건물에는 팔각주좌를 갖춘 초석을 사용했으며, 문지와 담장 그리고 개별 건물지가 각

각 확인되었는데, 교란이 심한 모습이지만 건물 안에 온돌이 설치된 모습은 확인되지 않
았다. 따라서 이 건물은 온돌을 사용하지 않고 입식(

立式)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

편 건물의 용도에 대해서는 고구려 왕실과 관청 건물지로 판단하는 학설15)이 있는데, 건
물 안에서 온돌시설이 확인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건물지 동쪽과 서쪽에 위치한 석주를 조사한 결과 담장석렬의 모퉁이에 석주가 세워진 

모습이 확인되며, 석주 사이 간격은 40m 정도이다. 이들 석주는 평양성 안에서 확인된 표
석과 유사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석주는 방리구획과의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
다. 유적의 시기는 2호 건물지[

院落]에서 출토된 권운문(卷雲紋) 수막새 위에 “((戊戌)年

14) 서정호, 2004, 「집안 민주유적 건물지의 성격에 관한 연구」, 『2004년 추계 학술대회』, 고구

려연구회.

서정호, 2005, 「집안 민주유적 건물지의 성격에 관한 연구」, 『고구려연구』제19집, 고구려연

구회, 학연문화사.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國內城』 -2002~2003 集安國內城民主遺址試掘報

告, 文物出版社, 2004,6.

15) 魏存成, 1991, 「高句麗 初期・中期의 首都」, 『중국학계의 고구려사 인식』, 대륙연구소출판사,

p.112.

도 8. 민주유적지 평면도(서정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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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순철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造瓦故記歲)”라는 명문이 확인되므로 고구려 고국원왕 8년(338)년으로 볼 수 있으며, 이
때를 건축기초의 건설 시작 시기로 볼 수 있다. 

4) 함경남도 함주군 신하리 집자리유적 

신하리유적은 동해안 연안에 위치한 건물지로 함흥시 성천강 하류에서 10㎞ 떨어진 지

점에 위치한다.16) 여위천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진 배수로 공사로 인해 남북으로 분리된 
모습이며, 남쪽에서 외줄고래 온돌을 놓은 건물지 2동이 확인되었다. 건물 안에는 온돌을 
놓았으며, 마루를 두고 지붕에 연화문수막새 등의 기와를 사용하였다. 유적의 시기는 5세
기말~6세기 초로 추정된다.

16) 조선고고연구 편집위원회, 2007, 「함주군 신하리집자리유적 발굴보고(1)」, 『조선고고연구』

제1호, 사회과학출판사.

그림 9. 민주유적 2호 원낙(

院落) 문지

             (서정호 2004)

그림 10, 민주유적지 동측 석주와 북측 담장 석렬
               (서정호 2004)  

도 11. 신하리유적 건물지(조선고고연구 
           편집위원회 2007)

도 12. 동대자유적(조선유적유물도감 편찬위원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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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5) 동대자유적

중국 길림성 집안현 동대자에 위치하며 유적의 규모는 동서 35m, 남북 20m 정도이며, 

서쪽에 위치한 1채의 건물이다. 한 지붕 아래 2동의 방이 위치한 모습으로 동쪽 방에는 외
줄구들이 있고, 서쪽 방에는 두줄구들을 놓았다.17) 건물에 사용된 기와 중 연화문, 인동
문, 귀면수막새를 사용한 점으로 볼 때, 유적의 시기는 6세기대로 추정된다.  

고구려지역에서 조사된 주거 및 취락관련 

유적은 그 사례가 적지만, 궁궐, 산성 내 궁
궐, 창고, 수혈주거지 그리고 지역별로 확인
된 온돌을 사용한 기와건물지 등이 알려져 있
다. 초기 수혈주거지 중에는 구릉부에 입지하
면서 환호를 갖춘 사례도 확인되며, 서울 한
강유역18)과 중원지방(청원 남성곡유적19) 등)
에서 조사된 관방유적 중 보루성 내부 건물지
에서 온돌이 확인된 점은 위에서 살펴본 여러 

유적들과 동일한 모습이다.

고구려 건물지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생활면의 위치에 따라 지하식과 지상식으로 나

뉘고, 지상식은 다시 자연암반기초 건물지, 줄기초 건물지, 적심석기 초 건물지, 굴립주 건
물지, 무기초 건물지로 분류된다. 특히 줄기초 건물지는 고구려 건물지의 과반을 차지하
여 고구려 건물지의 특징으로 파악된다고 한다.20) 지하식 건물지는 대부분 수혈주거지로 
내부에 외줄고래의 온돌시설을 갖춘 모습이며 오녀산성의 사례처럼 군대의 병영으로 사

17) 조선유적유물도감 편찬위원회, 1999, 『조선유적유물도감3-고구려편(1)~(3)』.
18) 구의동보고서간행위원회, 1997, 『한강유역의 고구려요새-구의동유적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소화출판사. 

서울대학교박물관·서울대학교인문학연구소·구리시·구리문화원, 2000, 『아차산 제4보루-발

굴조사 종합보고서』.

서울대학교박물관·서울대학교인문학연구소·구리시·구리문화원, 2002, 『아차산 시루봉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고려대학교고고환경연구소·구리시, 2007, 『아차산 제3보루-1차 발굴조사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아차산 4보루 발굴조사보고서』.

서울대학교박물관·서울특별시, 2009, 『용마산 제2보루 –발굴조사보고서』.

한국고고환경연구소·광진구청, 2015, 『사적 제455호 아차산 일대 보루군 홍련봉 1·2보루』.

한국고고환경연구소·광진구청, 2019, 『사적 제455호 아차산 일대 보루군 홍련봉 1·2보루-3

차 발굴조사보고서-』.

19) 충북대학교박물관, 2004, 『청원 남성곡 고구려유적』.

중원문화재연구원, 2008, 『청원I.C~부용간 도로공사구간내 청원 남성곡 고구려유적(-2006

년도 추가 발굴조사-)』.

20) 조용환, 2016, 「고구려 줄기초 건물지의 특징과 변천」, 『한국상고사학보』93, 한국상고학학회.

그림 13. 홍련봉 2보루(한국고고환경연구소·
광진구청,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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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순철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용되기도 했다. 난방시설이자 취사시설인 구들 아궁이에는 아궁이 장식틀이 설치되었는
데, 평안북도 운산군 동신면에 소재한 고구려의 용호동 1호분 출토 철제 아궁이21)와 안악 
3호분 고분벽화 중 부엌 내 아궁이 모습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2. 백제

한성백제시기의 마을유적은 한강수계를 따라서 폭넓게 확인되고 있다. 당시 왕성인 풍

납토성22)과 몽촌토성23)을 위시하여 당시 지방행정 거점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는 여(

呂)

21) 朝鮮總督府, 1929, 『高句麗時代の遺蹟』圖版 上冊 古蹟調査特別報告 第五冊, p.89 No.429~ 

430.

22) 풍납토성 내부조사에 대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풍납토성Ⅰ-현대연합주택 및 1지구 재건축부지-』.

한신대학교박물관, 2003, 『풍납토성Ⅲ-삼화연립 재건축 사업부지에 대한 조사보고-』.

한신대학교박물관, 2004, 『풍납토성Ⅳ-경당지구 9호 유구에 대한 발굴보고-』.

국립문화재연구소·한신대학교박물관, 2005, 『풍납토성Ⅵ-경당지구 중층 101호 유구에 대한 

보고-』.

한신대학교박물관, 2006, 『풍납토성Ⅶ-경당지구 상층 폐기장 유구에 대한 발굴보고-』.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풍납토성Ⅷ-외환은행직원합숙소부지, 소규모주택신축부지, 강동

빌라부지. 대진동산연립주택부지-』.

서울역사박물관·한신대학교박물관, 2008, 『풍납토성Ⅸ-경당지구 출토 와전류에 대한 보고-』.

서울역사박물관·한신대학교박물관, 2009, 『풍납토성Ⅹ-경당지구 유물포함층출토 유물에 대

한 보고-』.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풍납토성Ⅺ-풍납동197번지(구 미래마을) 시굴 및 발굴조사 보고서1-』.

한성백제박물관·한신대학교박물관, 2011, 『풍납토성Ⅻ-경당지구 196호 유구에 대한 보고-』.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풍납토성ⅩⅢ-풍납동197번지(구 미래마을) 발굴조사 보고서2-』.

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풍납토성ⅩⅣ-풍납동197번지(구 미래마을) 발굴조사 보고서3-』.

한성백제박물관·한신대학교박물관, 2015, 『풍납토성ⅩⅦ-경당지구 206호 유구에 대한 보고-』.

23) 몽촌토성발굴조사단, 1984, 『복원·정비를 위한 몽촌토성발굴조사보고서』.

그림 14. 용호동 1호분 출토 철제 아궁이(

朝鮮總督

          

   1929) 

그림 15. 안악3호분 부엌(조선유적유물도감
               편찬위원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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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자형 주거지와 철(

凸)자형 주거지가 확인된다. 

한성백제의 도성인 한성은 『삼국사기』에 묘사된 구조가 고구려나 신라와 다른 모습

으로 먼저 정궁(

正宮)과 별궁(別宮)이 따로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고구려 군대를 한성

에서 맞아 싸울 정도로 한성은 군사적 기능을 겸하였다. 또한 한성이 남·북 2개의 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 개로왕 21년(475)조24)와 『일본서기』 웅략기(

雄略

紀) 20년조25) 기사를 종합하면 북성(北城)은 큰 성(大城), 남성(南城)은 왕성(王城)으로 
볼 수 았다. 

도성이 2개 이상의 성으로 구성된 사례는 중국 전국시대에 많으며, 조(

趙)의 한단성(邯

鄲城), 제(齊)의 임치성(臨淄城), 연(燕)의 하도(下都)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평지에 위치
한 대성 안에는 관청, 공방, 일반 민가가 위치하며 인근 구릉에 위치한 왕성은 별도로 위치
한 모습이다.26) 따라서 한성백제의 한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과 왕성으로 추정되는 몽
촌토성에서는 모두 판축한 토성이 확인되었으며, 성 내부에서 궁궐 관련시설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와 우물 등 각종 주거지와 저장시설 등이 조사되었다.

한강유역의 한성백제시기의 마을유적에서는 평면형태가 방형, 타원형, 육각형 등 다양한 

형태의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이 중 육각형 주거지는 몽촌토성, 풍납토성, 하남 미사리27), 
파주 주월리28), 포천 자작리29) 등지에서 발견되었는데 돌출된 출입시설이 없는 육각형주
거지, 철(

凸)자형 육각형 주거지, 여(呂)자형 육각형 주거지 등 출입시설의 형태에 차이가 

있다. 대개 육각형 주거지는 출입구가 남쪽에 있고 반대편 북쪽에 아궁이나 부뚜막이 있
다. 부뚜막은 점토와 판석을 결합하여 양 벽과 천장을 만들고 굴뚝까지 터널 모양으로 연

몽촌토성발굴조사단, 19854, 『몽촌토성발굴조사보고』.

서울특별시·서울대학교박물관, 1987, 『몽촌토성 동북지구발굴조사』.

서울대학교박물관, 1988, 『몽촌토성 동남지구발굴조사보고』.

서울대학교박물관, 1989, 『몽촌토성 서남지구발굴조사보고』.

24) 『삼국사기』권25 「백제본기」개로왕 21년조.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인 제우(齊

于)·재증걸루(再曾桀婁)·고이만년(古爾萬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해 

7일만에 빼앗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니 성안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왕이 나가 도망가

자 고구려 장수 걸루(桀婁) 등이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으며 그 죄를 헤아리고,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25) 『日本書紀』권14 「雄略紀」20년조. “『백제기(百濟記)』에 이르기를 ‘개로왕 을묘년(475) 겨울에

이리(고구려)의 대군(大軍)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낮 7일 밤 동안 공격해 왕성(王城)이 함

락되니 마침내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대후(大后),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하였다.”

26) 한성백제박물관, 2013, 『백제의 꿈 왕도한산』, p.18.
27) 미사리선사유적발굴조사단·경기도공영개발사업단, 1994, 『미사리』제1~5권.
28) 경기도박물관, 1999, 『파주 주월리 유적-‘97·’98 경기도박물관 조사지역』.

한양대학교박물관·문화인류학과, 1999, 『파주 주월리 유적-’96·’97 한양대학교 조사지역』.

29) 경기도박물관, 2004, 『포천 자작리유적Ⅰ-긴급발굴조사 보고서-』.

경기도박물관, 2004, 『포천 자작리유적Ⅱ-시굴조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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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순철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결하는 형태이며, 포천 자작리유적 2호 주거지의 사례처럼 가옥 지붕에 기와를 사용한 사
례도 확인된다. 따라서 육각형주거지는 다른 주거지에 비해 월등하게 큰 특징이 있어 신
분이 높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주거지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는 부뚜막으로 사용된 외줄구들을 들 수 있

다.30) 이전 시기의 조리시설이 얕은 구덩이를 파고 한 겹의 돌을 깔거나(부석식 노지) 
ㄱ자형 외줄구들이었지만, 한성백제시기의 주거지에는 주로 주거지 출입시설의 반대편 
모퉁이 혹은 벽면 가까이에 점토와 판석을 이용해 일자로 아궁이와 솥걸이를 갖춘 부뚜막 
시설(ㅡ자형 외줄구들)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특히 부뚜막의 입구에 부착한 “∩ ”자 모양
의 아궁이 장식틀(

竈額板)이 출토되었는데, 풍납토성에서는 다양한 토제 장식틀이 확인

되며, 몽촌토성에서는 철제 장식틀이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아궁이 장식틀은 고구려에
서 사용한 모습이 확인되므로 그 기원은 고구려의 아궁이에서 찾을 수 있다고 판단되며, 
고구려와 같은 출자임을 표방한 한성백제의 문화가 고구려 주거지와 연결될 수 있음을 알
려주는 중요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一자형과 ㄱ자형 외줄구들의 구조적 차이31)

를 각각 낙랑과 고구려로 상정한 뒤 
一자형을 낙랑 및 대방군, ㄱ자형 외
줄구들의 기원을 고구려로 상정한 견
해가 있다.32) 또한 호서, 호남지역의 
마한계 주거지에서도 이러한 아궁이 
장식이 발견된 점으로 볼 때, 한성백
제의 주거문화가 마한지역으로 확산
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30) 외줄구들의 기원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세죽리-연화보 유형의 연대와 한반

도 중부지방 외줄구들의 출현 시점(2세기 초엽)과는 시기차이가 확인된다. 이러한 연대차이

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원전 1세기 이후의 낙랑문화나 고구려 주거지와의 관련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개성시 봉동읍 유적에서 조사된 주거지의 ㄱ자형 외줄구들은 그 기원을 살

펴보는데 있어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5, 『개성공업지구 1단계 문화유적 남·북 공동조사 보고서』.

이현혜, 2010, 「옥저의 기원과 문화 성격에 대한 고찰」, 『한국상고사학보』제70호, 한국상고

사학회, p.64.

이병훈, 2011, 『원삼국~한성백제기 중부지방 외줄구들의 변천과정』, 숭실대학교 대학원 석

사학위논문.

31) 박경신, 2006, 「고구려의 취난시설 및 자비용기에 대한 일연구」, 『숭실사학』제19집, 숭실대

학교 사학회, pp.237~240.

오승환, 2008, 「우리나라의 이동용부뚜막 연구」, 『한강고고』제2호, 한강문화재연구원, 

pp.106~115.

32) 박중국, 2011, 『呂자형 주거지를 통해 본 중도문화의 지역성』, 한신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pp.83~89.

그림 16. 철제 아궁이 장식틀(한성백제박물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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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한성백제의 영역은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B.C.14)에서 “북으로는 패수

(

浿水)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熊川)에 닿고, 서로는 대해(大海)에 이르며, 동으로는 주

양(

走壤)까지 이른다”는 내용은 한성백제시기의 영역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이다. 『삼국

사기』에서 백제의 동쪽 경계로 지목된 <주양(

走壤)>은 춘천 일대로 비정되었는데, 화천 

원천리유적에서 대규모 마을유적이 확인되었다.33) 평면형태가 철(

凸자)형 또는 여(呂)자

형 주거지로 평면형태가 육각형, 오각형, 방형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모두 117기의 주
거지와 저장창고 등으로 쓰인 구덩이 88기가 확인되었으며, 4세기 무렵부터 마을이 조성
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를 막기 위한 백제의 군사거점으로 추정된다.34) 

금강 북안에 형성된 연기 나성리유적은 한성백제시기의 지방 도시의 면모를 살필 수 있

는 대표적인 마을유적으로 나성리토성과 함께 축조되었다.;35) 조사구역인 북편에는 한성
백제시기의 구획저택 11기, 구획유구 29기, 주구건물 16기, 방형구획유구 4기, 망루 6기, 
수혈유구 16기, 도로유구 13기, 구상유구 16기가 조사되었다. 구획저택은 외곽에 구획을 
이루는 구를 설치하여 외부와 내부 공간을 구분한 뒤 내부에 건물과 수혈유구 및 우물(집
수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시설을 한 유구로 정리할 수 있다. 나성리 유적은 4세기말에서 
5세기 초반 무렵 외부에서 이주한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마을로 그 규모로 볼 때, 한성백
제시기의 중앙 유력집단으로 추정된다.

한편 한성백제기 도성인 한성 바깥쪽에 위치한 지방의 대형 마을유적을 살펴보면 이러

한 주거지가 지역별로 밀집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들 마을유적에서 출토된 한성백제 관
련 유물을 통해 한성백제의 지배력과 통제가 이루어진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러한 모습이 중앙집권국가의 행정력이 도달한 고대국가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한계점이 
있다.36) 지역별로 금동관모와 금동식리 그리고 환두대도 등을 소유한 지역 호족의 세력
이 존재했고, 이들의 존재를 용인하고 지방지배에 이용37)한 것으로 본다면, 한성백제의 
도성 외곽에 위치한 대형 마을의 존재는 문화적으로 한성백제와 공통된 주거문화를 공유

33) 예맥문화재연구원, 2013, 『화천 원천리유적-화천 원천리 2지구 유물산포지내 발굴조사보고서-』.
34) 심재연, 2013, 「6. 한성백제기 북한강유역 진출양상」, 『화천 원천리유적-화천 원천리 2지구 

유물산포지내 발굴조사보고서-<제Ⅳ권:본문3·부록>』, 예맥문화재연구원, p.172.

한성백제박물관, 2013, 『백제의 꿈 왕도한산』, p.100.

35) 중앙문화재연구원·한국토지주택공사, 2015,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및 생활권 2-

4구역 내 저습8유적(북쪽) 연기 나성리유적』

36) 이현혜, 2013, 「백제 고이왕대 연맹왕국설 검토」, 『백제연구』제58집,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37) 한성백제의 왕도인 서울 풍남동, 몽촌동 일대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화성시 요리고분군 Ⅰ지

점 1호 목관묘에서 출토된 금동관모와 금동식리의 존재는 5세기 초까지 지방에 지방관을 파

견하여 직접 지배를 한 것보다는 현지 호족들을 이용하여 간접지배방식으로 지방을 통제하고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문화유산연구원, 2018, 『화성 요리 고분군-화성 향남2지구 동서간선도로 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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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차순철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서울, 경기 및 영서, 영동지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여
(

吕)자형 주거지와 철(凸)자형 주거지의 존재는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공통된 주거형태

로 지역 내 자연환경과 기후조건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모습으로 출현한 주거형태라고 볼 
수 있다. 

여(

吕)자형 주거지와 철(凸)자형 주거지는 중앙 장축선상에 부가된 출입부뿐만 아니라 

기둥배치, 석제 취사난방시설의 위치, 입지 등에서 정형화된 축조원리를 보여주는 주거유
형38)으로 평면형태의 분류에 있어서도 출입부를 제외한 주 생활공간의 형태에 따라 방형, 
오각형, 육각형 등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시간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39) 또
한 ㄱ자형 외줄구들에서 일자형 외줄구들로 그 형태가 변화하는 모습이 확인되는데, 이는 
주거 공간의 활용과 관련된다고 생각된다. 한편 영서, 영동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여(

吕)자

형 주거지와 철(

凸)자형 주거지는 서울, 경기지역과 달리 평면형태가 육각형인 사례가 적

은 점과 기와의 사용사례가 확인되지 않는 점은 두 지역사이에 차이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일부 영서 지역의 주거지에서 한성백제토기가 확인되지만40) 이는 교류에 의한 것으
로 보이며, 오히려 중도식 무문토기가 다 수를 점하고 있는 점과 낙랑계 토기가 다 수 확인
되는 점은 서울, 경기지역과 다른 문화권으로 존재했고 주거형태는 공통된 모습이지만 결
국 지역 간의 문화차이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41) 

한반도 중서부와 서남부 지방에서 오랜 기간 이어진 마한 문화는 그 특성이 같으면서

도 달라 크게 중부, 호서, 호남 등 3개의 권역으로 구분된다. 주거지는 대체로 사주식(

四柱

式) 주거지가 집중된 모습이다.42) 이 사주식 주거지는 내주의 기능을 가진 네 개의 기둥구
멍이 주거지 모서리에 방형으로 배치된 형태로 마한과 관련된 것43)으로 보고 있지만, 백
제 주거지의 영향으로 벽구나 외부 돌출구 등이 설치된 사례도 확인된다. 이러한 모습은 
마한 문화권의 주거형태인 사주식 주거지와 백제 문화권의 주거의 벽구, 벽주가 함께 결

38) 박중국, 2011, 『呂자형 주거지를 통해 본 중도문화의 지역성』, 한신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39) 송만영, 1999, 「중부지방 원삼국 문화의 편년적 기초-주거지의 상대편년을 중심으로」, 『한국

고고학보』제41집, 한국고고학회.

40) 백제의 동쪽 경계에 있어 애매한 입장을 견지되었지만, 화천 원천리유적의 조사결과로 볼 때,

변경의 기준을 설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재연, 2006, 「한성백제기 북한강 중상류지역의 양상에 대하여」, 8ààY-14집, 호서고고학회.

41) 박중국은 이러한 특징을 고려하여 <중도문화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박중국, 2011, 상게논문, p.71.

42) 정일, 2006, 「전남지역 사주식주거지의 구조적인 변천 및 전개과정」, 『한국상고사학보』제54

호, 한국상고사학회.

43) 김승옥, 2004, 「전북지역 1~7세기 취락의 분포와 성격」, 『한국상고사학보』제44호, 한국상고

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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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합된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44) 

취사와 난방시설은 아궁이와 굴뚝의 위치, 그리고 축조방법에 따라서 부뚜막과 외줄구

들 구분할 수 있으며, 외줄구들의 경우에는 배연시설을 구들처럼 만든 것과 바로 바깥으
로 빠지도록 만든 모습이 확인된다. 아궁이의 경우에는 아궁이 장식틀을 사용한 모습이 
특징적이며 배연부에 별도의 원통형 연가를 만든 점은 독특한 모습이다. 이들 시설을 만
든 재료는 점토, 석재와 점토를 섞은 것으로 구분되는데, 대체로 점토를 주로 사용한 모습
이다.

주거지 내부에 마련한 벽구는 벽체의 설치와 관련되며, 평면형태는 

一자형, ㄱ자형, 

ㄷ자형, ㅁ자형 등으로 다양한 모습이 확인된다. 이들 벽구는 사주식과 사주벽구식, 비사
주식의 주공배치를 보이는 주거지에서 상부구조를 보조해주는 시설로 이용되었다. 다만 
배수시설인 외부돌출구의 경우에는 그 조사사례가 드물며 일부 구릉지에 위치한 주거지
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배수시설은 주거지 내부의 벽구시설과 연결된 형태로 확인되므로, 
벽가를 따라서 고인 물을 외부로 배출하는 시설로 보인다.

주거지 출입시설은 횡방향으로 출입이 이루어지는 형태와 사다리를 이용하여 상하방

향으로 출입이 이루어지는 형태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45) 횡방향 출입시설은 형태에 따라 
철(

凸)자형 또는 여(呂)자형으로 구분되며, 상하방향의 출입시설은 고고학적인 조사를 통

해 확인된 사례는 없으나 당시 가옥의 모습을 기록한 문헌내용46)과 중부지방 이남에서 확
인된 수혈주거지의 잔존사례를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지역 내 주거지의 변
화는 한성백제기의 주거지와 호서, 호남지역의 마한계 주거지로 각각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 시기가 흐를수록 한성백제계 주거지의 시설들이 마한계 주거지에 채용되는 모습
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백제문화가 호서, 호남지역에 영향을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변화모습이 일부의 문화요소만을 선별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양상을 보
이고 있어 주거형태의 변화가 백제적인 주거문화요소에 의해 일원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시각47)도 있지만, 백제의 영역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당시 상황 속에
서 마한지역의 전통적인 가옥구조가 유지되는 것은 현지의 기후환경에 적합한 구조의 주

44) 김승옥, 2007, 「금강유역 원삼국~삼국시대 취락의 전개과정 연구」, 『한국고고학보』제65집,

한국고고학회.

서현주, 2011, 「3~5세기 금강유역권의 지역성과 확산」, 『호남고고학보』37, 호남고고학회.

45) 권오영, 2009, 「원삼국기 한강유역 정치체의 존재양태와 백제국가의 통합양상」, 『고고학』8-2,

서울경기고고학회.

46) 『후한서』 동이열전 한조. “作土室 形如冢 開戶在上”
47) 양지훈, 2014, 『호서지역 원삼국~삼국시대 수혈주거지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화재협

동과정 석사학위논문,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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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순철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거지가 계속 유지되는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웅진백제시기의 마을유적으로는 부여 관북리의 왕궁과 왕릉묘역인 능산리고분군을 연

결하는 도로 주변인 쌍북리48)와 석목리49) 일대에서 확인된 마을유적은 도로를 중앙에 두
고 양쪽에 방형의 주거지가 마련된 모습이며, 주변에 위치한 공방으로 볼 때 공인들이 거
주하던 마을로 추정된다. 

3. 신라

신라는 사로6촌을 기반으로 고대국가로 발전을 했다. 당시 모습은 『삼국사기』에 기

록된 것처럼 “조선(

朝鮮) 유민들이 산과 계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라는 

내용이다.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와 관련하여 당시 경주지역에 존재한 6개 중심마을의 존

48) 울산발전연구원문화재센터, 2020, 『부여 쌍북리 56번지 유적-부여 사비한옥마을 조성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49) 금강문화유산연구원, 2017, 『부여 석목리 143-7번지 유적』.

백제고도문화재단, 2019, 『부여 석목리 143-16번지 유적』.

그림 17. 부여 석목리 143-7번지, 16번지 유적의 주거공간분포도(금강문화유산연구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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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재가 확인되는데, 마을의 입지가 구릉과 계곡지역임을 알려준다. 또한 그 출자와 관련하
여 고조선 유민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 부분은 고구려와 백제의 출자문제와 비교할 때 주
목된다.

신라의 초기 취락과 가옥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은 드문편이며 경주50) 이외 지역인 

울산 명산리 314-1번지51), 병영성52), 양산 평산리53), 대구 평촌리54),  경산 임당유적55), 
대구 시지지구56), 매호동 1008번지57), 포항 호동58), 양덕동59), 흥해읍 성곡리 유적60) 등
에서는 당시 취락이 확인된 바 있다.

경주 황성동유적에서 조사된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원형 또는 말각방형으로 마을을 이

룬 모습이며, 인접한 제철유적과 관련된 공인마을로 보인다. 다지구에서 조사된 원형주거
지의 경우에는 노지가 확인되며, 가·나지구의 말각방형주거지의 경우에는 외줄구들이 확
인된다. 월성 북편과 북서편인 다지구에서 조사된 주거지는 벽주를 빼곡하게 돌린 형태와 
수혈주거지가 확인되는데, 구들이 확인되지 않지만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며, 경산 임당유
적에서 조사된 주거지와 동일한 모습으로 보인다.

포항지역에서 조사된 삼국시대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방형, 장방형, 타원형 등이며 주

혈, 노시설, 외부돌출구, 벽구, 단시설, 벽체시설, 상면의 처리방법, 저장공시설, 출입시설 
등이 확인된다.

대구 평촌리유적에서는 원형주거지에 벽가를 따라서 일자형 외줄구들이 설치된 모습이

며, 대구 매호동 1008번지 유적은 방형주거지로 벽가를 따라서 ㄱ자형, ㄷ자형 외줄구들
이 확인되며, 단벽 한쪽으로 치우쳐서 문을 낸 모습이다. 평면형태에서는 차이를 보이지
만 중부지역에서 확인된 여(

吕)자형 주거지와 철(凸)자형 주거지의 출입문 위치가 변화한 

50) 국립경주박물관, 2000, 『경주 황성동 유적Ⅰ·Ⅱ』.

경북대학교박물관, 2000, 『경주 황성동 유적Ⅲ・Ⅳ』.

계명대학교박물관, 2000, 『경주 황성동유적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4, 『월성해자 발굴조사 보고서Ⅱ』.

51)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 2009, 『울주 명산리 314-1번지 유적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 발

굴조사 보고서』

52) 울산문화재연구원, 2005,『울산 병영성』.
53) 동아대학교박물관, 1998, 『양산 평산리 유적』.
54)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10,『달성 평촌리・예현리 유적』.
55) 영남문화재연구원, 1999, 『경산 임당동 유적Ⅰ-F, H지구 및 토성-』.

영남문화재연구원, 2008, 『경산 임당택자개발사업지구(Ⅰ지구)내 경산 임당동 마을Ⅰ·Ⅱ』.

56) 영남문화재연구원, 2000, 『대구 시지지구 생활유적Ⅱ』.
57) 영남문화재연구원, 2009, 『대구 매동초등학교 신축부지 내 대구 매호동 1008번지 유적』.
58)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5, 『포항호동유적Ⅰ』; 2008, 『포항호동유적Ⅱ~Ⅷ.』.
59) 성림문화재연구원, 2011, 『포항 양덕동 유적Ⅰ-생활유적-』.
60) 한빛문화재연구원, 2012, 『포항 성곡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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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순철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외줄구들이 주거지 안에 배치된 모습 등은 동일한 모습이다. 한편 영
남지역에서는 문경 신기동 740번지 유적에서 중부지방의 철(

凸)자형 주거지가 확인된 점

61)으로 볼 때, 귀틀집이 남부지역에 축조되면서 중부지역의 주거형태가 일정부분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중부지역의 외줄구들이 영남지역으로 확산되는 시기와 과정을 
알려준다. 

중부지방에서는 신라의 한강유역진출과정에서 설치된 군사거점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유적들이 확인되며, 삼국통일 후 주군을 설치하면서 만들어진 취락이 다 수 확인되고 있
다.62)

수혈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방형, 장방형, 타원형, 말각방형, 횡장방형, 여(

呂)자형, 타원

형 등으로 세분할 수 있지만 방형과 장방형주거지가 대부분이며 내부에 구들이 설치된 모
습이다. 하지만 신라왕경 안에서는 이러한 수혈주거지의 모습이 거의 확인되지 않으며, 
동천동 일원 등에서 일부만 조사되었다. 그 원인으로는 왕경 내 거주민이 내위(

內位)를 가

진 왕경인으로 지방민과는 다른 지위를 차지한 점에 기인하며, 거주조건 역시 지방과 달
랐기에 당시 왕경 안에서 수혈주거지의 축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는 경주에 월성을 쌓고 주변 일대를 정비하여 왕경을 만들었다. 초기에 만들어진 이

러한 왕경의 모습은 분명하지 않지만, 이후 방리를 갖추면서 도시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신라 자비왕 12년(469)에 “

京都에 坊里名을 정하였다.”라는 내용은 왕경 내 도로를 만

들고 개별 건물이 있는 택지를 구별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구분은 앞서 고구려유적인 

61) 대동문화재연구원, 2015, 『문경 신기동 740유적-문경 신기 제2일반산업단지 조성부지내 유

적 시·발굴조사보고서-』.

62) 김은겸, 2014, 『중서부지방 신라 취락의 고고학적 분석 연구』, 아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박수미, 2015, 『경기지역 신라말~통일신라시대 수혈주거지 연구』,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

학위논문.

그림 18. 대구 매호동 1008번지 유적 주거지 복원도(영남문화재연구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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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중국 길림성 민주유적에서 확인된 석주나 평양성 내 표석처럼 당시 도시 공간을 구분하려
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진흥왕대 황룡사를 축조하면서 벌인 대규모 토
목공사로 만들어진 황룡사 주변 방리 안에는 여러 크기의 가옥이 위치하였으며, 도로를 
통해 출입이 가능한 모습이다. 당시 왕경 내 건물들은 대부분 귀틀집으로 왕궁, 관청, 사찰 
등에는 고구려처럼 기와를 사용했지만 일반 건물은 사용하지 않았다. 내부에 온돌을 설치
하기 보다는 아궁이를 통한 취사만 이루어진 모습으로 추정되며, 건물 안에서 입식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63) 

Ⅳ. 맺음말

본 발표에서 다룬 가야 외 지역의 주거와 취락의 공간범위는 중국 길림성부터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매우 넓은 공간이다. 이 공간 안에 위치한 여러 시기의 다양한 취락유적들
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공통된 비교대상을 찾고 이러한 공통된 특징을 어떻게 
반영해서 비교할 것인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공간으로 볼 때, 삼국시대의 한반도는 중국 동북지방과 북반부를 

차지한 고구려와 한강 이남지역을 동, 서로 나눈 신라와 백제 그리고 경상남도 김해를 중
심으로 한 금관가야와 이후 경상북도 고령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로 구분되며, 한강 이동
지방에 해당하는 동해안 영동, 영서지역의 예(

濊)로 지역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기후와 

지리조건으로 살펴보면 사람들이 거주하는 가옥의 형태와 공간, 난방시설 등에서 차이가 
확인된다.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각각의 지역별 주거형태를 살펴보면 고구려지역은 고래를 갖춘 

기와집과 수혈주거지를 중심으로 취락이 만들어졌고, 왕성 안에는 표지석을 세우고 이를 
경계로 한 택지 안에 위치한 대형 가옥들이 존재했다.

한성백제와 예의 영역으로 생각되는 한강유적과 영서, 영동지역을 살펴보면 평면평태

와 규모가 다른 여(

吕)자형 주거지와 철(凸)자형 주거지가 확인되는데, 가옥 안에 설치된 

구들로 볼 때, 두 지역간 차이는 크기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붕에 기와를 사용
한 사례를 살펴보면 한성백제의 대형 가옥들에서 많이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기와라는 

63) 양정석, 2007, 「신라 왕경인의 주거공간 : 삼국사기 옥사 조(條)와 왕경(王京) 유적의 관계를

중심으로」,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 신라 왕경인의 삶』 28,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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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차순철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지붕 재료가 가진 특수성과 권위를 알려준다. 또한 영서, 영동지역 취락 안에서 출토된 토
기로 보면 한성백제와의 관련성이 있지만, 이와 별도로 낙랑지역과의 교류를 통해서 이들 
지역의 토기를 소비한 모습이 확인된다. 이는 영서, 영동지역이 한성백제에 속한 것이 아
니라 정치적으로 볼 때, 별개의 세력으로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한편 마한지역의 가옥으로 알려진 사주식주거지는 그 분포지역이 호서, 호남지역을 중

심으로 하지만, 경기도 지역에서도 확인되며, 주거지 안에 부뚜막과 화구에 아궁이 장식
틀을 설치하고 원형 토관을 굴뚝으로 사용하는 모습은 한성백제의 주거문화의 영향을 받
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마한의 문화권 안에 위치한 이들 사주식주거지는 한성백제
의 영향이 확산되면서 본래의 모습에서 변화하는데 이는 주거지 내 벽구, 벽주, 외부돌출
구 등의 시설이 추가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신라의 취락과 가옥은 이른 시기 자료가 많지 않지만 경주 황성동유적으로 볼 때, 평면

형태가 원형에서 말각방형으로 바뀌면서 외줄구들이 설치된 모습이며, 이는 대구, 경산지
역에서 조사된 주거지들과 동일하다. 한편 경상북도 문경지역에서 중부지방의 영향을 받
은 철(

凸)자형 주거지와 함께 외줄구들이 확인되는 점은 영남지방의 가옥 구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가야 외 지역의 취락과 가옥을 살펴본 결과 현지의 지리환경과 기후조건을 

반영한 모습이 중시된다. 또한 가옥의 난방 및 취사시설인 구들의 존재가 중요한 기준임
을 알려주며,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에는 아궁이 장식틀의 존재가 서로 동일한 주거문화를 
공유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아궁이 장식틀이 마한지역으로 보는 호서, 호남지역
의 주거지에서도 확인되는 점에서 한성백제를 매개로 한 주거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한
편 영남지역에 위치한 신라는 진한지역 내 주거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중부지역의 
영향으로 인해 외줄구들이 보급되면서, 점차 사용이 확대된 듯하다. 하지만 신라왕경이 
완성되는 시기에 있어서 왕경 내부에 건립된 가옥은 귀틀집으로 과거 수혈주거지 안에 외
줄구들이 설치된 주거문화와 구분되며, 이후 수혈주거지는 소멸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
지만 지방에서는 이러한 외줄구들이 있는 수혈주거지가 계속 사용되는데, 이는 주거를 이
용하는 주민의 차이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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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에 대한 토론문_장용석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

」에 

 대한 토론문

장 용 석

동국문화재연구원

먼저 이 논문을 작성하기 위하여 국내 및 중국의 자료까지 검토한 차순철 선생님의 학

문적 열정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논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가야지역을 제외한 삼국시대 지역별 가옥(주거)의 모습을 비교・검토하기 위하여 한

반도 뿐만 아니라 중국 요녕성 및 길림성지역까지 포함하는 방대한 자료를 이용하였다. 
검토 결과 가옥의 모습은 기후와 풍토에 맞는 지붕구조와 난방시설을 당시인들이 선택한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지역별 기후를 살펴보기 위해 공군에서 사용하는 자료를 
근거로 한반도는 온난습윤과 한랭동계 기후구 2지역으로 구분되며, 이를 더 세분하면 13
개 권역으로 가능하다고 한다(도 1 참조). 따라서 각 국가마저도 지역별로 자연환경에 따
라 기후가 다를 수 있다. 

2. 취락의 성격은 가옥을 포함한 여러 가지 시설물들의 조합(종교시설, 저장시설, 공방

시설, 사회기반시설, 매장시설, 제의시설, 방어시설 등)을 통해 밝힐 수 있다. 

3. 고구려지역의 주거형태는 고래시설을 갖춘 기와집과 수혈주거지(형태-방형, 장방

형, 내부-외줄구들, 아궁이 및 지각, 석재 사용 벽면 등)그리고 왕성안에는 방리와 도로의 
경계를 알리는 표지석(石標)을 세우고 이를 경계로 한 택지 안에 위치한 대형 가옥들이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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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재한다고 한다. 취락은 산골짜기에 입지하고, 이엉을 엮어 지붕을 했으며, 온돌을 설치하
고, 계곡물을 사용했으며, 양잠과 부경, 빈(殯)이 존재했다.

4. 백제지역의 경우, 한성백제기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방형, 타원형, 육각형 등 다양한

데, 육각형주거지는 몽촌토성, 풍납토성, 지방인 하남 미사리, 파주 주월리, 포천 자작리 
등에서 확인되었다. 구조적으로는 돌출된 출입시설이 없는 육각형주거지, 철(凸)자형 육
각형주거지, 여(呂)자형 육각형주거지 등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육각형주거지는 출입구가 남쪽, 반대편인 북쪽에 아궁이나 부뚜막이 있으며, 부뚜막은 

점토와 판석을 결합한 형태이다. 포천 자작리2호는 지붕에 기와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러한 예를 통해 볼 때, 육각형주거지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
리고 이 시기 주거지의 가장 큰 특징은 외줄구들인데, 점토와 판석을 이용해 솥걸이를 갖
춘 부뚜막시설(―자형 외줄구들)을 설치했다. 

그리고 아궁이 장식틀(조액판, 

竈額板)이 풍납토성(토제)과 몽촌토성(철제), 호서・호

남지역의 마한계 주거지에서 출토되었는데 그 기원은 고구려 아궁이에서 찾아지는 것으
로 볼 때 한성백제기의 문화를 고구려와 연결시키고 있음과 동시에 마한지역까지 확산되
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5. 신라지역에서는 경주 황성동, 포항 호동, 양덕동, 흥해 `성곡리, 경산 임당, 대구 시지, 

양산 평산리유적 등에서 취락이 조사되었다. 많은 유적둘에서 외줄구들이 ―・ㄱ・ㄷ자 
형태로 설치되어 있었으며, 주거지들의 평면형태는 방형, 장방형, 타원형 등이다. 문경 신
기동 740번지 유적에서는 중부지방의 철(

凸)자형주거지가 확인되었으며, 내부에 외줄구

들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중부지역에서 확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중부지방에서 신라의 진출과 관련된 유적들도 확인되는데, 평면형태는 방형, 장

방형, 타원형, 말각방형, 횡장방형, 여(

呂)자형 주거지 등이다. 이 가운데 방형과 장방형

이 대부분이며, 구들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신라 왕경 안에서는 수혈주거지의 모습이 거
의 확인되지 않으며, 동천동 일원에서만 확인되었다. 이러한 원인으로는 왕경 내 거주민
이 내위(內位)를 가진 왕경인으로 지방민과는 다른 지위를 차지한 점에 기인해 거주 조건
도 지방과 달랐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지금부터는 위의 내용 가운데 몇 가지 질문을 발표자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1. 취락의 성격을 언급하면서 일반 가옥과 시설물들의 조합을 검토해서 취락의 성격을 

추론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복수의 시설물들이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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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삼국시대 취락과 가옥 -가야 외 지역을 중심으로-」에 대한 토론문_장용석

취락내에 분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럴 경우 하나의 취락은 반드시 한 개만이 
아닌 복수의 성격을 지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예를 들어 중심취락-교통취락, 중심취락-
제의관련 취락, 일반취락-생산취락 등). 논문에서 검토한 유적을 통해 그 예를 설명해 주
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취락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의 입지
적 측면과 주변유적-이를테면 고분군 등-과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2. 주거지 규모의 경우, 영남지방에서 조사된 원삼국~삼국시대 주거지의 규모는 대체

로 50㎡가 넘지 않습니다. 규모가 큰 주거지가 확인된 유적으로는 경산 임당유적(100㎡ 
이상)과 김해 봉황동유적(80㎡ 이상)이며, 포항 호동유적의 경우는 300여기 가운데 50㎡
가 넘는 것이 3기(최대 77㎡)이며, 137기가 조사된 진주 평거동유적의 경우도 50㎡ 이상
은 2기(최대 53㎡)입니다. 즉 취락의 위계가 높을수록 대형주거지들이 분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경우는 보고된 자료가 적어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백제 한성기의 대규

모 마을유적이 다수 조사된 한강유역과 춘천일대에서 조사된 평면 철(

凸)자형과 여(呂)자

형주거지의 경우 규모가 큰 예가 많이 확인되고 있습니다(풍납토성, 포천 거사리유적, 춘
천 중도동 취락, 춘천 천전리 취락, 화천 원천리유적 등). 이처럼 규모가 큰 주거지들이 다
수의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이 유적들의 경우도 해당지역의 중심유적으로 펑가되고 있
는지 궁금하며, 주변에서 조사된 유적과 비교연구가 이루어진 예가 있다면 간략하게나마 설
명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처럼 주거지의 규모가 큰 이유는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3. 신라 왕경 안에서 수혈주거지의 모습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 것에 대해 왕경 내 거주

민이 내위(

內位)를 가진 왕경인으로 지방민과는 다른 지위를 차지한 점에 기인한다고 기

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라 이외 고구려, 백제의 경우는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신라 왕
경인 경주의 경우 동천동 및 시내 일원에서 조사된 다수의 수혈유구 가운데 일정한 형태(원
형 및 방형)를 띠면서 규모가 3~5m 정도이며, 편평한 바닥면을 형성, 일정한 소토범위 확인, 
바닥면 사방에 주혈이 배치된 경우, 일정한 형태의 석렬이 확인되는 유구들이 당시의 수혈
주거지가 아니었을까 추정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왕경지구 안에도 지방에서 조사된 형태와 
동일한 수혈주거지가 다수 분포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4. 고구려의 경우 만발발자 유적(길림성 통화시)에서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방형이며, 

벽면은 할석과 잡석을 섞어 쌓은 형태가 조사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춘천 근화동유적 C
구역 14호 주거지의 경우도 평면방형이며, 네 벽면은 천석을 이용해서 축조했습니다. 북
쪽에는 고래시설을 한 구조가 확인되었습니다. 두 유적에서 조사된 주거지의 형태나 벽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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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의 축조가 매우 유사해 보이는 점에서 중국동북지방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식해도 좋
을런지 궁금하다. 만약 그러하다면 두 곳의 중간지대인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에서도 이와 
유사한 주거지들이 조사된 사례가 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또 하나는 많은 노동력이 발생하는 다량의 석재를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주거지 

보다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하여 축조한 수혈식주거지일 가능성은 없는지 궁금합니다. 

5. 마지막으로 향후 취락연구의 방향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기 바랍니다. 취락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개별주거지에 대한 속성(평면형태나 내부시설 등)이나 취락의 입
지, 기능, 규모, 위계 등에 대한 연구는 상당한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고 생각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지역내 연구와 지역간 연구 등 좀 더 넓은 범위로 연구를 확대시켜가야 올바른 
지역사연구가 될 수 있고, 이를 통해 국가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으
로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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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가야 건물지 구들의 분포와 성격

고 영 민 (국립김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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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고영민

가야 건물지 구들의 분포와 성격

Ⅰ. 머리말 

온돌로 익히 알려져 있는 구들은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시설이다. 고대부터 사용하였으

며,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현대에도 그 원리를 이용하고 있다. 온돌과 구들의 개념은 약간 차
이가 있는데, 구들은 고래둑, 구들장으로 구성된 구조적 측면의 의미가 강하고, 온돌은 구들
로 만들어진 난방방식의 의미가 크다.1) 주거 건물 내에서 불을 피워서 취사와 난방을 겸할 
수 있는 구들은 한반도에서 약 이천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사용되어 오면서 발전해왔다. 

삼국시대 가야 지역에서도 이러한 구들을 사용하였는데 이시기 구들은 우리가 일반적

으로 알고 있는 전통가옥의 형태와는 다르다. 전통가옥은 고래 위에 구들장을 깔고 그 위
에서 생활하는 반면, 삼국시대의 것은 고래가 지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으로 돌출되
어 있다. 또한 방 전체에 구들이 시설되지 않고 ‘ㅡ’자 또는 ‘ㄱ’자형의 외줄구들을 이용하
였다. 구들은 취사 등에 사용하는 열의 전도를 이용하여 난방기능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으
로 부뚜막에 불을 가하면 구들을 통해 달궈진 복사열을 통해 실내를 데우는 형식이다. 

1) 김왕직, 2007, 『알기 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동녘, 257쪽. 

Ⅰ. 머리말                                 
Ⅱ. 주요 유적 사례 

Ⅲ.  가야  건물지  구들의  특징과  성격 
Ⅳ. 맺음말

목 차

가야 건물지 구들의 분포와 성격 

고 영 민

국립김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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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부뚜막에 연도나 구들이 없는 독립된 형태의 것은 부뚜막이라 하고, 연도가 달린 것은 

연도 부뚜막, 여기에 구들이 시설되어 있는 것은 쪽구들이라고 한다. 연도 부뚜막은 부뚜
막과 연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쪽구들은 부뚜막과 연도사이에 구들이 추가된 구조이다.2) 

가야의 구들에 관해서는 기존에 많은 선행 연구가 진행되었다. 본고에서는 가야지역의 

구들이 출토된 주요 유적과 함께 가야의 구들의 분포와 특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Ⅱ. 주요 유적 사례 

가야와 관련하여 건물지에서 구들이 발견된 유적은 사천 늑도유적, 진주 평거동유적, 

창원 외동유적, 사천 봉계리유적, 함양 화산리유적, 고령 지산동 유적이 있다. 주요 유적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유적명

전체주거지

구들주거지

구들형태

축조재료

비고 

사천늑도 A

90

41

타원형, 외구들

석재

삼한

사천늑도 C

14

7

타원형

석재

진주 평거동3-1

95

26

타원형

점토

진주 평거동3-2

137

117

타원형

점토

함양 화산리

43

24

타원형

점토

사천 봉계리

149

6

타원형, ㄱ자형

점토

창원 남산

35

3

타원형

점토

창원 신방리

2

2

ㄱ자형

창원 외동

3

1

타원형

창원 가음정동

3

1(추정)

진해 용원

2

2(추정)

고령 지산동

13

9

T자형

  

남부지방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구들이 사용되어진 것으로 알려진 사천 늑도 유적은 영

남지역 구들 문화의 초기 형태로 잘 알려져 있다. 삼한시대에 해당하지만 영남지역 삼국시
대 주거지의 구들 변천과 관련하여 많은 연관성이 확인되므로 추가하였다. 

2) 송기호, 2019, 『한국 온돌의 역사』.

표 1. 가야 관련 주거지 구들 출토 유적 현황(송기호, 2019, 『한국 온돌의 역사』,  p189 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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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고영민

가야 건물지 구들의 분포와 성격

늑도 유적에서는 방형과 원형의 주

거지가 나타나는데 중복관계를 통해 
볼 때 방형주거지가 원형주거지보다 
선행한다.  방형주거지에서  ㄱ자형의 
외고래를 가진 구들이 주로 확인되었
다. 원형계 주거지에서는 구들을 원형
의 벽면과 붙여서 만든 형태가 있다. 
부뚜막은 대부분 판석을 세워서 만들
었으며,  구들의  고래도  석재를  주로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2매의 판석을 세우거나 1매의 판석을 세우고 상부에 다시 판석을 
덮어서 만들었다.

진주  평거동  유적은  진주  남강  변에 

위치한 대규모 취락유적이다. 수혈건물
지는 총 137기가 조사되었는데, 대체로 
자연제방  정상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구들이 있는 건물지는 모두 117기
로, 대부분 원형주거지이다. 구들은 동벽
이나 서벽 중앙에 부뚜막을 설치하고, 단
면 ‘ㄱ’자 형태의 고래를 북벽을 따라 축
조하였다. 구들과 부뚜막 내부에는 솥받

그림 1. 늑도 C-13호 주거지 구들

그림 2. 늑도 C-14호 수혈 주거지

그림 3. 평거동 유적 수혈 건물지 중복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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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침이 주로 확인되며 돌이나 토기를 사용하였다. 

늑도 유적의 구들과 다르게 대부분 점토를 이용해 만들었으며, 보수하여 사용했다고 추

정하기도 한다. 무투창고배나 평저장동옹 등으로 볼 때 취락의 중심연대는 3∼4세기대로 
알려져 있다. 

창원 외동 유적은 구릉 말단 곡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모두 3기의 수혈주거
지가 확인되었다. 모두 원형 주거지인
데 이중 구들을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2호 주거지이다. 길이 7m, 너비 5.6m
의 타원형 주거지로 구들은 점토를 이
용하여 만들었다. 주거지 벽면을 따라 
1/4 가량 고래를 설치하였으며, 부뚜막
은 동측에 위치하고 있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발형토기, 단경호, 철겸 등이 출토되었다. 

함양 화산리 유적은 총 45기의 수혈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평면형태는 주로 원형과 타

원형이며, 부뚜막 시설이 확인된 주거지는 모두 30기이다. 주거지 벽면을 따라 외고래의 
구들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적갈색 점토를 이용해 만들었다. 고래의 단면은 원형이며 벽
체에서 확인된 가공흔과 점토소성 상태로 보아 먼저 내부에 대나무 등으로 내부 구조를 
만들고 그위에 적갈색의 점토를 발라 형태를 유지하였다. 25호 주거지의 경우 두 개의 부
뚜막이 확인되었는데 인위적으로 폐기된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 동시기 사용되었다.3) 

3)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07, 『함양 화산리유적』, p269.

  

그림 4. 평거동 유적 20-1호 주거지 

그림 5. 창원 외동 유적 2호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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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가야 건물지 구들의 분포와 성격

사천 봉계리 유적은 152기의 수혈 주

거지가 확인되었다. 노지, 부뚜막, 연도
부뚜막, 구들 등 다양한 시설이 확인되
었다. 주거지 형태는 원형 및 타원형이 
다수를 차지한다. 주거지 중 파괴된 것
이 비록 많지만, 구들이 확인된 것은 모
두 10여기 정도이다. 이중 50호에서는 
ㄱ자형의  외고래  구들이  확인되었다. 
구들은 주거지 벽면을 이용하여 만들어
졌으며, 모두 점토를 사용하였다. 

고령  지산동  유적은  지산동  고분군 

주능선의 동편계곡과 계곡의 동쪽 능선 
서사면 일대에 위치해 있다. 수혈 주거
지는 모두 13기가 확인되었다. 주거지
의 모양은 방형과 타원형으로, 방형이 9
기로 다수를 차지한다.

전체 주거지 중에서 고래가 확인되는 

것은 모두 9기이다. 고래의 형태는 T자
형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사자는 주거
지가 파괴되어 고래의 잔존 양상이 일
부에  지나지  않는  것도  형태적으로  T
자로 추정하였다.4) 고래는 돌과 점토를 
이용하여, 주로 동쪽과 서쪽 벽면을 이
용하여 시설하였다. 또한 일자형 고래
의 중앙부를 돌출시켜 아궁이를 만들었
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연질옹과 뚜껑, 
고배 등의 유물로 보아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4)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7, 『고령 지산동 유적』, p180. 

그림 6. 함양 화산리 유적 25호 주거지

그림 7. 사천 봉계리 유적 29호 주거지

그림 8. 고령 지산동 유적 9호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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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주거문화

Ⅲ. 가야 건물지 구들의 특징과 성격

영남지역의 가야시대 건물지의 구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먼저 모든 가

야의 주거지에서 구들이 확인 되지는 않는다. 분포지역은 영남지역 해안지대를 시작으로 
진주와 창원일대를 중심으로 사용되었으며, 내륙지역에서 일부 사용되었다. 주로 평거동 
유적과 같은 평지나 곡부에 입지한 취락에서 확인된다.5) 진주 평거동 유적이나 사천 봉계
리 유적과 같은 대형 취락 내에서 일부 주거지에만 구들이 나타나는데, 수혈 주거지 내부
의 부뚜막이나 구들 같은 시설이 계절의 변화에 맞춰서 매우 유동적으로 구축되고 철거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6)  

축조 재료는 시기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데, 사천 늑도 유적에서는 석재와 점토를 이용

한 구들이 등장하였으나, 이후 가야의 주거지에서는 점토로만 만든 구들이 주를 이룬다. 
고령 지산동 유적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 후기가 되면 석재를 사용한 구들이 등
장한다. 

구들의 평면 형태는 영남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원형 주거지에 맞춰서 벽을 따라 

만들어진 타원형의 점토제 구들이 만들어졌다. 늑도 유적에서 방형의 주거지도 확인되나, 
구들이 시설된 것은 원형 주거지가 다수를 차지한다. 공봉석은 구들과 부뚜막의 형태를 
삼한시대 늑도 유적에서 확인되는 석재로 만들어진 ㄱ자형 구들에서 삼국시대 원형 주거

5) 구들이 시설된 주거지의 입지적 특징에 대해 취락의 성격차이나 수혈 건물지의 폐기 시점에 따

른 차이, 계절성 취락의 가능성을 제기한 선행 연구도 있다. 공봉석, 2008, 「경남 서부지역 삼

국시대 수혈건물지의 구들 연구」, 『한국고고학보』 제66집.

6) 金賢, 2006, 「南海岸 쪽구들 住居址 登場에 대한 小考-勒島住居址를중심으로-」, 『石軒鄭

澄元敎授 停年退任記念論叢』, p360. 

①.타원형 구들(평거동 20-1호) 

②.ㄱ자형 구들(봉계리 50호)

③.T자형 구들(지산동 2호)

그림 9. 가야 수혈 주거지의 구들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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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가야 건물지 구들의 분포와 성격

지의 원형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공봉석 2008). 가야의 수혈 주거지 구들은 평거동 
유적, 함양 화산리 유적, 창원 외동 유적 등에서 확인되듯이 주거지 내부 벽면의 1/3에서 
1/4 가량에 걸쳐서 원형으로 만들어지며, 봉계리 유적 사례에서 보듯 일부 ㄱ자형이 만들
어진다. 

늑도의 주거지가 기원 전후한 시기가 중심이라면 4세기대 원형주거지를 중심으로 유행

한 가야의 주거지와 시기 차이가 발생한다. 또한 5세기가 낙동강 하류역에서는 온돌과 부
뚜막의 확인 예가 많지 않은데, 이는 수혈주거지가 급감하고 고상건물이 증가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지적되었다.7) 

이후 6세기대가 넘어가면 석재로 만든 온돌이 등장하는데 창원 가음정동 2호 주거지, 3

호 주거지, 창원 봉림동유적, 김해 우계리 유적에서 확인되며, 창원 고령 지산동 유적과 같
이 돌과 점토를 혼합하여 만든 T자형 구들도 등장하게 된다.  

T자형 구들은 삼국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
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월 문산
리나 춘천 우두동 유적의 예로 보
아 고려 초기까지 계속 등장한다. 
그러나 삼국시대 말기에 등장한 T
자형 구들은 고려시대 들어서 사
라지기 시작하고, 고려시대에 온
구들이라는 형태로 바뀐다.(송기호 2019) 

가야 주거지에서 확인되는 구들의 고래는 대부분 외고래이며, 부뚜막과 고래의 너비 차

는 크지 않다. 이후 부뚜막과 고래로 연결되는 지점이 급격히 좁아지는 구조적 차이가 확
인되는데, 이는 재래의 부뚜막 시설에 구들이 도입된 양상을 반영하는 것이며,8) 전통 한
옥의 구들에서 보이는 불목과 유사한 구조로 보아 원활한 배연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
도 있다.9)

구들이라는 난방시설은 추운 북쪽에서 개발되어 남쪽으로 전파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

는데, 영남권 전체의 분포를 본다면 경남 해안일대와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 남부쪽에 
몰려있고 경북 북부는 상대적인 공백지역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경북 북부의 공백으로 
볼 때 육로로의 전파가 아닌 남해안 지역에서 발전해 나갔다고 추정된다. 

7) 공봉석, 2016, 「가야의 주거와 취락」, 『가야 고고학 개론』, 진인진.
8) 송기호, 앞의 책 p198. 
9) 공봉석, 앞의 책 p100.

그림 10. 고령 지산동 유적 9호 주거지의 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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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가야 건물지 구들의 기원에 대해 영남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등장한 유적은 사천 

늑도 유적이다. 구들과 함께 낙랑 및 한식 유물이나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관련 유물 
등 대외 교류와 관련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늑도 유적의 구들은 삼각점토대 토기 
단계에 등장하는데,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통해 그 기원에 대해서는 북옥저 기원설(단
결-크로우노프카 문화), 고구려 기원설, 다원설 등 다양하게 알려졌다.  

구들의 기원과 관련한 연구에 대해서는 송기호의 연구가 주목할 만하다. 초기철기시대 

구들의 발흥부터 조선시대까지 전시대에 걸친 온돌의 변천사를 연구하였는데, 고대 남해
안지역 구들의 기원을 북옥저라고 제시하였다. 사천 늑도 유적과 단결-크로우노프카 문
화의 석재와 점토를 사용한 구들의 평면과 단면 형태의 동일성, 단결-크로우노프카 계통 
토기의 등장, 강원 영서 지역 구들의 공백, 경기도 지역과 다른 방향으로의 구들의 변천 등
을 들어 해상 교류를 통해 남해안으로 전파되었다고 제시하였다.(송기호 2006). 또한 늑
도가 거점이 되어 이후 구들 문화가 진주 평거동, 사천 봉계리, 함양 화산리 등으로 확산하
였다고 보았다. 

이상의 구들과 관련한 연구내용을 통해 볼 때 늑도의 구들은 단결-크로우프카 문화와 

많은 유사성이 확인된다. 다만 아직 북한 등지의 자료가 부족하여 이동의 동선이 함경도 
남부 해안을 이용한 것인지, 다른 내륙 방면을 이용한 것인지는 앞으로 자료가 누적되어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림 11. 동녕 단결유적 F1주거지(좌), 페트로프섬 2호 주거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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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가야 건물지 구들의 분포와 성격

Ⅳ. 맺음말

이상과 같이 가야의 수혈주거지에서 나타난 구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가야 주거지에서 

확인된 구들의 특징을 정리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가야 주거지의 구들은 동벽 또는 서벽에 부뚜막을 설치하였으며, 벽을 따라서 고래를 

북쪽으로 진행하여 굴뚝을 설치하였다. 주로 원형주거지에 점토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가
야 수혈 건물지의 구들은 4세기대에 주로 유행하였다. 이후 5세기 단계가 되면 숫자가 줄
어드는데, 6세기대가 되면 석재를 이용한 구들이 등장하게 되고, 이는 T자형 구들로 발전
하여 통일신라로 이어지게 된다.    

구들은 가야의 주거 문화를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주제이지만, 가야 주거지

의 구들을 설명함에 있어서 많은 자료를 확인하지 못했다. 향후 연구를 통해 이를 보완하
도록 하겠으며, 앞으로 가야 주거지의 구들과 관련한 많은 자료가 추가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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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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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 건물지 구들의 분포와 성격」에 대한 토론문_김나영

가야 건물지 구들의 

 분포와 성격

」에 

 대한 토론문

김 나 영

울산대학교박물관

본 발표문은 가야지역의 구들이 출토된 주요 유적의 사례를 소개하고 가야 구들의 분포

와 특징에 대해서 검토하였습니다. 가야 건물지 구들의 기원과 관련하여 앞 시기 사천 늑
도유적주거지의 구들을 검토하여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의 유사성을 언급하였습니
다. 그리고 가야 구들의 특징은 ‘동벽 또는 서벽에 부뚜막을 설치하고 벽을 따라서 고래를 
북쪽으로 진행하여 굴뚝을 설치하였다. 주로 원형 주거지에 점토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4
세기 대에 주로 유행하였다. 이후 5세기 단계가 되면 숫자가 줄어드는데, 6세기대가 되면 
석재를 이용한 구들이 등장하게 되고, 이는 T자형 구들로 발전하여 통일신라로 이어지게 
된다’라고 정리를 하였습니다.  

토론자는 발표문을 읽고 궁금했던 사항과 의문점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1. 발표자께서는 가야 구들의 기원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사천 늑도유적의 구들을 검토

하였으며, 선행 연구의 견해(송기호, 2006)를 수용하여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의 유
사성을 언급하였습니다. 토론자도 영남지역 삼한시대 주거지를 연구하면서 늑도유적의 
원형계 주거지 안에 설치된 구들의 계통과 기원을 밝히는 부분은 대단히 어려웠고, 단서
를 찾고자 자료수집과 연구가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발표자께서는 늑도유
적 주거지의 기원을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의 관련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습
니다. 어떠한 부분에서인지 좀 더 부연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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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2. 영남지역의 사천 늑도유적, 대구 달성 평촌리유적, 울산 교동리유적 등의 주거지 사

례로 미루어 볼 때, 삼한의 이른 시기에는 구들의 축조 재료가 석재(돌)였음을 알 수 있습
니다. 이후 주거지내 연질토기와 전기 와질토기가 출토되는 단계의 주거지에서는 구들의 
축조재료가 점토로 변화하는데, 이러한 양상은 삼한 후기에서 삼국시대까지 이어집니다. 
물론, 석재와 점토를 혼용하여 축조된 사례도 있지만, 주이용 재료는 점토입니다. 이러한 
점토 구들은 삼국 후기에서 통일신라에 이르면 다시 석재 구들로 변하게 됩니다. 이처럼 
영남지역 내 삼한 · 삼국시대 구들의 축조재료가 석재→점토→석재로 변화한 요인이 무
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구들의 주재료가 석재였던 북쪽의 고구려 등 지역과 비교할 
때 남쪽의 변 · 진한과 가야, 신라 등 지역에서는 구들의 축조재료가 점토의 이용이 높았던 
것은 당시 주거문화를 이루었던 사람들의 선호도의 차이였는지, 기후와 지형의 차이였는
지, 아니면 기술상의 문제였는지 등 발표자분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3. 가야의 주거지는 변한 시기부터 이어져온 평면 원형계에 수혈 벽가에 인접하여 구들

이 설치된 주거문화가 5세기 대까지 이어지고 선호되지만, 4~5세기 대에 백제, 신라 등 
주변지역의 주거문화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주거문화가 수용됩니다. 즉, 진주 가호동유적
과 진주 평거동(3-1지구)유적 등에서는 마한 · 백제 주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
되는 부뚜막이 설치된 방형계 주거지가 확인되며, 금관가야권에 속했던 진해 용원유적, 
창원 신방리유적, 기장 가동유적 등에서는 신라 주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구들이 설치된 방형계 주거지가 확인됩니다. 특히 창원 신방리유적과 기장 가동유적의 방
형계 주거지 안에 설치된 구들의 위치는 수혈 벽가에서 일정거리 이상 떨어져 벽체 안쪽
으로 이동하게 되고, 평면 형태 또한 ‘ㄱ’자, ‘ㄷ’자, ‘ㅁ’자 등 구조적으로 다양해집니다. 가
야 지역권에서도 주변지역들과 교류가 많았던 남해안지역과 타 주거문화권과 경계를 두
고 있는 점이지대에 위치한 지역들에서 이러한 변화양상이 확인됩니다. 이처럼 가야의 구
들은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부분도 있지만, 주변지역과의 직 · 간접적인 교류와 삼국의 다
양한 상호작용 속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발표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4. 발표자께서는 가야 지역의 구들이 확인된 주요 유적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대상으로 

한 고령 지산동유적은 평면 방형계에 출토유물의 양상 또한 6세기 대 신라토기의 비율이 
높아 신라권역의 주거지로 생각됩니다. 6세기 대 창원 가음정동 2호주거지(동아세아), 산
청 하촌리 ⅠA지구 21호 주거지 등에서 석재 구들이 등장한 사례로 미루어 볼 때, 이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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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 건물지 구들의 분포와 성격」에 대한 토론문_김나영

들이 신라의 주거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가야 지역 내 석재 구들의 출현 및 
변화양상을 통해 신라 주거문화와 관련을 지을 수 있는 것인지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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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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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가야의 주거

공 봉 석 (부경문물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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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봉석  

가야의 주거

Ⅰ. 머리말

2000년대 이후 삼국시대 대규모 취락 발굴조사가 급증하면서 주거와 취락에 관한 연구

가 본격화되었다. 진주 평거동 유적, 진주 내촌리 유적, 산청 하촌리 유적, 거창 송정리 유
적 등을 통해 취락의 전체 모습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고, 김해 봉황동 유적, 김해 관동리 
유적, 함안 충의공원 조성부지 내 유적, 고성 동외동 유적 등이 발굴조사 되면서 취락의 수
준이나 기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가야의 주거 연구는 주거지의 구조를 통해 시기적인 변화나 지역적 특성을 파

악하려는 연구가 주를 이루며, 더불어 구들과 같은 주요 내부시설과 주거지 상부 형태에 
관한 복원도 시도되는 등 몇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주거와 취락 연구는 대
부분 각 단위의 형식 분류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였는데, 이제는 형식 분류를 넘어서 
취락 내 다양한 활동 공간의 분화나 취락 간의 상호 관계 연구, 인간 활동에 관한 설명 등
으로 진전되어야 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權鶴洙 1994 ; 李盛周 2009).

따라서 이번 발표에서는 가야의 주거 구조와 변천양상, 지역적 특성 등은 선행 연구에

. 머리말

. 주거의 구조 

   1

. 권역별 주거 구조

   

2. 주거 구조와 사회변화

. 주거 규모 변화와 가구 양상

   

1. 주거의 규모 변화

   

2. 취락 양상

   

3. 주거의 부속 시설

   

4. 주거 규모 변화와 가구 양상

. 맺음말

목 차

가야의 주거

공 봉 석

부경문물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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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서 이미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삼가고, 여기에서는 권역별·시기별 주거 방
식의 변화 및 차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우선 가야 주거의 구조적 특성을 권역별로 정
리하고, 주거 구조 변화를 당시 사회상과 관련하여 간략히 설명하였다. 이러한 기초자료
를 바탕으로, 4~5세기 영남 서부 내륙 및 남해안 지역 주거지의 규모 변화에 주목하였다. 
5세기가 되면 전반적으로 주거지의 규모가 축소되는데, 취락을 구성하는 유구의 변화나 
분포양상, 그리고 주거의 부속 시설로 판단되는 수혈과 지상식 건물지 등을 검토하여, 주
거 건물의 축소 배경과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 주거의 구조

 1. 권역별 주거 구조

영남지방은 대략 3세기 후반을 전후한 무렵부터 낙동강을 경계로 영남 동부와 서부지

역 등 광역 단위별로 주거의 구조가 분화되며, 가야의 주 무대라 할 수 있는 영남 서부지역
은 낙동강 하류역과 서부 내륙·남해안 일대로 주거가 구별된다.

낙동강 하류역은 원삼국시대 원형계 주거지가 4세기 초엽까지 일부 관찰되지만, 대체

로 3세기 후반경에 등장한 방형계 주거지가 4세기 후반까지 지속된다. 이때의 원형계 주
거지는 주로 평면 타원형으로, 중심기둥 없이 벽기둥만 확인되는 경우가 많으며, 내부에
는 점토 구들이 벽을 따라 주거지 둘레의 1/3~1/4가량 설치되어 있다. 김해 대청·부원동 
유적, 창원 남산·가음정동 유적 등지에서 주로 확인되며, 경남 서부 내륙 및 남해안 일대
에서 4세기대 유행한 타원형 주거지와 같은 유형이다. 한편, 방형계 주거지는 벽기둥을 설
치한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 무질서한 기둥 배치를 보이는 예가 많으며, 벽체를 세
우기 위한 기초 홈인 벽구가 확인되기도 한다. 노 시설은 주거지의 평면형에 따라 구조가 
달라지는데, 방형 주거지에서는 구들보다 부뚜막을 선호하였다. 구들을 설치할 경우 벽을 
따라서 평면 ㄱ자형이 되도록 하였다.

이후 5세기에도 낙동강 하류역은 여전히 방형계 주거지가 주류를 이룬다. 창원 봉림동 

B1-2호 주거지에서 부뚜막이 조사된 바 있지만, 구들과 부뚜막의 확인 사례가 많지 않아 
이 시기 유행했던 노 시설의 종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전 금관가야 궁허지, 김해 봉
황동 유적, 김해 관동리 유적에서 출토된 이동식 토제 부뚜막을 고려하면, 구들이나 부뚜
막을 이동식 부뚜막이 대신하였을 가능성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權貴香 2010). 한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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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봉석  

가야의 주거

세기 후반경 평면 원형 주거지가 김해 봉황토성, 창원 반계동 유적, 창원 가음정동 유적에
서 부분적으로 관찰되지만, 6세기 후반 창원 가음정동 유적 등지에서 다시 장방형 주거지
가 나타나고 있어, 낙동강 하류역은 6세기까지 여전히 방형계 주거가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6세기 전반경에 등장한 방형계 주거지는 소위 신라 계통의 주거지로, 주요 특징

은 단연 구들의 구조를 들 수 있다. 구들은 모두 석재로 만들었는데, 김해 우계리 4호와 창
원 봉림동 B2-4호 방형 주거지는 벽에 외줄 고래가 설치되고 그 중앙에 아궁이가 위치하
며, 가음정동 2호(

東亞細亞文化財硏究院 2009)는 동쪽 벽에 설치된 부뚜막에서 서쪽으

로 두 줄 설치한 고래 흔적이 남아있고, 아궁이 바닥에는 석재를 횡으로 놓아 부넘기를 두
었다. 그리고 창원 가음정동 3호 원형 주거지(

昌原大學校博物館 2001)에서는 남동쪽에 

ㄴ자 상의 두 줄 고래가 확인되는 등 다양한 형태의 석재 구들이 확인된다.

한편 이 지역은 3세기 중반경 고 김해만이 최고 수위로 상승한 뒤 하강함(오건환 1994)

에 따라 생활영역이 기존 구릉에서 저지대로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저지대에 취락이 
자리 잡으면서 고상 건물의 비율이 높아진다든지 취락에 특수 시설을 하는 등의 습지 환
경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법이 나타나고 있다. 관련하여 창원 신방리 유적과 김해 봉황
대 유적(

慶南發展硏究院 歷史文化센터 2005)에서는 주거역 주변에 목책열이나 석열을 

배치하거나, 고상 건물은 기둥 자리를 넓게 굴착한 후 두꺼운 판목, 또는 판목을 3중 정도 
엇갈리게 깔아 마찰계수를 높여 지반의 침하를 방지하였다. 더불어 김해 봉황대 진입로 
개설구간과 전 금관가야 궁허지, 5세기대 봉황토성 등 저지대에 입지한 수혈 주거지는 바
닥에 두껍게 흙을 깔거나 나무못을 촘촘히 박아 습기와 지반 침하 등을 방지한 사례가 확
인되기도 한다. 

이처럼 낙동강 하류역에서는 4세기 초 저지대로 생활영역이 확대되면서 습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특히 지상식(

地上式) 건물, 즉 고상 건물을 적극적으로 채용하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조성한 고상 건물은 일반적으로 취락의 부속 시설인 창고
나 망루 등도 있겠지만, 취락을 구성하는 유구와 배치 상태 등을 고려하면, 많은 수가 주거 
건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김해 관동리 유적·김해 여래리 유적·김해 아랫덕정 유
적·창원 가음정동 유적 양상으로 보아 6세기까지 지속해서 주거 건물로 사용하였던 것으

<그림 1> 김해 봉황대 46호, 창원 신방리 1호, 김해 관동리 41·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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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로 생각된다. 반면 4세기대 서부 내륙 및 남해안 지역은 진주 평거동 유적 정도를 제외하
면 많은 수의 고상 건물지가 확인되는 사례가 드물며, 설령 고상 건물지가 확인되더라도 
유구의 배치 상태와 고상 건물의 구조를 고려하면 창고나 기타 취락의 부속 시설이 많은 
편이다. 

한편, 경남 서부 내륙 및 남해안 일대는 원삼국시대부터 줄곧 유행하였던 원형계 주거

가 4세기 후엽까지 지속하는데, 원삼국시대 원형계 주거와 비교하면 삼국시대 주거는 구
조 면에서 상당한 정형성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원형계 주거는 평면 타원형
이 많고, 기둥은 벽에 걸쳐 일정한 간격으로 세운 벽기둥만 확인될 뿐 중심기둥이 전혀 확
인되지 않는다. 구릉에 입지한 주거는 벽기둥과 함께 벽구의 설치 비율이 높은 편이다. 구
들은 벽을 따라 점토로 조성하되, 건물 둘레의 1/3 이상을 넘지 않는 것이 많다.

4세기 후엽을 전후한 시기부터 타원형 주거는 더는 사용되지 않고, 방형계 주거가 등장

하여 6세기대까지 이어진다. 단 4세기 후엽에 타원형과 방형 주거의 과도기적인 형태인 
말각 장방형 또는 장타원형 주거지가 진주 평거동 유적·산청 하촌리 유적·거창 송정리 유
적 등지에서 관찰되는데, 이들 주거지에서는 타원형 주거에서 주로 보이는 벽주식의 주혈 
배치와 구들이 많이 확인된다. 이때 구들은 고래 길이가 짧은 것이 특징이다.

5세기대로 접어들면, 일부 장방형 주거와 함께 방형 주거가 많이 확인된다. 방형 주거

는 진주 평거동 유적·산청 하촌리 유적에서와같이 비교적 25㎡ 이하의 소형으로, 내부에 
주혈이 확인되지 않거나 무질서한 주혈 배치를 보이며, 일부 짧은 연도가 부가된 것도 있
지만 주로 부뚜막이 벽과 직교되게 설치하여 바로 배연되는 구조이다. 지역에 따라 주거
지의 네 모서리 쪽에 중심 주혈과 벽구가 설치되기도 한다.

방형계 주거는 6세기 후반까지 이어지지만, 대략 6세기 전반 이후는 신라문화의 파급과 

관련하여 신라에서 유행한 주거가 사용된다. 즉 낙동강 하류역에서 확인되는 평면 방형의 
석재 구들이 설치된 주거지가 산청 하촌리 유적과 고령 지산동 유적 등지에서 조사된 바 
있다.

<그림 2> 진주 평거동 32호(4세기), 거창 송정리 233호(5세기), 고령 지산동 2호(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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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봉석  

가야의 주거

2. 주거 구조와 사회변화

기존의 삼국시대 분묘와 토기의 연구 성과를 고려하면, 주거도 가야의 주요 정치체에 

따라 일정한 구조 차이를 보일 가능성이 크지만, 현재로서는 김해를 중심으로 창원·진해 
일대의 낙동강 하류역과 서부 내륙·남해안 일대 등 대략 2개 권역에서만 주거의 구조 차이
가 나타난다.

우선 낙동강 하류역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주거 유형이 변한에서 가야로 이행하는 시점

에 등장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낙동강 하류역에서는 변한 단계의 구야국(

狗倻國)에 이

어 금관가야(

金官加耶)가 지리적으로 유리함과 철 생산 바탕의 중개무역으로 여전히 유

력 집단으로 존재하였는데, 4세기 초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가야의 핵심 지역인 낙동강 하
류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방형 주거문화가 도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현재로서는 
금관가야 중심지의 주거지 자료가 소략하여 주거의 특징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방
형 주거의 원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료의 증가를 기대해야 할 것이다.

다만 낙동강 하류역은 일찍부터 주거 건물 형태의 다변화를 꾀하였다. 김해 봉황대 유

적(가야인 생활체험촌 조성부지 유적)에서 확인된 고상 건물지는 봉황대 서편의 해반천 
주변 저지대에 위치하여 당시 교역품 등을 보관한 창고나 임시 가옥 등으로 보기도 하며
(전옥연 2013), 김해 퇴래리 유적·진해 자은 채석 유적·창원 신방리 저습 유적·김해 관동리 
유적·김해 여래리 유적 등지에서 확인된 고상 건물지 역시 유적의 입지와 내용으로 보아 
많은 수가 주거 건물로 추정하기도 한다(배덕환·김민수 2009). 다만 상기한 유적은 교역
이나 채석(

採石), 분묘 조성, 제철(製鐵) 등과 같은 특수 기능 취락(유병록 2009)으로 상

정되는 유적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자칫 고상 건물을 이러한 특수 집단에서만 주거용
으로 사용했다고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취락의 기능적인 측면보다, 당시 
생활영역의 확대 필요성과 이에 따른 유적 입지에 적합한 주거의 형태 변화 등의 사회적 
요구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원삼국시대부터 사용한 타원
형 주거가 지속되는 가운데 3세기 후반경 방형계 주거가 등장하여 공존하고, 여기에 고상
(

高床) 건물을 주거 건물로 사용하는 등 같은 시기 다른 지역에 비해 주거 건물의 형태와 

구조가 매우 다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 하류역에서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일찍부
터 주거 건물의 다변화를 꾀하는 것과 별개로, 영남 서부지역은 1세기가량 늦은 4세기 후
엽부터 점차 지상식 건물이 주거 건물로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함안과 마산 진동 일원은 4세기대 낙동강 하류역과 서부 내륙·남해안 일대의 지

리적 중간 지대에 속하여 양 권역의 주거가 혼재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사례가 많지 않아 
예단하기 어렵지만, 마산 근곡리 유적이나 함안 오곡리 87번지 유적 등지에서는 낙동강 
하류역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장방형이나 장타원형의 평면형을 띠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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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거지가 높은 비율로 확인되고 있다. 함안의 아라가야는 삼한 단계부터 진동만을 통한 교
역으로 번성하여 금관가야와 대등한 세력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리적으로 유리한 입
지를 바탕으로 주변국과의 교역 속에서 자연스럽게 주변 지역의 주거를 수용하였던 것으
로 보인다.

다음으로 영남 서부 내륙과 남해안 일대에서 4세기 후반까지 사용된 타원형 주거의 의

미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혹자는 변한의 원형계 주거가 4세기 후반까지 지속하는 것을 
문화 지체 현상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이에 앞서 당시의 주거 내부 사정을 제대로 파악
하는 것이 중요하다.

4세기대 타원형 주거는 원삼국시대의 원형 주거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이전과 비교

하면 구조적 측면에서 상당한 변화가 감지된다. 이를테면, 주거의 평면형은 주로 원삼국
시대에 원형이던 것이, 삼국시대가 되면 대형과 소형이 원형, 중형이 타원형 등 주거 규모
에 따라 평면형이 구분된다. 그리고 벽기둥과 벽면 처리 등 벽체 조성 방법이 정형을 갖추
며, 주거 규모도 전반적으로 커진다.(공봉석 2015) 특히 주거의 규모 변화는 취락 및 주거 
방식과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4세기대 주거 규모가 커지는 현상은 이전 단계
와 비교하면 취락 구조나 주거 방식이 현저하게 달랐음을 의미한다(공봉석 2013). 그리고 
구들은 이미 사천 늑도 유적에서 확인된 이후 원삼국시대에도 줄곧 사용되지만, 원삼국시
대에는 구들의 설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지만, 삼국시대에는 주거에 보편적으로 구들이 
확인된다. 따라서 4세기대 타원형 주거는 구조적 특성과 취락의 변화상을 고려할 때 단순
히 변한의 주거가 계속 이어졌다기보다, 변한의 주거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원형계 주
거가 구조적·기술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4세기 후반 무렵 서부 내륙 및 남해안 일대는 방형계 주거가 새롭게 등장하여 5세

기대에 본격적으로 사용된다. 방형 주거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대
체로 낙동강 하류역의 방형 주거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낙동강 하류역에
서 함안과 마산 진동 일대까지 퍼져 나간 방형 주거가 4세기 후반부터 점차 서쪽으로 확산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구나 해안 주변에 입지하여 대외교역을 통해 정치적으로 번성한 
구야국에서 새로운 주거 문화가 수용되고 그것이 함안 일대까지 확산되었으며, 이후 5세
기대에 본격적으로 서부 내륙과 남해안 일대로 퍼졌던 것으로 판단된다(정우현 2012).

이상과 같이 주거 구조의 변화를 정치체의 변화나 지리적 위치·성격에 따른 주거문화의 

수용 등과 같은 거시적인 관점의 사회변화 정도와 연결 지을 수 있는 수준이다. 장기간 걸
쳐 자연스럽게 형성된 주거 양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일반 주거에서 나타나는 주거의 
구조 차이가 직접적인 사회의 변화상 나아가 정치체의 동향을 반영할 가능성이 작아 보인
다. 즉 사회변화와 주거·가구 양상이 반드시 일대일의 대응 관계로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
서 권역별 사회 구조는 주거 방식과 취락의 관계 속에서 더욱 현저한 차이가 날 것으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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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봉석  

가야의 주거

각된다(공봉석 2015). 이를테면,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은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가야
의 세력이 재편되는 시기이며, 이후 5세기 중반은 대가야가 유력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서
부 내륙과 남해안 일대에 분포한 가야 제국(

諸國)이 번성하는 때다. 이러한 사회변동과 관

련하여 주거의 구조적 변화가 어느 정도 관찰되지만, 주요 사건에 따라 주거 구조 변화가 
연동하지 않을뿐더러 설령 그러한 변화가 나타나더라도 이를 통한 사회상을 설명하기 힘
들다. 결론적으로 주거의 구조 변화를 바탕으로 주거 방식과 취락 양상을 통해서 당시 지
역 연구나 사회변동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Ⅲ. 주거 규모 변화와 가구 양상

가구(

家口)1)가 수행하는 활동은 동거(同居), 가사(家事), 가족관계, 생산, 분배·소비, 

(사회적·생물학적) 재생산, (재산·지위, 혹은 정보의) 계승 등으로, 이는 많은 사회에서 가
구라는 실체를 특징짓는 공통적인 기능이나 활동들로 자주 언급되어온 것이다(

金範哲 

2102 재인용). 다음에서는 가야의 가구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4세기 후반 무렵 서부 내륙 
및 남해안 일대 주거지에서 보이는 규모 변화에 주목하였는데, 주거 규모의 변화가 궁극
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가구 활동에서 찾아보았다. 

1. 주거의 규모 변화

4세기 후반 무렵을 전후하여 나타나는 가야 주거의 규모 변화에 대해서는 이미 별도의 

논고에서 지적한 바 있다(공봉석 2013). 서부 내륙과 남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주거의 평
면형 변화와 함께 주거 규모가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특히 장기간 존속하여 타원형
과 방형 주거지가 함께 확인되는 유적에서는 그러한 양상이 두드러진다. 다음에서는 진주 
평거동 유적 1·2지구, 함양 화산리 유적, 산청 하촌리 유적, 거창 송정리 유적에서 확인된 

1) 일반적으로 가구는 동거하는 가내집단(家內集團)을 말하며(金範哲 2013), 어느 정도는 가사

(家事)를 함께하고 의사결정에 동참하기도 한다(Blanton 1994). 편한 우리말로 식구(食口)라

고도 하는데, 식구는 구성원의 수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고 전문 용어로는 가구 혹은 세대(世帶)

라고 한다. 다만 가구와 세대가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용례를 볼 때 세대가 혈연관계 쪽으로 

기울어진 뉘앙스가 있다(李盛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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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4~5세기대 주거지 가운데 면적 산출이 가능한 완형의 타원형 주거지 190기·방형 주거지 
231기를 대상으로 히스토그램을 작성하였다. 

타원형 주거지는 우측에 분포하는 51㎡ 이상의 얕은 봉우리 2개를 제외하면, 좌측으로 높

은 봉우리 1개가 형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주거지는 이 봉우리를 중심으로 면적 13~33㎡ 사
이에 분포하는데, 계급값 25㎡를 기준으로 좌우가 대체로 대칭에 가까운 안정적인 분포양
상을 보인다. 다만 좌측의 계급값 13㎡를 지나면서 빈도수가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한편, 방형 주거지는 대형(계급값 57~65㎡)과 초대형(계급값 101㎡)으로 분류될 수 있

는 얕은 봉우리가 히스토그램 우측으로 떨어져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대
부분 계급값 5~49㎡ 사이에 분포하는 등 전반적으로 데이터가 좌측으로 심하게 치우친 
분포형을 보인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계급값 13㎡를 기준으로, 좌측의 계
급값 9㎡·우측의 계급값 21㎡를 지나면서 급경사를 이루는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타원형 
주거지와 달리, 대형과 소형 주거지 그룹이 많이 이격되어 있어 상호 규모 차이가 현저함
을 알 수 있다.

요약하자면, 타원형과 방형이 각각 계급값 25㎡·13㎡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타원형 주거지가 13~33㎡, 방형 주거지가 9~21㎡ 구간에서 높은 빈도수를 나타내는 분
포 형태를 고려하면, 4세기대 타원형 주거지가 5세기대 방형보다 전반적으로 규모가 크다
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타원형에서 방형 주거지로 대체되면서 주거지 규모가 축소되
었다는 것인데, 검토 대상 유적과 주거지 수를 고려하면 시기에 따른 주거 규모의 변화는 
특정 집단의 차이가 아닌 일반적인 양상을 보아야 할 것이다. 산술적 계산이기는 하지만, 
타원형 주거지가 평균 23㎡·방형 주거지가 평균 16.9㎡이므로 주거지의 축소 면적은 6.1㎡
이다.

통상 주거의 규모는 주거 구성원의 수, 거주자의 신분 및 지위, 건물의 용도 등을 반영

한다는 점은 많은 연구자가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이 가운데 주거 구성원의 변화는 주거 
규모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중
기로 전이될 때와 같이 주거 규모가 극적으로 축소되는 현상이 삼국시대 주거에서는 나타

<그림 3> 타원형과 방형 주거지 면적 비교 (타원형 190기, 방형 23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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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봉석  

가야의 주거

나지 않고, 노 시설의 수, 출토유물의 양이나 구성 등의 큰 변화도 일관성 있게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4세기 후반경 주거 면적이 축소되는 현상을 주거 구성원의 변화로 직접적으
로 연결 짓기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5세기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개별 주거의 구성원이 
줄어들거나 구성원의 신분이 낮아지지 않았다면, 주거 규모의 변화 이유는 주거의 안과 
밖, 넓게는 취락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위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2. 취락 양상 

다음에서는 4세기와 5세기대 경남 서부 내륙 및 남해안 일대 주요 취락의 유구 구성과 

배치 상태 등을 검토하여 주거 규모 변화와 관련한 가구 행위를 유추하였다.

진주 평거동 유적은 4세기부터 5세기까지 농경이라는 같은 기능을 수행했던 취락이다. 

4세기대 취락(2지구)은 타원형 주거지 137기·고상 건물지 45기·대형 건물지 1기·수혈 16
기·경작지·도로 유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취락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를 경계
로 서편의 고상 건물지로 구성된 창고역과 동편의 주거역으로 구분된다. 고상 건물지는 
주거역 내부에 배치된 3~4기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취락의 서편에 무리를 이루고 있다. 
수혈은 주거지 수 대비 매우 적은 수가 확인되었는데, 형태나 규모 면에서 특별한 정형을 
파악하기 힘들고, 주거지와 고상 건물지 등과 중복관계도 보여, 개별 주거지에 딸린 것은 
매우 한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상 건물지 역시 주거지 주변에 배치된 3~4기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는 취락 단위에서 공동으로 관리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평거동 5세기 취락(1지구)에서는 방형 주거지 34기와 고상 건물지 4기, 수혈 58기 

등이 확인되었다. 취락을 구성하는 유구의 종류는 4세기대 취락과 같으나, 개별 유구의 비
율과 취락 내 배치 상태 등은 이전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방형 주거지는 대체로 타원형 주

<그림 4> 진주 평거동 2지구 4세기대 취락

( 주거지,  고상 건물지,  수혈)

<그림 5> 진주 평거동 1지구 5세기대 취락

( 주거지,  고상 건물지,  수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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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거지가 주로 분포하는 공간의 서편에 3개 또는 4개 정도로 무리를 이루고 있다. 고상 건물
지와 수혈은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아 시기를 특정하기 어렵지만, 방형 주거지 주위에 일
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어 타원형보다 방형 주거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수혈의 경우, 주거지 수(34기) 대비 상당히 많은 수(58기)가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따라서 진주 평거동 4세기 취락은 개별가구에 딸린 기타 유구가 거의 확인되지 않아 대

부분 주거 건물 단독으로 주거를 영위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주거지의 배치 및 
중복 상태로 볼 때 주거군(

住居群)을 형성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5세기대가 되면 취

락에서 수혈이 증가하게 되고, 수혈은 주거지 주변에 배치되고 있어 개별가구의 부속 시
설로 판단된다.

이러한 현상을 비단 진주 평거동 유적뿐만 아니라 서부 내륙 및 남해안 일대에 분포한 

4·5세기대 취락에서 두루 관찰되고 있다. <그림 6>은 4세기대 진주 가좌동 유적과 함양 
화산리 유적의 유구 배치도이다. 가좌동 유적에서 확인된 유구는 주거지 47기와 수혈 1기
로, 주거지는 구릉 정상부를 공지로 남겨두고 사면에 배치되어 있다. 특히 2~3기씩 중복
된 각각의 주거지군 사이에 일정한 공간이 확인되는 현상은, 의식적으로 중복이 이루어졌
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동시에(공봉석 2011), 주거지가 3~5기씩 무리를 이루고 있음을 알
려준다. 주거지 외 기타 유구는 수혈 1기에 불과한데, 유적의 범위와 유구 분포양상 등으
로 미루어 볼 때 조사지역 외곽에 관련 유구가 분포할 가능성이 작아 보인다. 화산리 유적
에서는 주거지 43기, 수혈 5기, 고상 건물지 1기, 석곽묘 1기가 확인되었다. 취락 일부만 
발굴 조사되었지만, 확인된 주거지를 수를 고려하면 주거지 주변에 분포하는 수혈과 지상
식 건물지 수가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진주 가좌동 유적과 함양 화산리 유적
은 진주 평거동 4세기대 취락과 같이 주거지 위주의 단순한 유구 구성을 보이는데, 주거 
부속 유구는 거의 확인되지 않고 주거군을 형성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 6> 진주 가좌동(

左)·함양 화산리(右) 4세기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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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봉석  

가야의 주거

한편 거창 송정리 유적은 4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존속하였는데, 5세기에 접어들면서 

취락을 구성하는 유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 시기에 조성된 유
구는 주거지 143기, 지상식 건물지 53기, 수혈 484기, 구 10기, 주혈군 4개소 등으로, 주거
지 주변으로 지상식 건물지와 수혈이 매우 복잡하게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산청 하촌리 
유적 역시 거창 송정리 유적과 유사한 취락 양상을 띠는데, 확인된 유구는 주거지 138기·
고상 건물지 28기를 비롯하여 수혈 624기·구상유구 11기·소성유구 3기·매납유구 1기·토
취 수혈 10기·주혈 400개 등이다.

이들 유적에서는 주거지를 제외한 기타 유구의 비율이 매우 높아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수혈의 증가 현상이 두드러지며, 더불어 주혈 배치의 정형 파악이 되지 않는 주
혈의 수를 고려하면 고상 건물지도 현저하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다룬 진주 평거
동 1지구와 비교하면 같은 5세기대 유적이지만, 수혈과 지상식 건물지가 비교되지 않을 정
도로 많이 확인되고 있어 취락의 기능이나 수준이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거창 
송정리 유적과 산청 하촌리 유적에서 확인되는 많은 수의 수혈과 지상식 건물지는 주로 개
별 주거지 주변에 배치되어 부속 시설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4세기대 취락은 일부 특수한 기능을 수행한 취락을 제외하면 주거 건물 위주의 

단조로운 유구 구성을 보인다. 이에 개별가구는 주거 건물 단독으로 주거를 영위하였거
나, 주거군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5세기대 취락에서는 유적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수혈과 지상식 건물지가 급증하는 현상이 여러 유적에서 관찰된다. 특히 
진주 평거동 1지구에서는 수혈 1~3개 정도가 주거지 주변에 공간적으로 결집되어 있어 
유의미한 무리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이는 배치 상태를 종종 관찰할 수 있다. 반면 거창 송
정리 유적이나 산청 하촌리 유적은 많은 수의 수혈과 지상식 건물지가 취락 내 무질서하
게 배치되어 있어 개별 주거지에 딸린 기타 유구를 특정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지만, 산술
적으로 계산하면 거창 송정리 유적이 주거지 1기당 수혈 3기 이상, 산청 하촌리 유적이 주
거지 1기당 수혈 4기 이상을 배치하였다.

<그림 7> 거창 송정리(

左)·산청 하촌리(右) 5세기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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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3. 주거의 부속 시설

4세기에서 5세기로 전이되는 과정에 취락에서 나타나는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이 취락을 

구성하는 유구의 비율 변화이다. 주거지 대비 기타 유구, 즉 지상식 건물지와 수혈이 급증
하는데, 이들 유구는 주거지 주변에 배치되어 주거를 영위하기 위해 여러 용도로 활용되
었을 주거 부속 시설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주거의 부속 시설은 어떠한 가구 활동과 관련
해 조성하였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먼저 수혈은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대부분 유적에서 확인되며, 특히 취락 유적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 취락과 주거의 성격이나 기능 등을 파악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혈은 주변 유구와 관계, 규모, 내부 및 바닥 시설, 토층 
퇴적 양상, 출토유물 등을 통해 공방·저장시설·의례 관련 시설·토취장·폐기장 등으로 추정
하고 있다(

金成泰 2003).

거창 송정리 유적에서 5세기대 취락과 함께 조사된 수혈은 475기이다. 이 가운데 평면 

원형이나 방형으로, 벽이 수직에 가깝게 굴착되어 어느 정도 깊이를 가지고, 바닥이 편평
하며, 완형에 가까운 유물이 출토되어 저장혈로 판단되는 유구가 18기 정도이다. 규모는 
길이 200~350㎝, 깊이 20㎝ 이상이 가장 많이 확인된다. 비록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지만, 
상기한 저장혈과 유사한 구조를 띠는 수혈까지 포함하면, 대략 237기로 전체 수혈 대비 
50%를 차지한다. 저장혈 외에도 토취장과 폐기장 등으로 추정되는 수혈이 일부 확인되
며, 나머지는 용도를 파악하기 힘든 상태였다.

산청 하촌리 유적에서는 주거지와 지상식 건물지 외에 수혈 624기, 소성유구 3기, 매납유

구 1기, 토취 수혈 10기가 확인되었다. 수혈은 단면 형태가 호형·통형·복주머니형·2단 굴광
형 등으로, 보고자는 많은 수가 저장용으로 사용되었고 일부 제의용으로도 추정하고 있다.

진주 중천리 유적의 경우, 주거지 11기·지상식 건물지 14기 외에도 수혈 19기, 제사유

구 5기, 소성유구 3기, 우물, 도로, 구, 주혈 1,000여 개 등 다양한 유구가 유적 전체에 걸
쳐 매우 복잡한 분포양상을 보인다. 주거지는 조사구역의 동쪽과 서쪽에 집중되어 있고, 
그 사이 중앙부에는 지상식 건물지와 수혈, 소성유구, 도로유구가 있다. 그리고 남북으로 
형성된 구하도를 따라 열상으로 소와 말뼈가 매납된 제사유구가 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Ⅱ-10호 수혈 내에서는 적갈색 경질 소성의 인두형 토제품이 출토되었는데, 제사 또는 이
와 관련된 물품을 저장하는 공간으로 추정하고 있다.

함양 우명리 유적에서는 주거지 11기와 수혈 10기 조사되었다. 수혈은 내부에 소토와 

점토 등이 퇴적되어 있고, 바닥은 편평하며 일부 바닥 시설의 흔적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출토유물은 주거지 출토품과 비교할 때 기종 및 구성면에서 대차가 없고, 비교적 많은 양
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수혈의 용도는 작업장, 또는 저장고 등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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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봉석  

가야의 주거

한편, 지상식 건물지는 삼국시대 전 시기에 걸쳐 주로 창고로 활용하였으며, 5세기 이

후부터 주거용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서부 내륙 및 남해안 지역 4세기
대 지상식 건물지는 정면 2칸·측면 2칸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며, 구조가 다르더라도 규모
가 정면 2칸·측면 2칸에 따르는 경우가 많은 등 구조와 규모가 대체로 일정하다. 다만 이 
시기 주거지 주변에 배치된 지상식 건물지의 확인 사례가 많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고상 
창고(지상식 건물지)는 일반 주거에 보편적으로 설치되는 시설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
다. 더불어 진주 평거동 유적(2지구)과 같이 주거 지역과 대응하는 장소에 대규모 고상 창
고군(지상식 건물지군)을 배치한 사례 역시 이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서부 내
륙 및 남해안 일대의 4세기대 지상식 건물지는 소유 및 관리 주체가 개별가구·주거군·취락 
등으로 다르더라도 취락 내 주거역과 별도의 공간에 무리를 이루든, 개별 주거에 딸려 있
든 대부분 고상 창고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다 5세기가 되면, 취락에서 수혈 주거지와 지상식 건물지가 혼재하는 경우가 많으

며, 더러 단일 취락에서 수혈 주거지보다 지상식 건물지의 비율이 높게 확인되기도 한다. 
이는 수혈 주거지와 함께 지상식 건물지도 주거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실제 창원 
봉림동 유적·진주 중천리 유적·진주 무촌리 유적에서는 지상식 건물지의 비율이 수혈 주
거지와 비슷하거나 높게 확인되고, 구조도 1칸×1칸·2칸×1칸·3칸×2칸 등으로 다양하
다. 그리고 산청 하촌리 유적에서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내·외주로 구성된 지상식 건물지
가 확인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진주 중천리 유적, 산청 하촌리 유적, 거창 송정리 유적처럼 
취락에서 확인된 주혈의 수와 분포 상태를 고려하면 지상식 건물지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지상식 건물지는 취락의 성격이나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고상 창고로도 여전히 많이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주거 규모 변화와 가구 양상

경남 서부 내륙 및 남해안 일대는 4세기에서 5세기로 전이되면서 주거 규모가 축소되

는데, 이때 취락에서는 주거 부속 유구라 할 수 있는 지상식 건물지와 수혈 등이 증가하게 
된다. 즉 4세기에는 주거 건물 단독으로 배치되거나 주거 건물끼리 무리를 이루었다면, 5
세기의 방형 주거는 주거군을 이루면서 건물 주변에 수혈과 지상식 건물이 딸린 사례가 
많이 확인된다. 시기를 불문하고 이때의 주거군은 그 자체를 개별가구로 볼 수 없고, 개별 
주거를 개별가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수혈은 저장, 작업, 의례 등
의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취락의 규모나 성격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저장창
고로 사용된 예가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5세기에 접어들면서 지상식 건물지가 주거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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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로 늘어난 것도 한몫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4세기대는 주거 단독 혹은 주거군을 형성하여 가구를 영위하였다면, 5세기대 취

락에서는 개별 주거와 부속 유구들의 복합이라고 할 수 있는 가구복합(

家口複合)2)이 주

거의 기본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주거 건물 자체의 규모는 축소되지만, 
결과적으로 주거 공간은 더욱 늘어난 셈이다. 즉 4세기에 상위 수준의 일부 가구를 제외한 
대부분 가구는 주거 건물을 중심으로 주거 활동을 하였다면, 5세기가 되면 주거 건물과 그 
주변의 부속 시설까지 주거의 직접적인 공간적 범위가 된다. 

가구 행위의 공간적인 구성에 초점을 맞추면 다음과 같다. 4세기의 저장을 비롯한 도구 

제작·의례 등 주거 내 주요 가구 활동이 5세기에 주거의 외부 공간으로 옮겨지면서 주거 
건물이 축소되는 계기가 되었고, 외부로 이동한 가구 활동과 관련하여 수혈과 지상식 건
물지가 조성되면서 주거의 공간적 범위가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4세기대 주거 내
부의 가구 활동이, 5세기대 취락에서 주거의 부속 유구로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속 
유구는 저장혈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공방이나 의례 공간, 토취장 등도 확인
되고 있다. 요컨대 5세기대 일반 취락에서는 주거의 소형화로 말미암아 다양한 유구가 취
락 내에서 매우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분포하며, 사회의 다양성이 유구의 다양성을 통
해 반영된다면 5세기로 진입하면서 더욱 복잡한 주거의 기능분화를 취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거의 소형화는 더욱 체계화되고 세분된 주거 활동, 나아가 가구 양상을 읽을 수 있
는 주요한 지표로 볼 수 있다. 

한편, 5세기대 주거 공간의 확대는 주로 저장공간의 확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앞에서 수차 밝힌 바 있다. 즉 주거의 부속 유구인 수혈과 지상식 건물지가 저장혈과 고상 
창고 등으로 가장 많이 쓰였다는 것이다. 진주 평거동 1지구와 함양 우명리 유적 등과 같
이 주거지와 수혈·지상식 건물지의 비율이 비슷하거나 수혈·지상식 건물지가 약간 높게 
확인되는 경우 이러한 해석에 크게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거창 송정리 유적·산청 하
촌리 유적·진주 중천리 유적처럼 주거지와 수혈·지상식 건물지의 비율이 크게 차이 나는 
유적은 가구 행위만으로 취락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기타 유구를 설명하는 데 다소 무
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이러한 취락은 가구에서 주거의 부속 시설을 3~4기 이상 소유하였을 가능성도 전

혀 배제하기 힘든 것이, 부속 시설이 모두 저장과 관계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4세기에 
비하면 전반적인 주거 규모가 작아졌다고 할지라도 주거의 대·소형 규모 차이가 현저하
며, 가구의 빈부 불균형이 4세기보다 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주거에 따라 부속 
시설의 여부나 수량 등이 달라지고 여기에 연동하여 주거의 공간적 범위도 달랐을 가능성
이 크다.

물론 5세기대 대규모 취락에서의 수혈과 지상식 건물지를 개별가구가 아닌 취락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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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봉석  

가야의 주거

능과 관련하여 공동 관리하였던 저장시설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하기 힘들다. 대규모 취락
에서 복잡한 유구 중첩 양상과 상기 시설의 출토유물이 소략하여 동시기에 존재한 유구를 
판정하기가 어렵지만, 취락 내 창고의 집중은 다량의 저장물이 집결되는 것을 의미하므로 
취락의 위계와 함께 기능과도 관련성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즉 대규모로 전문화된 생산 체
계를 갖춘 취락에서는 생산물의 저장과 분배 등을 위한 별도의 저장역을 두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5세기대 취락에서는 지상식 건물지가 주거용으로도 많이 사
용되면서 기존 고상 창고의 기능을 저장혈(수혈유구)이 대신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상 주거 규모 변화에 수반되는 주거와 취락의 변화를 통해 당시 가구 양상을 살펴보

았다. 상기한 제 변화는 모두 경남 서부 내륙 및 남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관찰되는 현상이
다. 이에 반해 낙동강 하류역은 변한에서 가야로 이행하는 시기에 기존에 없던 새로운 주
거 유형(방형계 주거)이 등장하는데, 이때 서부 내륙과 남해안 일대에서 보이는 주거의 제 
변화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즉 4세기에 방형 주거가 도입되면서 주거 규모의 변화가 
나타나고, 무질서한 다수의 주혈로 구성된 주혈군을 지상식 건물지로 분류한다면 김해 봉
황동 유적과 같은 대규모 취락 내에서는 창고가 급증하며, 더불어 지상식 건물을 주거 건
물로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주거 건물의 다변화를 꾀하는 등 서부 내륙 및 남해안 일대보
다 1세기 정도 빠른 시기에 주거의 대대적인 변화가 관찰된다. 결과적으로 주거지의 평면
형이 원삼국시대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주거와 취락의 양상 
속에 나타나는 가구 활동을 비교하면 타원형 주거와 방형 주거의 수준차는 명확해 보인
다. 이런 측면에서 문화 지체 현상을 논의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Ⅳ. 맺음말

가야의 가구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경남 서부 내륙 및 남해안 일대의 4세기 타원형 주

거지에서 5세기 방형 주거지로 전이되면서 나타나는 주거 규모 변화에 주목하였다. 주거 
규모의 축소와 함께 취락에서는 주거 부속 시설이 증가하고, 부속 시설은 저장창고를 비
롯하여 공방이나 작업장 등으로 활용되었다. 이에 4세기대는 주거 단독 혹은 주거군을 형
성하여 가구를 영위하였다면, 5세기대는 가구복합(

家口複合)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즉 4세기대 주거 내 주요 가구 활동이 5세기에 주거의 외부 공간으로 옮겨지면서, 5세기
대 주거의 직접적인 공간 범위가 주거 건물과 그 주변의 부속 시설까지 확대된 셈이다. 이
러한 제 변화 과정을 통해 당시 가구 양상을 알아보고, 낙동강 하류역과 간단하게 비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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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하였다. 이상이 주거 규모 변화와 관련한 주요 내용이다.

본 발표문은 주거나 취락에서 시설물의 형식보다 인간 행위를 유추할 수 있는 공간적인 

구성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관련하여 몇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살펴봄으로써 맺음말을 
갈음하고자 한다. 

우선 당시 가구 양상을 파악하면서 유구 간의 동 시기성 판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

아 내용을 전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주거지는 상호 중복이라든지 출토유물을 
통해 동시성 파악이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수혈과 지상식 건물지는 유물이 제대로 출
토되지 않고, 취락의 제 유구와 복잡한 중복 관계를 보이는 예가 많아 같이 존재한 유구를 
판정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본문에서 개별 주거지에 부속된 시설의 판단은 공간적인 
근접성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4세기대 가구의 주요 활동이 5세기대 기타 유구로 표출되었다고 보

면서도, 취락의 기능이나 규모에 따라 취락에서 운용하였을 부속 시설일 가능성도 모두 
설명하였다. 5세기 들어 달라진 취락의 구조나 수준·기능으로 말미암아 개별가구는 물론, 
취락·주거군 차원에서 필요에 따라 수혈이나 지상식 건물지는 얼마든지 둘 수 있을 것으
로 생각된다. 개별가구와 그 이상의 단위에서 보유한 시설물의 구분이 필요할 것이다.

한편, 발표문에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했지만, 주거군에 대한 개념도 논의가 필요하

다. 주거군은 4~5세기에 모두 확인되지만, 주거군의 의미와 성격은 어떠한 개념으로 이
해할지는 신중해야 한다. 기존에 선사시대 취락 단위에서 세대 복합체·세대공동체 등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김승옥은 세대공동체란 친족적으로 가까운 개별세대들이 공
간적 군집을 이룬 형태(김승옥 2006), 권오영은 소형주거지 수 기로 구성된 것으로 주거
는 세대별로 하고 생산과 소비는 공동으로 행하던 일종의 확대가족(

權五榮 1997)으로 보

았다. 비록 시대가 다르고 연구 지역이 다를지라도 모든 연구자의 공통점은 수 기의 주거
지가 일정 공간에 모여 있는 현상을 취락의 하위 단위로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이영철 
2013). 삼국시대에도 여전히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집단이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취락인 
점을 고려하면, 다수가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집단일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구성
원들의 다양성이 확인된다거나 중심 취락·특수 목적 취락과 같은 대규모 취락의 단위에서
는 혈연관계라는 고리는 약해졌을 것으로 보인다(이영철 2013). 일례로 토기 생산·제철과 
같은 특수 목적 취락과 대규모 농경을 전업으로 하는 취락의 주거군은 취락의 기능과 관
련되어 성격을 달리할 가능성이 크다. 즉 취락 형성 당시부터 특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라면, 해당 취락의 주거군은 일정한 이해관계로 맺어진 집단일 가능성도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낙동강 하류역은 변한에서 가야로 이행하는 시기에 이미 서부 내륙과 남해

안 일대에서 보이는 주거의 제 변화가 나타난다고 하면서, 1세기 정도 시차를 두고 양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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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봉석  

가야의 주거

역이 거의 유사하게 진행되었던 것처럼 설명하였다. 물론 전반적인 변화 양상은 크게 다
르지 않지만, 변화의 정도나 수준은 낙동강 하류역 주거와 취락의 면밀한 검토가 바탕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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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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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의 주거」에 대한 토론문_정효은

가야의 주거」에 
 대한 토론문

정 효 은

국립경주박물관

발표자께서는 가야권역 내 주거문화를 낙동강 하류역과 서부내륙, 남해안 일대로 구분

하고 권역별 주거 구조의 변화에 대해 통시적으로 검토하였습니다. 특히 서부내륙지역에
서 확인된 다수의 대규모 취락유적 조사에 직접 참여한 성과를 바탕으로 가구고고학적 관
점에서 주거 규모 변화를 가구활동 공간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였습니다. 

토론자는 발표문의 편년과 대세적 흐름에 대해서는 동의하므로 이에 대한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보다 발표문을 읽고 궁금했던 사항들에 대해 발표자께 보충 설명을 요청드리는 
쪽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질문은 크게 4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1-1. 5페이지에서 “주거 구조의 변화를 정치체의 변화나 지리적 위치·성격에 따른 주거

문화의 수용 등과 같은 거시적인 관점의 사회변화 정도와 연결 지을 수 있는 수준이다. 장
기간 걸쳐 자연스럽게 형성된 주거 양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일반 주거에서 나타나는 
주거의 구조 차이가 직접적인 사회의 변화상 나아가 정치체의 동향을 반영할 가능성이 작
아 보인다. (중략) 따라서 권역별 사회 구조는 주거 방식과 취락의 관계 속에서 더욱 현격
한 차이가 날 것으로 생각된다.” 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사회 변동이 주거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외부적·정치적 영향론을 신중하게 지양하

고 주거, 가구의 미시적 관점에서 보는 것 같으면서도 권역별 차이는 강조하는 발표자의 
견해에 대해 보충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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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립김해박물관 가야학술제전
가야의 주거문화

1-2. 발표자께서 제시한 서부내륙지역 주거 구조와 규모의 변화를 가구활동과 연계하

여 검토하신 부분은 취락의 변화를 외부적 사회변동에서 찾기보다는 취락 구성원의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서 앞으로 출토유물과 함께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서부내륙지역에서는 4세기 후엽부터 주거지의 변화와 함께 출토유물에서도 변화가 감

지됩니다. 물론 동시다발적으로 이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각 요소 간 시기차가 크
지 않습니다. 보수성이 강한 주거문화에서 왜 이러한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났는지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진주 평거동, 거창 송정리와 같은 장기 지속된 취락의 경우 이러한 전환 양상이 비교적 

뚜렷하게 관찰되는데 변화가 단절적이지 않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취락 
구성원들이 시간을 두고 선택 수용했다고 볼 수 있으며 또 이러한 변화에 외부적, 내부적 
요인 중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살펴봐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2-1. 발표자께서는 낙동강 하류역에서 보이는 주거 건물 형태 다변화의 요인으로 저지

대라는 환경적 요인을 언급하셨습니다. 이러한 환경요인과 주거 구조의 평면적 변화(원형 
→ 방형)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또 서부내륙지역은 원형계 주거지의 전통이 원삼국시대부터 지속, 발전해왔다고 언급

하셨습니다. 이 현상을 문화지체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을 지양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그렇다면 서부내륙지역의 지형적, 환경적 요인이 주거 구조의 보수성에 미친 영향으로 보
아야할지 이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2-2. 서부내륙지역에서 주거구조는 4세기대 원형계 주거지+구들에서 5세기 이후 방형

계 주거지+부뚜막 조합으로 변합니다. 이 때 수반하는 주거 면적의 변화가 가구 구성원의 
변화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면 구들보다 부뚜막을 채택하면서 주거지 내 가용면적이 넓
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
습니다. 

3. 누차 지적하신 바와 같이 수혈, 지상식 건물지는 시기성을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많

습니다. 특히 지상식 건물지는 출토유물이 소략하여 그러한 경향이 강한데 취락 내 배치
양상만으로 주거용인지 저장용인지 그 용도를 추정하는 것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해 보
입니다. 관련해서 서부내륙지역에서 5세기대 지상식 건물지의 비율이 증가한 것에 대한 
해석을 지상식 건물지의 주거용으로서의 전용으로 보는 것은 근거가 불충분하지 않은지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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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가야의 주거」에 대한 토론문_정효은

다시 말해, 지상식 건물지의 용도를 구분하는 기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구체

적으로 주거지와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배치되었을 때 주거지와 연계된 저장시설로 판단
하는지 그 기준이 궁금합니다. 가구 양상을 읽을 수 있는 주거지와 부속시설의 정형화된 
패턴이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들을 알고 싶습니다.

4. 서부내륙지역 방형계 주거지의 유입이 낙동강 하류역으로부터 전파로 보셨는데 주

지하다시피 함양 우명리, 산청 하촌리 등지에서 확인되는 4주식 주거지는 마한, 백제계로 
볼 수 있고 실제로 출토유물도 해당 지역과 친연성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방형계 주거지와 접촉할 수 있었는데 왜 주된 유입경로로 낙동강 하류역을 
언급하셨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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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年  12月  1日 印刷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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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김해박물관

Gimhae National Musrum